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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 대한민국 보통 가족을 위한 독서 성장 에세이
김정은.유형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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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바꾸고 싶어-엄마는 바뀔까요?


 책은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특히 아이들에겐 어릴 때부터 독서습관을 길러줘야 하고 권장목록과 유명인의 추천도서 목록을 행복을 향한 열차 티켓을 거머쥐는 것처럼 수집한다. 하지만 이것도 한때다. 초등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마침내 대망의 대학교를 입학하기까지가 대한민국의 최종 독서의 종착역인 까닭이다.

  독서에 대한 열의가 정말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한국인의 독서량과 독서시간은 가히 참담하다. 또한 책읽기 책에 대한 선호도가 높거나 방송에 등장한 책이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된다거나 베스트셀러니까 읽어야 한다는 형태의 독서가 전반적인 흐름이다. 유명인이 추천한 책의 줄거리를 읽고 그들의 감상을 내 것인 양 하는 어느덧 과시가 되어버린 이 나라의 독서판.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의무화되고 강박에 휩싸인 우리나라의 독서문화가 점점 사람들을 책에서 멀어지게 하는 게 아닐까. 우리의 책읽기에 대한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라캉이 말한 타자의 욕망은 아닐까. 

  독서에 대한 순수한 열의를 방해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야 할 책에 대한 관심이 우리나라 특유의 교육과 맞물려 ‘학습’으로 인식되면서 오히려 독서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 형성된 탓이기도 하다. 학습을 떠나서도 책이 인생의 진리이며 모든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것처럼 얘기되는 현실에서 ‘나’는 그것을 찾지 못했을 때 오는 참담함도 더해진다면 독서에 대한 열망은 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헬조선이란 ‘생계’를 위한 지극히 전투적인 사회에서 책에서 위로받기엔 책과 함께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어쩌면 타인의 독서경험과 추천목록을 찾아 읽기는 이렇게 형성된 독서습관 탓에 아직도 ‘내 경험’을 찾지 못한 이들의 독서습관 형성을 위한 노력일 것이다. 독서를 통해 새로운 인생의 전환을 느낀 이들의 진정성있는 경험을 공유하고픈 이유일지도 모른다. 왜냐고, 여전히 독서에 대한 울렁증과 강박증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그 강박을 완전히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독서를 하고 싶은 열정의 첫 단계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린, 어떤 형태로든 정말로 책을 ‘잘’ 읽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엄마 바꾸고 싶어!' , 큰 아이의 절절한 외침


  강박적으로 독서의 필요성을 머리로 알고 있지만 절절하게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 가족의 독서 경험을 공유하기를 권한다. 한 가족이 함께 독서를 하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가족도 심상치는 않다. 아빠는 파업 중이고 엄마는 직업병으로 백수이자 병원을 오가고 엄마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아이들은 엄마와의 거리감에 힘들어하고, 마침내 엄마를 바꿨으면 좋겠다라고 하기까지. 헬조선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의 안타까운 상황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상황에서 이들 가족이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방식은 정말로 독서에서 이루어졌다. 이 경험은 이 가족만의 ‘특별’한 경험으로 차별적이고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분명 ‘이 가족이 특별한 것일 뿐이야’라는 생각은 책을 읽으며 은연 중에 전혀 특별한 그들만의 경험으로 보이지 않는다. 책을 읽어내고 소통하는 탁월한 엄마, 아빠의 글솜씨 때문이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전전긍긍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읽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가족 모두가 저자이다. 아빠와 엄마와 두 딸이 함께 읽고 나눈 독서의 경험이다. 그들이 읽은 책을 통해 현재 느끼는 감정과 어려움을 책 속의 등장인물을 내세워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들 가족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탁월한 것이기도 하겠다. 책 속의 이야기를 나의 것으로 대체하여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은 그리고 마침내 가족이 ‘가족’으로 똘똘 뭉치는 광경은 오히려 파업이 해결된 지 아닌지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그만큼 큰아이가 엄마를 이해하는 것과 엄마가 아이의 재능과 관심을 아이의 기준으로 이해하는 과정이나 작은 아이가 언니와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의 꿈과 자신감을 길러가는 과정이 더욱 흥미롭다고나 할까. 가족생활에서 중요한 요인이 물론 경제적인 부분이지만 그래서 위기인 아빠의 ‘파업’은 어느새 뒷전으로 물러나는 상황이 된다. 그것은 수많은 위기의 한 요인일 뿐이며 이들이 위기를 헤쳐나가는 방법을 알아 가기에 더 이상 위협요인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업하는 아빠, 아픈 엄마, 서로가 낯선 가족들"


  책의 서술자는 엄마인 것 같다. 문체나 이야기의 흐름이 그렇다. 주제에 맞추어 그들이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주제마다 아빠의 편지가 따로 있기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들의 가족 토크쇼에서 들은 이야기지만 이 책에서의 ‘서술자’ 측면에서 아빠의 역할에  의문을 가지며 책이 출간되기까지 직접적인 집필자인 엄마에게 공이 크다라고 한다고. 하지만 저자인 엄마는 이 책의 전반적인 기획과 출발이 아버지에게서 나왔고 문체의 통일성을 위해 톤을 맞춘 것이라며 아빠의 역할이 적지 않음을 강조했다. 흐뭇한 광경이다.

