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끌


소년이 온다, 한강, 창비, 2014.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란 것이 있어서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나는 살고 싶습니다.” - 시민군의 일기


 작가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읽고 읽으며 글이 써지지 않는 날들을 보내며 글자가 나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작가에게 이 소설을 마칠 수 있도록 이끈 것은, 시민군의 마지막 일기를 읽고 나서였다.

 

그때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제가 그때까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어요. 그리고 생각한 것이, 이 소설이 인간의 참혹과 폭력에서 시작했지만 인간의 존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저 거기까지만 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소설의 맨 앞과 맨 뒤에 촛불을 밝히자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어떻게 장들을 배열해야 할지 알 수 있게 되었고 월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할 수 있었어요.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수상작가 인터뷰 중 -


  그렇게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의 이야기다. 5·18 민주화운동이란 명명을 얻기까지, 그날의 역사가 재현되고 있지만 이 역시 그날을 조금 보여줄 뿐이다. 한 도시가 마비되고 고립된 그 시간들의 이야기는 작가가 이야기를 전개할 수 없을 정도의 강도로 그야말로 소설같아 현실로 가져오는 것이 어려울 정도의 일들이 숨겨져 있다. 5·18. 이제 37년의 시간이 지나 이 역사적 상처를 가슴에 안은 모두가, 역사가 치유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시점이다. 여전히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채이고 왜곡과 거짓을 넘어선 희화화를 일삼는 이들이 여전히 이 역사를 조롱하고 있다. 바로 잡힌 규명을 통해 예의없고 반성없고 잔혹한 무리들의 인식세계도 변할 수 있을까. 열다섯 소년의 혼이 여전히 떠돌고 있는 이날의 역사, 그날의 아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5·18을.   

  그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내 친구가, 내 가족이, 내 이웃이… 마구잡이로 얻어맞고, 총에 맞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 그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그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을 떠돈다. 그것은 영혼으로 떠도는 그날의 사망자의 모습과 겹친다.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살아남아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열여섯 동호의 살아남은 슬픔과 죄책감. 매일 분향소로 들어오는 시신들을 수습하는 일을 맡으며 초를 밝혀 주검들의 혼을 위로하며 친구 정대를 찾는 동호의 괴로움이 절절히 공감되면서 아린 마음이 되는데, 결국 동호마저도 폭도인 국가에 의해 희생당하고 만다. 슬프고 안타깝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그러면서도 멍한.

  어린 동호조차도 그 폭격과 폭력 속에 친구 손을 놓친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시민군의 활동을 돕는데, 죄책감도 양심도 없는 존재들이 또 어찌 그리 많을 수 있을까. 절대 권력이라는 그 우스운 명칭. 왜 양심은 가진 자에게는 그토록 머물지를 않는지.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p57~58


  <소년이 온다>는 그날의 사건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5·18은 한순간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에 머리에 트라우마가 된 사건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날의 폭력과 고문으로 다친 몸과 마음을 안고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삶은 진행이 되지 않는다. 그날의 충격은 목뼈가 어긋난 것과 같아, 그들의 삶은 여전히 어긋나 있다. 잊겠다 다짐하지만, 절대로 잊히지 않는 기억이 그들의 현재 삶이 된다. 여전히 끔찍한.


 일곱 대의 뺨을 그녀는 이제부터 잊을 것이다. 하루에 한 대씩, 일주일 만에 잊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이 그 첫날이다.

 어떻게 잊을까 목뼈가 어긋난 건 같았던 그 충격을.


  이런 잔혹함을 자행한 이가 눈앞에 살아 번들번들한 얼굴을 디밀고 나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역겹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 번들한 기름기가 학살자가 살아온 모습이겠지. 양심이 내려앉지 못할 미끌거림. 그러니 아직은 죽지 마라. 그저 노안으로 죽지 마라. 미끌거린 채 마지막까지 번들번들한 그 얼굴로 사라지지 마라. 이런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따라서 나도 이렇게 다짐한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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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5-30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한강 작가 최고의 작품
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시빛 2017-05-30 21:05   좋아요 0 | URL
그런 것 같아요.
소재가 주는 힘이 있긴 하지만 한강 작가도 소재를 잘 풀어낸 것 같아요..
그러니 블랙리스트로 낙인찍혔겠죠...?! 국제적인 상을 수상하고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