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이랑 지음 / 이야기장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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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랑이랑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이랑, 이야기장수, 2026-03-12.

 

 

  내가 아는 이랑은 고랑과 짝을 이루는 단어가 전부다. 아니다. ‘누구’와 혹은 ‘무엇’과 ‘함께’를 나타낼 때의 이랑도 안다. 고랑과 함께 쓰일 때, 이랑은 뜻이 분명해지고 은유도 폭발한다. 그래서인지 이랑에는 필연적으로 고랑이 따라붙는 듯하다. 고랑과 함께하는 이랑. 삶의 정점과 하강이 공존하는.

  그리고 이제, 이랑이 예술가의 본명이라는 것을 안다. 예술가에게 ‘미친’이란 수식어는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일 때, 딸 하나는, 이랑의 언니는, 이슬은, 미친년이 되지 못해서 “미래를 더이상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이슬’의 이야기가 각인되어 ‘이슬’을 애도한다. 미친년이 되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제목을 보고 미친 듯이 이 책을 읽고 싶었다. 나름 머릿속에 상상되는 이야기의 내용과 흐름이 있었다.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다르게 흘러갔다. 엄마와 딸들과 고양이의 역사로 흘러가는 중에 ‘이슬’이 계속 맺힌다.

저자인 이랑은 언니 ‘이슬’이 소진사消盡死하였다고 했다.

 

우리가 가진 가족은 너무 허약했고 결핍투성이였다. 언니는 그들에게 힘을 보태느라 자기 힘을 다 소진해버렸다. 나는 언니의 죽음이 ‘자살’이라기보다 힘이 다 빠져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죽음은 뭐라고 부를까. 소진사消盡死? 가끔 그렇게 가진 힘을 다 소진하고 죽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는다. 평생 남을 위해 살던 사람들.

 

  38세의 이슬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일상을 잘 버텨오다 갑자기 “저승에 갔다. 이승을 떠났다. 하늘에 갔다. 사망했다.” 가정폭력 피해생존자 동지로서 사랑한다고 말하던 언니는 “죽음을 선택하고 죽음을 실행했다.”

  동생 이랑은 언니가 ‘장녀병’이었다고 질타했는데, 그 병에 걸린 언니가 안타까웠다. 언니를 둘러싼 그 환경(이랑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미쳤고, 아빠는 쌍놈이고, 할매들도 다 정신병자고, 친척들은 사기꾼이니.”, 게다가 남동생은 장애인이다.)을 떠나 조금 편안해졌기를 바랄 수밖에. 되물림되는 불치병인 장녀병을 치료할 약은 없는 건가. 이기적이고 천재적인 동생에게 “너만 너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며 비난했지만 점점 “너라도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하던 언니 이슬의 변화된 말들이 미래를 암시하는 말이었을까. 비공개로 차곡차곡 쌓아 둔 이슬의 몇 개 되지 않은 기록이, 편지가 그 담담한 편지가 이랑의 노랫말보다 더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 그런 것쯤 제쳐두고 좀더 미쳐버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제 능력을 소원을 가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건, 얼마나 아픈 일인가.

  이랑의 엄마 김경형은 힘겹고 아픈 삶을 어떡하든 혼자 헤쳐나가려 노력했지만 어찌보면 실패했다. 가족과 친척 사이에서 ‘미친년’이 되어버린 엄마는 사는 동안 고통과 아픔과 답답함과 울분을 산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해소하고자 했다. 하지만 산에서 심각한 ‘폭력’을 당한 후 더 이상 산엔 갈 수 없었고, 이후 장롱 속 이불 속에 머리를 박고서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는 이랑 엄마의 이 모습이 너무 처절하게 느껴졌는데, 더불어 가스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한 실비아 플라스가 생각 나, 더더욱 가슴이 답답했다.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에 물든 대가족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 엄마 김경형의 ‘미친년 인생’은 엄마 탓이 아니다. 엄마 탓은 아니지만 엄마가 미친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잔혹한 굴레 속에서 나 또한 미친년으로 자라났다. 그나마 나는 내 이야기를 세상에 꺼낼 수 있는 미친년이라 다행이다. 하지만 나뿐 아니라 엄마의 미친년 역사도 무척 소중하기에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다.

 

  이랑이 정의하듯 ‘미친년’의 역사는 되물림되었다. 이랑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미친년이 되었고 그리하여 언니도 그러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동생 이랑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언니 이슬도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방송댄스, 라틴댄스 등을 비롯해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즉흥 춤”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제대로 미칠 수 있을 정도의 것은 아니었고 그것과는 별개로 온전히 떠안고 있는 가족에 대한 경제적인 어려움과 힘겨움을 상쇄하기에는 부족했나보다 싶었다. 그것만으로는 이슬이라는 한 인간이 보다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 없었노라고.