  저자의 말처럼 단순하게 글쓰기로 엄마, 아빠, 아이들의 공을 구분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농담반 진담으로 이 책은 다 엄마가 한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할수록 아빠의 지분이 커져가고 있었다. 아빠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무얼까. 그것은 이 가족의 전체적인 가치와 철학을 이끌어가는 데 아빠의 생각이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는 것이다. 가정이나 국가나, 핵심적인 가치와 목표 아래 다양한 형태의 일들이 이루어진다. 어떤 가치와 철학을 가지느냐가 한 가정을, 한 나라를 만들어간다. 그런 면에서 이 집안의 큰 가치가 흔들리지 않게 올곧게 지켜갈 수 있도록 하는데 흔들림없었던 ‘아빠’에게 박수를 건넨다. 아빠의 기본적인 가치와 엄마의 가치와 행동력이 맞물려 이 가정의 독서관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각자의 역할들을 충실히 해내고 그리고 어려움과 위기 속에서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노력들이 만들어 낸 결실이다. 이 책은 단순히 이 가족이 어떤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 가족들의 경험이 녹여나 그들이 읽은 책들이 더욱 빛나는 듯하다. 유쾌하고 독특한 이 가족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강박이 아니라 자연스러움과 진정성이 얼마나 큰 소통이 되는지를 느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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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1. 당신의 시선은 어디에 머무는가

 

 

 *시녀들 (라스 메니나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Don Diego Rodriguez da Silva y Velasquez)

 *316 x 276 cm,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소장

 *출처) Naver 미술정보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vs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시선은 머무는 곳이다.

  길을 걷다 보면 너무도 익숙한 풍경에 걸음이 멈춰질 때가 있다. 그러나 너무도 낯선 풍경에도 걸음은 멈춰진다. 익숙함과 낯섦은 각각의 특성으로 시선을 끈다. 그리나 조금 더 길게 걸음을 붙잡아두는 것은 어떤 풍경일까. 되돌아 시선이 오래도록 머무는 것은 어떤 풍경일까. 나의 발걸음은 나의 시선은, 익숙함과 낯섦에 반응하며 나를 이끈다.

  그림이 있다. 아마도 난 그림을 지나쳐갈 지도 모르겠다. ‘난 그림보는 눈이 없어서’. 어쩌면 나는 그림을 바라볼 지도 모르겠다. ‘저 그림 엄청 유명해, 유명한 화가가 그린 거래’. 어쩌면 나는 그림을 보고 있지만 전문가들이 말한 특징을 찾아 줄을 긋고 있을지 모르겠다. 해결해야 할 일을 해치우듯이. 나는 제대로 그림을 본 걸까.

  나는 다시 걸음을 돌려 하나의 그림을 본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squez)의 시녀들(Las Meninas) 속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자신도 등장한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화풍은 무엇인지, 잘 그렸다는 것은 무언지를 생각하는 동안의 나는 분명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문제와 그 해답을 제대로 외웠는지를 확인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포인트는 이거야를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지식없이, 아무런 편견없이 이 그림을 보았다면 어디에 초점을 맞추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의해 확립될 것이다. 천차만별인 가치에 우위를 정하는 것은 상대적이겠지만 보편타당함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은 절대적이다. 다양한 가치들의 싸움에서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점점 사람을 본다거나 함께 하는 사회에 대한 것보다는 자본주의의 시장질서에 맞는 형태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점점 세상은 경쟁과 차별이 당연시되고 ‘살아가기 위한’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가치를 찾고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미술책에서 이 그림은 그림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넓은 미술관에서 내 키보다 큰 커다란 그림을 마주했을 때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그림 속의 인물들을 보고 있었다. 하나의 사회, 수많은 사람들 속의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때 떠오른 책이 바로 이 두 책이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그리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이 책의 저자들이 그림에서 본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시선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시선들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세상살이에 익숙해져 한번씩 외치지만 평소에는 늘 뒷전에 두는 그런 마음들. 그것이 조금 더 소리를 높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시선’을 가지고 있는가가 결국 이 사회를 살아가는 방식을 규정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그림이 처음부터 시녀들이라는 제목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화가 자신이 붙인 제목도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점차 이 그림을 ‘평’하는 이들에 의해 그림에 대한 초점도 달라졌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물론 화가의 의도를 진지하게 찾았겠지만. 밝은 드레스와 금발로 빛을 받고 있는 공주와 많은 사람들이 그림 속에 있다. 사람들은 이 그림 속에서 누구에, 무엇에 관심을 가지게 될까. 뒤돌아서서도 생각나게 만드는 장면은 무엇일까.  책의 저자들은 각각 그림 속 다른 이에게 초점을 맞춘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이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저기 앉아 있는 개라고?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의 작가 라헐판 코에이가 그렇다. 작가는 저 그림 속으로 들어가 개를 감싼다. 저 개는 개가 아니라고. 이름은 바르톨로메, 어린 소년이라고.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가 통치하던 17세기에도 지금과 달라지지 않은 점이 있다면 “너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야, 알겠니?”라는 말의 울림이다.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지성과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생활여건이 좋아졌다는 현재에도라고 해야 할까. 저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때론 의지와 다짐의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을 기저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마드리드에 가면 매일 보게 될 왕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는 듯했다. 이 아이들에게 마드리드는 희망의 도시이자 기회의 땅이었다. 바르톨로메에게만 아니었다. 후안은 그런 대도시에서 병신들이 얼마나 심한 차별을 받고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불구자는 이 곳 마을처럼 단순히 구경거리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한테서 침 세례를 받고 갖은 수모를 당했다(p28)


