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의 결말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이미지프레임, 2004.


  시각은 변한다. 재밌게 둘리를 보던 시절을 지나, 둘리 때문에 웃고 울던 때를 지나 고길동에게 연민을 느낀 시절이 있었다. 세월은 흘렀다. 말썽많은 객식구를 갑작스럽게 돌봐야 했던 고길동의 밉살스러움이 이해가 되기도 하던 시절을 지나왔다면, 아 정말 나이가 들었구나 싶다. 내가 나이가 든 만큼 강산은 여러 번 변했고 강산이 변한 만큼 세상은 외적 변화와 더불어 내적인 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에 대해 가치에 대해, 아닌 것처럼 하면서 변해서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순정만화가 더 좋았던 시절이라면 이런 그림체의 만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 같지만 세월은 취향에도 변화를 주기 마련이어서 공룡둘리의 나이듦을 보고 싶었다. 아기공룡은 다행히, 누구의 관점에서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멸종하지 않았고 나이들었다. 익살스럽던 그 아기공룡의 현재는 고개를 돌리면 무수히 보이는 수많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공룡 둘리. 그런 이야기를 닮은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주민등록증만 주어진다면 어김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을 그대로 밟고 있는 둘리. 주민등록증이 없다면 영락없는 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인 공룡 둘리다. 여전히 둘리가 만화의 세계라면, 둘리의 이야기가 환상이려면 둘리의 손가락에서 발휘될 초능력의 존재다. 그렇게 둘리의 손가락을 제거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완전한 현실의 이야기가 된다. 그 손가락마저도 다른 이유가 아닌 프레스기에 잘리게 함으로써 둘리는 엄연한 이 땅에 살아가는 노동자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 만화가 나온 시기는 신자유주의, IMF를 지나 구제금융이 촉발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이던 시대에 그려진 것이라 당시의 피폐한 분위기가 더욱 드러난다. 그러나 가려져서 그렇지 여전히 이 억압적 노동환경은 진행되고 있으며 둘리의 친구들의 삶 역시도 둘리와 다르지 않다. 몸을 파는 또치의 삶, 공갈젖꼭지는 벗어버리고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희동이, 친구들을 해부용으로 팔아넘기는 철수. 어릴 때 보던 그 아이들은 모두 변했다. 낯선 것에 호기심과 연민을 가지고 돌보던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던져준 환경에서 그 환경의 길들임에 맞게 변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또한 도우너의 사기로 인해 빚에 쪼달리다 사망한 길동이나, 그래서 이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철수 또한 손을 잡고 함께 하는 친구들, 가족들의 존재가 놓인 환경을 헤쳐나갈 수 없게 하는데서 더욱 변화하게 한다. 더 구렁으로 들어가도록 만드는. 좀처럼 명랑만화의 분위기를 생각할 수 없는 황량한 둘리의 시대.

  말안장에 앉으면 돈이 마구 쏟아지는 정유라가 송환되어 5월의 마지막날 한국으로 입국한다. 대한체육회도 한국마사회도 어떻게 흘러온 구조인지 권력에 아첨하고 돈놓고 돈먹는데에 전력을 쏟는 사이 마필관리사가 사망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확정되기도 하는 분위기이고 무엇보다 닫힌 환경이 아니라 문제가 있으면 합리적인 개선방안을 수립할 수 있는 정부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데 39살 마필관리사는 자살을 선택했다.

  역시 구조적 환경이 만든 인간적이지 못한 처우 때문이다. 태생이 그렇게 변화되지 않을 인간이 있기도 하고 한계단이라도 위에 서 있으면 ‘갑’의 본능을 끄집어내는 이들이 있다. 구조가 인간의 합리적인 인식마저도 도태되게 만드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시스템과 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이 만화는 둘리에 관한 이야기 외에 여러 편의 만화가 수록되어 있다. 하나같이 현실과 그 현실을 이용하고 현실에 이용당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날카로운 사회풍자는 아픈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병든 사회에선 역시 쉽사리 병들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는가.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그럼에도 아무도 모르는, 그저 비품취급받는 의자처럼 우리의 존재가 구조속에 갇혀,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게 되는 것.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적인 사람의 마음이 삶의 위안이고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함에도 사회의 변화는 처절하고 아프게 흘러간다. 더 나은 사회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룡의 시대가 다가오지 않기를. 공룡시대의 끝은 종말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