  이젠 남은 자가 있다. 떠난 자를 그리워하며 아파하며 떠난 자가 남겨둔 것을 고스란히 옆에 두고 있는. 이랑의 가족사를 들으며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성장해 온 나날을 보며 이랑에게 하루하루 “끝없는 혼잣말”이 얼마나 필요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연극을 하고 이 모든 행위가 일찌감치 가족 내에서 불거진 상처와 슬픔을 다독이는 것이라면 여전히 이랑 작가는 계속 써야만 할 것이고 몸의 행위를 지속해야 할 것이다. 사랑이라 말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고통과 슬픔, 아픔을 남겨준 가족, 그리고 그 가족을 고통 쪽으로 더 가깝게 만드는 고루하고 폭력적인 관습들로 누군가는 폭발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누군가는 감정을 거세한다. 세상에 이토록 내밀한 가족사를 털어놓지 않더라도 온전한 감정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선 이랑처럼 ‘미친년’이 될 필요는 있다. 누르고 있는 기억과 감정을 끄집어 온기를 찾아가는 여정, 특히나 이 땅의 ‘미친년들’에게는 더욱 그것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랑의 이 책은 위로와 함께 용기를 북돋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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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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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야, ‘인간’이란 그런단다


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한겨레출판, 2026-04-04.

 


  요즘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쪼~금 더 된 어느 때부터 “나쁜 무리”가 많음을 느낀다. 그들은 매일매일 매시간, 이렇게 확인하고 외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제부터 우리는 한패야”

이러한 ‘나쁜 무리’들이 내 삶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나쁜 무리’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유치하게 기민하다. ‘나의 무리’가 아닌 ‘너의 무리’, 나는 ‘너’를 알지만 나는 그들과 ‘한패’가 되지 않으려 한다.

  “정말이지, 서로가 서로에게 길이 들었군요.” _「작은 벌」

  아,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속 ‘길들이다’는 단어가 이토록 불온하게 들리는 상황이라니. 여우야, ‘인간’이란 그런단다.

 

 《너의 나쁜 무리》는 일곱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읽었을 땐 불온하게 봤다. 뭐 이렇게 하나같이 나빠. ‘뭐지!’ 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그 감정이 많이 소멸되어 ‘뭐지?’.

〈작은 벌〉은 탈주극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와 보호자가 사설 구급차 운전원 ‘이중일’에게서 구급차를 빼앗는 상황을 보여준다. 어떡하든 이중일을 속이고 구슬려 구급차를 탈취하려는 이들과 어리버리하게 휩쓸리는 이중일의 모습엔 살고자 하는 자와 살기 싫은 자의 대비가 뚜렷하다. 구급대원으로 타인의 삶, “환자들의 삶에 관여하는 것이 죽도록 싫었던” 이중일은 그럼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 그에게는 ‘평화’가 올까? 그렇다면 제목은 왜, 「작은 벌」일까.

 

그들은 결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이중일은 속으로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며 자신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추운 뺨에 더운 손」은 관계 ‘맺음’이 아니라 이미 관계인 사이의 ‘끊을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다. 추운 뺨에 더운 손은 한 명의 상태일까, 두 명의 상태일까. 추운 뻠에 갖다대는 더운 손이 타인의 것이라면, 일단 두 사람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것이 허용되는 관계인 것이니, 이미 이뤄진 관계에서 그 상황을 호의,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아니면 거부하고 싶은가가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함께 볼 수 있는 게 마임이야.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을 통해서.

 

  ‘선의’를 쉬이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얼마나 쉬울까. 하지만 ‘선이’에게 ‘선의’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다. 이미, 선의로 해석될 수 없기에.

  ‘선이’의 엄마는 다른 사람의 돈과 물건을 훔친다. 이런 엄마라서 부끄러운 ‘선이’는 엄마와 분리되고 싶다. 그러나 ‘엄마’라는 이 관계가 완전히 타인이 될 수 있는 존재일 수 없다. 더구나 어린 ‘선이’에게는 더욱. 그렇기에 선이는 “나로 살고 싶고”, 나로 살고 있는 이들을 미워한다. 엄마에게 짓눌린 어린 ‘선이’가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방법은 있는가. 이해는 해야 하는 건가. ‘선이’에게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는 인물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친구 ‘기문’이다. 선이는 ‘기문’이 그 옛날 자신의 엄마가 훔쳤을 ‘기문’엄마의 금두꺼비를 달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건 그들의 관계도 더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불안을 주는 부분이기도 하니까. 여기에 ‘기문’은 ‘마임’ 이야기를 한다. ‘기문’의 마임 철학을 통해 ‘선이’는 ‘선의’를 볼 수 있을까.