 

   먹을 것이 풍족하다고 해서 지상낙원이 되지는 않는다. 정신적인 풍요가 없다면 말이다. 농촌에 비해 물자가 풍요로운 도시 마드리드가 그랬다. 조롱과 멸시는 곱추 바르톨로메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니 조롱과 멸시로부터 안전한 방법은 존재를 숨김으로써다. 안타깝게도 그의 숨김이 가장 우스꽝스러운 상태로 해제되었을 때 바르톨로메는 최고 권력의 눈에 띄었다. 5살 마르가리타 공주는 바르톨로메를 개, 인간개라고 표현했다. 이후 바르톨로메는 ‘개’가 되어 공주의 장난감으로 살아야 했다. 자신을 장난감으로 만든 공주에게 귀염을 받는 것만이 오히려 편안한 삶을 살게 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 인간이 개가 아닐진대 개처럼 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피로가 따르고 그보다 더 크나큰 정신적인 고통이 뒤따른다.

   그림 속엔 바르톨로메와 같이 장애인이 나온다. 그들도 바르톨로메에게는 못 미치는(적어도 그들은 개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차별을 겪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바르톨로메를 힘들게 괴롭히는 이들은 같은 장애인들이다. 다른 이들이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낄 때 오히려 이들은 바르톨로메를 경계한다. 못난이 난쟁이라 불리는 마리에 바르볼라나 난쟁이 니콜라시토를 보면 순응한 자의 행동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공주의 귀염을 차지하는 바르톨로메에게 위협을 느끼며 자신들의 위치가 변화될까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을 그저 바르톨로메를 제거(죽인다는 의미는 아니다)하려는 데 쓰는 니콜라시토의 모습은 그림 속 바르톨로메에게 발을 올리고 있는 모습에서도 보인다. 오로지 권력자의 말 한마디가 중요한 세상에서 살기 위한 본능적인 체득은 권력자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임을 철저하게 실현하는 그들에게 안타까움과 분노가 함께 느껴진다.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가장 큰 이해를 해주리라는 기대가 무너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순응한 자, 마리에 바르볼라의 말에서 그녀가 견디는 삶의 모습에, 그럴 수밖에 없음에 연민을 느낀다. 

 

잘사는 왕족들의 놀이에 끼여 함께 논다고 생각해. 너무 마음 쓰지 마. 네 일만 제대로 잘하고,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면 여기 궁중에서도 아무 근심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해 봐. 그냥 연극이라고. 넌 그 연극의 주인공이야!(p201)

  그래, 삶이 연극이라면 시간이 정해져 곧 막이 내려질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더구나 고통스런 상황에서라면 더욱 더. 하지만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삶에서 언제까지고 가장 비참한 역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배역을 바꾸어야 한다. 그 배역을 바꾸기 위한 첫걸음이 자신이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다. 바르톨로메는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화가가 되는 일이다.

 

 프레하 : 바르톨로메. 너는 절대 화가가 될 수 없다. 우리 같은 흑인이나 노예, 난쟁이들은 사회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일반인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는 조합이나 단체에 가입할 수도 없고, 출세나 성공 같은 건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고 이 사회에 조그마한 도움이 되는 한 그저 우리를 참아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르톨로메 : 상관없어요!

 프레하 : 상관없는 게 아냐! 네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위해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니? 남들로부터 솜씨를 인정받으면서도 네가 심혈을 다해 그린 그림에는 낯선 사람들의 인장이 찍히고, 낯선 사람의 이름이 붙을 것이다.

 바르톨로메 : 프레하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이제껏 제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던 과거보다는 백배 더 나아요. 저는 화가가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p273)


 

  바르톨로메는 ‘개’에서 ‘사람’이 되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바르톨로메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의 도움과 노력으로 ‘개의 삶’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자신이 살고 싶어 하는 삶에 대한 의지를 표한다. 물론 여전히 바르톨로메의 삶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배역을 바꾸기를 원했고 ‘누군가’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첫 단계로 나아가기 원했다. 개가죽을 뒤집어쓰고 개처럼 헉헉거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바르톨로메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은 안타깝게도 바르톨로메 혼자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람인 바르톨로메가 곱추라는 이유로 개가 되어야 하는 것에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생각과 그 부당함을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들의 연대가 이루어낸 것이다. 그리고 계속 ‘개’로 남아 공주의 총애만을 얻으려 하지 않았던 바르톨로메의 의지가 더해진 것이다.

