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앓다 - 문학은 상처에서 출발하고 상처 위에 존재한다 민음의 비평 5
강유정 지음 / 민음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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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의 상처


타인을 앓다, 강유정, 민음사, 2016.


  타인을 앓는 일은, 불쑥 일어난다. 의도하지 않음에도 들이닥치는 감정의 풍랑이다. 그것은 오래도록 가슴에 머물러 종내는 머리를 지배하기도 한다. 가령 외벽 작업 중 사망한 가장의 다섯 아이와 아내, 노모를 향한 모금 행동도 타인을 앓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고인과 남겨진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일은 ‘정’이 많아 일컬어지는 한국인들에게는 더러 볼 수 있는 일인 듯하다. 어쨌든, 그렇다면 이처럼 타인을 앓는다는 것은 사회를 살아가는데 꽤나 중요한 힘이다.

  평론은 문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그냥 그 자체로 서 있다. 대체로 서두에 시작하는 온갖 학자들의 명언이나 문구들을 보면 늘 특정한 이의 이름과 문구가 인용되고 평론들 마다마다에 사용된다. 그러니, 문학을 읽는 방법이 학자나 타인의 문구를 통한 해설이 되어 평론은 문학을 매개로 한 비평가들의 세계로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도 제법의 학자들을 평론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비평이 준 장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평론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언어의 틀은, 오히려 소설 또는 시에 대한 이해를 저 멀리로 보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굳이 비평집을 찾아 읽은 것은 오로지 제목 [타인을 앓다] 때문이다.

  이 제목에서 전하는 바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라 여겼기에 어떤 학자들의 말들이 줄줄줄 이어진대도 견디어 볼 수 있다 생각했는데 굳이 견딜 필요가 없었다. 쉽고 평이하게 소설들을 비평하고 있어서 저자가 말하는 관점에 유의해서 소설을 생각해보는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이 비평집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문학과 사회비평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재미는 무엇인지, 당대 소설의 주요 서사 소재지, 출판시장의 기획형 상품, 청소년 소설 장르란 무엇인지, S.F라는 장르 등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과 의견을 건넨다. 2부는 2000년대 이후의 작품을 중심으로 비평을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비평을 확인할 수 있다.

  31편의 평론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바탕은 제목이 함의하고 있는 것처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다. 생각해보면 어떤 소설을 읽었을 때 ‘좋다, 재미있다’를 적극적으로 말할 때는 등장인물, 특히 주인공에게 공감했을 때이다. 인물에 공감하지 못하면 소설에 대한 평가가 박해지는 듯하다. 책제목이 [타인을 앓다]인 것에 대해 저자 강유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인을 앓는 것, 문학을 읽는 것과 문학을 하는 것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타인을 앓는 것, 깊은 공감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 그게 바로 미련하지만 두터운 문학의 길일 것이다. 이해하고자 애쓰는 내가 먼 곳의 다른 고통과 소통하는 초월적 인식의 공간, 그게 바로 문학의 공간이다.


  문학의 공간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점은 수용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설속 세계는 현실의 반영이라 아무리 외면하고픈 사건의 연속일지라도 무엇 하나라도 이해의 고리를 발견하고픈 욕구가 있다. 저자는 최근의 젊은 작가들에게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성적 도덕’이란 동시대성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근현대사의 흐름에 문학은 그 궤를 같이 했다. 그 역사를 증언하고 기록하는 것을 넘어 알지 못했던 이들의 사연들을 재현하며 소설속 인물이나 그것을 읽는 독자 모두 상처를 치유하기를, 고통을 내 고통처럼 여기기를 바라는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위한 소설은 기존과는 다른 플롯과 서술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대정신의 구현’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나’라는 특정한 소설적 주체가 아닌 불투명한 타인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공감하는 자가 타인을 앓는 윤리적 작가이고 시대의 보편적 감정을 목격하고 재현하는 것이 바로 지금, 여기 소설의 존재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의 보편적 감정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이 필요하다. 저자는 최근 젊은 작가들의 소설이 “그냥”이라는 단어 사용과 인물이 추상적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인물의 직업도 명확하지 않다는 이 상황을 20대의 독특한 세대적 고민이거나 서사적 관점의 부재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이들의 소설에서는 부정과 무위와 냉소와 욕망의 부재가 자리잡고 있다고 파악한다.