표제작과 같은 「너의 나쁜 무리」속 이 ‘무리’들을 뭐라 불러야 좋을까. “쉽게 오염되거나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은 아예 들이지조차 말라”고 했던 여사, “여사와 우리가 되기 위해 애썼던” 유선. 버림받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둘은 동일한 사람에게 버려진 사이다. ‘여사처럼 살 거다’라 외치지만 ‘너도 떠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여사를 위해 기꺼이 버림을 선택한 유선이다. 정말 진심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인 건가. 「너의 나쁜 무리」속 전개는 점점 점입가경이 되는데, 궁금해진다. 이들의 행동이 ‘연대’라 할 수 있나. ‘유대’라 할 수 있나. 어떤 의미로 서로의 비밀을 움켜쥔 사이에서 무척 강한 연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부정적일수록 접착력을 더 강화하며 쉬이 물드는. 나쁘지 않은 것, 맞나?

 

나는 여사처럼 살 거다. 아주 많은 사람에게 마음 주고 몸 주고 절절매며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갈 테다. 그러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도 했다. 나쁘지 않은데……?


 「아무 사이」. 아무 사이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사이를 말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사이를 말하는 걸까.

  시터 일을 하는 ‘희지’는 이 일에 의미를 둔다. 이전일을 하면서 쌓인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변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할머니들을 돌보며 이들에게 자신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희지’는 성심성의껏 노인들을 돌보고 애정을 쏟는다. 그런데, “아무 사이”라니. 여기 “아무 사이”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전혀 관계맺음이 필요없는 사이, 이미 맺어진 그 어떤 관계에도 불구하고 ‘엮이고 싶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니까, ‘희지’를 이른바 ‘고용’하고 있다 여기는 보호자가 ‘희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심지어 희지의 돌봄을 받는 노인조차도 마찬가지다.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요.”

“희지 씨, 그러지 말아요.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정말로.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작은 벌」에서는 최소한의 관계맺음도 없기를 바라는 건조한 사이에 끈끈이가 뿌려져 뭉침이 이루어졌는데, 「아무 사이」에선 최선을 다한 ‘애정’을 주었음에도 끈끈이가 붙지 않을 수 있음을 보는 듯하다.

 「너의 나쁜 무리」속 ‘여사’님의 말마따나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주제에 사람 마음을 초조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이 각각의 소설에 있다. ‘징글징글한’ 관계다. 이 징글징글함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항상 반경 안에 있게 되고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마는 꼴”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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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퀴어하다 - 장소에 토박이가 된다는 것, 속한다는 것, 그리고 자연의 온갖 퀴어함에 관하여
퍼트리샤 오노니우 케이시언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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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체로부터


자연은 퀴어하다 - 장소에 토박이가 된다는 것, 속한다는 것, 그리고 자연의 온갖 퀴어함에 관하여

 퍼트리샤 오노니우 케이시언, 노승영 (옮긴이), 에이도스, 2026-04-14


  ‘퀴어하다’. 이 단어를 흘낏, ‘퀴어’보다는 ‘자연’에 방점을 두고 책을 펼쳤기에 이런 전개를 예상하지 않았다. ‘자연’에 관한 다큐 정도로 생각하고 책을 펼치는데,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당황할 수밖에. ‘퀴어’를 너무 간과한 건가. 원제를 본다. 『Forest Euphoria』. 그리고 작가 소개를 본다.

  ‘퀴어하다’가 자연스러운가. 대체로 ‘퀴어’라는 단어는 ‘동성애’라는 특정한 의미를 부각하며 한정적으로 사용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의미를 들이댄다면 제목이 자연스럽지 않다. 혐오와 멸칭, 황색 언론에서 주로 다루는 소모적인 논쟁의 형태가 아니라 ‘다른 의미’를 가졌다. 저자가 확장하여 이야기하고픈 ‘퀴어함’은 뭘까. 적어도 생물학자로서 저자가 왜 자연에서 “Euphoria”를 외치는지 너무나 공감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마케팅 측면에서 “퀴어하다”를 붙이고야 마는 까닭도 알겠다.