  개의 등에 발을 올리고 있는 난쟁이에서 인간 바르톨로메를 그려낸 작가의 상상력과 작가의 ‘시선’이 나를 붙든다. 새삼스럽게 함께 하는 삶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끔 한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그림 속의 개는 바르톨로메가 아니다. 처음부터 바르톨로메의 자리가 아니었다. 저것은 그저, 진짜 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저자 박민규는 개 뒤에 서 있는 시녀에 주목한다. 그녀는, 음, 음, 너무 못생겼다. 우리는 기억한다, 주인공을. 주인공은 당연 잘생기거나 예쁘거나, 능력이 많거나, 돈이 많거나, 다 갖췄거나 그렇다. 작가는 가장 못생긴 여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 이야기를 한다. 못생긴 여자를 기억하느냐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고 작곡 했다는 모리스 라벨의 곡과 동일한 제목의 소설이다. 그 때문인지 시종일관 라벨의 배경음악이 깔린 듯이 이야기가 전개된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귓가에 온통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어쩌면 음률이 계속 느껴지는 것이 여운이 아닐까.

아무리 사랑해도 결국 타인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일 뿐이니까. 그것이 자신의 고통이 되기 전까지는, 어떤 인간도 타인의 고통에 해를 입지 않는다(p15~16).

  아마도 그렇다. 그 어떤 사랑이라도 그 어떤 고통이라도 타인의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타인의 고통은 내 것과 비교되었을 때 이해되고 와 닿는다. 1986년에 스무살이던 청년은 1999년에도 여전히 자신의 고통을 기억한다. 그녀에게 모리스 라벨의 음반을 선물한, 함께 「라 스메니나」의 그림을 본 그녀를. 이 소설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보면서 계속 못생긴 시녀에 머무르는 뒤돌아서도 그녀를 떠올리는 한 남자의 기억이다.   

  사랑은 개인적 경험이 아니다. 보편적 경험이다. 다만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개인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사랑경험은 개인에게 특수할 뿐, 타인에게는 고통이 되지 못할 경험이다. 그러나 못생긴 여자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라면 달라진다. 타인의 개인적 경험에 연민을 느낀다. 그런데 연민의 대상자가 누구라고? 못생긴 여자인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인가?

  어쩌면 ‘나’에게 트라우마가 있지 않았다면 이 소설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보다 잘생긴 아버지, 못생긴 어머니는 자신의 헌신이 무색하게 아버지로부터 버려졌고 못생긴 어머니의 아들인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이기에 못생긴 여자에게 갖는 마음이, 시선이 달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못생긴 여자도 부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못생긴 여자를 향한 수많은 사람의 멸시를. 그로 인해 쌓아올리지 못하는 자신감과 상대방의 진심을 믿지 못하게 되는 자신을.


 

나는 그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무엇도 믿지 않았다. 따라 뛰는 사람들, 피리소리를 따라 어디론가 달려가던 사람들과...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세상의 풍경들을 그저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아름다워지는 여자들... 아름다워 <져야만> 하는 여자들과... 학력을, 차를, 또 집을... 말하자면 힘을 <가져야만> 하는 남자들... 서로에 의해, 서로에 비해, 올라선 서로를 위해 구축하던 프리미엄과... 올라서지 못한 서로에게 요구되던 또 그만큼의 스펙에 대해... 그러나 전혀 달라지지 않는 삶의 성질에 대해... 오로지 스펙과... 프리미엄만 늘어날 뿐인 이 삶에 대해... 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30년만 지나면 허물어야 할 한 채의 집을 위해, 실은 조건과 조건... 이윤과 프리미엄에 의해 만난 서로에 의해... 하여, 실은 있지도 않았던 사랑에 내내 절망할 이 삶에 대해... 그 <생활>에 대해... 하여 자신의 자녀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이 삶에 대해... 다시 사랑이란 명목으로 가두고 사육하는 이 삶에 대해... 갖추고 올라섰다 한들, 이를테면 일병 7호봉 정도나 될 그 대단한 프리미엄에 대해... 실은 허망한, 하여 과시밖에는 할 게 없는 이 삶에 대해... 그러나 결국 죽음을 맞이할 이 삶에 대해... 고생하셨어요, 말은 하지만 실은 유산을 셈하고 있을 자녀들에 대해... 그래서 실은 그 무엇도 남지 않을 이 삶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p328)


 

  사랑이야기는 은은하고 안타까움이 더해지며 그것을 더욱 깊고 짙게 하는 것은 저자의 문체와 구성이다. 소소하게 그려 넣은 80년대가 90년대로 넘어가는 변화 속의 사람들의 모습은 그 문체로도 덮을 수 없는 현실감이 느껴지기도, 조금은 과장되어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콤플렉스 덩어리를 모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수많은 덩어리를 모으며 우리는 노예로 전락해 가고 있지 않은지를 사랑이야기 속에 녹여 내었다.

