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내 삶의 터닝 포인트 - ‘익숙한 것과의 결별’ 그후
변화경영연구소 지음 / 유심(USIM)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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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똥덩어리 위에


구본형, 내 삶의 터닝 포인트-‘익숙한 것과의 결별’ 그 후


  공자가 집 앞으로 이사를 왔다. 그 앞으로 달려가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 애쓰며 제자이고 싶다고 간절히 애원하는 내가 될 수 있을까. 한때는 스승의 날이면 딱히 찾아가고픈 이가 없음에서 오는 허전함이 있었다. 뭔가 기막힌 운명에 방점을 두었기에 학창시절을 거치면서 주어진 관계엔 운명이라 하길 거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니다, 라는 결론을 맺고 안심한다. 공자는 나의 취향이 아니라 궁합이 맞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 것이 예의와 존경이라는 데 의문을 표하는 바이니 말이다. 예의란 좋은 말임에도 관계에 진전을 더디게 하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설정시키는 공신이다. 그 공신이 미치는 힘이 내 인생에 얼마나 강했던가를 생각하고 있노라니 이 책 속 열두 명이 공신을 어떻게 다루며 스승을 만들어 갔는지, 관계를 맺어갔는지, 인생을 나아갔는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죽은 거나 진배없었지만 내 발목을 내어주는 대신 나는 살게 됐다. 떨어져 죽었어야 할 나를, 내 발목이, 자신을 27조각 내며 살려냈다. 산신이 바스러진 발목을 차가운 수술대에 올렸다. 의사는 절단이라는 말을 무덤덤하게 뱉어냈다.


  스승에 대해 말하기 전 제자들은 그들의 지난 삶을 얘기한다. 그 면면은 다르지만 하나같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의 ‘나’가 아닌 ‘고호’다. 방황과 절망과 실패의 날들이 지속되며 피폐해지고 자존감을 잃어가고 의미와 목표를 상실한 삶, 그저 분주하기만 한 삶, 공허함에 허우적이는 삶이었다고 말한다.


삶은 구석에 내팽개쳐진 목발처럼 초라했고 짝다리로 서서, 똑바로 선 모든 것들을 경멸했다. 절망이 지배했고 냉소와 비관으로 세상은 가득 찼다. 그때 스승을 만났다.


  그때 스승을 만나 그들이 변했다고 말한다. 당연, 그래서 그 변화를 이끌어 주는 스승의 가르침을 요약판으로 알려주는 것이 이 책이라 기대하면 안된다. 무엇보다 그리하여 그들이 변했다는 말도 적절치 않은 듯하다. 그들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변화의 속도를, 방향을 제 마음대로 설정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그들은 항상 변화에 있었다. 상황의 변화를 기회로 디딤으로 삼아 인식의 전환을 이루는 걸 알지 못했을 뿐. 그들이 자신의 변화의 조종자가 될 수 있게끔 해준 변화경영사상가 구본형의 존재는 강렬한 영웅으로 묘사되진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강렬한 카리스마로 단번에 모든 상황을 해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런 소리를 기억에 남긴다.


자리를 잡고 무념에 빠져 있던 그때 누군가 내 옆 칸에 앉는다. 바지 벗어제끼는 소리가 조신하게 들렸다. 나는 혼자 눈을 크게 떴다. 움직이지 않았다. 작전상 상황 종료 시까지 음소거를 유지하기로 한다. 괄약근을 힘껏 조여 나오려는 모든 것들을 중단시켰다. 숨을 멎게 했다가 가늘게 내쉬며 숨소리조차 가라앉혔다.

그는 화장실에 앉아 시를 읊었다. 어떤 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읽어 내리는 것인지 외워서 읊조리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시를 듣지 않고 그의 멋진 목소리만 들었다. 그리고 이따금 무언가가 물에 빠지는 소리와 굽이굽이 스승의 장기를 빠져나온 가스 소리를 들었다. 귀를 쫑긋 세웠다. 소리들이 만연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시를 멈추지 않았다.