  최근의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의 관점이 없다는 것이 소설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50년대 소설 속 인물들은 한국 전쟁과 절대적 가난, 1960년대 대학생들은 4·19 세대의 정서적 박탈감과 가난, 1980년대는 민주화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2000년대 이후의 20대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면들을 발견할 수 없다. 마냥 사용되는 “그냥”과 “습관”이라는 방관의 태도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어떠한 ‘정신’ ‘상처’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작가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 된다. 작가들에게 동시대의 상처없음이 결핍이 된다. 왜냐하면 문학은 타인을 공감하는 것,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상처’가 필요하니 말이다. 2000년대 이후의 동시대가 경험하는 상처의 부재가 작가들에게는 긍정의 요소가 될 수 없음이다.


문학은 상처를 필요로 한다(2007년 젊은 작가 대회에서 한유주는 자기 세대의 특징으로 거대 담론, 대문자로 기록된 역사적 상처의 부재를 꼽았다. 그는 공통의 상처가 없는 세대에게, 9·11 테러는 신선한 시적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고백을 덧붙였다). 중심의 상처가 부재하다는 사실에 가벼움의 향락을 느낄 것이라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이들은 환부 없는 상처의 곤란을 증언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공통의 상처를 기억하게 된 것인지 모른다. 세월호라는 상처, 그리고 촛불혁명이라는 벅찬 불빛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상처…. 그러니 이제 동시대가 함께 느끼는 상처를 가졌으니,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기대해도 좋으련가.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문학은 상처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공감한다. 상처를 어떻게 풀어가는가는 작가의 역할이다. 거기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이라는 바탕이 흐른다면 읽는 독자는 더없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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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의 깨달음


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문학동네, 2017.


  랄프 로렌이 의류 브랜드라는 걸 몰랐다. 당연 창시자도 몰랐기에 디어 랄프 로렌의 “디어” 또한 “dear”인지 몰랐다. 작가의 단편집 『그들에게 린디합을』에 대한 인상으로 이 소설을 잡았을 땐, 오로지 손보미라는 작가에 기댄 선택이었다.

  단편의 느낌과 비슷한 느낌도 있었는데 이국적 이미지였다. 작가의 작품에서 분위기나 서술톤에서 번역투라고 해야 할 지, 외국 작가의 느낌이랄지, 그런 이미지를 더러 느꼈는데 이번 장편 소설은 아예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그곳의 등장인물의 삶을 쫒고 있다. 단지 배경만, 그러니까 장소만 옮긴 한국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랄프 로렌의 이야기는 실존인물과 오버랩되면서 그의 생애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기에 얼마만큼의 진실과 허구가 섞인지 모른 채, 우선은 작가가 찾아가는 랄프 로렌과 조셉 프랭클의 인생사가 진실인 것처럼 여겼다.

  유학생활 9년차의 종수는 지도교수로부터 퇴출 통보를 받고 서랍을 부수던 중 교교시절 같은 반 수영의 청첩장을 발견한다. “디어 종수, 나는 아주 잘 지내. 곧 결혼식을 올릴 거야. 나는 무척 행복해. 너도 잘 지내길 바란다.” 왜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그들 사이가 어땠는지

지난 기억을 떠올려보니 수영과는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쓰는 일로 함께 한 시절이 있었다. 수영은 랄프 로렌에게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편지를 쓰고자 했고 종수에게 영역해 달라 부탁했던 것이다. 그해 수영과 종수는 함께 만나 얘기를 나누었지만 수영이 편지를 부쳤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그해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만났던 그땐 이미 랄프 로렌은 사망한 후였고 종수는 미국에 머물며 랄프 로렌을 찾아나서게 된다.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는 과정에 랄프 로렌을 아들처럼 키운 시계공이자 권투 선수 조셉 프랭클, 조셉 프랭클의 이웃 백네살 레이첼 잭슨, 레이첼 잭슨의 입주 간호사 새넌 헤이스를 만난다. 그렇게 랄프 로렌의 생애를 쫓으며 그가 왜 시계를 만들지 않았는지, 랄프 로렌과 조셉 프랭클이 숨긴, 수수께끼 같은 고리들을 계속 찾는다.

