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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평점 :
여우야, ‘인간’이란 그런단다
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한겨레출판, 2026-04-04.
요즘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쪼~금 더 된 어느 때부터 “나쁜 무리”가 많음을 느낀다. 그들은 매일매일 매시간, 이렇게 확인하고 외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제부터 우리는 한패야”
이러한 ‘나쁜 무리’들이 내 삶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나쁜 무리’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유치하게 기민하다. ‘나의 무리’가 아닌 ‘너의 무리’, 나는 ‘너’를 알지만 나는 그들과 ‘한패’가 되지 않으려 한다.
“정말이지, 서로가 서로에게 길이 들었군요.” _「작은 벌」
아,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속 ‘길들이다’는 단어가 이토록 불온하게 들리는 상황이라니. 여우야, ‘인간’이란 그런단다.
《너의 나쁜 무리》는 일곱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읽었을 땐 불온하게 봤다. 뭐 이렇게 하나같이 나빠. ‘뭐지!’ 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그 감정이 많이 소멸되어 ‘뭐지?’.
〈작은 벌〉은 탈주극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와 보호자가 사설 구급차 운전원 ‘이중일’에게서 구급차를 빼앗는 상황을 보여준다. 어떡하든 이중일을 속이고 구슬려 구급차를 탈취하려는 이들과 어리버리하게 휩쓸리는 이중일의 모습엔 살고자 하는 자와 살기 싫은 자의 대비가 뚜렷하다. 구급대원으로 타인의 삶, “환자들의 삶에 관여하는 것이 죽도록 싫었던” 이중일은 그럼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 그에게는 ‘평화’가 올까? 그렇다면 제목은 왜, 「작은 벌」일까.
그들은 결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이중일은 속으로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며 자신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추운 뺨에 더운 손」은 관계 ‘맺음’이 아니라 이미 관계인 사이의 ‘끊을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다. 추운 뺨에 더운 손은 한 명의 상태일까, 두 명의 상태일까. 추운 뻠에 갖다대는 더운 손이 타인의 것이라면, 일단 두 사람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것이 허용되는 관계인 것이니, 이미 이뤄진 관계에서 그 상황을 호의,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아니면 거부하고 싶은가가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함께 볼 수 있는 게 마임이야.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을 통해서.
‘선의’를 쉬이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얼마나 쉬울까. 하지만 ‘선이’에게 ‘선의’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다. 이미, 선의로 해석될 수 없기에.
‘선이’의 엄마는 다른 사람의 돈과 물건을 훔친다. 이런 엄마라서 부끄러운 ‘선이’는 엄마와 분리되고 싶다. 그러나 ‘엄마’라는 이 관계가 완전히 타인이 될 수 있는 존재일 수 없다. 더구나 어린 ‘선이’에게는 더욱. 그렇기에 선이는 “나로 살고 싶고”, 나로 살고 있는 이들을 미워한다. 엄마에게 짓눌린 어린 ‘선이’가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방법은 있는가. 이해는 해야 하는 건가. ‘선이’에게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는 인물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친구 ‘기문’이다. 선이는 ‘기문’이 그 옛날 자신의 엄마가 훔쳤을 ‘기문’엄마의 금두꺼비를 달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건 그들의 관계도 더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불안을 주는 부분이기도 하니까. 여기에 ‘기문’은 ‘마임’ 이야기를 한다. ‘기문’의 마임 철학을 통해 ‘선이’는 ‘선의’를 볼 수 있을까.
표제작과 같은 「너의 나쁜 무리」속 이 ‘무리’들을 뭐라 불러야 좋을까. “쉽게 오염되거나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은 아예 들이지조차 말라”고 했던 여사, “여사와 우리가 되기 위해 애썼던” 유선. 버림받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둘은 동일한 사람에게 버려진 사이다. ‘여사처럼 살 거다’라 외치지만 ‘너도 떠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여사를 위해 기꺼이 버림을 선택한 유선이다. 정말 진심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인 건가. 「너의 나쁜 무리」속 전개는 점점 점입가경이 되는데, 궁금해진다. 이들의 행동이 ‘연대’라 할 수 있나. ‘유대’라 할 수 있나. 어떤 의미로 서로의 비밀을 움켜쥔 사이에서 무척 강한 연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부정적일수록 접착력을 더 강화하며 쉬이 물드는. 나쁘지 않은 것, 맞나?
나는 여사처럼 살 거다. 아주 많은 사람에게 마음 주고 몸 주고 절절매며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갈 테다. 그러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도 했다. 나쁘지 않은데……?
「아무 사이」. 아무 사이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사이를 말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사이를 말하는 걸까.
시터 일을 하는 ‘희지’는 이 일에 의미를 둔다. 이전일을 하면서 쌓인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변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할머니들을 돌보며 이들에게 자신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희지’는 성심성의껏 노인들을 돌보고 애정을 쏟는다. 그런데, “아무 사이”라니. 여기 “아무 사이”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전혀 관계맺음이 필요없는 사이, 이미 맺어진 그 어떤 관계에도 불구하고 ‘엮이고 싶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니까, ‘희지’를 이른바 ‘고용’하고 있다 여기는 보호자가 ‘희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심지어 희지의 돌봄을 받는 노인조차도 마찬가지다.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요.”
“희지 씨, 그러지 말아요.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정말로.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작은 벌」에서는 최소한의 관계맺음도 없기를 바라는 건조한 사이에 끈끈이가 뿌려져 뭉침이 이루어졌는데, 「아무 사이」에선 최선을 다한 ‘애정’을 주었음에도 끈끈이가 붙지 않을 수 있음을 보는 듯하다.
「너의 나쁜 무리」속 ‘여사’님의 말마따나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주제에 사람 마음을 초조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이 각각의 소설에 있다. ‘징글징글한’ 관계다. 이 징글징글함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항상 반경 안에 있게 되고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마는 꼴”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