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상처를 꺼내본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21세기북스, 2011.


  제목을 본 순간 양자역학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우습게도 그런 책은 전혀 필요치 않았다. 왜 미리부터 긴장하고 그로 인해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모르겠다. 새롭게 출간될 줄 알았다면 좀 늦게 읽을 걸 그랬다. 언뜻 보았을 때 바다 위의 돌고래 사진과 연한 하늘색이 제목이 주는 압박을 줄이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다시 보니 새와 사람이 등장하는 사진이라서 순간의 착각이 주는 이미지가 얼마나 큰가, 생각했다. 포터 이름이 그렇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새삼 베아트릭스 포터가, 피터 래빗이 떠올랐다. 아련하고 동화적인 느낌들이 이 책에서 느끼는 것인지 포터에서 느끼는 것인지 헷갈렸다.

  단편 열 편이 실린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자리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한 지점에 머물러 있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비밀스럽게 뭔가를 숨겨놓은 장소이며 빠르게 지나쳐가고 싶지만 참을 수 없는 냄새로 인해 온전히 그 냄새를 묻힐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장소이자 기억. 삶에는 늘 그런 지점이 있다는 것을 그로 인해 내 생각이, 내 언어가, 내 삶이 더디게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순간의 이야기들을 작가는 그리고 있다. 


잠시 후 칼러 씨가 집에서 나오더니 내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그것은 이후 좀체 내 마음을 떠날 줄 모르는 말이다―그는 말했다.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 ― <강가의 개>


  아무리 칼러 씨가 네게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해준대도 그 순간에 내가 있었으므로 ‘나’는 그 일에서 그 누군가에게서 쉬이 벗어나지 못할 감정을 안고 있다. 훗날에 과거의 지점을 돌아보는 이야기는 그리하여 좀더 애틋하고 저리게 다가온다. 결코 그 순간이 바꿔질리 없기에 감정이란 그때만큼 달라질리 없기에. 하지만 머언 미래의 감정을 그린대도 달라지지 않을 거란 걸 알게 된다. 그것을 단편소설은 몇장이어야 한다는 형식에 미치지 못하는 두페이지 소설 <피부>에서 그리고 있다. 부부가 과거 낙태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과 머언 날에 과거를 기억할 그들을 생각하는 일은 과거형 문장과 미래형 문장으로는 다르게 나타나지만 문장이 담고 있는 감정은 전혀 다르지 않다.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그러나 오늘 오후 부드러운 라임 색 카펫 위 그녀의 벌거벗은 몸 옆에 누워, 비와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만 클로이의 피부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의 이름처럼 서늘하고 부드러운, 내 젊은 아내의 창백한 피부. 바깥 거리에서 음악 소리가 커지고 클로이가 내 쪽으로 몸을 굴린다. 맨 먼저 나의 가슴에 키스하고 차츰차츰 아래로 내러간다. 나는 눈을 감는다. 조금 후면 우리는 매일 밤 그러하듯이 우리의 조그만 매트리스 위에서 함께 잠이 들 것이다. 창문 밖 종려나무들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잔인한 짓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안개 속의 꿈을 믿으면서. 

― <피부> 


  그렇게 보면 빛의 입자가 가는 경로를 예측하기란 알기 어렵다는 리처드 파인만의 이론은 맞지 않을 지도. 어떤 상황에서의 감정이란 시간이 흘러 정확히 닿을 지점에 가 닿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보여주는 헤더의 감정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의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들면 역설에 환멸을 느끼기가 쉬워지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젊어서는 도전뿐이에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저 피곤해지거든요. 모든 물리학자에게는 자기 너머 수준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와요. 자기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라고 그는 말했다.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나이가 아주 많은 로버트 교수와 느끼는 교감은 헤더에게는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다. 헤더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이 감정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을 더 의식한다. 그것은 사회가 요구하고 사회가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 삶은 사회라는 시선을 너무 의식하는 까닭에 그 시선에 맞추는 것을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헤더가 사회가 용인하고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사회적 시선에 맞는 콜린과의 결혼을 선택하면서 헤더가 잃어버리는 것은 영원히 헤더를 채워주거나 구원해줄 수 있는 존재다. 그 결핍을 결코 콜린이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콜린은 헤더를 채워준다. 이 이상한 결핍과 채움의 과정 속에서 헤더는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이 섬세하고 아린 소설을 읽으면서 과거의 행위들로 그로 인한 감정으로 영원히 지속될 상흔 속에 머물러 있는 미래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끌어안고 기억이 퇴화되기를 바라는 것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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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시간 여행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고상숙 옮김 / 북레시피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주어진 시간 상자에서


위험한 시간 여행, 조이스 캐롤 오츠, 북레시피, 2019.


