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지음 / 귤프레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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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거다. 

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귤프레스, 2018-01-22.


  장례가 끝나고 난 뒤 수많은 감정 중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있었다. 세상에 다행이라니. 한 생명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인지 명확히 알지도 못한 채 한밤중 닥친 소식에 망연하던 정신은 어디 가고 장례가 끝났다고 다행이라니. 슬프게도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장례식 내내 슬퍼하기 이전에 전투적이 되었던 나. 돌아보면 장례 전까지 매일을 긴장 상태에 있었다. 두 명의 어머니가 병원에 계신 엄마에게 이입된 모양이다. 어머니와 시어머니 모두 병원에 계신 엄마는 매일을 시어머니를 방문했다. 물론 아버지와 번갈아 가시긴 했지만 미음을 끓이는 일은 엄마의 몫이고 할머니 상태를 묻는 시누이들의 잦은 전화에 답하고 나면 ‘우리 엄마한테도 가야 되는데’라는 말을 읊조리셨다.

  “할머니랑 외할머니랑 같은 날 돌아가시면 어떡해?”

  아버지는 할머니 장례에 엄마는 외할머니 장례에 가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엄마는 시어머니 장례에 가야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작은 어머니, 작은 며느리였다. 작은 며느리는 실제로 그런 집을 본 적이 있다며 그 집은 각자 자기 부모님 장례에 가기로 했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그런 집을 보았다는 얘기의 결말이 왜 우리 엄마는 자신의 엄마의 장례식이 아닌 할머니 장례식에 가야하는 것으로 귀결되나. 

  “큰며느리니까.”

  그 집은 다행히 ‘작은 며느리’라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작은 어머니는 말했다. 그 순간 또다시 더할 수 없는 경계를, 벽을 느끼고 말았다. 엄마는 아무말씀 하시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런 거다”라고 말했다. 커다란 돌덩이가 들어앉고 무수한 돌멩이가 날아오는 기분이 들진대 울엄마는 어땠을까. 그러니, 우습게도 난 장례식 순간순간 외할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물론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한국의 가부장제 문화는 장례 기간에도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럴싸하게 경계짓는 아들과 며느리, 며느리와 시누이의 역할, 관계들.

  웹툰작 『며느라기』는 우리나라 거의 모든 가정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적나라한 이 가족의 모습이 ‘내 가족’의 모습이 아니라고 ‘내’가 겪는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며느라기』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며느리”들은 모두가 힘겨워하면서도 ‘함께’하지 않는다. 불편하고 찜찜한 무언가를 느끼면서도 결코 문제를 보려하지 않는 그림이 그려진다. 똑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있지만 공감은 없이 나 혼자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안간힘 쓰고 있다. 왜 이렇게 문제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서로 힘겹다 말한마디, 연대할 말조차 잃어버리고 있는가. 가족이라면서.

  며느라기. 우리 엄마는 기꺼이 “며느라기”가 받겠다고 말했을까. 큰며느리는 이 가정에 들어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가. 의무와 책임이 크다면 큰며느리의 권리는 도대체, 무엇일까. 큰며느리는 이제 다가올 시아버지 제사를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생일날 돌아가신 시아버지 덕분에, 생일날 제사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나날이 오래되었다. 어떤 시누이는 그렇게 말했다. “생일이라고 사람들 다 모이라고 시아버지가 그날 돌아가신 거야.”

  좋게 들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냥 곱게, 좋게 듣기엔 찜찜한 말들이 “며느리”들에게는 가해진다. 속상하자면 한도 끝도 없고 그렇다고 듣지 않았다고 하기엔 한으로 쌓일 말들을 며느리는 담고 있다. 나또한 ‘며느리’ 입장으로 고모들을 보면서 ‘시누이’라는 역할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건 또 모르는 일. 가부장제 문화에 길들여져 이제는 대꾸하기도 싫어져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 일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것이 최선이 되어버린 날도 적지 않다. 그러니 또, 그렇게 누군가를 무언가를 비판하려 할 때면 못한 일이 생각나 움츠러들고 만다. 결혼 전 민사린이 똑부러지게 무구영에게 효도에 대해 일침하다가도 결혼 후 예쁨받는 며느리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처럼 문화라는 것은 이렇게 사람을 만들어버리는 것인가. 모두가 힘겨워한지 오래되고 행복하지 않은 문화가, 지속되고야 마는 이유는 무언가.

  연애기간 처음 남자친구 집에 가면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생각하는 김혜리에게 “가사도우미 면접 보느냐”는 물음이 이토록 명확한 물음으로 다가올 수가 없다. 명절이면 각자의 역할에 따라 입장이 명확히 바뀌는 모습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일상의 모습이 드라마로 나타날 때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가”라며 흥분하면서도 “우리집은 안그래”, “나는 안그래”라고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이제쯤은 변하겠거니 하면서도 아직은 먼 길. 수없이 이런 이야기들이 난무해도 늘, 내가 겪는 일은 아니라며 나는 아니라며 버티는 것일까.

  『며느라기』에서는 모두가 힘겨운 표정을 짓는 가운데 쇼파에 앉은 ‘아버지’만이 그대로다. 그 어떤 불편한 표정도 없다.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존재, 그 존재로 인해 이 사회가 이렇게 유지되고 있다는 현실을 『며느라기』그림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불편하고 속상하고 부당함을 느끼는 모두가 밖으로 나간 상황에서도 쇼파에 드러누운, ‘아버지’라는 존재. 늘 고부갈등만이 부각되고 있지만 이런 문제의 중심은 ‘아버지’라는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럼에도 이 땅의 며느리들은 시어머니, 시누이, 남편, 며느리들 서로간의 감정적인 소모전으로만 치닫고 있다. 무어 그리 큰 권력이라고 떡 버틴 ‘그’로 인해 행복하지 않은 삶들이 이어져야 된단 말인가.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딸에게 ‘그런 식으로 살지 말라’고 말해놓고 돌아서서 며느리에게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변화.