  왜인지 나는 붐빈 화장실을 피해 들어간 공용화장실에서 스승의 배설의 전과정을 몰입하여 듣고 있는 제자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참으로 자연스러운 상황이지만 어쩐지 기묘하고 난감한 상황에서 노동요(?)처럼 흐르는 스승의 시낭송 속으로 빠져들어간 것처럼 다른 제자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같은 자세로 귀기울이고 있는 열 두명의 제자를 떠올리며 쓸데없이 파안대소한다. 그때 스승이 외우고 있던 시가 최영철의 「아직도 아직도 쭈구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였으면 아주 좋았을 거라 생각하면서….


누가 쏟아놓은 것인지도 모르는 똥덩어리 위에

또다시 자신의 똥을 내려놓으며

아직도 하나가 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 최영철, <아직도 쭈구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中 -

 

  그들 삶에서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알아가도록 스승은 온몸을 다해 말해주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궁합과 타이밍의 조화다. 힘들어 죽겠다 말하면서도 그들은 스승으로서 구본형을 선택했다. 이 책은 스승이란 주어지는 것도 내게 무엇을 해주는 것도 아니라 함께 무엇을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스승의 가르침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호과정을 통해 공감과 공명의 울림임을 보게 된다. 스승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 꿈을 그려가는 방법이 가슴으로 인식되고 머리로 이해되어 손발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각각의 삶의 태도와 방향을 깨우쳐가는 과정들이 책속에 담겼다. 각각의 지난한 여정들 속에서 변화해가는 그들 자신에 대한 인식이 뭉클하게 전해진다. 제자들의 이야기는 한순간에 일궈지지 않았고 삶의 변화 또한 완결되지 않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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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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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같은 소리하고 있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 2018.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나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라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노래하고 있다. 20세기에서 그린 21세기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었을지언정 무조건 살기좋은 세상이었다. 진보와 발전이란 거부할 수 없는 단어였고 기대감을 가속화·극대화시켰다. 하지만 21세기는 20세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보와 발전이란 제한적인 단어였고 어제에서 이어진 문제는 지속적이다. 미래라고 불린 사회가 현재가 된 지금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시각은 영향력을 갖는다. 유발 하라리도 대표적이다.

  인류가 직면한 커다란 질문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느냐”라고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그러니까 현재, 인류는 고통에 처해 있다는 말이겠다. 그 고통의 주원인이 그토록 21세기에 기대하던 기술혁명이라는 점은 또다른 아이러니긴 하지만 결국 익숙하게 겪어왔던 대로 기술혁명은 인간소외를 급격히 부추긴다. 총체적으로 보면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가지는 한계라 말할 수 있으며 유발 하라리는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21세기의 전례 없는 기술적, 경제적 파괴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모델을 최대한 빨리 개발해야 한다. 이런 모델들은 일자리보다 인간을 보호한다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 많은 일자리들이 따분한 고역이고 구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아무도 현금출납원을 평생의 꿈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을 보호하는 일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한계로 도태된다며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주장했고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식 복지 제도’를 도입하여 마르크스가 한계로 지적한 부분을 수정하며 지속해 왔다. 물론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은 다르지만 말이다.


점점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한 가지 새로운 모델은 보편기본소득제UBI다. UBI는 정부가 알고리즘과 로봇을 지배하는 억만장자들과 기업들에 세금을 물려서 그 돈을 모은 개인에게 기본 필요를 충당할 만큼의 급료를 제공하는 데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빈곤층에는 실직과 경제적 혼란에 대비한 완충 역할을 할 테고, 덕분에 부유층은 포퓰리즘에 의한 대중의 격분으로부터 보호받을 거라는 구상이다.


  유발 하라리도 ‘보편기본소득제’를 제안한다. 항상 예산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국회는 선발시에는 ‘복지’를 부르짖으며 그것이 유용하다고 활용한다. 하지만 그 이후 실행은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것에서 보듯이 대중의 격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고 유용하게 흘러간 패턴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의 격분 역시도, 쉬이 사라졌으니까. 자유민주주의를 완벽히 포장해주는 것이 복지제도이다. 복지제도를 이렇게 갖다 쓰는 한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복지제도를 혐오했다. 그것이 이용당하고 버려질 것이기에. 목적이 무엇이냐를, 본질을 파악하지 않으면 결국 당하고 만다.

