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1. 당신의 시선은 어디에 머무는가

 

 

 *시녀들 (라스 메니나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Don Diego Rodriguez da Silva y Velasquez)

 *316 x 276 cm,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소장

 *출처) Naver 미술정보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vs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시선은 머무는 곳이다.

  길을 걷다 보면 너무도 익숙한 풍경에 걸음이 멈춰질 때가 있다. 그러나 너무도 낯선 풍경에도 걸음은 멈춰진다. 익숙함과 낯섦은 각각의 특성으로 시선을 끈다. 그리나 조금 더 길게 걸음을 붙잡아두는 것은 어떤 풍경일까. 되돌아 시선이 오래도록 머무는 것은 어떤 풍경일까. 나의 발걸음은 나의 시선은, 익숙함과 낯섦에 반응하며 나를 이끈다.

  그림이 있다. 아마도 난 그림을 지나쳐갈 지도 모르겠다. ‘난 그림보는 눈이 없어서’. 어쩌면 나는 그림을 바라볼 지도 모르겠다. ‘저 그림 엄청 유명해, 유명한 화가가 그린 거래’. 어쩌면 나는 그림을 보고 있지만 전문가들이 말한 특징을 찾아 줄을 긋고 있을지 모르겠다. 해결해야 할 일을 해치우듯이. 나는 제대로 그림을 본 걸까.

  나는 다시 걸음을 돌려 하나의 그림을 본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squez)의 시녀들(Las Meninas) 속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자신도 등장한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화풍은 무엇인지, 잘 그렸다는 것은 무언지를 생각하는 동안의 나는 분명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문제와 그 해답을 제대로 외웠는지를 확인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포인트는 이거야를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지식없이, 아무런 편견없이 이 그림을 보았다면 어디에 초점을 맞추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의해 확립될 것이다. 천차만별인 가치에 우위를 정하는 것은 상대적이겠지만 보편타당함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은 절대적이다. 다양한 가치들의 싸움에서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점점 사람을 본다거나 함께 하는 사회에 대한 것보다는 자본주의의 시장질서에 맞는 형태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점점 세상은 경쟁과 차별이 당연시되고 ‘살아가기 위한’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가치를 찾고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미술책에서 이 그림은 그림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넓은 미술관에서 내 키보다 큰 커다란 그림을 마주했을 때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그림 속의 인물들을 보고 있었다. 하나의 사회, 수많은 사람들 속의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때 떠오른 책이 바로 이 두 책이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그리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이 책의 저자들이 그림에서 본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시선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시선들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세상살이에 익숙해져 한번씩 외치지만 평소에는 늘 뒷전에 두는 그런 마음들. 그것이 조금 더 소리를 높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시선’을 가지고 있는가가 결국 이 사회를 살아가는 방식을 규정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그림이 처음부터 시녀들이라는 제목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화가 자신이 붙인 제목도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점차 이 그림을 ‘평’하는 이들에 의해 그림에 대한 초점도 달라졌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물론 화가의 의도를 진지하게 찾았겠지만. 밝은 드레스와 금발로 빛을 받고 있는 공주와 많은 사람들이 그림 속에 있다. 사람들은 이 그림 속에서 누구에, 무엇에 관심을 가지게 될까. 뒤돌아서서도 생각나게 만드는 장면은 무엇일까.  책의 저자들은 각각 그림 속 다른 이에게 초점을 맞춘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이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저기 앉아 있는 개라고?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의 작가 라헐판 코에이가 그렇다. 작가는 저 그림 속으로 들어가 개를 감싼다. 저 개는 개가 아니라고. 이름은 바르톨로메, 어린 소년이라고.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가 통치하던 17세기에도 지금과 달라지지 않은 점이 있다면 “너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야, 알겠니?”라는 말의 울림이다.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지성과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생활여건이 좋아졌다는 현재에도라고 해야 할까. 저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때론 의지와 다짐의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을 기저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마드리드에 가면 매일 보게 될 왕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는 듯했다. 이 아이들에게 마드리드는 희망의 도시이자 기회의 땅이었다. 바르톨로메에게만 아니었다. 후안은 그런 대도시에서 병신들이 얼마나 심한 차별을 받고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불구자는 이 곳 마을처럼 단순히 구경거리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한테서 침 세례를 받고 갖은 수모를 당했다(p28)


 