 

“저는 늘 스펙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경쟁력 없이 살 수밖에 없는 대다수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남자들을 위한 소설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여자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저자의 의도는 사실, 달갑지 않다. 같은 상황에서 여자에게는 ‘외모’가 더 추가된 것이 현실이라 해도 외모로 인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이 시대의 여자들에게 과연 이 책은 위로가 될까?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는 것이 위로인가라는 반문을 해본다. ‘나’에게 못생긴 어머니의 일이 없었다면 과연 그는 그림 속 못생긴 시녀에게 관심을 두었을까. 경험이 있음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볼 때 사회에서 ‘소외’되는 자에 대해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고는 생각한다.

  경쟁사회에서 결국 인간을 위로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진정성있는 마음이다. 그것이 상대에게 닿을 수 있는가는 사회가 억누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이 말하는 것은 ‘누군가로부터의 위로’일 수도 있겠다. 이 같은 시대에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일 게다. 그리고 타인의 위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도 타인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로받는 상황이 되는 것은 역시 달갑지 않다. 세상은 점점 위로받고 싶은 자들만이 가득해지고 있다. 가장 좋은 것은 그런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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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게도 국수 - 인생의 중심이 흔들릴 때 나를 지켜준 이
강종희 지음 / 비아북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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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서글퍼지는 날이 있다. 누군가 대놓고 내 등짝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데도  나는 늘 등짝을 후려맞고 있는 기분이다. 하루 하루가 그렇게 이어가지는, 가느다란, 삶. 어이없게도...

  이런 삶을 알아주는 것마냥, 누구나가 다 그렇게 살고 있다는 외치듯이 이런 제목이 눈에 띄었다. '어이없게도'. 그래 삶은 어이없지. 국수가닥들이 모여 삶을 위해 기도하듯 한자리에 모여 있다. 자주 먹던 구포국수같은 표지에 정말 내 삶보다 어이없구나 싶게 웃음이 나왔다. 이건, 국수를 소개하는 책인가.

  그러나 '인생의 중심이 흔들릴 때 나를 지켜준 이'라는 문구에서 이건, 국수종류를 소개한다거나 어느 맛집따위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리고 마주한 모리국수에서 원초적인 삶의 느낌과 마주했다. 아, 점점 작가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

  작가는 자신이 면식범이라 '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지만, 어이없게도 이것은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삶은 국수였다. 작가는 인생의 곳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인생의 희노애락을 겪었다. 작가는 줄기차게 자기는 국수를 좋아해서 그 날의 국수들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녀는 사람을, 그 추억을 기억하고 싶었던 거다. 그녀는 짐짓 그립고 가슴 아린 어느 날을, 그리고 누군가를 떠올리며 자신의 지난 인생들을 다독이고 있지만 드러내놓고 그들이 그립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말하지는 못하는 거다. 국수를 빌려 그 이야기를 전한다.

  삶의 어느 고개에서 마주한 그들과 그들과 함께 나눈 국수 속에 작가의 인생이 녹여난다. 그들이 국수가 작가의 인생에서 어떠한 힘이 되었는지 위로가 되었는지 이 어이없는 국수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돌아보면 작가가 먹는 국수 한그릇마다 나의 인생도 실려 있다는 생각을 들게끔 한다.  뜨거운 국수이든 차가운 국수이든 인생의 누군가와 만나 후루룩 면발을 삼키며 이야기 속으로 젖어들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긴긴 밤, 끝없이 면발이 생각나게 하는 책이다. 그러니까, 삶은, 국수다.  


p21. 누군가가 그랬다. 생선은 낯설고 잔인하다고. 육지의 생명인 나와 다른 세계, 비밀의 바다에서 온 생명을 먹는 행위는 나라는 존재의 생명을 직시하는 행위다. 낯설고 원초적인 바다의 존재, 생선이 그득한 국수 냄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했던가.
`버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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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


그만둬도 괜찮아

-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그만둘까 버텨볼까 고민하는 여자에게, 

유재경, 북포스, 2013.


  여름의 긴 휴가를 즐기고 난 다음, 아 가기 싫어!

  직장인이라면 휴가 첫날부터 시작해 마지막까지 내뱉는 말이다. 아, 회사가기 싫어!

  그럴 때 누가 “그래 가지마, 그만둬”라고 말해준다면 감사…잠깐 그렇겠지만 또 이성을 끈을 붙잡고서 왜 그만두면 안되는지를, 그만 둘 수 없는지를 주절주절 늘어놓게 된다. 직장인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내 의지일 것이니까 타인의 ‘그만둬’라는 말은 결정적 한방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만둠으로 인해 단절되는 그 지폐와의 연결이 삶을 지탱하는 것이라….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시베리아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라는데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곡괭이를 팽개치고 지평선을 향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간다는데 걸어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춘다는데 걸음을 멈춘 순간 밭고랑에 쓰러져 죽는다는데


   오르다 말고 걸어가다 마는 어떤 일생

     - 천양희, 어떤 인생 중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천양희 시인의 <어떤 인생> 속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병에 걸려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잔상이 머릿속에 남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를 안다는 것. 그 견딜 수 없음을 알아챌 수 있다면.