  시작부터 저자는 ‘명료함의 결여’, ‘모호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스스로 ‘명료함이 결여’된 인간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살아 온 아르메니아인. 시작이 어디에서부터였나 따져가는 건 중요한 부분이 아닐 테다. 그것이 ‘저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더 중요하다. 아르메니아도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모호한 위치’에 있는 나라로 평가받는다. 현재 저자는 ‘인종학살을 피해 아르메니아에서 미국으로 피란한 이민자 가정 출신의 여성 생물학자’로 소개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쓴 의도를 서두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의도가 이 책을 끌고 가기보다는 숲에서, 자연에서 “Euphoria”를 체험하고 ‘인식’한 것이 이 책을 쓸 수 있게 하는 ‘동기’를 강화하고 ‘의도’를 견인하였다고 본다. 이 순서는 중요하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에 속한다. 그러니까 자연 이야기에 인간 이야기가 삽입된 것에 내가 너무나 ‘퀴어하지 않게’ 반응한 것이다. 그렇다면 ‘퀴어함’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퀴어는 오늘날 문화에서 ’정상‘으로 간주되지 않는 성 및 성별 범주를 가리키는 데 주로 쓰이지만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일탈‘인가를 모호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뭉뚱그려 가리키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

 

  자연은 다양하고, 복잡하고, ’순수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양성과 복잡함과 다르게 ’순수성을 부여‘할 때는 대체로 생물종의 ‘성별이나 번식’에 제한하여 이야기한다. 이에 따라, 자연에, 생물종에 “지독한 폭력을 가한다.” 이분법적 강박과 이성애 규범을 강제하면서 말이다. 생물학종은 모두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단순한 암수 구별법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 순수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저자는 생물학자로서 연구를 깊이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이고 이성애적인 접근’ 체계가 얼마나 지배적인지, 심지어 기존 질서를 그대로 따름에 따라 객관적 오류를 일으키는 경우도, 학자의 선호에 따라 생물종에 ‘혐오’를 담은 명명을 하는 경우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통제, 예측 가능성, 확고한 정의(定意)를 요구하며, 청결, 순수, 상업적 생산성을 기대”하는 우리 문화에서 저자와 같은 성별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소외되고 배제당한다. 외롭고 아프고 힘겨울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저자 앞에 나타난 자웅동체이거나 삼성이체인 ‘균류’와 같은 존재들! 이러한 생물들은 다양하고 많다. 혹고니는 동성끼리 짝을 이루며, 뱀장어는 뚜렷한 생식기간이 없이 살아가기도 하며, 달팽이 또한 성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분법적 사고와 ‘인간 중심’의 사고 체계에 따르면 모두 배제되는 문제적 생물군들. 이것은 저자가 스스로를 존중하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전환’시켜 주는 존재가 된다.

 

균류는 전복적이다. 나는 이 전복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그들의 논바이너리 몸에서, 범주와 정의의 거부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강하게 했다. 그들을 연구하면서 명료함과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 나은 언어를 찾았으며 더 중요하게는 나의 유동성, 양서류성, 집단적 반향을 향한 끌림을 인정받고 공감받았다. 그들은 내가 스스로의 사람됨을 찾고 이해하고 찬미하게 해주었다. 그들은 나를 이름으로 불렀다.

 

  버섯에 대한 EBS 다큐를 꽤 흥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그 몇시간 짜리로도 버섯에 대해 제법 매료되었는데 ‘명료함이 결여된’ 생물학자의 눈에 버섯은 얼마나 흥미로울까. 이러한 균류로 인해 저자는 “퀴어함”의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 모호하고 뒤죽박죽인 자연에 대해 생각한다. “이성애 규범 바깥의 생식을 연구하며 진화와 생물학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자연의 “퀴어함”을 받아들이는 데서 나아간다.

  이 책은 자신을 보다 더 사랑하고 싶지만 기존 위계 질서 속에서 힘겨웠던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재인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동안 얼마나 힘겨웠는지 ‘균류’에 동질의식과 소속감을 느끼며 자신을 정립해 나가는 저자의 몸부림이 이 책에 잘 담겨 있다. ‘소외’되고 배척당한다고 느끼는 이들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지 그 방법적 측면에서도 도움이 되는 책이다. 처음부터 명확히 밝힌 저자의 의도, 그건 다음과 같다.