  다소 예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는 1938년생이다. 작가가 그리는 미래세계, SF 공간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작가가 살아간 그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불어 전체주의 세계가 가질 수 있는 특성이란 비슷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인데 그보다 이 소설이 작가의 46번째 소설이라는 점이 더 인상적이었다.

  전체주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이 소설은 잘 읽힌다. 2039년의 북미연합, 개인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사회, 이런 류의 소설에서 감시, 처벌, 반역, 추방, 처형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쉬이 예상된다. 하지만 그 처벌의 결과가 과거사회로의 추방이라는 점은 이 소설이 가지는 특징이다. 아드리안은 졸업식 연설이 국가권위에 대한 도전이란 이유로 반역자로 추방된다. 추방된 곳에선 신분을 바꾸고 살아가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신분이 아니라 주어진 대로의 삶이다. 기억이란 또렷하여 아드리안은 자신이 핸드폰과 컴퓨터를 쓰며 살아가던 시대에 있었음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아드리안이 눈앞에 보는 건 종이책과 타자기를 사용하는 시대다. 마치 시간여행자처럼 아드리안은 메이 엘렌 엔라이트로 1959년 9월 23일, 1959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두 사람의 자아가 내재한 아드리안은 현재의 이 상황을 무사히 넘겨 다시 자신이 살던 시대로 되돌아갈 것을 다짐한다. 아드리안은 위스콘신 주 웨인스코샤 대학생 메리로서 수업을 듣고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발설하지만 않으면 되는, 그렇기에 오히려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못한 채 추방자의 삶을 잘 버티어간다. 아드리안이 누군가. 울프만 교수를 사랑하기전까지는.

  어쩌면 이 소설이 잘 읽히는 지점은 말랑말랑하게 쓰여졌다는 점일 것이다. 서로 다른 시대, 국가가 통제하는 시스템을 적확하게 비교묘사하기보다 아드리안의 심리를 따라 그려지는 세상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 만큼 아드리안의 불안과 다짐과 사랑의 시선이 어렵게 그려질 리 없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이 소설을 가볍게, 탄탄하다는 느낌이 덜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디스토피아, 전체주의의 공포가 그로 인해 압박되고 죄어오는 느낌도 약하다.

  소설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건 스키너다. 아드리안이 심리학과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만큼 주요하게 『과학과 인간 행동』을 비롯한 스키너 이론에 대한 논의가 많다. 스키너는 행동주의 심리학자로서 인간행동은 환경에 대한 반응이라고 보며,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과 <웰든 투>로 유명하다. 소설에선 이 스키너 이론에 대한 아드리안 자신의 생각들을 채우는데 어쩌면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이 부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아드리안 또한 메리는 스키너 이론에 대한 내내 비판적 의견을 제시한다.


살아 있는 것은 (외부에서 보았을 때) 모두 시계가 돌아가는 기제와 비슷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나는 항의하고 싶었다. 나는 나야. 나는 독특한 존재이며 그런 식으로 파악하기 힘든 존재라고.


  그러한 비판의식에서 아드리안이 계속 제기하는 것은 ‘나’, ‘자아’이다. 통제된 사회속에서 자신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처럼 아드리안은 메리가 아니라 본래의 아드리안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자각 또는 자기 인식의 결여에 대한 스키너의 언급―자기 인식에 대한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인간에게는 자기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에 충격을 받았는데 이 역시 교과서가 아닌 그의 주요 저작 중에 읽은 내용이었다.

이러한 인식에는 뭔가 분명 끔찍한 게 있었다. 내가 나에 대해 모른다면 그 어느 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렌즈가 얼룩덜룩 더러운 상태이면 이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이 모두 얼룩져 보일 테니까.


