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뜨거운


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창비, 2009.


  분명 촛불혁명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은 변했다. 민주주의가 실체가 잡히지 않은 채 피로 쟁취해야 하는 이미지에서 평화적이고 질서 있는, 수준높은 우아함으로 요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 국민들은 이제 민주주의를 다시 쓴다.

  그래서인지 민주주의의 국민 의사표현 방식으로으써 새롭게 ‘문자’에 대한 공방이 오가고 있다. 말끝마다 국민을 들먹이는 정치인들은 국민의 문자를 특정 집단의 테러로, 폭탄으로 규정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행위라 명명했다. 반면 국민들은 정보혁명 시대에 맞춘 새로운 의사표현 수단으로서 문자를 정의하며 당당하게 개인의 번호를 노출한 만큼 문제테러범, 폭탄투하범이라 규정하는 정치인들의 행태에 분노하고 있다.

  어쨌든 분노는 좋다. 분노는 새로운 에너지로 전환되는 힘이다. 다만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민주주의의 발전은 깨어 있는 시민의 폭압적 권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국민들의 대응방식은 변화했고 여전히, 정치인들의 인식은 변하지 않은 채다.

  100℃는 1987년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날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는가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정신의 계승이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평탄할 새가 없었다. 전쟁과 독재가 연이어지고 폭력과 폭압 속에서 짓눌리며 살아야 했다. 경제마저도 피폐한 상황에서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 또한 폭압아래 허물어졌다. 그 피폐한 삶에서도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을 부르짖으며 목숨과 민주화의 가치를 바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소문없이 스러져갔고 빨갱이란 딱지를 붙이며 시뻘건 피를 빼내는 일이 당연한 듯 권력에 의해 휘둘려지던 그 때. 삶은 삶이 아니었다.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감추고 거짓으로 꾸며댄 이야기만이 권력의 입맛에 맞도록 전해졌다. 그렇기에, 사실과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수많은 이들이 충격과 죄책감을 가졌다. 그리고 여전히 죄지은 자는 죗값을 치르지 않았고 세상은 여전히 독재가 휘두르고 있었으니, 국민들이 분노의 함성을 일으키는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었고 깨어 있는 이들이었고 내 가족과 내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렇다. 영호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고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되면서 보이는 가족들의 반응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대학생 영호의 이야기라기보다 영호의 어머니 이야기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가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는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어머니는 여러 의미로 정말 강하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100℃는 그리고 있다. 아들의 학생운동에 반대하며 빨갱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서린 어머니가 진정, 민주화운동에 열성적이게 되는 모습은 평범한 사람들을 투사로 만드는 강력하고 불합리한 억압이 만드는 것이다.

  눈물과 피와 목숨으로 이룬 민주주의가 어이없게도 무너지는, 독재로 회귀하는 현상을 경험한 이들의 분노와 허탈은 얼마나 강했을까. 그럼에도 촛불을 들어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이 꼭, 피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 이 역사가 잘 이어져가기 위해선 또한 피흘렸던 그 시간들을 오롯이 기억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나라에서 자행된 폭압적인 시위 진압방식을 보며 이 나라의 독재적이고 무식한 권력은 정말로 다른 나라에서처럼 국민들이 폭탄 테러를 자행하지 않는 것을 축복으로 여겨야 한다. 이제까지의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우리나라 국민은 개인은 희생했지만 타인을 죽이면서 ‘민주주의’를 외치지 않았다.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네. 그래서 온도계를 넣어야만 불을 얼마나 더 때야 할 지 언제쯤 끓을지 알 수 있지. 하지만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지금 몇 도인지, 얼마나 불을 더 때야 하는지. 그래서 불을 때다가 지레 겁을 먹기도 하고 원래 안 끓는 거야 하며 포기를 하지. 하지만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100℃』가 보여주는 세계는 시민의 힘을 보여준다. 1980년, 1987년. 그리고 또한 무수한 나날들. 그리고 처음 촛불을 들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지난 겨울부터의 경험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지나치게 경직되고 엄숙한 분위기가 좀더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가미되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의식으로 점점 변화되고 발전되어 간다. 영원히 ‘완성’ ‘완결’형이 아닌 만큼, 계속 지켜보고 관심을 쏟으며 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이 만화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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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의 결말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이미지프레임, 2004.