 

이 책에서 나는 자연이 얼마나 퀴어한지 탐구한다. 나는 어릴 적 경험, 퀴어 정체성, 균류를 연구하는 과학자로서의 작업을 통해 자연이 억압될 수 없고 제한될 수 없고 똑바로 정의될 수조차 없음을 배웠다. 자연에 편재하는 퀴어함은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이분법적 규칙에 도전한다. 성이 셋 이상인 균류, 까마귀의 동성 동반자 관계, 달팽이와 장어의 간성 몸에서 우리는 인류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영감을 얻는다. 궁극적으로 퀴어함은 우리 모두를 정체성과 무관하게 더 불확정적이고 불확실하고 이행적이고 혼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이고 협력적이고 비위계적인 존재 방식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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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새의 말이 들린다
스즈키 도시타카 지음, 김소연 옮김 / 오팬하우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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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엄 촘스키는 못 듣는다


스즈키 도시타카, 김소연 (옮긴이),  오팬하우스, 2026-05-27.

 

 새벽이 아닌 휴일 오전, 집단으로 날카롭게 울어대는 새들의 소리에 나가보았다. 까치 무리와 까마귀 무리의 대치! 제법 오래 이어진 이 대치를 ‘굳이’ 직관하며 새들은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었다. 전선줄에 병정처럼 늘어선 까치와 까마귀 무리들. 어디서인지 계속 수를 늘려가는 이들의 전투는 무엇때문일까. 까마귀에 의해 둥지가 점령당한 것 같은 까치들이었기에 까마귀는 왜 까치 둥지를 침략하는 건지 궁금했고 잠시 뒤엔 까치와 까마귀가 서로 연합하는 듯이 보여 이건 또 뭘까 궁금했다. 멀리 지나가는 사람들 소리에 ‘고양이’가 섞여 있어 둥지를 공격한 고양이에 맞선 새의 연합작전(?)이라는 상상의 나래를 펴기까지, 그리고 점차 나뭇잎의 흔들림도 잠잠하고 새들의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뭔가 멍하고 소외된 듯한 기분으로 현장을 벗어났다. 그때 이 책을 알았다면 뭘했을까. 새의 말이 들리는 저자였다면 당장 새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챘겠지만 내겐 그저 새의 감정과 기분을 나타낸 듯 다르게 들렸던 소리가 기억난다. 

  이 책은 ‘새 언어’ 탐구 과정을 기록했다. ‘새new’가 아니라 ‘새bird’. 저자인 스즈키 도시타카‘는 아시아 최초로 영국 동물행동연구협회 국제상’을 수상한 일본의 생물학자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언어는 인간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과 자연의 괴리가 생각났다.

하지만 박새들은 그건 틀린 생각임을 가르쳐주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언어가 있듯 새에게는 새들의 언어가 있다. 인간의 언어는 동물 언어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자연을 올바르게 보는 눈을 잃었지만 새들은 다른 동물의 언어까지 제대로 이해하며 살고 있다.

 

  핵심은 이거다. 저자는 ‘박새’가 ‘언어’를 가지고 있음을 오랜 시간 탐구와 실험을 통해 ‘증명’한다. 저자의 이러한 노력은 과학계, 동물학회에 반향을 일으키며 세계 유수의 실렸고 저자는 이 과정을 이 책에 담고 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겨가면 약간 당황하게 된다. 이 책은 20년의 연구, 탐구서인데 책의 내용이나 서술이 몹시 가볍게 느껴진다. 20년의 노력이 아니라 잠깐의 취미활동을 기록한 것처럼. 굳이 서론을 길게 하지 않고 핵심만을 간략히 서술하는 것, 그 심플함이 이 책의 장점일 수도 있겠다. 오랜 실험과 탐구를 담은 책인데 그와 관련된 ‘사진’ 한 장 없다니 하고 생각했는데, 일러스트로 그려진 그림이 유쾌함을 주는 요소일지도. 저자가 ‘직접 그린’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새가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이 놀라운 연구를 좀더 ‘탐구’하고팠던 나에게는 상당히 아쉬움이 남았고 저자가 ‘논문’에는 어떻게 썼는지 매우 궁금해졌다. 이런 나의 생각이 풀리게 된 건, 저자가 중학생 대상으로 강연을 제법, 주욱 했다는 서술에서였다. 아, 그러한 활동으로 이 책이 학생들에게 보다 쉽게 읽히고 다가갈 수 있도록 서술된 건가! 내 아쉬움은 진정시키며 다른 저작물이 소개되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 무언가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동물의 울음소리가 그저 감정의 표현인지 인간의 말처럼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는지를 구별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는 것이다. 만약 사고 절약 원칙에 따라 생각해도 구체적인 의미를 전달한다고밖에 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한다면 동물에게도 언어가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해낸 사람은 전 세계에서 나밖에 없다! 나는 ‘동물은 말하지 않는다’라는 2천 년 이상에 걸친 역사상 최대의 오해를 풀고,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일어섰다.