  로맨스로 진행되어가는 지점에서 아드리안은 이런 자각을 더하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소설의 분위기는 반전된다. 1959년의 시대도, 시간여행도 의문이 가득한 채 펼쳐진다. 통제된 환경을 빠져나오려는 아드리안과 울프만의 관계에 의해 사회에 대한 시각 또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외롭고 힘든 그 시대에 그것을 극복하게 해주는 울프만과의 미래를 꿈꾸는 만큼 아드리안이 갖게 되는 의혹과 불안이 실험상자 속에 갖힌 느낌을 준다. 스키너의 실험은 확장된 전체주의의 통제와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자아가 환경에 최대 적응된 상태에서의 인식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꽤나 슬프고 아픈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시간 안에서 견뎌내는 거야. 어디에서 살건 한 번에 하루씩 견뎌내는 것은 똑같아. 이게 바로 우리 시공간의 축복이란다.


  자아에 대한 생각과 시간여행에 대한 생각을 전체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는 정확하다. 


삶은 지금 현재이기 때문이다. 삶은 생각이 아니고, 투영되는 것도 아니며, 삶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삶은 현재의 그것이며 TV에 비치는 것처럼 항상 지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가 나를 위한 곳, 지금이 나를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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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지음, 이희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렉스 플라메

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2010.


  요즈음 보고서의 힘을 생각하게 된다. 기록, 증언이 가진 힘과 오랜 시간 동안 비밀유지가 되는 힘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 거짓이 조작이 공작이 어떻게 형성되어 뻗어나가는지 진실을 감추기 위한 카르텔이 얼마나 공고한지 그런 것들을.

  브로덱의 보고서는 어떤 보고서일까. 예상 가능하기도 하다. 일종의 진술서 같은 것이리라. 소설은 왜 보고서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브로덱 자신의 질문이 있다. 왜 ‘브로덱’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브로덱이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드러내지 않으려는 속뜻은 따로 있다. 내용과 더불어 보고서를 쓰는 자, 브로덱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소설을 통해 또 하나의 단어를 배운다. 안더러. 그리고 에라이그니스. 전쟁이 끝난 마을, 전쟁은 끝났지만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전쟁 이전의 상황일 수 없는 마을에 낯선 이가 나타난다. 낯선 이를 부르는 말은 매우 많은데 ‘안더러’는 그 중 하나다. 타인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안더러’를 불편해한다. 이 낯선 자, 이방인은 여인숙에 머물며 그저 그림을 그리고 전시하려 할 뿐이지만 죽는다. 이 형용할 수 없는, 이상야릇하고 안개로 휩싸인 일, ‘에라이그니스’에 대한 일을 밝히고 기록하는 것이 브로덱의 일이다.


내 이름은 브로덱이고 그 일과 무관하다.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다. 모두들 알아야 한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브로덱의 보고서는 아니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 일’과는 무관한 브로덱의 어조가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브로덱이 전혀 무관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주게 한다. 안더러의 이야기 위에 홀로코스트가 겹친다. 브로덱은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자’이다. 그곳은 “아주 먼 곳, 인간다움이 모두 사라진 곳, 겉모습만 인간이고 의식이 없는 짐승들만 머무는 곳”이었고 브로덱은 그 시기를 암흑으로 가득한, 검은 구렁이라고 칭하며 아직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이 브로덱이 살아 돌아올 것이라 생각지 않은,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브로덱은 말 그대로 ‘똥개’가 되었다.  

  왜 마을 사람들은 브로덱이 살아돌아온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안더러를 불편하게 여기는가. 단지 그들이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는 너무도 쉬운 대답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대답일 수도 있겠다. 브로덱은 그곳에서 살아 왔지만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존재가 아니다. 전쟁은 특히 사람을 구분짓기 좋아한다.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만을, 내 가족만을 생각하고 내 영역을 고집하고 그리고 나머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 세밀하게 타인을 나누어 버리는 일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모든 역사는 보여주었다. 브로덱이 나머지였다. 안더러였다.