   먹을 것이 풍족하다고 해서 지상낙원이 되지는 않는다. 정신적인 풍요가 없다면 말이다. 농촌에 비해 물자가 풍요로운 도시 마드리드가 그랬다. 조롱과 멸시는 곱추 바르톨로메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니 조롱과 멸시로부터 안전한 방법은 존재를 숨김으로써다. 안타깝게도 그의 숨김이 가장 우스꽝스러운 상태로 해제되었을 때 바르톨로메는 최고 권력의 눈에 띄었다. 5살 마르가리타 공주는 바르톨로메를 개, 인간개라고 표현했다. 이후 바르톨로메는 ‘개’가 되어 공주의 장난감으로 살아야 했다. 자신을 장난감으로 만든 공주에게 귀염을 받는 것만이 오히려 편안한 삶을 살게 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 인간이 개가 아닐진대 개처럼 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피로가 따르고 그보다 더 크나큰 정신적인 고통이 뒤따른다.

   그림 속엔 바르톨로메와 같이 장애인이 나온다. 그들도 바르톨로메에게는 못 미치는(적어도 그들은 개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차별을 겪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바르톨로메를 힘들게 괴롭히는 이들은 같은 장애인들이다. 다른 이들이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낄 때 오히려 이들은 바르톨로메를 경계한다. 못난이 난쟁이라 불리는 마리에 바르볼라나 난쟁이 니콜라시토를 보면 순응한 자의 행동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공주의 귀염을 차지하는 바르톨로메에게 위협을 느끼며 자신들의 위치가 변화될까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을 그저 바르톨로메를 제거(죽인다는 의미는 아니다)하려는 데 쓰는 니콜라시토의 모습은 그림 속 바르톨로메에게 발을 올리고 있는 모습에서도 보인다. 오로지 권력자의 말 한마디가 중요한 세상에서 살기 위한 본능적인 체득은 권력자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임을 철저하게 실현하는 그들에게 안타까움과 분노가 함께 느껴진다.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가장 큰 이해를 해주리라는 기대가 무너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순응한 자, 마리에 바르볼라의 말에서 그녀가 견디는 삶의 모습에, 그럴 수밖에 없음에 연민을 느낀다. 

 

잘사는 왕족들의 놀이에 끼여 함께 논다고 생각해. 너무 마음 쓰지 마. 네 일만 제대로 잘하고,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면 여기 궁중에서도 아무 근심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해 봐. 그냥 연극이라고. 넌 그 연극의 주인공이야!(p201)

  그래, 삶이 연극이라면 시간이 정해져 곧 막이 내려질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더구나 고통스런 상황에서라면 더욱 더. 하지만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삶에서 언제까지고 가장 비참한 역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배역을 바꾸어야 한다. 그 배역을 바꾸기 위한 첫걸음이 자신이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다. 바르톨로메는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화가가 되는 일이다.

 

 프레하 : 바르톨로메. 너는 절대 화가가 될 수 없다. 우리 같은 흑인이나 노예, 난쟁이들은 사회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일반인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는 조합이나 단체에 가입할 수도 없고, 출세나 성공 같은 건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고 이 사회에 조그마한 도움이 되는 한 그저 우리를 참아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르톨로메 : 상관없어요!

 프레하 : 상관없는 게 아냐! 네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위해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니? 남들로부터 솜씨를 인정받으면서도 네가 심혈을 다해 그린 그림에는 낯선 사람들의 인장이 찍히고, 낯선 사람의 이름이 붙을 것이다.

 바르톨로메 : 프레하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이제껏 제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던 과거보다는 백배 더 나아요. 저는 화가가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p273)


 

  바르톨로메는 ‘개’에서 ‘사람’이 되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바르톨로메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의 도움과 노력으로 ‘개의 삶’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자신이 살고 싶어 하는 삶에 대한 의지를 표한다. 물론 여전히 바르톨로메의 삶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배역을 바꾸기를 원했고 ‘누군가’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첫 단계로 나아가기 원했다. 개가죽을 뒤집어쓰고 개처럼 헉헉거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바르톨로메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은 안타깝게도 바르톨로메 혼자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람인 바르톨로메가 곱추라는 이유로 개가 되어야 하는 것에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생각과 그 부당함을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들의 연대가 이루어낸 것이다. 그리고 계속 ‘개’로 남아 공주의 총애만을 얻으려 하지 않았던 바르톨로메의 의지가 더해진 것이다.