  목적을 정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어쩌면 유발 하라리의 인간의 겸손을 외치는 목소리도 수긍은 간다. 하지만 ‘겸손하세요’라고 해서 겸손할 수 있다면 인간의 고통이 있을 리가 없다. 유발 하라리의 말에 귀기울이고 맞다고 감탄하며, 무릎을 탁 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렵지 않은 글임에도 왜인지 명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아성찰과 자기반성의 명상과 자기계발서로 바뀌는, 마무리되는 장르에 당황하지는 않지만 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유발 하라리의 생각과 글에 대한 매력은 책이 출간될 때마다 하강곡선을 그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책이 나오면 읽게 되겠지. 결국 나도 늘같은 유권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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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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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그리고 적


적을 만들다, 움베르토 에코, 2014.


  제목은 기억하기에 확실한 우월을 지닌다. 에코의 에세이가 다루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읽은 시간이 지나 기억에 떠올리는 건 역시 제목 <적을 만들다>인 것을 보니까.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뉴욕에서 파키스탄 택시 기사로부터 이탈리아의 적은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적이 없다 답한 에코는 다시 생각한다. 이탈리아가 지닌 불행 중 하나가 적을 두지 않은 것이라고 말이다. 위와 같이 ‘적’이 지닌 가치와 ‘적’의 필요성을 논하는 에코의 의견은 오랜 역사를 통해 실례로 뒷받침되어 왔다. 하지만 ‘적’이란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해주지 않는다. 필요와 가치를 다하기 위한 ‘적’이란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 

  적을 만들지 않는 삶을 찬양해 왔던 것은 거짓이고 속임수였다. 항상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적’에게 기생해왔던 것은 정치였다. 아니 권력이던가. 어쨌든 북한이란 ‘적’을 항상 필요로 했던 권력을 떠올리면 에코의 의견에 동감하게 된다. 누구를 ‘적’으로 두느냐가 정체성을 확실히 보여준다는 것을.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폭넓은 유연성을 지니는데, 베로나의 스킨헤드족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자신들을 식별하기 위해 그룹에 속하지 않는 자라면 누구든지 적으로 겨냥한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우리를 위협하는 적을 거의 자연적인 현상의 측면에서 규명하는 일이 아니라, 그 적을 만들어 내서 악마로 만드는 과정이다. 


  또한 세상이 수초도 지나지 않아 그것을 요구한다. no야 yes야? 이 편이야, 저 편이야? 묻고, 물음조차 없이 프레임을 씌워 제 기준에 맞춰 타인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단답형의 말 한마디로 속전속결로 이뤄지는 타인에 대한 평가는 어떤 가치를 위해 싸우는 것일까. 난무하는 혐오의 단어와 예의를 상실한 말들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이루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님에 틀림없다. 적이 생겨나고 있음은 확실히 불행의 조짐이다. 작은 잽을 날리며 곳곳에서 들끓는 적. 한때는 이런 적들을 한방에 훅, 날릴 수 있으리란 기대가 가득했는데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서인지 ‘적’이 쌓여간다.  

    

우리의 적이 되는 대상은(미개인들의 경우처럼) 우리를 직접 위협하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를 위협하지 않을지라도 누군가에 의해 위협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자들이다. 따라서 우리와 다르다는 것은 그들의 위협적인 태도에서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다름 그 자체가 우리가 찾는 위협의 신호인 것이다.

 

   가치가 상대적이라고 한다지만 절대적 가치는 있는 법이다. 지켜야 하는 걸 지키는 것과 없어져야 하는 것을 없애는 것, 어느 것이 더 힘든 일일까. 새삼 ‘적을 만드는 일’보다 쉬운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달력 한 장 남은 2018년, 없어야 할 것이 소멸하는 것을 보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가. 비에 씻겨가지도 않을 적이 계속 만들어진다. 쌓여만 간다. 한해의 마무리를 편안하게 하고 싶었건만 요즘 끊임없이 내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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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용서 - 적개심, 아량, 정의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강동혁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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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분노가 가득한데


분노와 용서-적개심, 아량, 정의, 마사 C. 누스바움, 2018.