  마을이 점령당한 상황에서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은 이유로 고발당한 브로덱은 자신을 수용소로 끌려가게 한 마을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곳에 그가 사랑하는 이가 있고 그곳이 그가 살아가는 곳이었으니. 수용소에 있는 동안 마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지 그리고 그의 아내가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은 브로덱이 살아오지 않기를 바랐고… 안더러는 그의 그림이 마을이 가지고 있던 비밀을 보여주고 있어 두렵고 위태로웠다.


죄지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죄가 없다는 것은 무고한 사람들 가운데 유일한 죄인과 결국 똑같다는 것을 알았다.


  이 말이 담고 있는 엄청난 무게,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이 세상이 이렇게, 나쁜 일들은 벌어지고 진실은 감춰지는 이유가 아닐까. 그렇다면 왜 마을 사람들은 브로덱에게 여인숙에서 벌어진 사건을 안더러의 일을 기록하도록 했을까는 의문이 생긴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행한 일을 감추고 싶어한다. 그들의 죄를 아는 이가 있는 것은 그들에게 불편함을 넘어 두려움을 주는 일이다. 그런데도 굳이, 브로덱을 지목해 그 글을 쓰라고 하는 것은… 5.11 연구회를 조직해 5.18의 진실을 은폐‧조작‧왜곡해온 전두환 반군부처럼 ‘조작된 진실’을 원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브로덱은 사건의 진실에서 떨어진 글을 쓰는 것일까, 그렇기에 브로덱은 다른 버전의 보고서를 준비하고 이것은 그것일까.


사람들은 이상해. 별 생각 없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을 저지르지. 그런데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기억을 안고서는 계속 살아갈 수가 없는 거야. 내다 버려야 하지. 그럼 나를 만나러 와. 왜냐하면 그들을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걸 알거든. 그래서 나한테 다 얘기하지. 나는 하수구야, 브로덱. 나는 신부가 아니라 인간 하수구야. 사람들이 편해지려고, 가벼워지려고 자기들의 온갖 피고름과 쓰레기를 내다 부을 수 있는 뇌를 가진 인간. 그러고 나서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 버려. 새 사람이 되어서. 깨끗해져서.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서. 그들이 털어놓은 것에 대해 하수구가 입을 다물고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거든.


  어쩌면 브로덱의 보고서가 필요한 절실한 이유는 이 말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유로 쓰여져 있기만 하면 그 용도가 다하는 보고서는 마을의 시장에 의해 불에 태워진다. 수용소 생활을 거치며 삶과 인간, 인간의 본성에 관한 수많은 생각을 거듭할 수 있었던 브로덱에게는 어떤 보고서가 필요할까. 덤덤하게 마음을 아리게 하는 문체로 써 내려간 브로덱의 보고서는 인간에 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생생한 경험담이 된다. 브로덱이 경험한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그런 일들을 저지른―“괴물이 아니라 농부이고 장인이며 소작농, 산림감독, 하급공무원들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또한 괴물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들을 묶어 주는 동시에 그들을 초월하는 집단, 비슷비슷하게 생긴 수천의 얼굴들로 이루어진 집단 속에 녹아들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인간이 어떤 짓거리를 하는지 나는 보았다. 모든 잘못은 그들을 끌어들이고 부추기고 그들을 발 없는 도마뱀처럼 춤추도록 지휘봉을 흔든 사람에게 있으며 군중은 스스로의 행동과 미래와 궤적에 대해 의식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다. 실은, 군중 그 자체가 괴물이다.


  마을 사람들은 안더러의 본명을 모른다. 그들은 마을을 찾아온 자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었으니 모두 이방인을 부르는 명칭들은 실로 다양했기 때문이다. 안더러는 명확히 우리와는 달랐다고 했지만 브로덱은 안더러를 ‘나 같다’고 느낀다.  타인을 타자화시키는 것은 명명에서 시작됨을 또한번 생각하게 된다. 괴물같지 않으면서 괴물인 사람들의 일상성이 아주 아리게 느껴진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렉스 플라메와 같다.