  개의 등에 발을 올리고 있는 난쟁이에서 인간 바르톨로메를 그려낸 작가의 상상력과 작가의 ‘시선’이 나를 붙든다. 새삼스럽게 함께 하는 삶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끔 한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그림 속의 개는 바르톨로메가 아니다. 처음부터 바르톨로메의 자리가 아니었다. 저것은 그저, 진짜 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저자 박민규는 개 뒤에 서 있는 시녀에 주목한다. 그녀는, 음, 음, 너무 못생겼다. 우리는 기억한다, 주인공을. 주인공은 당연 잘생기거나 예쁘거나, 능력이 많거나, 돈이 많거나, 다 갖췄거나 그렇다. 작가는 가장 못생긴 여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 이야기를 한다. 못생긴 여자를 기억하느냐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고 작곡 했다는 모리스 라벨의 곡과 동일한 제목의 소설이다. 그 때문인지 시종일관 라벨의 배경음악이 깔린 듯이 이야기가 전개된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귓가에 온통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어쩌면 음률이 계속 느껴지는 것이 여운이 아닐까.

아무리 사랑해도 결국 타인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일 뿐이니까. 그것이 자신의 고통이 되기 전까지는, 어떤 인간도 타인의 고통에 해를 입지 않는다(p15~16).

  아마도 그렇다. 그 어떤 사랑이라도 그 어떤 고통이라도 타인의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타인의 고통은 내 것과 비교되었을 때 이해되고 와 닿는다. 1986년에 스무살이던 청년은 1999년에도 여전히 자신의 고통을 기억한다. 그녀에게 모리스 라벨의 음반을 선물한, 함께 「라 스메니나」의 그림을 본 그녀를. 이 소설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보면서 계속 못생긴 시녀에 머무르는 뒤돌아서도 그녀를 떠올리는 한 남자의 기억이다.   

  사랑은 개인적 경험이 아니다. 보편적 경험이다. 다만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개인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사랑경험은 개인에게 특수할 뿐, 타인에게는 고통이 되지 못할 경험이다. 그러나 못생긴 여자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라면 달라진다. 타인의 개인적 경험에 연민을 느낀다. 그런데 연민의 대상자가 누구라고? 못생긴 여자인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인가?

  어쩌면 ‘나’에게 트라우마가 있지 않았다면 이 소설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보다 잘생긴 아버지, 못생긴 어머니는 자신의 헌신이 무색하게 아버지로부터 버려졌고 못생긴 어머니의 아들인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이기에 못생긴 여자에게 갖는 마음이, 시선이 달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못생긴 여자도 부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못생긴 여자를 향한 수많은 사람의 멸시를. 그로 인해 쌓아올리지 못하는 자신감과 상대방의 진심을 믿지 못하게 되는 자신을.


 

나는 그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무엇도 믿지 않았다. 따라 뛰는 사람들, 피리소리를 따라 어디론가 달려가던 사람들과...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세상의 풍경들을 그저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아름다워지는 여자들... 아름다워 <져야만> 하는 여자들과... 학력을, 차를, 또 집을... 말하자면 힘을 <가져야만> 하는 남자들... 서로에 의해, 서로에 비해, 올라선 서로를 위해 구축하던 프리미엄과... 올라서지 못한 서로에게 요구되던 또 그만큼의 스펙에 대해... 그러나 전혀 달라지지 않는 삶의 성질에 대해... 오로지 스펙과... 프리미엄만 늘어날 뿐인 이 삶에 대해... 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30년만 지나면 허물어야 할 한 채의 집을 위해, 실은 조건과 조건... 이윤과 프리미엄에 의해 만난 서로에 의해... 하여, 실은 있지도 않았던 사랑에 내내 절망할 이 삶에 대해... 그 <생활>에 대해... 하여 자신의 자녀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이 삶에 대해... 다시 사랑이란 명목으로 가두고 사육하는 이 삶에 대해... 갖추고 올라섰다 한들, 이를테면 일병 7호봉 정도나 될 그 대단한 프리미엄에 대해... 실은 허망한, 하여 과시밖에는 할 게 없는 이 삶에 대해... 그러나 결국 죽음을 맞이할 이 삶에 대해... 고생하셨어요, 말은 하지만 실은 유산을 셈하고 있을 자녀들에 대해... 그래서 실은 그 무엇도 남지 않을 이 삶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p328)


 

  사랑이야기는 은은하고 안타까움이 더해지며 그것을 더욱 깊고 짙게 하는 것은 저자의 문체와 구성이다. 소소하게 그려 넣은 80년대가 90년대로 넘어가는 변화 속의 사람들의 모습은 그 문체로도 덮을 수 없는 현실감이 느껴지기도, 조금은 과장되어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콤플렉스 덩어리를 모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수많은 덩어리를 모으며 우리는 노예로 전락해 가고 있지 않은지를 사랑이야기 속에 녹여 내었다.

