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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평점 :
5.18의 설계자들
설계자들, 김언수, 문학동네, 2019-01-29.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을 살 것이다. 그래도 책을 읽을 생각이냐?
이게 무슨 소린가 했는데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라 생각했다. 남을 죽이는 것을 직업으로 하고 살아가는 이라면 두려움이란 일을 방해하는 것일 테니. 삶의 자세에 대해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는 일이란 무언가를 정진하게 하는 힘이기도 아니기도 할 테니까.
책을 읽는 암살자,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적어도 모든 것을 경험과 타인에 의해 배우지 않고도 책을 통해 배울 수는 있는 것이니까. 기술적인 방법이 책으로 전수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어쨌든 이 책에서 ‘책을 읽는’ 암살자는 그 행위 자체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암살자는 야만이 가득한 세계의 난폭한 인물로 그려지거나 무조건 심각한 고뇌에 잠긴 사람으로 묘사되기 일쑤다. 이 사이에서 래생은 어디쯤일까.
이 책은 암살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남을 죽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독립운동가와 조폭의 암살이 다름은 명확하다. 그 행위도 받아들이는 관점도 그렇다. 래생은 직업적 암살자, 그를 움직이는 힘은 돈이다. 돈을 주는 이들에 의한 어떤 지시에 의해서 그 방법을 실현하는 인물이다. 래생이 이 암살자의 세계에서 살게 된 것은 어릴 적 쓰레기통에 버려져 너구리 영감의 세계로 안착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때부터 너구리 영감이 맡아 온 ‘개들의 도서관’은 죽음을 설계하는 장소다. 암살 청부 집단은 시대에 맞게 변화해 간다. ‘한자’가 내서운 기업형 보안 회사가 등장하는 것처럼 사라지지는 않은 채 말이다.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의 죽음 이후 설계자의 세계에 대해 래생이 궁금해 하고 설계자 ‘미토’를 추적한다.
암살자는 누구를 죽일까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설계자들에 의해 정확하게 설계되어 있다. 총인지 칼인지 목을 부러뜨릴 것인지 방법을 명시한다. 이렇게 방법까지도 설계된 지침을 따르는 것과 어떻게 죽일까를 계획하는 일, 두 방법 중에서 암살자는 어떤 방법을 선호할까. 그런 궁금증이 인다. 그러니까 설계자가 힘들까 암살자가 힘들까. 그래서 이 책은 암살자와 더불어 설계자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누군가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이들의 역할, 그 시나리오를 담당하는 이들에 대해서. 결국 배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한다고 봐야 할까. 딱히 그건 아니다. 설계자들 또한 따지고 보면 암살자처럼 그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설계자들도 우리 같은 하수인들일 뿐이야. 의뢰가 들어오면 설계를 하지. 그 위에는 설계자를 설계하는 놈이 있겠지. 그 위에는 그놈을 설계하는 또다른 설계자가 있을 걱. 그렇게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뭐가 남을까? 아무것도 없어. 맨 위에 있는 것은 그냥 텅 빈 의자뿐이야.‘ 래생이 말했다.
“그 의자에도 분명 누군가가 앉아 있겠지.”
“아무도 없어. 다르게 말하면 그건 그저 의자일 뿐이야.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의자. 그리고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그 의자가 모든 걸 결정하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일종의 시스템 같은 거지. 자넨 칼을 들고 올라가서 맨 꼭대기에 있는 놈을 찌르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어. 그곳에 있는 것은 텅 빈 의자뿐이니까.”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 철저한 역할 분담이라고나 할까. 설계자들 뒤의 의뢰인은 따로 있다. 그 의뢰인들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은 정해져 있다.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 설계자들이 하는 말, ‘선거가 있어서, 선거 때문에, 선거가 끝나면’……설계자들이나 암살자들이나 그렇게 놀라운 인물들로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최근의 5.18에 대한 새로운 증언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렇게 시민들을 죽이기 위해 계획된 시나리오, 설계자들이 있고 암살자들이 있고 의뢰인이 있다. 그 의뢰인이 지금까지 공고히 존재하는 것은 제 이익을 위해 분명하게 형성한 카르텔, 그 시스템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이어가려 조직을 총동원하고 있는.
이 책이 초판 2010년이고 난 분명 이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내용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언젠가 이 소설이 여러 나라에 번역되었다는 기사를 읽었고 그때에도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는데 다시, 읽어보고 그리고 책에 붙은 많은 외국인들의 찬사를 읽어보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 책을 읽고 열광하게 하는가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의 이유는 명확했는데 역시 이 책은 영화화가 확정되어 제작진행 중이라고 한다. 읽자마자 영화관계자들이 매우 좋아하리라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이 책은 잘 읽힌다. 범죄스릴러라는 장르지만 많은 추리를 요하지도 않아서인지 꽤 속도감있다.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 눈을 자근자근 밟는 느낌이다. 암살의 세계인데도 유혈이 낭자하고 욕설이 난무하는 형태가 아니다. 하지만 역시 암살자의 삶을 다루고 있기에 그 세계의 인물들이 가지는 전형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않았다. 가령 래생은 암살자의 세계에서 가장 멋져 보이는 전형적인 캐릭터를 그대로 따른다. 외모, 어릴 적 결핍, 독서하는 암살자, 그리고 무엇보다 고뇌하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여지없이 암살자들은 그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더라도 한번은 누군가에게, 그것은 늘 젊은 여자로 나타난다는 점, 흔들려야 한다. 뛰어난 암살자 추가 그러하고 또한 래생도. 어쨌든 이 세상에서 뛰어난 암살자라 불리는 이들의 죽고 죽임이 이어진다. 그 죽음, 모든 암살자의 죽음이 허무하다. 기껏해야 암살자들일 뿐인데, 그들은 그들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한다. 그것이 암살과정에서 만난 인연에 대한 복수이자 정의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결국 의자가 그대로 있다면 암살자들도 설계자들도 다시 고용될 것인데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만 인생의 깨달음을 삶의 새로움을 얻을 수 있는 듯이 그렇게 허무하게 그들 서로만을 죽이기 위해 온갖 에너지를 다 쓴다. 그렇게 이 책은 허무하게, 아쉽게 여겨지는 결말과 눈을 뽀드득뽀드득 밟고 있다는 느낌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