  어떤 형태로든 너무나 익숙해지고 일상화되어 버린 단어, 분노. 분노와 동행하는 수많은 단어 중 용서가 붙었다. 이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있을까.

  분노 옆에 용서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분노’를 어떻게 보느냐와 연관된다. 어떤 시대에는, 어떤 대상을 향해서는 ‘분노하라’ 외치며 분노의 정당성을 부르짖고 분노할 것을 부추긴다. 그런 시절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다. 맘껏 분노하며 정의를 부르짖는 일이 힘겨운 세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에 분노는 정의와 어울려 다녔다. 정의가 짝꿍이었기에 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되는, 엄정하게 따져야 할 단어였다. 그 시대가 지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대상이 사라졌다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분노와 정의는 짝꿍으로 이어져야 할 말이기에, 용서라는 말이 다가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용서라니. 이 시대 대표적 석학으로 불리는 누스바움의 분노는 어떤 것이기에 용서와 짝을 지웠는가. 누스바움에 의해 재정의된 분노와 용서는 분노를 복수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 그리스신화의 복수의 여신과 지혜의 여신을 빗댄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를 결부시켜 이야기를 전개한다. 복수의 여신이 지혜의 여신에 의해 정의로운 분노의 신 에우메니데스로 변화했다는 이야기의 뼈대를 생각하면 누스바움이 바라보는 분노, 그러하기에 용서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된다. 문제가 있다고 볼 때 그것은 해결되어야 하고 발현되지 않아야 할 감정이 된다. 그렇기에 분노를 극복하는 방안이 필요하고 누스바움은 그것을 용서로 본다. 하지만 역시 누스바움이 정의하는 용서에는 제한이 있다. “용서 안에 도사리고 있는 공격성과 통제, 기쁨의 부재 같은 요소”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개인적 영역, 중간 영역, 정치적 영역에서 분노와 용서가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따져본다. 용서가 거래적‧교환적으로 이뤄질 때 필연적으로 가해자가 자신의 위치를 격하시키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는데 도움되지 않는 태도임을 지적한다. 참으로 어렵다. 분노도 용서도 누스바움에 따르면 누스바음이 지적하는 모든 것을 피해서 행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선사시대의 어느 단계예서는 분노가 가치 있을지 모르는 몇 가지 혜택을 제공해주었겠죠. 심지어 오늘날에도 분노의 유용한 역할은 흔적기관처럼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지향적이고 선한 정의의 체제가 세워지자 분노라는 감정은 대단히 불필요한 감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분노의 비합리성과 파괴성을 얼마든지 깊이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누스바움은 분노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 듯하다. 얼핏 생각할 때 개인적 차원의 분노로 전제하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누스바움은 “분노에는 미덕이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사적 영역에서든 공적 영역에서든 규범적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법체계나 사회가 정의로운 체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분노가 아니라 용서에 방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분노에 미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용서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가 아닌가,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건가 이런 생각들이 들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분노에 대한 부정적 견해로 ‘비-분노’를 강조하는 누스바움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이 말들이 공허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에서 분노가 차지하는 중심성은 문화적 규범이 만들어낸 구성물이거나 개인적 소양을 함양한, 혹은 함양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분노에 선천적 뿌리가 있다는 믿음에도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도록 합시다. 하지만 우리가 타고난 것은 분노하는 성향이지, 행동을 통한 불가피한 분노의 표출은 아닙니다. 우리는 근시에서 건망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본성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성향이나 경향을 교정하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목적을 상실한 부문별한 분노가 횡행하고 있는 지금을 보면 이 말에 수긍이 갈 수밖에 없다. 분노하는 성향은 지속하되, 행동으로의 표출이 아니라는 말이 가지는 그 이상을 사실 우리는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그럼에도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현실의 상황들을 목격하며 알아가게 된다. 분노도 용서도 인간의 본성에 새겨져 있기에 교정해야 한다는 말을 좋은 쪽으로는 넘어가지만 삐딱하게 보게 되면 이 말에 대한 반발도 차오른다. 그 수정과 교정의 방향이 어떻게 가야하는가가 상당히 주관적이고 또한 정치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누구나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는 개인적 분노 표출에 반대한다. 하지만 사회적인 형태에서의 분노는 특정 세력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불가피하다는 말에서 그 불가피함의 수준은 또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꼬리를 문다. 분노하고 싶은데 분노할 수 없을 때가,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할 수 없을 때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 모든 것은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문제가 되고 대안이 되고 방법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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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링의 인문학 - 이상한 놈, Peeling의 인문학을 만나다, 수정증보판
유범상 지음 / 논형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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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건대