 

“저는 늘 스펙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경쟁력 없이 살 수밖에 없는 대다수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남자들을 위한 소설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여자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저자의 의도는 사실, 달갑지 않다. 같은 상황에서 여자에게는 ‘외모’가 더 추가된 것이 현실이라 해도 외모로 인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이 시대의 여자들에게 과연 이 책은 위로가 될까?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는 것이 위로인가라는 반문을 해본다. ‘나’에게 못생긴 어머니의 일이 없었다면 과연 그는 그림 속 못생긴 시녀에게 관심을 두었을까. 경험이 있음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볼 때 사회에서 ‘소외’되는 자에 대해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고는 생각한다.

  경쟁사회에서 결국 인간을 위로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진정성있는 마음이다. 그것이 상대에게 닿을 수 있는가는 사회가 억누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이 말하는 것은 ‘누군가로부터의 위로’일 수도 있겠다. 이 같은 시대에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일 게다. 그리고 타인의 위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도 타인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로받는 상황이 되는 것은 역시 달갑지 않다. 세상은 점점 위로받고 싶은 자들만이 가득해지고 있다. 가장 좋은 것은 그런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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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의 항해저 너머'를 향한 대담한 탐험

 

월리엄 M. 레디, 문학과 지성사, 2016. 3.

 



 

  감정은 사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으로서 이런 책이 출간된 것이 기쁘다. 감정과 이성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한들 그래 네 생각이야, 라고 끝내 버려 안타까웠다.

  이런 나의 안타까움을 알아보기라도 한듯 저자는, 그것도 역사학과 인류학 교수이신, 최근의 감정연구를 분석하여 새로운 이론틀을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다. 일단, 저자 역시 감정이 생각과 완전히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저자의 이론을 제시하는데 있어 '역사'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시기를 예로 들어 그가 주장하는 감정의 세계에 이성적으로 빠져보자.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바다출판사, 2016. 3.





  “4.13 선거가 다가오는구나!!!!

 

 그람시는 이탈리아에 파시즘이 자리잡은 요인을 민중의 정치적 무관심이라 지적했다. 이 말에 공감하면서도 우리는 자연적으로 무관심해지고 있다. 정치가 민중들로 하여금 '무관심'을 택하게 만드는 전략을 세우고 있는 듯도 하다. 그렇담 우리나라의 정치가들은 뛰어난 정치력을 가진 이들이 아닌가!

 선가가 다가오고 있다. 정치에 질려버린 피로해진 사람들이 정치에서 희망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 이때, 그람시의 산문은 어떤 힘을, 행동력을 키워줄까.

 타인의 무관심으로 내 삶이 큰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나에게 관심을 꺼달라고요!와 당신의 무관심이 나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구요!라는 맥락은 다르다. 

 파시즘의 이탈리아 상황이 1900년대 초반이건만 2016년의 대한민국은 허구헌날 과거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4.13일은 선거일이다.

 

 

 

 

나쁜 페미니스트-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사이행성, 2016. 3.

 



  페미니스트는 그렇다. 페미니스트라고 쉽게, 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또 생각해보면 페미니스트는 뭐지? 페미니즘은 뭐지?라는 생각이 맞물린다. 대한민국에 페미니즘이 너무나 왜곡되어 인식되어 있는 까닭이다. 하긴 오죽하면 여성 국회의원조차도 국회의원이 되려면 멍청(?)해 보여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일삼는 나라인데...오죽하랴.

 

 저자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데 대한 여러 문제들을 지적하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데 있어서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건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편에 선다는 의미이며 그러므로 스스로를 나쁜 페미니스트라 인정하고 다른 나쁜 페미니스트를 이해라려 노력하자고 말한다.