  시각은 변한다. 재밌게 둘리를 보던 시절을 지나, 둘리 때문에 웃고 울던 때를 지나 고길동에게 연민을 느낀 시절이 있었다. 세월은 흘렀다. 말썽많은 객식구를 갑작스럽게 돌봐야 했던 고길동의 밉살스러움이 이해가 되기도 하던 시절을 지나왔다면, 아 정말 나이가 들었구나 싶다. 내가 나이가 든 만큼 강산은 여러 번 변했고 강산이 변한 만큼 세상은 외적 변화와 더불어 내적인 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에 대해 가치에 대해, 아닌 것처럼 하면서 변해서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순정만화가 더 좋았던 시절이라면 이런 그림체의 만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 같지만 세월은 취향에도 변화를 주기 마련이어서 공룡둘리의 나이듦을 보고 싶었다. 아기공룡은 다행히, 누구의 관점에서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멸종하지 않았고 나이들었다. 익살스럽던 그 아기공룡의 현재는 고개를 돌리면 무수히 보이는 수많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공룡 둘리. 그런 이야기를 닮은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주민등록증만 주어진다면 어김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을 그대로 밟고 있는 둘리. 주민등록증이 없다면 영락없는 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인 공룡 둘리다. 여전히 둘리가 만화의 세계라면, 둘리의 이야기가 환상이려면 둘리의 손가락에서 발휘될 초능력의 존재다. 그렇게 둘리의 손가락을 제거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완전한 현실의 이야기가 된다. 그 손가락마저도 다른 이유가 아닌 프레스기에 잘리게 함으로써 둘리는 엄연한 이 땅에 살아가는 노동자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 만화가 나온 시기는 신자유주의, IMF를 지나 구제금융이 촉발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이던 시대에 그려진 것이라 당시의 피폐한 분위기가 더욱 드러난다. 그러나 가려져서 그렇지 여전히 이 억압적 노동환경은 진행되고 있으며 둘리의 친구들의 삶 역시도 둘리와 다르지 않다. 몸을 파는 또치의 삶, 공갈젖꼭지는 벗어버리고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희동이, 친구들을 해부용으로 팔아넘기는 철수. 어릴 때 보던 그 아이들은 모두 변했다. 낯선 것에 호기심과 연민을 가지고 돌보던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던져준 환경에서 그 환경의 길들임에 맞게 변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또한 도우너의 사기로 인해 빚에 쪼달리다 사망한 길동이나, 그래서 이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철수 또한 손을 잡고 함께 하는 친구들, 가족들의 존재가 놓인 환경을 헤쳐나갈 수 없게 하는데서 더욱 변화하게 한다. 더 구렁으로 들어가도록 만드는. 좀처럼 명랑만화의 분위기를 생각할 수 없는 황량한 둘리의 시대.

  말안장에 앉으면 돈이 마구 쏟아지는 정유라가 송환되어 5월의 마지막날 한국으로 입국한다. 대한체육회도 한국마사회도 어떻게 흘러온 구조인지 권력에 아첨하고 돈놓고 돈먹는데에 전력을 쏟는 사이 마필관리사가 사망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확정되기도 하는 분위기이고 무엇보다 닫힌 환경이 아니라 문제가 있으면 합리적인 개선방안을 수립할 수 있는 정부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데 39살 마필관리사는 자살을 선택했다.

  역시 구조적 환경이 만든 인간적이지 못한 처우 때문이다. 태생이 그렇게 변화되지 않을 인간이 있기도 하고 한계단이라도 위에 서 있으면 ‘갑’의 본능을 끄집어내는 이들이 있다. 구조가 인간의 합리적인 인식마저도 도태되게 만드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시스템과 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이 만화는 둘리에 관한 이야기 외에 여러 편의 만화가 수록되어 있다. 하나같이 현실과 그 현실을 이용하고 현실에 이용당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날카로운 사회풍자는 아픈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병든 사회에선 역시 쉽사리 병들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는가.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그럼에도 아무도 모르는, 그저 비품취급받는 의자처럼 우리의 존재가 구조속에 갇혀,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게 되는 것.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적인 사람의 마음이 삶의 위안이고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함에도 사회의 변화는 처절하고 아프게 흘러간다. 더 나은 사회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룡의 시대가 다가오지 않기를. 공룡시대의 끝은 종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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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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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열망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마음산책, 2015.


  줌파 라히리의 소설은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런 작가의 첫 번째 산문집이다. 풍경화같은 표지가 고요하고 여유로운 느낌과 약간의 쓸쓸함도 깃든 듯한데, 제목으로서는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없지만 또한 대체로 산문집이란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해 보고 느낀 것들을 다루기에, 소설적 상상력이 아닌 일상의 줌파 라히리의 생각을 맛볼 수 있는 책이려니 한다.

