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의 KO승


스파링, 도선우, 문학동네, 2016.12.21.

  문학동네소설상 수장작인 『스파링』은 책을 읽는 중중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 가만 보니  클리셰로 가득하다. 그렇기에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 작가의 서술톤은 클리셰 가득한 일들을 이끌어 가는데 시종일관 담담하고 차분하다. 언뜻 도덕교과서 같은 이야기도 많다. 그런데, 이 익숙한 클리셰를 가만 들여다보니 이 이야기는 결국 그렇게 흘러 갈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이 『스파링』속 세계, 클리셰는 우리에게 늘 익숙한 권력과 자본이었다. 그러니 그것이 움직임이 예측가능한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가 진부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그토록 경직되어 있다는 이야기와도 같을 것이다.

  실제, 어떻게 될지 모를 장태주의 삶이 처음부터, 시작부터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났기에 어떤 삶의 궤적인 좀 다를까 했건만, 이것은 이야기이지만 삶이니까. 이 대한민국에서 공중화장실에 버려진 어린 아이의 삶이 전형적인 권력과 자본에 의해 비틀리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저 응원이고 바램일 뿐이지, 실상은 그렇지 않으리란 걸 안다. 그러니 우리의 소년 ‘장태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소년’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모든 일을 겪은 후에야 서술되는 형태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장태주의 어조는 시종일관 아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초등학생, 이제 중학생인 소년 장태주의 행동과 언어는 이미 세파에 시달린 어른의 목소리와 같았다. 맞닥뜨리는 일들에 모두, 한단계 초월한 듯한 반응을 보이는 장태주의 목소리는 그렇기에 애잔함이 가득하다.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의 장태주는 참 사랑스러워보였다. 이해를 품고 달리는 아이의 목소리였기에. 열일곱살 미혼모의 행동에서의 아기 버림을 충분히 이해하는 태주는, 소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이 공중화장실에 버려진 것을 흥미롭게 이야기하는 장태주로 인해 어린 장태주에 대한 연민이 깊어진다.

  하지만 보육원과 학교에서의 장태주의 삶은 어떤가. 세상에 대해 ‘이해’를 품으려 해도 세상이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의 모두에게 ‘장태주’라는 한 사람으로서의 인격은 사라지고 보육원 아이라는 이미지로만 장태주를 소비한다. 그것이 이 부정의한 세상이 보육원 아이 ‘장태주’를 대하는 방식이고 클리셰다. 어린 아이를 향한 매서운 세상의 논리, 아이조차도 부모의 논리를 그대로 되뇌며 제 친구를 억압하고 업신여기는 모습을 보면 경악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생각한다. 아, 그렇다. 이 나라 대한민국의 부모들의 행태가 그렇더라. 제 아이만 잘나고 멋있는 줄 알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다는 것. 아이들을 위한 동화는 없다. 일찍이 어린 왕자가 말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고.


그게 이곳의 질서다. 질서라는 건 한 번 만들어지면 여간해서는 무너지지 않는다. 종종 그 질서에 불만을 갖고 무너뜨리려는 인간들이 생기기는 해도 질서라는 건 본래 레고 블록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하나를 이룬 거라서, 몇몇 반골들이 자기들 뜻과 맞지 않는다고 지랄들을 떨어봐야 결국 무너지는 건 자기들이지 질서가 아니다.


  불행하게도 장태주의 삶은 어른들의 최악이 행동패턴을 그대로 따르는 또래의 아이들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제가 살아갈 세상에 어른의 힘과 논리를 가져와 또래들을 억압하고 우위에 선다. 아니, 이 세상의 논리는 그렇다. 돈과 힘. 돈없고 부모없는 아이가 겪을 수밖에 없는 모든 불운을 끌어안고 세상을 헤쳐가던 장태주에게 한줄기 빛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동 능력과 소년원에서 만난 공선생과 그 가족들이다.

  비참한 삶에서 응원해주고 위로해주는 내 편을 만난다는 것은 새 삶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어린 장태주의 삶은 그들로 인해 달라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전한 클리셰가 진행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장태주에게 가족이자 권투를 가르쳐 주는 소년원 담임과, 담임의 부인, 담임의 장인은 이 이야기 속에서 시종일관 ‘도덕 교과서’의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장태주가 견뎌온 이 세상의 구조와는 한발짝 떨어진 채로 그 제도와 맞서며 끊임없이 사회정의에 대해 부르짖고 그러한 삶을 실천해가는 이들이다. 그리고 여기서 권투는 상식적이고 공정한 규칙의 세계를 가르키는 방식이 된다. 그들은 권투 기술이라는 실질적인 운동을 가르침과 동시에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 이러한 타당한 규칙의 기술을 장태주에게 전수해 주는 것이다.


살아가며 저돌적으로 인파이팅한 기억을 갖지 못하면, 언젠가 부딪히게 될 현실의 무게에 놀라 도망만 다니게 될 수도 있거든. 그래선 그 현실을 극복할 수도 없고 스스로를 증명할 수도 없으니까 살아가며 한 번쯤은, 모든 걸 다 걸고 정면승부를 겨뤄봐야 할 필요가 있어.


  상식적으로 공정이 불공정하고 맞붙으면 공정이 승리해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고 상식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바르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규칙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게 이 세상이라는 것만 잊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자조를 배우며 살아야 한다는 게 슬프고 어이없지만, 결국 알게 된다. 이 세상은 수많은 일진들이 둘러싼 세계라는 것을. 일진, 그들만의 끈, 그들만의 논리, 그들의 폭력. 그것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정의는 오히려 정의를 바라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세계를 살아가기 더 편한 인간들에게 훨씬 유용한 가치이자 신념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나는 천천히 깨달아온 셈이었다.


  또한번 이 세상의 클리셰와 맞선, 파이팅하며 끊임없이 스파링하던 이들의 세계가 무너졌다. 위와 같은 말을 내뱉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갈 장태주를 이 세상은 얼마나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 탁월한 기술과 담임과 스승이 가르쳐 준 규칙으로 멋지게 KO승을 해주기를 바랐건만, 사랑하는 모든 이를 잃은 장태규의 절규만 들려온다. 


  내가 당신들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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