 

 

 

동성결혼은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가

 

리 배지트, 민음사, 2016. 3.

 

 


  동성결혼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분여 있다.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방향인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동성결혼을 허용하면 될지 말지, 허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논의의 책이 아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지에 관한 책이다.나는 사회를 바꾸고 싶나? 왜 이렇게 사회가 바뀌는 형태에 관심이 달려가는 걸까......

 저자는 동성 결혼을 경험한 국가가 겪은 사회문화적 변이 양상을 실증하는 연구로 이러한 물음에 접근한다. 말많은 결혼과 그에 더 나아간 동성결혼. 정말로 논쟁들처럼 동성결혼은 사회악을 불러왔는지 아닌지, 이 책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

 

김상근, 21세기북스, 2016. 3.

 

 

 화가들마다 자신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카라바조도 독특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인상주의나 낭만주의적 그림들에 열광하는 분위기를 보건대 그의 그림은 또한 섬뜩하니까. 살인자에 도망자라는 개인의 이력이 더해져서 더욱 그렇게 보일지도.

 카라바조의 그림을 통해 당시의 세계를 읽어내는 책이다. 카라바조는 르테상스와 종교개혁 시기의 삶을 살았던 화가다. 그림에 대한 새로운 기법은 잘 모르겠고 그의 삶과 그의 예술적 정신에 대한 이야기, 혼돈의 시기에 그림을 통해 어떤 정신을 말하고자 했는지 그 살인미학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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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풍부한 식사를 하는 법


  따스한 봄이다. 바람이 시원하게 그러나 조용히 불고 있다. 저 멀리 아이들과 사람들이 활기차게 떠드는 소리들이 들린다. 그리고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들도 잔잔히 들린다. 속도를 높여 지나가는 자동차 경적마저도 볼륨을 낮춘 배경음악으로 들린다. 나는 화알짝 핀 벚꽃나무 아래서 얘기를 듣고 있다. 강의를 듣고 있다. 아니, 나무 아래가 아니어도 좋다. 답답한 강의실이어도 상관없다. 밥시간을 넘긴 상태라도 좋다. 노교수님의 강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숨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숨을 안 쉬는 줄도 모른 채 강의에 빠져 있다. 문학이론 강의가 봄날 만개한 벚꽃처럼 따사로울 수 있구나. 마지막 한 장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있구나.

  이런 강의라면 새벽이라도 한밤중이라도 꼿꼿하게 들을 수 있겠다. 흥미롭고 의미 있으며 무엇보다 쉽다. 테리 이글턴은 문학이론에 대해, 비평을 한다는 것에 어렵지 않게 접근하며 자연스레 그 방식에 몰입하게 한다. 테리 이글턴이 누구던가. 세상에,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대가아닌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라면 그 이론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개념과 용어의 이해의 문제로 일단 한발짝 물러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서를 읽기 전엔 준비, 땅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편안한 문체와 쉬운 설명으로 저자의 책뿐만 아니라 문학을 읽는다는 즐거움이 배가가 되었다.

 문학을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어쩌면 생각없이 읽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면 대부분 한마디로 말하거나 한마디만 하기를 요청받는다. “재밌어?” 그 말 외에 다른 말을 하고 싶지만 들어주는 이가 없고 들어주는 이가 있을 땐 그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래서, 결론은?”

  ‘재미있다, 없다’의 결론을 내기 위해 우리는 문학책을 읽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재미있는 이유와 재미없는 이유를 ‘말하고 싶은데’ 결론과 줄거리만 말하라하니 의도와는 다른 형태로 귀결되어 버린다. 문학을 읽는다는 즐거움, 설렘이 한 단어 속에 묻히고 마는 것, 판매부수 속에 감춰지고 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더 나아가 나의 문학을 읽는 방식이 단순해서 반대로 갈피없이 제각각이라서 재미를 놓친다면 그것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어쩜, 저자의 말대로 어조와 분위기, 속도, 장르, 구문, 문법, 문장구성, 리듬, 서사 구조, 구두점, 다의성과 같은 “형식”적인 요소에 대한 주의 깊은 독서에 대한 욕구가 있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이끌어갈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형식에 대해서조 주의깊은 독서가 필요하다고 하는 저자는 도입부, 인물, 서사, 해석, 가치로 나누어 문학을 읽는 방법에 대해 얘기한다.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옳고 그름과 정답이 없는 것이므로 자신 또한 거침없이 여러 비평을 했고 어떤 경우에는, 토머스 하디의 『무명의 주드』의 경우에는, 여주인공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지도 모른다고까지 한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인지 저자의 해석들은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감탄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접근할 수 있구나, 여기에 어떻게 대응하지? 이런 식으로 읽는다면 모든 책들이 지루할 틈없이 환상의 롤러코스트를 타는 기분이겠다.