  헬조선, 열정페이. 이 나라에서 직장인으로 산다는 건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병에 걸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정해진 휴가일을 사용하는 일이 불법인양 이뤄지는 문화, 휴가보상금으로 만족하는 문화, 휴일없이 연장근무를 강조하는 문화, 휴식이 게으름인 문화… 그런 문화속에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성과를 내기 위해 쉼없이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멈춰지는 삶을 맞게 될 것이다. 특히 이 땅에서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은 가사일 또한 여성에게 온전히 짐지워진 상황에서 더욱 더 자신을 옥죄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다가 저자처럼 소진되어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쓰러지는 날이 있게 되리라.

  완벽한 커리어우먼이 되기 위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하던 저자는 그것에 만족을 느꼈고 그러한 삶이 행복인줄 안다. 하지만 정신과로 찾아가 울면서 상담을 받으러 갈 정도의 상태를 경험하고 난 후 삶에 휴식이 필요함을 느낀다. 쉰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그 속에 활력과 전진이 있음을 만족이 있음을 행복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삶에서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더할지, 무엇을 강화하고 무엇을 변화시켜야 할지”를 저자는 깨우쳐 가며 더 행복한 삶으로의 전진을 한다.

  물론 완벽한 커리어 우먼이 되기 위해 살았던 저자의 스타일은 이 휴식이라는 것, 삶에서 멈춰 내고 덜어내는 것을 찾기 위한 방법도 일하는 느낌과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쉬지 못하는 이유라거나 쉬어야 할 이유, 그 당연성에 대해서 어느 순간 강박적으로 찾으며 자신이 쉬고 있은 것에 대한 타당성을 찾으려 보여서 안타까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생활방식이 줄곧 자신이 채찍질해가는 스타일이던 저자가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자신만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저자는 자신의 스타일로 자신이 살아온 생활방식, 자신을 이끌어가던 신념을 조정해 갔다. 그 노력이 놀라웠고 응원하게 된다. 우리에게 오랜 세월 체화된 암묵의 방식들을 바꾸는 일은 얼마나 힘든가.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했다. 그 노력으로 저자는 쓰러지기 전, 아니 쓰러져서 다시 일어났다.

  사실 세상은, 아니 직장은 내가 없으면 안될 듯이 굴어도 없어도 잘 돌아간다. 그것을 알게 될 때 은근한 씁쓸함이 든다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그렇게 존재감을 획득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없다고 없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은 결국 끊임없이 일을 ‘시키기’ 위한 방식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에 걸려 나 없으면 일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의 취미와 욕망을 누르며 너없음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짓 회사의 소리에만 귀기울였는지 모른다. 어쩌면 더욱 열심히 일하거나 적절하게 쉬면서 일하거나, 그 모든 것에서 중요한 것은 ‘자아’를 잘 조정하는 일이 아닐런지. 그리고 언제든 “그만둬도 괜찮다”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전제하고 있을 때 자유로운 생활을 더 구가하며 직장인의 삶도 잘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쉼,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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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환’이 나를 스토커로 만들다



How to Live 갈림길에서 삶을 묻다의 저자

윌리엄 브리지스



■ ‘가장 영향력 있는’???


  세계적인 유력 일간지 중의 하나로 꼽히는 『월스트리트 저널』은 기업과 금융관계 기사 보도를 1차적 목적으로 창간한 신문이다. 미국 뉴욕시에서 발행되는 이 신문은 정확한 보도와 넓은 취재범위, 작은 것에 대해서도 세심한 취재가 신문의 호평과 성공을 이끌고 있다. 이 신문은 자주 ‘가장 영향력 있는’ 시리즈를 선정한다.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십 전문가, ‘가장 영향력 있는’ 경영사상가,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기업인,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철학자 등등……. 그리고, ‘가장 영향력 있는’ 컨설턴트???

  기업과 금융 쪽에 관심이 별로 없기에 이런 주제에 흥미를 갖지도 못하고 너무 자주 월스트리즈 저널발 ‘가장 영향력 있는’ ○○인 리스트를 들어왔기에 여기 10인의 컨설턴트라는 글에도 별로 놀라움을 가지지 않은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나의 관심이었다. 나의 머리가 얼마나 따로 놀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은, 분명 아내가 사망했다는 글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보고 순간적으로 ‘남자야?’라고 했다는 점이다.

  어느 때는 작가 소개나 책의 소개에 내용이 아닌 이러한 외형적인 수식어와 홍보가 글을 읽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읽기도 전에 놀라야 하나? 다른 사람들은 다 놀라워하는데 내 맘에 안들면 그만큼 내가 부족한 건가? 따위의 생각도 들기도 하고 말이다. 반면, 당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의 생각을 읽게 된다는 데 대한 기대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저러한 수식어로 홍보된 이 책은 내게 기대에 대한 충족과 만족을 줄 것인가, 과도한 홍보만도 못한 감흥을 줄 것인가!?


