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시간 여행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고상숙 옮김 / 북레시피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주어진 시간 상자에서


위험한 시간 여행, 조이스 캐롤 오츠, 북레시피, 2019.


  다소 예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는 1938년생이다. 작가가 그리는 미래세계, SF 공간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작가가 살아간 그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불어 전체주의 세계가 가질 수 있는 특성이란 비슷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인데 그보다 이 소설이 작가의 46번째 소설이라는 점이 더 인상적이었다.

  전체주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이 소설은 잘 읽힌다. 2039년의 북미연합, 개인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사회, 이런 류의 소설에서 감시, 처벌, 반역, 추방, 처형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쉬이 예상된다. 하지만 그 처벌의 결과가 과거사회로의 추방이라는 점은 이 소설이 가지는 특징이다. 아드리안은 졸업식 연설이 국가권위에 대한 도전이란 이유로 반역자로 추방된다. 추방된 곳에선 신분을 바꾸고 살아가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신분이 아니라 주어진 대로의 삶이다. 기억이란 또렷하여 아드리안은 자신이 핸드폰과 컴퓨터를 쓰며 살아가던 시대에 있었음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아드리안이 눈앞에 보는 건 종이책과 타자기를 사용하는 시대다. 마치 시간여행자처럼 아드리안은 메이 엘렌 엔라이트로 1959년 9월 23일, 1959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두 사람의 자아가 내재한 아드리안은 현재의 이 상황을 무사히 넘겨 다시 자신이 살던 시대로 되돌아갈 것을 다짐한다. 아드리안은 위스콘신 주 웨인스코샤 대학생 메리로서 수업을 듣고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발설하지만 않으면 되는, 그렇기에 오히려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못한 채 추방자의 삶을 잘 버티어간다. 아드리안이 누군가. 울프만 교수를 사랑하기전까지는.

  어쩌면 이 소설이 잘 읽히는 지점은 말랑말랑하게 쓰여졌다는 점일 것이다. 서로 다른 시대, 국가가 통제하는 시스템을 적확하게 비교묘사하기보다 아드리안의 심리를 따라 그려지는 세상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 만큼 아드리안의 불안과 다짐과 사랑의 시선이 어렵게 그려질 리 없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이 소설을 가볍게, 탄탄하다는 느낌이 덜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디스토피아, 전체주의의 공포가 그로 인해 압박되고 죄어오는 느낌도 약하다.

  소설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건 스키너다. 아드리안이 심리학과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만큼 주요하게 『과학과 인간 행동』을 비롯한 스키너 이론에 대한 논의가 많다. 스키너는 행동주의 심리학자로서 인간행동은 환경에 대한 반응이라고 보며,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과 <웰든 투>로 유명하다. 소설에선 이 스키너 이론에 대한 아드리안 자신의 생각들을 채우는데 어쩌면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이 부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아드리안 또한 메리는 스키너 이론에 대한 내내 비판적 의견을 제시한다.


살아 있는 것은 (외부에서 보았을 때) 모두 시계가 돌아가는 기제와 비슷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나는 항의하고 싶었다. 나는 나야. 나는 독특한 존재이며 그런 식으로 파악하기 힘든 존재라고.


  그러한 비판의식에서 아드리안이 계속 제기하는 것은 ‘나’, ‘자아’이다. 통제된 사회속에서 자신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처럼 아드리안은 메리가 아니라 본래의 아드리안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자각 또는 자기 인식의 결여에 대한 스키너의 언급―자기 인식에 대한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인간에게는 자기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에 충격을 받았는데 이 역시 교과서가 아닌 그의 주요 저작 중에 읽은 내용이었다.

이러한 인식에는 뭔가 분명 끔찍한 게 있었다. 내가 나에 대해 모른다면 그 어느 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렌즈가 얼룩덜룩 더러운 상태이면 이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이 모두 얼룩져 보일 테니까.


  로맨스로 진행되어가는 지점에서 아드리안은 이런 자각을 더하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소설의 분위기는 반전된다. 1959년의 시대도, 시간여행도 의문이 가득한 채 펼쳐진다. 통제된 환경을 빠져나오려는 아드리안과 울프만의 관계에 의해 사회에 대한 시각 또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외롭고 힘든 그 시대에 그것을 극복하게 해주는 울프만과의 미래를 꿈꾸는 만큼 아드리안이 갖게 되는 의혹과 불안이 실험상자 속에 갖힌 느낌을 준다. 스키너의 실험은 확장된 전체주의의 통제와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자아가 환경에 최대 적응된 상태에서의 인식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꽤나 슬프고 아픈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시간 안에서 견뎌내는 거야. 어디에서 살건 한 번에 하루씩 견뎌내는 것은 똑같아. 이게 바로 우리 시공간의 축복이란다.


  자아에 대한 생각과 시간여행에 대한 생각을 전체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는 정확하다. 


삶은 지금 현재이기 때문이다. 삶은 생각이 아니고, 투영되는 것도 아니며, 삶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삶은 현재의 그것이며 TV에 비치는 것처럼 항상 지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가 나를 위한 곳, 지금이 나를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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