  한마디로 하면, 이 책은 작가가 새로운 언어,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과정의 이야기다. 그 과정은 집안에 들어 앉아서 마냥 책을 달달달 외우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고 기간 또한 길었다. 아마도 이 산문집의 묘미는 작가가 이탈리아어로 이 산문을 썼다는 데 있을 것이다. 산문이라서인지 소설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문장의 맛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탈리아어로 썼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탈리아어를 안다면 잘 느낄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번역본으로 마주해야 하는, 이 언어의 벽. 그래서 작가처럼 이렇게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갈망이 강하게 든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을 읽고 싶을 때, 번역된 책이 매끄럽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면 늘 원서를 직접 읽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다음날이면 실천할 의지를 잊어버린다. 그저 세상엔 너무나 많은 나라가 있고, 그만큼 다양한 언어가 있기에라며 효율성을 생각하며 늘 번역인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작가는 왜 이탈리아어를 배울 생각을 했을까. 외국어를 배울 생각을 한다는 것이 기이한 일은 아니다. 특히나 영어권 국가에서 몇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반사이니까. 작가는 언어를 배우기 위해 직접 로마로 향한다. 이탈리아 친구도 없다는 작가의 이 이탈리아어에 대한 갈망. 그것은 2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잠시의 방문으로 스치듯 강렬하게 자리잡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던 작가는 마침내 가족과 함께 로마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어를 공부한다.

  그것은 이탈리아어에 대한 갈망 이전에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주요한 이유가 된다. 줌파 라히리는 “창작에서의 안정감이 위험하”기에 이탈리아어를 갈망하는 것이다. 이미 익숙하고 자유로운 영어가 아닌 변화와 새로운 표현을 위해 선택한 이탈리아. 작가는 영어로 된 책을 읽지 않고 이탈리아어로 된 책을 읽으며 생활한다. 작가로서의 열망이 내면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이러한 모험은, 줌파 라히리에게 이탈리아어를 익히는 기쁨과 함께 새로운 변화에의 의지도 심어주는 것이다.

  줌파 라히리가 이 산문을 쓴 후 이탈리아에서는 문화와 민족과 인종 간 이해와 평화를 도모했다고 상을 건넸다. 그런데 네루다나 권터 그라스도 받았다 한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외국어를 모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 자체를 습득하는 것이다. 그 언어의 사고체계를 습득하는 것이다. 또한 그 문화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탈리아가 이 유명한 작가에게 이러한 상을 수여하는 것은 감사함일까.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구명대 없이 기슭을 떠나는 일’인 만큼 매우 절절한 의지가 필요한 일이니까.

  여전히 작가가 로마에서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로마에서 생활하는 이 여정은 마치 여행기처럼 느껴진다. 20년 전의 잠시의 방문처럼 가볍게 로마에 얹어져 있는 느낌이 드니까. 어떤 느낌일까. 주로 이민자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작가 자신이 이주민으로 생활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 말에만 속했다. 난 나라도, 확실한 문화도 없다. 난 글을 쓰지 않으면, 말로 일하지 않으면, 이 땅에 존재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삶은? 결국 같은 것이리라. 말이 여러 측면과 색조를 갖고 있고 그래서 복합적인 특성을 갖고 있듯 사람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거울, 중요한 은유다. 결국 말의 의미는 사람의 의미처럼 측정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p75~76


  작가의 글쓰기. 그것은 작가 자신에게는 피난처이기도 하고 삶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보아오던 이민자의 정체성이 완전히 작가 자신의 감정을 벗어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규정지어 얘기하는 것을 작가는 탐탁치않게 여기겠지만 인도인으로 미국에 살고 있다는 그 상황이 어릴 때부터 줌파 라히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알듯한 느낌이었다.


 내 불완전을 잊기 위해, 삶의 배경으로 숨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써왔다. 어떤 의미에서 글쓰기는 불완전에 바치는 경의다. 사람처럼 책은 창작 기간에는 불완전하고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이다. p94


  이 산문집은 줌파 라히리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차분하고 고요하다. 언어를 배우는 일이 그저 ‘말’을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기에 작가의 어린 날의 기억과 작가로서의 감정과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잔잔히 흘러나오는 산문집이다. 그래서 심심하다는 느낌도 들긴 하지만, 그것은 소설과 비교한 문장에서 느끼는 것이고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줌파 라히리의 생각은 여전히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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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끌


소년이 온다, 한강, 창비, 2014.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란 것이 있어서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나는 살고 싶습니다.” - 시민군의 일기


 작가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읽고 읽으며 글이 써지지 않는 날들을 보내며 글자가 나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작가에게 이 소설을 마칠 수 있도록 이끈 것은, 시민군의 마지막 일기를 읽고 나서였다.