 

  생물학자이자 연구자인 저자는 일본에서 가장 흔한 새 중 하나인 ‘박새’의 소리가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을 알아내고 각각에 ‘의미’가 있음을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 나아가, ‘새’가 ‘언어’를 사용함을 단계별로 증명했다. 분명 그러할 것인데, 이를 위한 ‘증거’가 없다고 그것이 아닌 것이 될 수 없다는 이 마음으로 저자는 끊임없이 실험하고 실험했다. 대표적인 것이 ‘나뭇가지’ 실험이다. “박새의 ‘츠르르르르’가 ‘뱀’을 의미하는 ‘단어’라면 그 소리를 들은 박새는 뱀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고 “평소에는 뱀으로 보이지 않던 것을 뱀으로 착각”할 것이라는 가설에 따라 ‘츠르르르르’ 소리를 들려주며 나뭇가지를 움직이는 반복된 실험을 한 결과, “‘츠르르르르’ 소리를 들은 박새는 머릿속에 뱀의 이미지를 연상하고, 뱀처럼 생긴 것을 찾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인간이 단어를 조합해 문장을 만드는 것처럼 박새도 “인간처럼 규칙을 사용해 울음소리를 조합하고 어순에 따라 의미를 이해할 것”, “박새에게도 문법 능력이 있다‘라는 가설을 설정하고 또한 이를 실험으로 증명해냈다.

  책에서는 간단히 서술되었지만 이 실험이 하루 이틀에 끝나는 건 아니다. 몇 년에 걸쳐 반복된 실험을 진행한다. 저자는 매번 박새가 언어 능력이 있음을 기본으로 하여 이와 관련된 의문을 품고 이 의문에 맞게 실험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을 거쳤다. 새의 언어 능력을 파헤치고픈 저자의 욕구는 일상에서 개그 프로를 보던 순간에도 ’새의 언어‘ 능력을 탐구할 수 있는 가설을 떠올리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시간 집중하고 이에 따른 행동력을 보이는지, 이러한 열정이 ’새‘가 언어가 있음을 증명하는 놀라운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저자는 새들의 언어 세상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노력 또한 진행했고 ”동물들의 대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세상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하루하루는 더욱 풍요롭고 멋지게 바뀔 것“이라 믿는 1983년생(자료를 찾아보니 1983년생이라 하여 또 놀란다) 학자다. ’20년간 박새 연구를~‘이라며 책소개에 있는 저자 사진을 보며 ’어려‘보이고 ’음악가‘ 같은 모습이라 매치가 잘되지 않았는데, 20년, 학자, 탐구 이런 단어를 기본으로 하여 내게 ’과학자‘, ’연구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구나 싶었다.

  이 책의 추천자인 ’최재천 교수‘는 저자에 대해 ”내가 가장 시기하고 질투하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 또한 저자의 이 열린 사고와 행동력에 감탄한다. 특히나, 노엄 촘스키와 비교되어 더더욱! 사실 이 책보다는 시작과 동시에 추천사인 최재천 교수님이 노엄 촘스키와 만난 일화를 보며 놀랐다.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자이자 정치사상가로 활동해온 영향력있는 학자다. 노엄 촘스키의 그동안의 저서가… 물론 학자로서 확고한 자기주장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에 대해 놀라는 건 아니다. 그저 생각보다 유연하지 않고 경직된 학자인가 생각들었을 뿐이다. 찾아 보았다. 1928년생이다. 2009년에 이미 80대가 넘은 학자였다. 이 나이쯤되면 자기가 아는 세상만이 다라고 생각하는 노인들이 많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세계와 다른 얘기를 하면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며 조금만 감정이 상하면 삐지기도 한다. 열린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다른 주장을 가진 이를 만났을 때 ’공격‘력이 살아나 더 신나지 않았을까. 좀더 논쟁할 수 있을 테니… 왜 최재천 교수가 이 책을 노엄 촘스키에게 가져다 흔들고 싶은지 이해가 된다. 이 책의 저자가 책에서도 계속 강조하듯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저자가 이야기한것처럼 ”우물 안에 있어도 괜찮은 것은 올챙이 때까지뿐“이다.

 

그는 내게 요즘엔 무슨 연구를 하느냐 물었다. 나는 너무도 당당하게 까치의 언어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내 설명을 듣던 그는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끝내 내 말을 끊으며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뿐”이라고 단언했다.  (…) 그날, 밤 늦게 나는 한국 방문을 거절한다는 그의 이메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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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가 사랑한 정원 - 화가이자 정원사, 클로드 모네의 그림과 정원에 관한 에세이
데브라 N. 맨코프 지음, 김잔디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모네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


모네가 사랑한 정원 - 화가이자 정원사, 클로드 모네의 그림과 정원에 관한 에세이

데브라 N. 맨커프 (지은이), 김잔디 (옮긴이),  중앙books(중앙북스), 2016-03-30.