■ 그의 ‘전환’이 나를 스토커로 만들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전환’의 모든 것을 아내와의 사별로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나는 제법 일찍이도 아내와 사별했나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무려 37년간이나 아내와 함께 했고 황혼 무렵의 아내와의 사별은 충분히 충격적이고 쓸쓸하겠거니 했다. 그러다 어느 글에선가 ‘아내와 살고 있다’라는 글을 보고 내 머리가 멈춰버렸다. 이것이 무언가. 분명 아내의 사망으로 쓸쓸함과 인생의 전환을 주구장창 나열하던 상황에 그 무슨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는 말인가. 그 때부터 쓸데없이 나는 이 사람의 스토커가 되어 기록을 찾게 되었다. 저놈의 ‘영향력 있는’이라는 조사 때부터 탐탁치않은 마음이 폭발한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의 기록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거야. 겨우 위키피디아에서 작년에 사망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나이 79세. 잠시 경건한 마음으로 애도하고 다시 뒤적였다. 정말, 아내가 죽고 ‘전환’을 열렬히 주창하더니, 새로운 아내로 ‘전환’한 것인가?

  아내와의 사별이 자신의 인생에서 ‘전환’에 이르게 되는 그 모든 이야기들이 그의 재혼이야기로 옮겨가면서 이 ‘변화와 전환’에 관한 개념과 이야기는 지극히 윌리엄 브리지스의 지극히 개인사적인 결혼과 재혼이야기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는 아내와 사별하기 전에도 충분히 ‘전환’에 대한 개념을 강조하고 이야기를 하던 컨설턴트였다. 왜 갑자기 ‘전환’에 대한 그의 논점이, 아니 그에 대한 설명이 개인사적으로 흘러가며 변하게 되었을까. 물론 나는 그의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대략의 책 검색을 통해 그가 이 분야로 직업전환을 하면서 가졌던 그의 기본적인 생각, 메시지는 같았다.

  나는 이 책이 왜 그가 재혼을 한 당위성(?), 필연성(?)을 지나치게 알리기 위한 글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지 모르겠다.


■ 윌리엄 브리지스의 인생 전환


직업 전환 : 영문학 교수 → 변환관리 컨설턴트


 마흔이란 나이는 서양의 남성에게도 흔들리는 시기인 걸까. 저자는 사회에서 사회적인 지위를 충분히 얻은 영문학 교수의 직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의 전환을 이룬다. 자신이 살고 있던 거주지까지 바꿔가며 그가 하고자 한 것은 ‘전환관리’에 관한 컨설턴트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영문학을 가르치는 대신 경쟁 시장에 뛰어들어 기업인들에게, 조직에게, 개인에게 삶의 변화와 전환에 대해 조언하는 일을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보란 듯이 성공한다. 그가 이러한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긴 그때는 그의 나이 마흔이 넘은 때. 그의 삶의 마흔이 지나면서 그의 생에 찾아온 어떠한 흔들림을 그는 잘 이겨내었다.

  분명 영문학 박사로서, 교수로서도 그는 전문직 종사자로서 전문가였다. 그러나, 어느날 문득 ‘변화와 전환’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일에 몰두하기까지 곧바로 성공이 보장된 길은 아니었다.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의 저서가 베스트 셀러가 되고 이를 바탕으로 강연과 컨설팅을 더욱 확장하면서 그는 확고하게 이 ‘전환관리’ 분야에서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인생 전환 : 사별, 그리고 재혼


 이쯤되면 이 작가를 부러워할 사람이 많겠다. 아니 부러워할 남자들이 많겠다. 26세에 19세의 아내를 만나 37년간 결혼생활을 했다.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농담이 들어가 있는 진담으로 남편은 아내가 죽으면 울지만 화장실에서 웃는다고 하지 않는가!

 육십이 넘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한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과 상실감이 없지 않았다고 하진 않겠다만, 어쨌든 그 나이에 너무나 잘 극복하고 19세 연하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여 결혼에 성공한다. 과정이야 어떠하든, 그냥 표면적인 상황을 놓고 보자면 참 성공한 인생 아닌가.

  사실,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 함께한(실질적인 갈등도 물론 있었고, 힘들었다고 토로하고 있긴 하지만) 아내가 있었고 그리고 육십이 넘은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 또한 약 20년 정도의 생활을 함께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성공했다. 물론 그는 그의 아내와의 관계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뉴잉글랜드 출신인 자신과 캘리포니아 출신인 아내는 시작부터 하나가 되기 어려웠다고 한다. 미국의, 미국인의 특성을 잘 모르기에 이 차이가 우리나라의 지역적인 편견이 가득한 경상도와 전라도의 관계쯤 되는가 생각해봤다. 이런 지역적인 차이 이외에도 성격적으로도 맞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뻣뻣하고 합리주의자였고,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며 논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그의 아내는 외향적이었고 에너지가 넘치고 카리스마가 있는, 그러나 왠지 모를 그늘이 있는 여자였다고 말한다. 정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른 부류의 사람, 그것이 그가 말한 아내와의 관계였다.