  타인의 인생을 쫒는 일이 지루한 궤적으로 흘러가리라 생각지 못했다. 어쩌면 큰 ‘사건’을 파헤치고자 하는 일념으로 타인의 생을 까발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듯 여겨졌다.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교차되는 수많은 서술의 흐름 속에서 랄프 로렌의 이야기를 뒤쫓는 ‘종수’의 속내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닐까 했다. 그만큼, 종수는 왜 랄프 로렌의 이야기를 찾으려 하는지, 보다 치밀하고 열성적인 것도 아니면서 그때 그때 생각의 조각들을 맞추어 가면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하노라면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종수’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과 종수처럼 살고 있지 못하다라는 상반된 생각이 올라온다.

  전자는 종수에게서 목표한 것에 도달하지 못해 밀려난 느낌을 갖는 이의 방황과 자조적인 모습을 본 것이었다. 후자는 어떤 기억에 의지해 타인의 삶을 탐색하는 여정을 하는 이는 얼마나 많은가란 생각이었다. 그만큼 종수는 나약한 듯 의지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랄프 로렌의 삶을 쫒는 건 종수에게 지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무력한 상태의 자신을 벗어나기 위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나를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 길 위에서의 깨달음 같은. 순례자 같은.

  궁금해 한 랄프 로렌의 삶의 부분을 명확히 알아내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최종적으로 랄프 로렌의 행적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이 소설에서 수수께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 수수께끼가 목적이 아닌, 종수의 이야기.


삶이 축제는 아닐지언정, 그게 자신을 지치게 하더라도, 계속 끌고 나가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잭슨 여사는 자신의 삶을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움직이게‘ 만들었다.


  동화 파랑새처럼 길의 이야기, 여정의 이야기라면 수영의 편지는, 종수에게 무엇이 될까. 오랫동안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아닐까. 그 기억 속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미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을 기억한 종수의 이야기. 그렇게 사람과 사람을 만나,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종수의 이야기. 마침내 기억한 “디어”라는 단어에 깃든 말. 그것이 종수가 찾고자 하는 것, 찾아낸 것이었다.


디어, 는 다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인 것처럼 느껴져. 아주 친밀하고 따뜻해.


  또하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혔다. 헤밍웨이가 쓴다는 것이 고독한 삶이라고 한 말을 인용한 프롤로그에서부터 시작하면서 종수가 랄프 로렌의 삶을 뒤쫒는 과정에서 자신을 작가라고 지칭하듯이 이것은 고독한 글쓰기의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구나. 매일 불평불만을 늘어놓지만 매일 쓰게 되는 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토록 늘어놓는 불평불만은 누군가의 삶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기 위한 서투른 표현이라는 것. 그렇게 글쓰기는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들을 친밀하고 따스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라는 것을.


살아 있는 사람들은 부고를 통해 죽은 사람에 대한 모든 감정―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을 간결하고 우아하고 진실된 문장으로 ‘공식적으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이모가 죽은 후에 어머니가 왜 그토록 그녀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죽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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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14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흥미롭네요.

이방인이 미국에서 랄프 로렌의
흔적을 좇는 이야기가 말이죠.

모시빛 2017-06-16 00:05   좋아요 0 | URL
뜬금없이 사제폭탄을 만든 대학원생이 연상됐어요.....종수도 교수님께 퇴출 통보를 받고 서랍을 부수는 과격(?)한 행동을 했지요. 그리고 기억의 매개물을 쫓아 랄프 로렌을 쫒는 참 서정적인 여행을 하는데.......역시 소설과 현실은 다르구나란 생각이...교수님 꾸지람에 한달전부터 폭탄 계획을 세웠다는 대학원생 때문에 책을 읽은 뒤에 오히려 더 종수가 기억이 나네요.
 