렉스 플라메는 다른 종류의 나비들이 그들 중에 끼어드는 것을 묵인합니다. 그런데 침략자가 나타나면 렉스 플라메들은 알 수 없는 언어를 이용해 서로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깁니다. 결국 그들 집안에 끼어든 나비들은 그런 정보를 얻지 못했으므로 새에게 먹히게 되지요. 렉스 플라메가 침략자에게 희생물을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받는 셈입니다. 아무 문제도 없고 만사가 순조로울 때는 자기네 집단과 다른 종의 나비가 한 마리 혹은 여러 마리 함께 있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들을 이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위험이 닥치면 본연으로 돌아가 살아남기 위해 자기 집단이 아닌 것들을 아무런 주저없이 희생시킵니다.


  그곳에 끼어든 안더러와 브로덱은 희생당한 나비이지만 각각 그림과 글로써 진실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그림은 찢겨지고 브로덱의 보고서 또한 불에 타버리지만 브로덱의 보고서가 있다는 것을 안다. 집단의 광기에 진실이 묻혀버리지 않을 수 있는 힘에 대해 생각한다. 그럴 수 있는 인간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브로덱이 희생자이자 타자인 브로덱이 진실을 담은 보고서를 써갈 수 있는, 그것을 알릴 수 있는 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브로덱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브로덱의 보고서는 안더러 사건, 마을 사람들이 한 일에 대한 증언이자 브로덱 자신이 한 일, 삶에 대한 회고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록이란 글이란 사람이 사람을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브로덱은 소설의 처음과 끝에 같은 말을 한다. ‘내 이름은 브로덱이다’라고. 마지막에 거듭 당부한다. ‘내 이름은 브로덱, 브로덱, 잊지 말아달라고.’ 안더러는 이름 없이 ‘타인’으로 ‘이방인’으로 남아 사라진다. 렉스 플라메의 본성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렉스 플라메의 집단적 광기로 살아가지 않는 방법은 개인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일이라는 것을 작가는 기억하라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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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기억의 그 이후

오직 두 사람, 김영하, 문학동네, 2017-05-25.


  어떤 기억은 감각에 의해서도 강화된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속에 음악이 삽입될 때 장면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느낌 감각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전혀 손을 대지 않고도 손에 무언가를 쥐었다가 놓친 듯한 감각을 느끼고 있다. 소설 속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 손을 스르륵 빠져나가는 그 무엇. 어쩌면 책을 덮고 나서 그 감각 때문에 「아이를 찾습니다」의 장면장면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아주 부주의하게 아이가 놓은 카트를 손에서 놓친 부모, 세 살 때 유괴된 성민의 부모가 겪는 일들은 익숙하게 흘러가지만 다시 성민을 찾은 이후의 삶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의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유전자가 같다는 이유로 마음이 합일되는 것은 기막힌 환상일 것이라고. 더구나 아이는 어딘가에 나의 친부모가 살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만큼 학대받는 삶이 아니었으니까. 윤석은 마트에서 카트를 놓친 때부터 “행복 그 비슷한 무엇을 잠깐이라도 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 없다. 하지만 성민을 다시 찾은 이후의 삶 역시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저는 생각했어요.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고독에 대해서요. 이제 그만 화해하지 그래, 라고 참견할 사람도 없는 외로움.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말다툼. 만약 제가 사용하는 언어의 사용자가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면 말을 조심해야겠어요. 수십 년 동안 언어의 독방에 갇힐 수도 있을 테니까. 그치만 사소한 언쟁조차 할 수 없는 모국어라니, 그게 웬 사치품이에요? ―「오직 두 사람」


  작가는 아빠와 딸의 관계를 오직 두 사람만 남은 희귀언어사용자로 풀어낸다. 어린 현주에게 아빠는 우상이었고 그런 만큼 보이지 않는 편애가 존재했기에 다른 가족들은 소외감을 느낀다. 아버지에게 조종된 삶을 살던 딸이 점차 그 관계의 불편을 느끼며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혼자 남은, 병든 아버지에게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는 감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범죄자와 작가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은밀히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계획이 뻔하면 덜미를 잡힌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때로는 자기 꾀에 자기가 속는다는 점도 그렇지. 이 아파트에서 내가 쓰고 있던 소설은 정해진 플롯이라고는 없는 중구난방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 사장의 음모는 아주 짜임새 있는,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저급한 추리소설의 냄새를 풍긴다. 그런데도 승자는 사장이라니. 이것은 혹시 잘 짜인 플롯이 결국에는 중구난방 요령부득의 서사를 이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 「옥수수와 나」