 

그때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제가 그때까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어요. 그리고 생각한 것이, 이 소설이 인간의 참혹과 폭력에서 시작했지만 인간의 존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저 거기까지만 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소설의 맨 앞과 맨 뒤에 촛불을 밝히자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어떻게 장들을 배열해야 할지 알 수 있게 되었고 월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할 수 있었어요.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수상작가 인터뷰 중 -


  그렇게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의 이야기다. 5·18 민주화운동이란 명명을 얻기까지, 그날의 역사가 재현되고 있지만 이 역시 그날을 조금 보여줄 뿐이다. 한 도시가 마비되고 고립된 그 시간들의 이야기는 작가가 이야기를 전개할 수 없을 정도의 강도로 그야말로 소설같아 현실로 가져오는 것이 어려울 정도의 일들이 숨겨져 있다. 5·18. 이제 37년의 시간이 지나 이 역사적 상처를 가슴에 안은 모두가, 역사가 치유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시점이다. 여전히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채이고 왜곡과 거짓을 넘어선 희화화를 일삼는 이들이 여전히 이 역사를 조롱하고 있다. 바로 잡힌 규명을 통해 예의없고 반성없고 잔혹한 무리들의 인식세계도 변할 수 있을까. 열다섯 소년의 혼이 여전히 떠돌고 있는 이날의 역사, 그날의 아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5·18을.   

  그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내 친구가, 내 가족이, 내 이웃이… 마구잡이로 얻어맞고, 총에 맞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 그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그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을 떠돈다. 그것은 영혼으로 떠도는 그날의 사망자의 모습과 겹친다.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살아남아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열여섯 동호의 살아남은 슬픔과 죄책감. 매일 분향소로 들어오는 시신들을 수습하는 일을 맡으며 초를 밝혀 주검들의 혼을 위로하며 친구 정대를 찾는 동호의 괴로움이 절절히 공감되면서 아린 마음이 되는데, 결국 동호마저도 폭도인 국가에 의해 희생당하고 만다. 슬프고 안타깝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그러면서도 멍한.

  어린 동호조차도 그 폭격과 폭력 속에 친구 손을 놓친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시민군의 활동을 돕는데, 죄책감도 양심도 없는 존재들이 또 어찌 그리 많을 수 있을까. 절대 권력이라는 그 우스운 명칭. 왜 양심은 가진 자에게는 그토록 머물지를 않는지.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p57~58


  <소년이 온다>는 그날의 사건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5·18은 한순간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에 머리에 트라우마가 된 사건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날의 폭력과 고문으로 다친 몸과 마음을 안고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삶은 진행이 되지 않는다. 그날의 충격은 목뼈가 어긋난 것과 같아, 그들의 삶은 여전히 어긋나 있다. 잊겠다 다짐하지만, 절대로 잊히지 않는 기억이 그들의 현재 삶이 된다. 여전히 끔찍한.


 일곱 대의 뺨을 그녀는 이제부터 잊을 것이다. 하루에 한 대씩, 일주일 만에 잊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이 그 첫날이다.

 어떻게 잊을까 목뼈가 어긋난 건 같았던 그 충격을.


  이런 잔혹함을 자행한 이가 눈앞에 살아 번들번들한 얼굴을 디밀고 나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역겹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 번들한 기름기가 학살자가 살아온 모습이겠지. 양심이 내려앉지 못할 미끌거림. 그러니 아직은 죽지 마라. 그저 노안으로 죽지 마라. 미끌거린 채 마지막까지 번들번들한 그 얼굴로 사라지지 마라. 이런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따라서 나도 이렇게 다짐한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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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5-30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한강 작가 최고의 작품
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시빛 2017-05-30 21:05   좋아요 0 | URL
그런 것 같아요.
소재가 주는 힘이 있긴 하지만 한강 작가도 소재를 잘 풀어낸 것 같아요..
그러니 블랙리스트로 낙인찍혔겠죠...?! 국제적인 상을 수상하고도요...
 


애도의 시간


여름을 지나가다, 조해진, 문예중앙, 2015.