클리셰의 KO승


스파링, 도선우, 문학동네, 2016.12.21.

  문학동네소설상 수장작인 『스파링』은 책을 읽는 중중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 가만 보니  클리셰로 가득하다. 그렇기에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 작가의 서술톤은 클리셰 가득한 일들을 이끌어 가는데 시종일관 담담하고 차분하다. 언뜻 도덕교과서 같은 이야기도 많다. 그런데, 이 익숙한 클리셰를 가만 들여다보니 이 이야기는 결국 그렇게 흘러 갈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이 『스파링』속 세계, 클리셰는 우리에게 늘 익숙한 권력과 자본이었다. 그러니 그것이 움직임이 예측가능한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가 진부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그토록 경직되어 있다는 이야기와도 같을 것이다.

  실제, 어떻게 될지 모를 장태주의 삶이 처음부터, 시작부터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났기에 어떤 삶의 궤적인 좀 다를까 했건만, 이것은 이야기이지만 삶이니까. 이 대한민국에서 공중화장실에 버려진 어린 아이의 삶이 전형적인 권력과 자본에 의해 비틀리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저 응원이고 바램일 뿐이지, 실상은 그렇지 않으리란 걸 안다. 그러니 우리의 소년 ‘장태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소년’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모든 일을 겪은 후에야 서술되는 형태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장태주의 어조는 시종일관 아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초등학생, 이제 중학생인 소년 장태주의 행동과 언어는 이미 세파에 시달린 어른의 목소리와 같았다. 맞닥뜨리는 일들에 모두, 한단계 초월한 듯한 반응을 보이는 장태주의 목소리는 그렇기에 애잔함이 가득하다.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의 장태주는 참 사랑스러워보였다. 이해를 품고 달리는 아이의 목소리였기에. 열일곱살 미혼모의 행동에서의 아기 버림을 충분히 이해하는 태주는, 소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이 공중화장실에 버려진 것을 흥미롭게 이야기하는 장태주로 인해 어린 장태주에 대한 연민이 깊어진다.

  하지만 보육원과 학교에서의 장태주의 삶은 어떤가. 세상에 대해 ‘이해’를 품으려 해도 세상이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의 모두에게 ‘장태주’라는 한 사람으로서의 인격은 사라지고 보육원 아이라는 이미지로만 장태주를 소비한다. 그것이 이 부정의한 세상이 보육원 아이 ‘장태주’를 대하는 방식이고 클리셰다. 어린 아이를 향한 매서운 세상의 논리, 아이조차도 부모의 논리를 그대로 되뇌며 제 친구를 억압하고 업신여기는 모습을 보면 경악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생각한다. 아, 그렇다. 이 나라 대한민국의 부모들의 행태가 그렇더라. 제 아이만 잘나고 멋있는 줄 알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다는 것. 아이들을 위한 동화는 없다. 일찍이 어린 왕자가 말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고.


그게 이곳의 질서다. 질서라는 건 한 번 만들어지면 여간해서는 무너지지 않는다. 종종 그 질서에 불만을 갖고 무너뜨리려는 인간들이 생기기는 해도 질서라는 건 본래 레고 블록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하나를 이룬 거라서, 몇몇 반골들이 자기들 뜻과 맞지 않는다고 지랄들을 떨어봐야 결국 무너지는 건 자기들이지 질서가 아니다.


  불행하게도 장태주의 삶은 어른들의 최악이 행동패턴을 그대로 따르는 또래의 아이들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제가 살아갈 세상에 어른의 힘과 논리를 가져와 또래들을 억압하고 우위에 선다. 아니, 이 세상의 논리는 그렇다. 돈과 힘. 돈없고 부모없는 아이가 겪을 수밖에 없는 모든 불운을 끌어안고 세상을 헤쳐가던 장태주에게 한줄기 빛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동 능력과 소년원에서 만난 공선생과 그 가족들이다.

