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희


공터에서, 김훈, 해냄, 2017.

 

  메말라 운동장이 된 못과 하천을 눈으로 보고 놀랐다. 그 변화의 차가 너무나 커서 제 본래의 이름, 못이나 내라는 치름을 찾을까 싶을 정도였다. 비가 내리니 그 메마른 땅을 적시고 있겠지. 조금 더 세차게 내리기를. 저 달아오른 지붕에도, 폐허같은 저 공터에도.

  폐허의 터인 가정에도 단비가, 내리기를.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를 살아간 마씨(馬氏) 집안의 가계도에서 느껴지는 공허와 슬픔, 아픔, 분노의 모든 것들에 내리는 단비. 어쩌면 상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공터에서>는 그 무대가 넓고 역사가 길다. 가장 마동수를 중심으로 한 장남과 차남의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다. 그 모든 사건들은 이들에게 배경이 아닌 현실로 나타난다. 그러니, 일제시대 만주의 길림, 장춘, 상해를 오간 마동수로부터 6.25를 지나, 베트남전에 참전한 후 괌에서 돌아오려 하지 않는 장남 마장세, 언론통폐합 사건으로 신문기자 일을 할 수 없게 된 가난한 마차세의 이야기는 남일처럼이 아니라 남일같지가 않은 이야기가 된다. 이 시기의 모든 사건들. 굴곡진 사건들에서 결코  비켜갈 수 없었던 이들은 그 벗어날 수 없는 사건으로 삶의 질곡을 겪으며 인생을 살아나간다. 쉽게 떨쳐 내지 못할 기억을, 상처를 만들며 맴도는 사건들이 개인을 한 가정을 차분하게 피폐함속으로 이끄는 동안, 헤쳐 나갈 수 있는 올곧은 정신은 형성될 수 있는 건가.


너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무슨 헛것이 씌었는지 도통 밖으로만 싸지르고 두어 달에 한 번씩 집에 오는데, 왜 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 인간하고 살을 섞고 살아서 너희들을 내지른 세월을 생각하면 내 가슴에서 벌레가 끓고 들불이 인다. 너는 힘들고 쓸쓸하면 너보다 더 쓸쓸한 이 어미를 생각해라.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의 전부다. p170


  어쩌면 이 모든 굴곡진 이야기의 근원이 누가 만들어내는지 모르는 근현대사의 ‘사건’들인 것처럼 마동수의 가정에 드리운 음산함의 이유는 ‘마동수’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 사건들을 함께 겪으며 그 역사 속에서 마동수는 끝끝내 제대로 서지 못하고 늘 회오리치기만 한다. 방어막이 되어 주지 못하고, 되려 하지 않은 채 거듭 흔들리고 방황하는 마동수와 함께 하는 삶은 마동수의 아내 이도순에게도 두 아이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안에서 겪는 ‘사건’이 된다. 그렇게 안팎으로 달려드는 무수한 사건들에 지쳐가는 상황에선 가장 힘든 존재가 ‘가족’이라는 존재다.          


1100고지 매복 진지에서 아버지, 어머니, 형은 멀어서 닿을 수 없는 외계(外界)의 환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먼 존재들은 군화 속에서, 언 발가락은 아무런 감각도 없이 남의 물건처럼 멀었는데, 그 멀고 먼 발가락의 고통은 불로 지지듯이 달려들었다. 혈연은 1100고지의 발 시려움 같은 것이었는데, 휴가가 다가오면 그 혈연의 끈은 마차세를 더욱 바싹 조여왔다. p16


  마차세는 어린 시절 밖으로 더욱 떠도는 아버지가 오지 않는 이유보다 왜 집에 오는 것인지를 더 궁금해 했다. 마장세는 늘 아버지가 삶의 외곽을 겉돌고 있다 여겼다. 두 아들에게 아버지의 삶은 뚜렷이 슬퍼할 것도 그렇다고 마냥 홀가분해지지도 않을 상흔을 주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 잔잔한 보잘것없음으로 두 아들의 생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나라의 역사는, 정책은 한 가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 가정의 가장의 역사는 그 자식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삶의 구조속에서 또 어쩌면, 그토록 틀은 정해져 있었을까. 방황하고 피폐하게 권위만을 내세우는 가장이 있고 가정을 꾸리며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살아내는 모성이 있으며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하나 결국 닮은 모습으로 생을 살고 있는 자식들이라는 것. 이 벗어날 수 없는 도식, 이 도식을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개인이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이라는 사실은 매우 허망하지만 또 그 구조 속에서 기어코 답을 찾아내기도 한다. 닮은 듯 보이나 다른 마차세와 박상희의 삶이 그렇다. 아버지 마동수와 어머니의 모습에서 가정이라는 것의 허망함과 그 무력을 발견했을 것도 같건만 끝내 ‘결혼’이라는 희망을 붙들려 한 마차세. 그에게 결혼이란 ‘막막한 세상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의 의미였다. 그렇게 결혼 속으로 들어간 마차세의 삶은, 마장세의 삶과 달랐나. 결혼이 답이었던가. 그 상대가 ‘박상희’가 아니었다면 마차세에게 결혼이 거점이 될 수 있었을까.

  세상의 모든 막막함과 마차세에게 드리운 이 공허함을 세밀하게 안아준 박상희가 있었기에 마차세는 마동수의 삶도 마장세의 삶도 아닌 박상희와 함께 하는 마차세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마씨네 가계에 발들 들인 박상희의 힘은 경이롭다. 그것은 마냥 마동수의 아내 이도순의 삶처럼 참고 참는 삶과는 조금은 다르다.

  어쩌면 이 ‘조금 다른’ 역할은 마차세가 바라는 ‘이상’으로 보이며 그렇기에 마차세에게는 ‘구원’의 여신과 같은 존재로 그려지는 것 같다. 이것이 아버지·어머니 세대의 ‘이도순’과 아들 세대 ‘박상희’의 결정적인 차이가 아닌가 한다. 비슷한 역할이 주어졌지만 그 역할을 빛나게 하는 것이 마차세의 인정이라는 점이다. 마차세의 재가를 득한 후에 박상희의 역할은 빛나고 있는 것이다. 마차세가 원하는 바에 맞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 힘을 얻는 박상희의 존재. 마차세에게 무엇을 재촉하지도 않으면서 마차세를 이해하는 폭과 깊이의 남다름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박상희의 역할이 이 전체의 소설에서 약간 이질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쨌든 마차세의 입장에서 박상희라는 존재는 단비이다. 또한 마차세와 마장세가 가지는 아버지에 대한 거리감과 죄책감의 내면을 생각해보도록 이끄는 역할이자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역할을 맡았다.  


제가 결혼한 직후에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젊었을 때 찍은 사진을 우연히 봤는데, 그 모습이 그때 태어나지 않은 두 아들과 똑 같았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저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모두 가엾어서 눈물겨웠습니다. p262

    

  이 개별적인 것 같으면서도 보편적인 세대의 이야기, 그러한 삶을 살았던 세대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눈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박상희’라는 진보적인 성향의 느낌을 지닌 인물의 목소리로, 시선으로.

  읽으면서는 마차세에게 연민을 느꼈는데, 왜 글은 박상희에게로 초점이 가게 되는지 모르겠다. 뒤늦게 들은 작가에 대한 논란 때문인지…. 열렬한 독자, 팬이 아니었기에 충격의 강도는 높지 않았는데 마씨 부자의 이야기에 왜 ‘박상희’만 기억에 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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