  덥다. 달력은 지금을 봄이라 말하고 날씨는 여름이라 말한다. 소나기가 그리워진다. 쩍쩍 갈라진 논을 보면서 여름 속에 들어섰음을 실감한다. 어느덧 여름하면 무더위가 더 생각나는 걸 보면 나잇살이 주는 땀의 무게가 너무 힘들었나 보다. 지난 여름은 너무, 너무 지친 여름이었다. 그래도 겨울엔 봄을, 여름을 기다렸으니 또한번 지나갈 여름을 맞이하는 마음은 아직은 덤덤하다.

  그래, 지나갈 여름이다. 어떠한 삶의 경험이든 여름을 견뎌내는 이들의 감정은 격랑이다. 그리고 그 여름을 지나면 격랑의 자욱들이 또렷이 보일 것이다. 여기 조해진의 <여름을 지나가다>는 그 여름 청춘들에게 남은 자욱들을 보여준다. 민과 수의 교차적 시점으로 서술되는 6, 7, 8월의 이야기가 그들이 함께 마주치는 여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산으로부터 머물 곳을 찾지 못한 민과 수의 이야기다. 민은 감정의, 수는 재산의 파산으로 인해 여름을 넘기기가 힘들어 여름을 넘길 공간을 찾는다. 그들 마음의 위안을 얻을 장소를 발견했다고 느낀 순간, 그 순간은 여름의 절정이었을까. 여름의 끝이었을까.

  민과 수가 마주친 공간의 주인은 누구라고 해야 할까. 급매로 내놓은 버려진 가구점. 그래서 현재 아무도 머물고 있지 않은 집. 그곳을 민과 수가 찾는다. 그리고 연주, 종우. 여름을 쳐다보는 그들의 얼굴들이 하나같이 닮았다. 민이 가구점 그 공간에서 들여다보는 거울 속의 모습처럼 말이다. 흐릿한.


  민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게 의심될 때마다 이곳으로 거울을 보러 왔다.

  흐릿한 거울 속에서 흐릿한 자신이 흐릿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 흐릿한 생애가 상상됐다. 가령 일정 기간 살다가 미련 없이 죽고 그 죽음에서 빠져나온 뒤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다시 태어나는, 그러니까 일생이란 개념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태어남과 죽음의 끊임없는 반복. 그런 식의 삶은 기차 같은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수많은 칸들이 연결된 기차처럼 각기 다른 생애들이 길게 이어져 전체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어제의 눈물을 기억하지 않고 내일의 포부 따위 갖지 않는.


  불안정한 터전을 삶의 피난처로 삼으며 하루를 버틸만큼, 그들의 삶엔 어떠한 아픔이 가득한 걸까. 부동산중개소에서 일하며 가구점을 드나드는 민에겐 파혼의 아픔이 있다. 그리고 종우와의 파혼의 이유가 되는 노동자의 사망이 있다. 거기에서 민은 마냥 자유로울 수 없다. 아버지의 빚을 떠안으며 신용불량자인 채로 타인의 신분증으로 살고 있는 수. 곧 철거될 옥상 놀이공원에서 열심히,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연주. 그들 삶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삶의 힘겨움과 아픔이다.

  그들이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니, 이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게도 보이지만 그냥 제 아픔속에 매몰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 수동적으로 여름을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듯 보이는 그들의 여름.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계획에도 없던 다른 종류의 삶으로 빨려 들어가는 허약한 지점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p50)”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발을 뻗어본다. 타인,인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위로하며 또한 위로 받으며 그렇게 발을 뻗는다. 민이 말하듯 발을 헛딛는 것쯤이야 두려울 게 무엇있으랴. 더는, 발을 뻗는 곳에 디딜 곳이 없는 것에 개의치 않을 것이다. 다만 발을 뻗지 않고 계속 그 상태로 머무는 것이 더욱 힘든 일이라는 것을 그 여름에 느끼기에, 지금 그 관성을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 머문 기차 한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들이 발을 뻗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아픔을 가진 또다른 존재를 확인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뻗는 발을 그대로 받아줄 아픔을 서로 나누는 존재. 피난의 공간을 함께 한 그들의 존재. 결국 아픔은 사람에서 시작되고 사람으로부터 치유받는 모양이다. 민이 수를 돌보는 것이 진짜 삶인 듯,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그 더운 여름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했던 존재들. 또한 타인에 대한 끝없는 애도. 그 여름은 그런 애도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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