  비참한 삶에서 응원해주고 위로해주는 내 편을 만난다는 것은 새 삶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어린 장태주의 삶은 그들로 인해 달라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전한 클리셰가 진행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장태주에게 가족이자 권투를 가르쳐 주는 소년원 담임과, 담임의 부인, 담임의 장인은 이 이야기 속에서 시종일관 ‘도덕 교과서’의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장태주가 견뎌온 이 세상의 구조와는 한발짝 떨어진 채로 그 제도와 맞서며 끊임없이 사회정의에 대해 부르짖고 그러한 삶을 실천해가는 이들이다. 그리고 여기서 권투는 상식적이고 공정한 규칙의 세계를 가르키는 방식이 된다. 그들은 권투 기술이라는 실질적인 운동을 가르침과 동시에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 이러한 타당한 규칙의 기술을 장태주에게 전수해 주는 것이다.


살아가며 저돌적으로 인파이팅한 기억을 갖지 못하면, 언젠가 부딪히게 될 현실의 무게에 놀라 도망만 다니게 될 수도 있거든. 그래선 그 현실을 극복할 수도 없고 스스로를 증명할 수도 없으니까 살아가며 한 번쯤은, 모든 걸 다 걸고 정면승부를 겨뤄봐야 할 필요가 있어.


  상식적으로 공정이 불공정하고 맞붙으면 공정이 승리해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고 상식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바르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규칙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게 이 세상이라는 것만 잊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자조를 배우며 살아야 한다는 게 슬프고 어이없지만, 결국 알게 된다. 이 세상은 수많은 일진들이 둘러싼 세계라는 것을. 일진, 그들만의 끈, 그들만의 논리, 그들의 폭력. 그것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정의는 오히려 정의를 바라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세계를 살아가기 더 편한 인간들에게 훨씬 유용한 가치이자 신념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나는 천천히 깨달아온 셈이었다.


  또한번 이 세상의 클리셰와 맞선, 파이팅하며 끊임없이 스파링하던 이들의 세계가 무너졌다. 위와 같은 말을 내뱉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갈 장태주를 이 세상은 얼마나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 탁월한 기술과 담임과 스승이 가르쳐 준 규칙으로 멋지게 KO승을 해주기를 바랐건만, 사랑하는 모든 이를 잃은 장태규의 절규만 들려온다. 


  내가 당신들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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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공터에서, 김훈, 해냄, 2017.

 

  메말라 운동장이 된 못과 하천을 눈으로 보고 놀랐다. 그 변화의 차가 너무나 커서 제 본래의 이름, 못이나 내라는 치름을 찾을까 싶을 정도였다. 비가 내리니 그 메마른 땅을 적시고 있겠지. 조금 더 세차게 내리기를. 저 달아오른 지붕에도, 폐허같은 저 공터에도.

  폐허의 터인 가정에도 단비가, 내리기를.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를 살아간 마씨(馬氏) 집안의 가계도에서 느껴지는 공허와 슬픔, 아픔, 분노의 모든 것들에 내리는 단비. 어쩌면 상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공터에서>는 그 무대가 넓고 역사가 길다. 가장 마동수를 중심으로 한 장남과 차남의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다. 그 모든 사건들은 이들에게 배경이 아닌 현실로 나타난다. 그러니, 일제시대 만주의 길림, 장춘, 상해를 오간 마동수로부터 6.25를 지나, 베트남전에 참전한 후 괌에서 돌아오려 하지 않는 장남 마장세, 언론통폐합 사건으로 신문기자 일을 할 수 없게 된 가난한 마차세의 이야기는 남일처럼이 아니라 남일같지가 않은 이야기가 된다. 이 시기의 모든 사건들. 굴곡진 사건들에서 결코  비켜갈 수 없었던 이들은 그 벗어날 수 없는 사건으로 삶의 질곡을 겪으며 인생을 살아나간다. 쉽게 떨쳐 내지 못할 기억을, 상처를 만들며 맴도는 사건들이 개인을 한 가정을 차분하게 피폐함속으로 이끄는 동안, 헤쳐 나갈 수 있는 올곧은 정신은 형성될 수 있는 건가.


