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의 깨달음
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문학동네, 2017.
랄프 로렌이 의류 브랜드라는 걸 몰랐다. 당연 창시자도 몰랐기에 디어 랄프 로렌의 “디어” 또한 “dear”인지 몰랐다. 작가의 단편집 『그들에게 린디합을』에 대한 인상으로 이 소설을 잡았을 땐, 오로지 손보미라는 작가에 기댄 선택이었다.
단편의 느낌과 비슷한 느낌도 있었는데 이국적 이미지였다. 작가의 작품에서 분위기나 서술톤에서 번역투라고 해야 할 지, 외국 작가의 느낌이랄지, 그런 이미지를 더러 느꼈는데 이번 장편 소설은 아예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그곳의 등장인물의 삶을 쫒고 있다. 단지 배경만, 그러니까 장소만 옮긴 한국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랄프 로렌의 이야기는 실존인물과 오버랩되면서 그의 생애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기에 얼마만큼의 진실과 허구가 섞인지 모른 채, 우선은 작가가 찾아가는 랄프 로렌과 조셉 프랭클의 인생사가 진실인 것처럼 여겼다.
유학생활 9년차의 종수는 지도교수로부터 퇴출 통보를 받고 서랍을 부수던 중 교교시절 같은 반 수영의 청첩장을 발견한다. “디어 종수, 나는 아주 잘 지내. 곧 결혼식을 올릴 거야. 나는 무척 행복해. 너도 잘 지내길 바란다.” 왜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그들 사이가 어땠는지
지난 기억을 떠올려보니 수영과는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쓰는 일로 함께 한 시절이 있었다. 수영은 랄프 로렌에게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편지를 쓰고자 했고 종수에게 영역해 달라 부탁했던 것이다. 그해 수영과 종수는 함께 만나 얘기를 나누었지만 수영이 편지를 부쳤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그해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만났던 그땐 이미 랄프 로렌은 사망한 후였고 종수는 미국에 머물며 랄프 로렌을 찾아나서게 된다.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는 과정에 랄프 로렌을 아들처럼 키운 시계공이자 권투 선수 조셉 프랭클, 조셉 프랭클의 이웃 백네살 레이첼 잭슨, 레이첼 잭슨의 입주 간호사 새넌 헤이스를 만난다. 그렇게 랄프 로렌의 생애를 쫓으며 그가 왜 시계를 만들지 않았는지, 랄프 로렌과 조셉 프랭클이 숨긴, 수수께끼 같은 고리들을 계속 찾는다.
타인의 인생을 쫒는 일이 지루한 궤적으로 흘러가리라 생각지 못했다. 어쩌면 큰 ‘사건’을 파헤치고자 하는 일념으로 타인의 생을 까발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듯 여겨졌다.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교차되는 수많은 서술의 흐름 속에서 랄프 로렌의 이야기를 뒤쫓는 ‘종수’의 속내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닐까 했다. 그만큼, 종수는 왜 랄프 로렌의 이야기를 찾으려 하는지, 보다 치밀하고 열성적인 것도 아니면서 그때 그때 생각의 조각들을 맞추어 가면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하노라면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종수’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과 종수처럼 살고 있지 못하다라는 상반된 생각이 올라온다.
전자는 종수에게서 목표한 것에 도달하지 못해 밀려난 느낌을 갖는 이의 방황과 자조적인 모습을 본 것이었다. 후자는 어떤 기억에 의지해 타인의 삶을 탐색하는 여정을 하는 이는 얼마나 많은가란 생각이었다. 그만큼 종수는 나약한 듯 의지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랄프 로렌의 삶을 쫒는 건 종수에게 지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무력한 상태의 자신을 벗어나기 위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나를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 길 위에서의 깨달음 같은. 순례자 같은.
궁금해 한 랄프 로렌의 삶의 부분을 명확히 알아내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최종적으로 랄프 로렌의 행적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이 소설에서 수수께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 수수께끼가 목적이 아닌, 종수의 이야기.
삶이 축제는 아닐지언정, 그게 자신을 지치게 하더라도, 계속 끌고 나가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잭슨 여사는 자신의 삶을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움직이게‘ 만들었다.
동화 파랑새처럼 길의 이야기, 여정의 이야기라면 수영의 편지는, 종수에게 무엇이 될까. 오랫동안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아닐까. 그 기억 속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미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을 기억한 종수의 이야기. 그렇게 사람과 사람을 만나,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종수의 이야기. 마침내 기억한 “디어”라는 단어에 깃든 말. 그것이 종수가 찾고자 하는 것, 찾아낸 것이었다.
디어, 는 다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인 것처럼 느껴져. 아주 친밀하고 따뜻해.
또하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혔다. 헤밍웨이가 쓴다는 것이 고독한 삶이라고 한 말을 인용한 프롤로그에서부터 시작하면서 종수가 랄프 로렌의 삶을 뒤쫒는 과정에서 자신을 작가라고 지칭하듯이 이것은 고독한 글쓰기의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구나. 매일 불평불만을 늘어놓지만 매일 쓰게 되는 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토록 늘어놓는 불평불만은 누군가의 삶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기 위한 서투른 표현이라는 것. 그렇게 글쓰기는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들을 친밀하고 따스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라는 것을.
살아 있는 사람들은 부고를 통해 죽은 사람에 대한 모든 감정―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을 간결하고 우아하고 진실된 문장으로 ‘공식적으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이모가 죽은 후에 어머니가 왜 그토록 그녀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죽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