 

 

  86세에 사망한 모네는 생애만큼 많은 이야기가 있다. 거기다 2,500점이 넘는 그림을 떠올린다면, 그만큼 모네의 이야기는 많을 테다. 그래서 모네에 대한 책을 보면 본 적 없는 그림이 계속 나온다. 모네 생애와 작품을 이야기하는 저자마다 지면이 허락하는 한, 대표적인 것 이외 더 소개하고픈 그림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네에 대한 책은 한 두 권으로는 미진한 느낌이다. 물론 모네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그렇겠지만. 모르는 것이 약이고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조금 아니까 아직 힘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은 모네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공간 “정원”을 중심으로 한 모네의 그림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네는 인생의 마지막 29년을 정원에서 보냈다고 하는데 이 정원은 그냥 있는 공간이 아니라 모네가 창조한 공간이다. 모네 자신 “정원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이라고 말했고, “자기 그림을 이해하려면 백마디 설명보다 자신이 직접 가꾼 정원을 보는 게 낫다”고 말했을 정도다. 모네의 정원을 가본 많은 이들도 모네의 정원에 대해 찬사했다. 어떤 이는 모네를 이해하려면 정원을 보라고, 그림보다 정원이 낫다고 했을 정도다.

  처음 모네가 정원을 가꾼 곳은 1871년 파리와 떨어진 아르장퇴유다. 이곳 테라스에 화분을 놓고 화단을 장식, 정원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때 정원을 배경으로 한 가족들을 그리며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이때의 정원은 전원주택에서 꽃을 가꾸는 것처럼 소소한 형태였고 대규모의 정원으로 확대하게 된 건 지베르니에 정착하고서다. 1883년 파리 북서쪽 작은 마을 지베르니에 처음 정착하고서도 모네는 빛을 그리는 화가로 자연 풍경을 그리기 위해 노르망디 해안, 루앙, 리비에라 등으로 여행을 다녔다. 곧 자신의 정원에 자신이 그리고픈 세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 세계를 위해 ‘정원을 창조’했다. 


그는 화단을 색과 높이에 따라 분류한 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대규모의 정물화처럼 꾸몄다. 강렬한 자연광 아래에서 꽃을 관찰하여 싱그러운 색채의 향연을 표현했다. 무성한 풀과 나무, 꽃을 심고 굽이치는 둑을 만들었으며 구불구불한 길을 내어 물의 정원을 조성했다. 

 

  이렇게만 보면 실제 모네가 정원을 창조하기 위해 들인 노력이 가늠되지 않는다. 모네는 정원과 관련한 서적을 찾아 읽는데 시간을 더 들였고 정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카유보트와 소설가 옥티브 미르보, 비평가 귀스티브 프루아 등)과 교류‘ 하고 온실을 두 개나 만들고 정원사를 여섯 명 고용했다. 1893년 초 초지와 연못이 있는 땅을 추가로 구입해 앱트 강의 지류인 루강이 더 잘 흘러 나가도록 공사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이웃들의 다툼과 복잡한 행정절차를 모두 감내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모네의 정원은 ’물의 정원‘이라고도 불린다. 모네는 습지와 같은 이 땅을 “밝은 색 수련이 잔잔한 수면에 떠 있고 주위에는 갈대와 버드나무, 아이리스가 자라는 연못정원으로 바꾸겠다는 구상”을 실현시켰다.

  모네는 19세기 후반 ’자포니즘(Japonisme)‘의 열풍 속에 ’우키요에‘에 매료된 대표적인 화가다. 우키요에는 모네의 화풍과 정원 조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물의 정원‘은 우키오요에 판화에 등장하는 전통 풍경과 일본식 아치형 다리를 본따 설계하였고, 로저 마르크스가 “당신이 미술계에 미친 영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말해달라”고 하자, “내가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꼭 찾아내야겠으면 옛 일본식이라는 정도로 해두시오.”라고 말했을 정도다.

  모네의 대표작으로 ’수련‘ 연작이 꼽힌다. 이 정원의 수련을 관찰하여 그린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모네는 관상용으로 수련을 심었을 뿐 그릴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순간 수련에 매료된 모네는 “어느 순간 갑자기 연못에서 황홀한 광경을 보았다. 나는 바로 팔레트를 집어들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만장일치로 평단의 호평을 받은 <수련> 연작이 탄생한다.