 기분은 환상의 롤러코스트를 타겠지만, 저자는 문학을 읽는 것은 섬세한 읽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섬세한 감식력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즐겁게 읽는 것은 실제 작품을 자의적으로 난도질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생각없이, 이유없이 오독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작품이 문장이 가진 아이러니를 잘 감별해 내고 의미를 표현하는 형식적인 방법을 잘 감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냥 동떨어진 해석으로 홀로이 즐겁다고 깔깔깔 거리는 것과는 명백히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도입부를 읽을 땐 어조나 구문, 아니러니, 상징, 리듬 등등에 더욱 주의해서 살펴보고 인물들이 지닌 성격, “캐릭터”의 특성을 잘 감지해야 한다. 인물에 감정이입하여 인물에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적당한 거리도 필요하다. 한 작품 속엔 다양한 인물들이 그만의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으니 말이다. 해석이라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문학작품의 해석은 텍스트의 의미에 입각해서 이끌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의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은 책을 처음 읽었을 때와 두세번 읽었을 때 해석이 달랐던 경험을 통해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는 문학을 읽는 것에 대해 ‘가치’에 대해 말한다. 위대한 가치를 지닌 작품은 무엇이며 불변의 가치라는 것이 있는가? 그에 대해 어떤 비평가는 독창성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여러 면에서 의혹을 제기하기 충분하다. 일단 새롭다는 것이 무조건 가치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또 어떤 비평가는 문학적 고전을 변함없는 가치를 지닌 작품이라기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어쨌든 누군가가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를 한다면 그것은 실제적이기보다는 명목상의 판단에 가까운 것이다. 또한 문학작품을 즐기는 것과 경탄하는 것은 다르다는 점에서 즐거움을 가치로 삼는다면 가치에 대한 견해는 또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가치에 대한 부분도 어쩌면 상대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탁월함으로 간주되는 것을 결정하는 데에는 기준이 있다는 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 기준은 공적인 것이고 개인의 우연적인 사적 선호의 문제가 아니다. 기준이란 가치를 판단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이며 아마도 이 기준을 배우기 위해 다양한 경험과 실질적 지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많은 책을 읽으며 거듭 문학 비평을 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문학을 어떻게 읽을 지에 대해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나 아마도 기본적인 것에 그 중요성이 있는 것처럼 제일 중요한 것을 알려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대로 실제 작품을 분석하여 예를 들고 있는데 이론과 실제가 잘 조화되어 영양도 골고루 갖추고 맛도 탁월하며 식감도 좋은 아주 풍부한 식사를 한 느낌이다. 저자가 사례를 든 책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놓친 것이 무엇이었나를 섬세한 감식력으로 쫓아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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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감 -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덕후’의 세계에 들어가려는 이들에게



  우선, 덕후감이라니. 언젠가부터 폭발하고 있는 덕후의 세계에 관한 책일까. 이와 같이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면 저자에게 제대로 낚였다. 저자는 제목인 덕후감에 대해 ‘독후감’의 고의적 오기이며 ‘덕후의 감'의 줄임말이라 말한다. 조금 늘여 말한다면 덕이 후한 감상문이다. 덕이 후한 감상문이라고 말랑말랑한 글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저자는 대중문화에 관해서도 거기에서 드러나는 역사적 쟁점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의 덕후감이란 오타쿠 비평이 아니라, 대중문화 속에 투영된 현실의 모습과 소망을 정치경제적적 맥락과 역사적 의미를 더해 분석한 책이다.