필링의 인문학, 유범상, 논형, 2014.


  여전히 인문학 열풍은 지속되고 있다. 힐링이든 필링이든 인문학 열풍이 지속되는 것에 비하면 인문학적 사고와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하긴 아직도 필링보다 힐링 쪽으로 그 무게가 지워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저자는 힐링과 필링의 인문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힐링의 인문학이 개인의 내면문제에 집중하여 개인의 강점을 찾고 심리치료에 노력하는 것이라면 필링(Peeling)의 인문학은 인간을 정치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끊임없이 눈가리개를 문제 삼아 그것을 벗겨내는 것, 나를 지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을 권력관계와 구조 속에서 찾으려는 시도다. 그리하여 전자에서 인문학은 대중들을 계몽할 대상으로 보거나 고급 교양교육과 사교의 장을 만드는 데 관여한다면 후자의 인문학은 필연적으로 정치와 만나게 된다고.


이제 인문학은 개인의 이해와 힐링(healing)을 넘어 공동체의 갈등과 구조를 필링해야 한다. 힐링은 힐링 자체로 힐링되는 것이 아니라 필링과 필링의 정치를 통해 진정한 힐링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필링의 인문학은 진정한 힐링의 조건을 만들고, 생각하는 정치적 주체를 통해 작동할 것이다. 이때 인문학은 단순히 나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


  수없이 개인의 힐링을 도모한다 한들 내 힐링의 장소가 시끄럽고 불편하다면 궁극적인 힐링이 이루어질 수 없다.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거나 그 장소가 불편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삶 자체가 정치와 연결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치적이다라는 말이 주는 그 부정을 함의하는 말들 때문에 정치에 대한 혐오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정치를 삶과 분리시켜왔지만, 사실 겪어본 바에 의하면 하나하나의 삶에서 정치가 개입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정치에서 뒤돌아 더 멀리로 달아나도록 부추기는 것은 그냥 이대로의 삶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이들 때문이란 생각이 거듭 든다.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생각당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생각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생각과 그에 따른 욕망은 자신의 것이 맞는지 타자의 것은 아닌지 말이다. 또한 헤아려 생각해야 할 것도 많다.


우리는 상식이라는 프리즘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데 상식이라는 샘은 그 시대의 가치관과 철학, 이념이라는 저수지에서 나온다. 지식・역사・상식 등은 권력관계의 산물이다. 이것의 이면에는 어떤 권력, 즉 국가든 자본이든 그들의 의지와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나 상식은 교양이 아니라 지배의 무기이고 정치의 싸움터이고 생사의 바로미터이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매트릭스 안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지금을 지배하는 상식은 어떠한지를 생각해보면 거듭 기이하고 희한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만큼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대체로 상식이라는 것, 지켜야 하는 것에 관해서 일정한 방향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상식에서 벗어난 것을 행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너무나 당연하게 몰상식을 부르짖으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나아가 그것을 자랑스럽고 힘차게 드러내는 어떤 상식을 다양성의 이름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이 시대의 가치관과 철학, 이념’의 한 틀이라는 것을 수용해야 하는 것인가. 저자는 ‘생각당하는 삶’을 경계했는데 생각당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만을 알기 때문이구나 싶다.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 지니는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책을 읽다 주먹을 굳게 쥐었던 것은 잠깐뿐 현실을 보면 고개부터 저어진다. 힐링, 필링,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정치적 무기는 어떤 철학과 상식어아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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