  또한 그의 아내는 결혼 당시 매우 어린 나이였다. 그리고 성격적으로 맞지 않은 저자와 37년을 사는 동안 한번의 외도경험이 있었다. 저자는 아내의 이 외도를 받아들이지 못해 10년여 동안 제대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고 그녀가 위급한 상황에 도움을 청할 때 무시했다고 한다. 나아가, 암으로 사망하는 아내가 죽기 2년 전, 이미 아내와의 관계를 정리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는 구구절절 아내를 잃은 슬픈 남자의 심정을 토로한다.


p90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심정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매우 특별한 일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아내가 죽은 이후로 하루하루는 완전히 텅 빈, 그러나 완전히 꽉 차 있는 시간들이었다. 삶은 공허했지만,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 동안 나는 처리해야 할 일들 사이에서 몽유병환자처럼 아무 생각 없이 지냈다. 생각이 너무 마비된 나머지 가끔은 주변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 까맣게 잊고 지내기도 했다. 마치 피노키오가 되어 거대한 고래에게 삼켜진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내 인생’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과 단절한 채 지냈다.

 

p96 사별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이런저런 파멸의 징후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중요한 것은 이미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해 보려는 나의 마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의식의 저 깊은 곳에서 나는 온전하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놓아버린다는 것은 잡고 있던 것을 놓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회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는 상관없이 길고 긴 탐험의 과정이다.


p98 그때까지 그녀의 존재가 나를 얼마나 성장시켰고 돌아보게 했으며, 좀 더 믿을 수 있게 만들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알게 된 두 번째 사실은,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는 외롭고 고립된 청년이었던 내가 결혼을 통해 성장했다는 것이다. 아내의 죽음으로 오랫동안 알고 있던 단 하나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잃었다. 아내는 천성적으로 세상에 ‘무심하게’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많은 부분을 아내와 감정적으로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우리 주위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p99 나에게는 그녀의 죽음이 곧 현실의 시간으로 다가온 것처럼 여겨졌다. 나 자신을 반만 믿게 된 상실감은 사랑하는 사람을 갖게 된 유일한 경험이었다. 따라서 아내의 죽음은 우리의 관계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능력까지도 없애는 일이었다. 아내의 사랑뿐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능력까지 없애는 일이었다.

      아내가 떠나면서 내가 경험한 외로움과 영원히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이 죽었다고 느꼈을 때 느낀 치명적인 외로움을 구별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필요했다. 아내는 나와 인간을 연결하고 나와 내 자신을 연결해 주는 그 자체였기 때문에 아내를 잃은 것은 처음에는 넓고 무서운 세상에 버려진 채 홀로 모든 것을 막아내야 하는 어린 시절의 환상같이 생각되었다... ‘마치 추방당한 기분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p100 아내가 죽자, 일상적인 현실에서 느끼고 흥분할 수 있는 연결고리와 단단한 기반을 잃은 것 같았다.


  이렇게 생활한 그이기에 그가 재혼하게 된 것은 확실한 ‘전환’ 아니겠는가. 상실감으로 세상과 단절한 이가 아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1년 반 정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결혼하기까지 놀라운 전환이다. 특히 두 번째 재혼에서의 적극성은 놀랍다. 그가 말한 성격을 가늠하고 죽은 아내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과 18살 연하의 수잔에 대한 사랑과 재혼은 그의 적극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물론 그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고 나이차에 대한 고민도 하고 주저하지만 결국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데이트를 하며 나아가지 않았는가. 그토록 상실감이 커서인지, 그는 아내가 죽은 지 1년 반만에 수잔과 재혼한다.


p290 아내의 죽음과 나의 재혼에 연관된 전환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성공적인 전환에 대한 그 어떤 가르침도 따르지 않았다.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하지만, 정답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우리의 삶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 필요 없는 세계가 되기 때문에, 그 책은 존재 이유를 없앤다. 유일한 존재로 사는 방법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역경의 여정을 지나고 그러면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세계와 부딪히며 살면서 자신의 방식으로 살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삶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옷걸이에서 내려져 새로운 코트처럼 입혀지길 기대하면서 옷장에 걸려 있는 밝고 신선한 삶은 없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아내를 용서하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이것저것 적어 놓은 글을 그녀가 죽자 태워버렸다. 볼 수가 없었노라 이야기했지만....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변화를, 전환을 거부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이 책의 주장과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어색하다고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그냥 아내와의 관계에서의 에세이는 에세이대로 그의 경력에 맞는 '전환'에 대한 주제는 분리시켰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묘하게 아내에 대한 반감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듯한 글을 보며, 요즘은 스토리텔링기법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지만 왜인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스토리...경험의 내용은 다르고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변화하는지는 물론 개인적인 것이긴 한데, '전환'에 있어 탁월성을 인정받은 것은 그의 경력일까, 아니면 이 책과도 연관이 있을까. 그의 전환에 대한 활동은 40세즈음에 시작되었음을 보면 아내의 사별 이후 '전환'에 대한 각성이 아니라 '전환'에 아내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한 것은 아닌지....이게 중요한가..아무튼, '전환'이 필요한 .그 시기에 전환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자! 이것이 그의 메시지다.


참고자료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wiki/William_Bridges_(author)

∙윌리엄브리지스 컨설팅 홈페이지 http://www.wmbridges.com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chorental&logNo=110187473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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