  이를 테면 걸그룹의 출현과 함께 튀어나온 삼촌팬의 등장에 소비적으로 보거나 롤리타로 퇴행으로 보는 상황에서 왜 ‘삼촌’인가에 주목한다. 이 삼촌이란 지칭에는 걸그룹 스타에 대한 이성애적 욕망의 금기를 은연중 상기시키고 있는데 실제로 삼촌팬들 중에서는 걸그룹의 노랫말에서처럼 ‘오빠’에 더 열광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럼에도 ‘삼촌’이라는 지칭은 걸그룹에 대한 성적관계와 거리를 유지하려는 가족적 친밀성을 더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략이 패권주의적 남성성의 사회에서 벗어난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남성성으로까지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을 비하했다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식으로까지 번졌던 박재범 사태가 있다. 명명백백하고 급박하게 여기에 전개된 시선은, 애국주의였다. 한국에 대한 비평에 관대하지 못하며 다시금 대한민국 국민의 애국심과 애국주의가 얼마나 깊고 강한지를 표하는 것으로서 이 모든 것은 논의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과연 애국주의였을까에 의구심을 표한다. 이 사건은 적확하게 보건대 문화적인 차이나 오역의 문제, 또다른 이해가 대립된 사건이었고 애국주의 이전에 ‘평등주의에 대한 요구’가 있다고 말한다. 디워, 유승준, 황우석 등등도 애국주의로 대표되는 사건들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들릴 것이다.

   “지배권력으로부터 핍박받는 가상의 마이너리티에 대한 동일시와 ‘다 해 처먹는 꼴불견’에 대한 박탈감과 분노 등은 분명 평등주의적 정서와 일맥상통한다(p139)”라고.

  애국주의와 뗄 수 없는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한번 보자. 저자는 숭례문 방화 사건을 예로 든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서 “민족적 자존심의 붕괴를 투영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건 전에 민족적 동질성은 붕괴되었고 그것은 관념적이고 상상적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파악해야 할 것은 국가, 행정당국의 무능력이다. 그리고 이 무능력이 민족-국가라는 신화를 종결시켰다고 말한다. 숭례문 방화 사건은 일견 한 개인의 행동으로 분노와 증오범죄라 하지만 개인의 증오와 분노의 대상을 민족적 상징물로 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배제에 대한 테러이며 소멸되지 않는 이데올로기를 드러내 준다고 말한다.

  혼혈인 하인스 워드의 한국 방문과 이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는 결국 일회적인 것처럼 보인다. 분명 그것을 계기로 다문화주의와 사회통합 논리가 확산되었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이 다문화주의에 대해 피로감과 적대적 감정을 노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논리는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간과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내재하고 있는 것일 지도.

 대중문화가 우리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저자의 대중문화를 읽는 코드는 분명하다. 그는 대중문화를 해리포터의 ‘소망의 거울’에 비유하는데 거울이 주는 환희에서 벗어나 거울과 나의 관계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며 이를 바라본다. 여기에 분명 정답은 없다. 옳고 그름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무언가에 대해 논의하는 장이 적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다양한 시각이 공존하고 그 시각이 논의 속에서 자유롭게 전개되고 개진될 때 세상은 더욱 발전해 갈 것이다. 문제를 파악하는 눈이 더욱 많아지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정보사회의 발달과 개인 블로그 등의 활성화로 논의의 장은 늘어난 것 같지만 논의다운 논의의 '장'은 옅어진 것 같다. 분명 어떤 방향으로의 이야기, 어떤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통제되고 억압되고 있기도 하고 또한 너무 격해져서 부러 논의를 회피하기도 한다. 오히려 이야기가 생각이 줄어들고 있는 세상이 되고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만, 대체로 언론이겠다 싶지만, 계속 들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우리는 너무나 통제에 짓눌려 있고 소위 '전문가'라는 권위에 짓눌려 있기(물론 전문가에 대한 존중때문이기도 하다만) 때문에 내 '시각'을 떨치지 못한다.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하지만 한번씩 이건 왜 이렇지? 저건 왜 그렇지? 이런 의문을 가지고 궁금해 하고 생각해 보았던 면들을 저자의 글에서 맞닥뜨릴 것이다. 단지 그 의문에서 깊게 들어가지 않았을 뿐일 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세상이 너무나 한편으로만 몰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는 경우이다. 어떤 현상이 나타날 때 그것에 대해 분석하고 해석하고 이유를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특정한 이데올로기로, 특정한 이익을 대변하여, 특정한 권력에 의해 한쪽으로만 치우지고 당연 그래야 한다고 논의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에 지극한 피로감과 답답함을 느끼는 이들이여. 누구는 음모론이라 할 지 모르나 어쩌면 명확한 예리함일 수도 있다. 마녀사냥처럼 일순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논의들 속에 의문을 느낀다면, '어 저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전문가가 그렇다고 다수가 그렇다고 얘기함에도 모호함이 느껴진다면, 한번쯤 만들어보자. 내 식으로의 사회를,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방식을. 그리고 어떻게 발을 떼야 할 지 모르겠다면, 한번 덕후의 감을 느껴봐라. 분명 내가 느꼈던 거야라는 생각에 반가움이 느껴질 것이다. 곧 또다른 이들의 덕후감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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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 '저 너머'를 향한 대담한 탐험

 

지그문트 바우만, 오월의 봄, 2016. 2.