너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무슨 헛것이 씌었는지 도통 밖으로만 싸지르고 두어 달에 한 번씩 집에 오는데, 왜 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 인간하고 살을 섞고 살아서 너희들을 내지른 세월을 생각하면 내 가슴에서 벌레가 끓고 들불이 인다. 너는 힘들고 쓸쓸하면 너보다 더 쓸쓸한 이 어미를 생각해라.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의 전부다. p170


  어쩌면 이 모든 굴곡진 이야기의 근원이 누가 만들어내는지 모르는 근현대사의 ‘사건’들인 것처럼 마동수의 가정에 드리운 음산함의 이유는 ‘마동수’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 사건들을 함께 겪으며 그 역사 속에서 마동수는 끝끝내 제대로 서지 못하고 늘 회오리치기만 한다. 방어막이 되어 주지 못하고, 되려 하지 않은 채 거듭 흔들리고 방황하는 마동수와 함께 하는 삶은 마동수의 아내 이도순에게도 두 아이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안에서 겪는 ‘사건’이 된다. 그렇게 안팎으로 달려드는 무수한 사건들에 지쳐가는 상황에선 가장 힘든 존재가 ‘가족’이라는 존재다.          


1100고지 매복 진지에서 아버지, 어머니, 형은 멀어서 닿을 수 없는 외계(外界)의 환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먼 존재들은 군화 속에서, 언 발가락은 아무런 감각도 없이 남의 물건처럼 멀었는데, 그 멀고 먼 발가락의 고통은 불로 지지듯이 달려들었다. 혈연은 1100고지의 발 시려움 같은 것이었는데, 휴가가 다가오면 그 혈연의 끈은 마차세를 더욱 바싹 조여왔다. p16


  마차세는 어린 시절 밖으로 더욱 떠도는 아버지가 오지 않는 이유보다 왜 집에 오는 것인지를 더 궁금해 했다. 마장세는 늘 아버지가 삶의 외곽을 겉돌고 있다 여겼다. 두 아들에게 아버지의 삶은 뚜렷이 슬퍼할 것도 그렇다고 마냥 홀가분해지지도 않을 상흔을 주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 잔잔한 보잘것없음으로 두 아들의 생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나라의 역사는, 정책은 한 가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 가정의 가장의 역사는 그 자식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삶의 구조속에서 또 어쩌면, 그토록 틀은 정해져 있었을까. 방황하고 피폐하게 권위만을 내세우는 가장이 있고 가정을 꾸리며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살아내는 모성이 있으며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하나 결국 닮은 모습으로 생을 살고 있는 자식들이라는 것. 이 벗어날 수 없는 도식, 이 도식을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개인이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이라는 사실은 매우 허망하지만 또 그 구조 속에서 기어코 답을 찾아내기도 한다. 닮은 듯 보이나 다른 마차세와 박상희의 삶이 그렇다. 아버지 마동수와 어머니의 모습에서 가정이라는 것의 허망함과 그 무력을 발견했을 것도 같건만 끝내 ‘결혼’이라는 희망을 붙들려 한 마차세. 그에게 결혼이란 ‘막막한 세상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의 의미였다. 그렇게 결혼 속으로 들어간 마차세의 삶은, 마장세의 삶과 달랐나. 결혼이 답이었던가. 그 상대가 ‘박상희’가 아니었다면 마차세에게 결혼이 거점이 될 수 있었을까.

  세상의 모든 막막함과 마차세에게 드리운 이 공허함을 세밀하게 안아준 박상희가 있었기에 마차세는 마동수의 삶도 마장세의 삶도 아닌 박상희와 함께 하는 마차세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마씨네 가계에 발들 들인 박상희의 힘은 경이롭다. 그것은 마냥 마동수의 아내 이도순의 삶처럼 참고 참는 삶과는 조금은 다르다.