  이상문학상 수상작 「옥수수와 나」는 소설가인 주인공을 통해 작가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내고 있다. 김영하 스타일에 맞춤한 작품이란 느낌이다. 위트와 아이러니가 절절하게 넘치는. 「인생의 원점」또한 그것이 가득한 작품이다. 인생의 원점 또는 변곡점에 대한 관념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매우 ‘실질적’인 경험을 제공하게 해준다. 서진이 마침내 느낀 것처럼, 

“인생의 원점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그런 정신적 사치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그게 진짜 중요한 거야.”

  「오직 두 사람」의 현주는 말한다. 이제 유일한 희귀언어사용자가 되었기에 허전하고 쓸쓸할 것 같다고 말이다. 책을 읽은 후에 희귀언어사용자가 마지막 남긴 글을 읽은 듯이 허전하고 쓸쓸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김영하 작가가 곳곳에 위트와 아이러니를 남기는 스타일임에도 이런 감정이 드는 것, 기억은 스타일이 아니라 메시지를 붙잡고 있나 보다 싶다.

  김영하 작가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 설정을 더한 글과 더불어 방송을 통해 더욱 더 작가의 ‘브랜드’를 높여가고 있다. 출간하는 책마다, 한마디 말에도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책을 읽은 후 이 공허함을 견디는 일은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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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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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설계자들

설계자들, 김언수, 문학동네, 2019-01-29.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을 살 것이다. 그래도 책을 읽을 생각이냐?


  이게 무슨 소린가 했는데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라 생각했다. 남을 죽이는 것을 직업으로 하고 살아가는 이라면 두려움이란 일을 방해하는 것일 테니. 삶의 자세에 대해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는 일이란 무언가를 정진하게 하는 힘이기도 아니기도 할 테니까.

  책을 읽는 암살자,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적어도 모든 것을 경험과 타인에 의해 배우지 않고도 책을 통해 배울 수는 있는 것이니까. 기술적인 방법이 책으로 전수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어쨌든 이 책에서 ‘책을 읽는’ 암살자는 그 행위 자체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암살자는 야만이 가득한 세계의 난폭한 인물로 그려지거나 무조건 심각한 고뇌에 잠긴 사람으로 묘사되기 일쑤다. 이 사이에서 래생은 어디쯤일까.

  이 책은 암살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남을 죽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독립운동가와 조폭의 암살이 다름은 명확하다. 그 행위도 받아들이는 관점도 그렇다. 래생은 직업적 암살자, 그를 움직이는 힘은 돈이다. 돈을 주는 이들에 의한 어떤 지시에 의해서 그 방법을 실현하는 인물이다. 래생이 이 암살자의 세계에서 살게 된 것은 어릴 적 쓰레기통에 버려져 너구리 영감의 세계로 안착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때부터 너구리 영감이 맡아 온 ‘개들의 도서관’은 죽음을 설계하는 장소다. 암살 청부 집단은 시대에 맞게 변화해 간다. ‘한자’가 내서운 기업형 보안 회사가 등장하는 것처럼 사라지지는 않은 채 말이다.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의 죽음 이후 설계자의 세계에 대해 래생이 궁금해 하고 설계자 ‘미토’를 추적한다. 

  암살자는 누구를 죽일까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설계자들에 의해 정확하게 설계되어 있다. 총인지 칼인지 목을 부러뜨릴 것인지 방법을 명시한다. 이렇게 방법까지도 설계된 지침을 따르는 것과 어떻게 죽일까를 계획하는 일, 두 방법 중에서 암살자는 어떤 방법을 선호할까. 그런 궁금증이 인다. 그러니까 설계자가 힘들까 암살자가 힘들까. 그래서 이 책은 암살자와 더불어 설계자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누군가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이들의 역할, 그 시나리오를 담당하는 이들에 대해서. 결국 배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한다고 봐야 할까. 딱히 그건 아니다. 설계자들 또한 따지고 보면 암살자처럼  그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설계자들도 우리 같은 하수인들일 뿐이야. 의뢰가 들어오면 설계를 하지. 그 위에는 설계자를 설계하는 놈이 있겠지. 그 위에는 그놈을 설계하는 또다른 설계자가 있을 걱. 그렇게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뭐가 남을까? 아무것도 없어. 맨 위에 있는 것은 그냥 텅 빈 의자뿐이야.‘ 래생이 말했다.