 

 

  무엇의 영향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얘기된다. 한발 더 나아가 지독히도 금기시되어야 하는 단어이기도 하고 또한 여전히 수많은 부정의 언어가 달리고 있다. 유럽에서는 사회주의와 유토피아가 동일선상에서 이야기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우리나라의 특징일 것이다.

  정통적인 사회주의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회주의를 무조건 찬양하지 않으며 항상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며 사회주의를 말해 왔다. 우리가 꿈꾸는, 희망하는 유토피아는 어떤 세상일까. 

 

 


엔첸스베르거의 판옵티콘-세상의 기괴함에 관한 스무 주제의 10분에세이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오롯, 2016. 2.

 




  “80의 노작가가 보는 사회

 

 세계의 위선과 어리석음에 대한 풍자. 

 이러한 풍자는, 특히 정치에 대한 풍자는 지금 현실에서 어렵다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풍자가 가득한 책들에 대한 매력은 더욱 다가온다. 

 저80의 노작가가 자본과 정치권력 속의 사회를 돌아보며 써내려간 에세이로 판옵티콘하면 떠오르는 감옥의 이미지가 글 속에서 어떻게 녹아나올지 궁금하다.

 

 

 

 

멀고도 가까운-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반비, 이후, 2016. 2.

 


  쉽고 편안하게 글을 쓰는 리베카 솔닛의 이야기다. 특정 주제에 대한 논쟁이기보다는 다양한 것들에 대한 저자의 시선이 주를 이루는 에세이로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나 할까.

 

 동일한듯 하면서도 삶에서 겪는 일들에 대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다르듯 리베카 솔닛의 시선은 고독과 연대, 질병과 돌봄, 삶과 죽음 등에 대해 어떻게 다를까.

 출판사는 이 책에 대해 이야기의 힘이라고 강조하다. 전체적인 주제가 '이야기'라고. 그렇다면 편안하게 리베카 솔닛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리베카 솔닛의 이야기는 논쟁마저도 일상의 이야기속에 녹여 내어 충분히 생각하게 하고 적확하게 문제를 집어내는 탁월함이 있으니까.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낸시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과 논쟁들

 

낸시 프레이저 외, 그린비, 2016. 2.

 

 

  사회가 어떤 형태이든 그나름의 '정의'를 주장한다. '정의'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정의와 그 적용방식이 다르다. 정의에 대한 탁월한 이론가 낸시 프레이저가 바라보는 정의와 그에 관한 논쟁들은 어떨까.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정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자의적인 정의가 넘쳐 그들의 정의가 넘쳐나는 이때에 올곧은 정의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하고 싶다.

 이 무지막지한 불평등과 모욕의 시대에 무지막지한 불평등과 모욕의 주체들의 정의가 정의로 굳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그들의 주장에 냉철하고 차분히 반박할 수 있는 정의를 알기 위하여.


 

 

 

반 고흐의 태양, 해바라기- 걸작의 탄생과 컬렉션의 여정

 

마틴 베일리, 아트북스, 2016. 2.

 

 

 봄이 오고 있으니, 꽃이 생각나는 계절.

 고흐라는 화가의 개인의 남다른 삶 때문에 그가 더욱 조명되기도 하고 또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고흐에 대한 찬양이 넘치는 것이 일제강점기 일제의 영향이라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다. 어떤 형태로든 고흐의 저작이나 그의 개인적 삶이 여러 측면으로 부각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외부적인 요인때문인지 어떤지 고흐에 대해 그의 작품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또한 아닌 듯도 하다. 고흐 연구에 집중한 저자가 고흐의 작품의 탠생 과정에 대해 기록한 이 책은 고흐에게 집중하게 해줄까, 고흐의 작품에 집중하게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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