로저 마르크스는 예술 잡지 <가제트 데보자르(Gazett des Beaux-Arts>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평단이 가장 대담하다고 평가한 요소를 소개했다. 모네는 <수련> 연작을 그리면서 지상의 닻에 얽매여 있던 풍경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이제 더 이상 땅도 하늘도 그 어떤 제한도 존재하지 않는다. 잔잔하고 비옥한 물이 캔버스의 들판을 완전히 덮고 있으며 빛이 넘쳐흘러 녹청색 잎의 표면에서 활기차게 뛰논다. 화가는 원근법의 피라미드식 선이나 단일 초점을 추구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서양의 전통적인 회화규칙에서 벗어났다.˝

 

  모네는, 언제나 기존 질서에서 벗어났다. 평단이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을 뿐. 모네의 기본을 달라질 리 없는데 평단이 변한 건가. 시간의 흐름과 모네의 끝없는 열정과 노력의 결실이 빚어낸 것일테다. 인상파를 조롱하던 때, 루이 르루아의 평론이 실린 때가 1874년이고, <수련> 연작이 전시되던 때는 1909년이니 무려 35년의 시간이 흐른다. 물론, 그 사이에 모네는 런던의 안개 연작도 <건초더미(1890~1891년)> 연작도 호평을 받았다.

 

유명 신문 <르 샤리바리>의 평론가 루이 르루아는 모네의 작품 <인상:해돋이>를 풍자하여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에서 이렇게 썼다. “대체 뭘 그린 걸까? 어디 보자. ’인상‘이라고? 나도 그럴 줄 알았다. 나 역시 인상을 받았으니까. 그렇다고 이 그림에 인상이 존재하는지는 의문이다.” 조롱하는 의미로 한 말이었지만 르루아의 발언은 화가들의 모임에 ’인상파‘라는 명칭을 부여했고, 인상파 화가들은 이후 11년에 걸쳐 전시회를 일곱 번 더 개최했으며 1886년에 마지막 행사를 가졌다.

 

  ’인상파‘ 화가로서 찰나의 순간을 화폭에 담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빛의 흐름을 표현하려 했던 모네는 강렬한 햇볕에 노출된 탓에 극심한 눈의 피로와 고통이 있었고 백내장 진단을 받는다. 수술 후에도 심한 부작용을 겪으며 심리적으로 위축되기도 한다. 잘 보이지 않거나 사물의 색이 왜곡되어 보이는 현상을 겪는 건 자연을 그리는 화가로서 얼마나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그럼에도 모네는 기억과 감각에 의지해 붓을 놓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린다.

  이때 그린 그림들을 보면 이전에 그렸던 색채보다 훨씬 강렬하다. 원래 그의 붓터치처럼 거칠고 생략된 표현도 더욱 두드러진다. 이때 모네가 그린 그림들을 많이 보게 되니 비로소 모네가 ’추상주의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두 그림만으로는 알 수 없는 변화된 그림의 색채, 그 색채의 강렬함이 노년 모네의 고통 강도 같이 느껴진다.

  모네의 그림과 정원이 유명해지고 이곳에 많은 화가들이 모네와 교류하고자 찾아들었다 한다. 그리하여 화가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이들 중 모네가 교류한 사람도 있지만 전혀 교류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한다. 오랜 시간 이웃에 살면서도 전혀 교류가 없을 수는 있지만, 모네의 정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크고 모네에 대한 유명세도 있었을 텐데, 굳이 관심두고픈 세계가 아니었는지, 단순한 사람 사이의 인사들도 없이 완전한 단절이었는지, 특별히 그러한 관계가 된 연유도 쓸데없이 궁금해진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맞는 사람을 만나는 일, 마음을 나누는 일, 사람과의 교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끔 한다. 이웃과의 일을 떠나 모네 자체는 오랜 생을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모네를 돌보아 준 이들이 많았던 건 모네의 복일 게다.

  꽃을 좋아하고 사랑한 모네가 죽을 때 관에 검은색 천이 덮여 있어서 이것을 걷어내고 창문에 걸려 있던 화사한 꽃무늬 커튼을 덮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꽃을 사랑한 모네가 마지막 쥐고 있던 꽃은 무엇일까 했는데 모네의 이런 당부가 있었다고 한다.

 

꽃이나 화환은 절대로 원하지 않아. 꽃으로 장식하는 건 헛된 일이야. 내 정원에 있는 꽃을 이런 일에 쓰려고 꺾는 건 신성모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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