“그 의자에도 분명 누군가가 앉아 있겠지.”

“아무도 없어. 다르게 말하면 그건 그저 의자일 뿐이야.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의자. 그리고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그 의자가 모든 걸 결정하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일종의 시스템 같은 거지. 자넨 칼을 들고 올라가서 맨 꼭대기에 있는 놈을 찌르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어. 그곳에 있는 것은 텅 빈 의자뿐이니까.”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 철저한 역할 분담이라고나 할까. 설계자들 뒤의 의뢰인은 따로 있다. 그 의뢰인들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은 정해져 있다.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 설계자들이 하는 말, ‘선거가 있어서, 선거 때문에, 선거가 끝나면’……설계자들이나 암살자들이나 그렇게 놀라운 인물들로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최근의 5.18에 대한 새로운 증언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렇게 시민들을 죽이기 위해 계획된 시나리오, 설계자들이 있고 암살자들이 있고 의뢰인이 있다. 그 의뢰인이 지금까지 공고히 존재하는 것은 제 이익을 위해 분명하게 형성한 카르텔, 그 시스템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이어가려 조직을 총동원하고 있는.

  이 책이 초판 2010년이고 난 분명 이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내용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언젠가 이 소설이 여러 나라에 번역되었다는 기사를 읽었고 그때에도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는데 다시, 읽어보고 그리고 책에 붙은 많은 외국인들의 찬사를 읽어보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 책을 읽고 열광하게 하는가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의 이유는 명확했는데 역시 이 책은 영화화가 확정되어 제작진행 중이라고 한다. 읽자마자 영화관계자들이 매우 좋아하리라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이 책은 잘 읽힌다. 범죄스릴러라는 장르지만 많은 추리를 요하지도 않아서인지 꽤 속도감있다.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 눈을 자근자근 밟는 느낌이다. 암살의 세계인데도 유혈이 낭자하고 욕설이 난무하는 형태가 아니다. 하지만 역시 암살자의 삶을 다루고 있기에 그 세계의 인물들이 가지는 전형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않았다. 가령 래생은 암살자의 세계에서 가장 멋져 보이는 전형적인 캐릭터를 그대로 따른다. 외모, 어릴 적 결핍, 독서하는 암살자, 그리고 무엇보다 고뇌하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여지없이 암살자들은 그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더라도 한번은 누군가에게, 그것은 늘 젊은 여자로 나타난다는 점, 흔들려야 한다. 뛰어난 암살자 추가 그러하고 또한 래생도. 어쨌든 이 세상에서 뛰어난 암살자라 불리는 이들의 죽고 죽임이 이어진다. 그 죽음, 모든 암살자의 죽음이 허무하다. 기껏해야 암살자들일 뿐인데, 그들은 그들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한다. 그것이 암살과정에서 만난 인연에 대한 복수이자 정의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결국 의자가 그대로 있다면 암살자들도 설계자들도 다시 고용될 것인데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만 인생의 깨달음을 삶의 새로움을 얻을 수 있는 듯이 그렇게 허무하게 그들 서로만을 죽이기 위해 온갖 에너지를 다 쓴다. 그렇게 이 책은 허무하게, 아쉽게 여겨지는 결말과 눈을 뽀드득뽀드득 밟고 있다는 느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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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5-1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과작하시는 작가신가 봐요.

9년 만에 새로 재개정판이 나왔는데
신판 표지가 훨씬 더 마음에 드네요.

<뜨거운 피>도 3년 전에 나온 책이네요
흠 흠 흠

모시빛 2019-05-17 13:0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개정판 표지가 훨 마음에 들어요.
개정판에선 내용-결말도 부분 수정했다고 하는군요. 어떻게 바뀌었는지 몰겠지만...
문학동네 소설상 <캐비닛>외엔 읽지 않아서 몰랐는데 김영하 작가처럼 해외에서 좋아하는 작가라고 하더라구요. <뜨거운 피>도 그런 작품일까,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