  어쩌면 이 ‘조금 다른’ 역할은 마차세가 바라는 ‘이상’으로 보이며 그렇기에 마차세에게는 ‘구원’의 여신과 같은 존재로 그려지는 것 같다. 이것이 아버지·어머니 세대의 ‘이도순’과 아들 세대 ‘박상희’의 결정적인 차이가 아닌가 한다. 비슷한 역할이 주어졌지만 그 역할을 빛나게 하는 것이 마차세의 인정이라는 점이다. 마차세의 재가를 득한 후에 박상희의 역할은 빛나고 있는 것이다. 마차세가 원하는 바에 맞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 힘을 얻는 박상희의 존재. 마차세에게 무엇을 재촉하지도 않으면서 마차세를 이해하는 폭과 깊이의 남다름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박상희의 역할이 이 전체의 소설에서 약간 이질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쨌든 마차세의 입장에서 박상희라는 존재는 단비이다. 또한 마차세와 마장세가 가지는 아버지에 대한 거리감과 죄책감의 내면을 생각해보도록 이끄는 역할이자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역할을 맡았다.  


제가 결혼한 직후에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젊었을 때 찍은 사진을 우연히 봤는데, 그 모습이 그때 태어나지 않은 두 아들과 똑 같았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저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모두 가엾어서 눈물겨웠습니다. p262

    

  이 개별적인 것 같으면서도 보편적인 세대의 이야기, 그러한 삶을 살았던 세대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눈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박상희’라는 진보적인 성향의 느낌을 지닌 인물의 목소리로, 시선으로.

  읽으면서는 마차세에게 연민을 느꼈는데, 왜 글은 박상희에게로 초점이 가게 되는지 모르겠다. 뒤늦게 들은 작가에 대한 논란 때문인지…. 열렬한 독자, 팬이 아니었기에 충격의 강도는 높지 않았는데 마씨 부자의 이야기에 왜 ‘박상희’만 기억에 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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홧김에


아주 친밀한 폭력 - 여성주의와 가정 폭력

정희진, 교양인, 2016-10-24.



  “아내 목 조른 남편 “징역 4년”… 납득 되나요?“

 기사를 보자 자동적으로 클릭한다. 몇몇 사건 판결을 두고 형량이 적당한지 설문조사한 결과에 관한 기사다. 대표적 보기 네 개를 본 순간, 제목에서부터 불편함을 느낀다.

 ①홧김에 아내 목 조른 A씨(징역 4년)

 ②함께 도박하던 이를 흉기로 찌른 B씨(징역 7년)

 ③내연녀의 남편을 살해한 C씨(징역 12년)

 ④한밤중 주거 침입 강도살인 D씨(징역 30년)


 ①번에 생략된 것은 “아내를 죽였다”, 첨가된 것은 “홧김에”.

  다른 사건들이 객관적인 사건을 서술했다면 ①번은 중요한 사항은 누락하고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심되는 ‘홧김’이라는 단어를 추가했다. 기사가 제대로 전달되려면 이 사건에 대한 것은, “아내 목 졸라 살해한”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다른 사건은 제쳐두고 ①번에 눈이 갔는데, 물론 법정 판결이 4년인데 그 이유가 홧김이니까 저렇게 썼다고 본다. 그런데 홧김이 과연 이유인가, 홧김은 살인자의 주장이 아닌가. 이 사건을 지배하는 것이 “홧김에”라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다.

  상습적인 구타와 폭력에 남편을 살해한 ‘아내들’ 사건의 경우 “계획적”이라는 말로 10년 이상이 확정된 사건을 너무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래, 그 순간엔 홧김일 수도 있겠다. 지극히 남편 혼자 주장하는 ‘홧김’. 그러나 ‘남편’ 자주, 상습적으로 ‘홧김’이 된다. 그렇다면 이 상습적인 ‘홧김’은 의도적인 것이 아닌가.

  “10대 딸 차로 치고, 별거 아내 강제 추행 `폭력남`...징역 3년”

  며칠 전 기사 때문에도 내재된 분노가 단지 이 폭력 남편때문만은 아님은 명백하다. 마침 그날의 기사는 딸을 성추행한 상담교사를 살해한 엄마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는 거였고, 그 살인은 계획적이라는 판단이 내려졌고, 무엇보다 법이라는 제도가 있음에도 ‘사적 복수’를 행하는 것이 용서할 수 없는 죄임을 명백히 했다. 

  그런데… 이 나라 법이 아내 폭력에 대해 안전망인 적이 있던가. 4년 넘게 별거한 아내도 이혼한 아내도 제 것인양 강간하고 죽일 권리를 행하는 이 사적인 화풀이의 행태는 수십년이 지나도 법적인 제제를 받지 않는가. 법의 권위는, 아내 폭력 사건에 관해서는 제 스스로 차버려도 좋은가. 그것이 또다른 체제를 위함인가.

  여기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은 현실에서 늘상 경험하는 일로 분노와 학습된 무력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또다시 현실을 깨우고, 이론적인 무장을 더해주는 책이다. 왜 ‘홧김’이라고 말하는지, 그럼에도 그것이 무방한 이유를 알려준다. 별거한 아내, 이혼한 아내에 대한 상습적이고 변태적인 행위를 해도 된다고 하는 남편의 이유를 알려준다.  

  놀라운 건, 이 책이 작가의 대학원 논문이었다는 글을 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책은 수십년 전의 사례라는 것이다. 사례자들이 30~40대 초반이 많았다. 남편의 나이도 그 또래라 생각하면 가해자들 역시 여전히 이 현실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수십년 전의 그 가해자들이 오늘날 사건의 또다른 주인공일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이 사례자들의 일들이 어제, 오늘, 지금 당장 벌어진 일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 주위를 둘러싼 공적 영역이나 사적 관계의 생각과 느낌들 모두가, 전혀, 옛날과 이어져 있듯이 그대로다. 페미니즘 때문에 여성인권이 높아졌느니 하며 불편한 시선을 던지다 못해 여혐이 확산되고 있는데, ‘아내’는 여성이 아닌가.

  아내 폭력이 당연시되는 여전한 현실을 접하며 작가는 이 아내 폭력의 문제는 당연하게도 사회가 부여하는 남편의 권리, 가부장제도가 당연시하는 권력의 문제라고 말한다.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관점에서 아내 폭력의 문제도 해결하는 형태로 접근하기에 폭력의 피해자인 ‘아내’에 대한 것이 전혀 없다. 폭력의 희생자를 가해자의 집안으로 고스란히 돌려보내는 이 관대한 법의 처사는 그 둘레에 “가부장제”가 내두르고 있는 힘이다. 가족유지. 왜 가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끔 한다. 그 가족은 누구를 위한 가족인지가 명백하다는 점, 오랜 동안 길들여진 이 가족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타당함, 아이들을 위해서, 아이 교육을 위해서 참는다는 아내들의 말, 그러나 가정폭력이 교육에 나쁘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작가의 말은 왜곡된 가족주의가 아내를 얼마나 억압하는가를 보여준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간단하다. 가정폭력이 아니라 ‘아내 폭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폭력의 해결 방안은 결코 ‘가족주의’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가족주의라는 개념에 ‘아내’의 인권은 없고 아내의 권리도 없고 오로지 타당하게 희생당할 요인들을 만들어 준다. 아주 기본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간이 모든 공동체에는 권력 관계와 갈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공동체는 없을 것이다. 가족을 인간이 만든 사회적 제도라고 인정한다면, 가족이라고 해서 권력 관계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며 그것은 다른 사회 조직도 마찬가지다. p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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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 2017-08-0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요즘 뉴스에 여성혐오범죄가 심심찮게 보도되더라고요. 그래서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찾아 보고 있는데 왜 진작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 반성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모시빛님의 리뷰를 보니 당장 읽고 싶어 지네요.

모시빛 2017-08-09 23:54   좋아요 0 | URL
정희진님의 글은 이론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쉽게 이해되는데 특히 이 책은 폭력을 다루고 있어서 더욱 절절하게 다가왔던 것 같네요. 우리나라의 정서와 상황에서 얘기되니까 좋구요. 물론 읽다 보면 사례들 때문에 마음이 무겁고 화나긴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