  “그런 거다”

  같은 며느리에게서 ‘며느리 역할론’이 나왔을 때 느껴야 했던 자조가 더 컸던 것은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기에, 그 힘겨움을 가장 잘 알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기대했던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도록 며느리의 힘겨움이 토로되면서도 변화가 없던 것이 그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픈 욕구가 강한 나머지 ‘나’에게만 집중해서일까. 각자가 살아남는 방법밖에 달리 없었기에. 같이 힘겨움을 나누고 방법을 고민하지만 그 전투력은 또한 실상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지 못하기도 하고. 그런 걸까.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도 힘겨운 큰며느리의 삶을 사는 엄마를 보면서 수년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 슬프다.

  더 많은 가족이 모이면 모일수록 가족 내에서의 근본적인 변화 방법을 모색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한들 무너져 버리기도 하고. 가족들 스스로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가족만으로는 해결이 힘들다는 것을, 변화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느낀다. 그런데 이 변화를 위해 가부장제의 확장된 틀인 사회의 역할을 생각하고 있으면 희망보다 자조가 먼저 치솟는다. 미투나 여성혐오에 대한 사회의 반응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방법과 대안에 대한 얘기도 무수히 흘러왔겠지만 '하지마‘라는 것으로만 흘러왔는지도 모르겠다. 딱히 바꾼 일도 없는데 벌써부터 지치게 된다. 이런 얘기에는 감정이입도 많이 돼서 쉬이 지쳐버리게도 된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감정이입이 되다 보면 쇼파에 누운 아버지도 언젠가는 쇼파에서 내려오는 일이 많은 가족들이 쇼파에서 멀어져 집 밖을 배회하는 일이 소멸되는 날이 오겠지. 그런 깨달음을 느끼도록 이런 책들이 나오는 것이고. 생각해보니 쇼퍼에서 책읽기만큼 편한 일이 어딨나 싶다. 더구나 그림책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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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가 말하는 사회복지사 - 22명의 사회복지사들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사회복지사의 세계 부키 전문직 리포트 17
김세진 외 지음 / 부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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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가 말하는 사회복지-

  22명의 사회복지사들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사회복지사의 세계


  『사회복지사가 말하는 사회복지사』는 22명의 사회복지사들의 자신의 업무 이야기를 전한다. 그저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이 사회복지사라고 생각하겠지만 사회복지사라고 통칭되는 이들의 활동 영역은 무수히 많다. 그 대상자만 하더라도 노인, 청소년, 아동, 장애인, 청소년 등등으로 나뉘고 각각을 담당하는 복지관과 센터, 병원, 학교, 조합, 시민 단체 등등 활동기관은 무수하다. 사이버 시대이니만큼 사이버 공간에서도 복지 업무가 이뤄진다. 이 책에서는 실제 활동하는 영역에서의 일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기에 사회복지사의 업무의 영역이 이렇게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복지’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이해의 출발은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클라이언트의 갈등, 직원과의 갈등 속에는 항상 감추어진 내가 있다. 스스로에 대한 성찰 없이 사회복지의 길을 간다는 것이 ‘허망’하기까지 한 일이다.


  글쎄, 어떤 직업이든 직업을 선택할 땐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갈등이란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사회복지’ 업무에서는 이런 염려 외에도 많은 염려가 붙는다. 단순히 업무와 관련된 ‘자격증’을 갖춘 것과는 별개로 어디서든 요구하는 직장인으로서의 자세, 마음가짐을 빼고서도 ‘사회복지’를 업무로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 실제 사회복지사들은 사회복지의 이념과 사회복지사의 의무를 제정한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이 있다. 이런 윤리강령을 성실히 지키고 모든 자세를 갖추고 업무에 임하는데도 사회복지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뭘까.

  출근한지 2개월쯤 된 사회복지전담공무원의 투신 뉴스를 접한 지 열흘쯤 지났다. 근무환경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고 투신과 업무 관련성에 대한 감사가 아직 진행 중인지 이후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사망한 줄 알았는데 기사를 보니 중태인 모양이다. 쾌유를 빈다.

  많은 청춘들이 어려운 취업관문으로 힘들어 하고, 공무원 준비에 매달리고 있기도 하다. 공무원과 취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그는 다른 이들에겐 꿈을 이룬 성공한 사람이다. 이제 출근한지 두달, 힘들고 어렵기도 하겠지만 아직은 취업성공에 대한 기쁨이 더 크지 않을까 싶은데 직장생활에서의 힘겨움을 토로하며 투신한 소식에 많은 이들이 충격받았다. 이제 막 직장생활을 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당연한 업무와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있을텐데 조금 더 참아볼 것이지 하는 안타까움도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메모에 대다수의 사회복지사가 수긍하고 있다는 얘기가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다.

  '지옥 같은 출근길' '사람마다 속도의 차이는 있는데 냉정한 사회는 받아들여주질 않는다' 그리고 ‘사회복지사의 인권보장이 시급하다'는 메모. 이로 인해 ’사회복지사‘의 업무가 또다시 이슈가 되었다. 사회복지사의 열악한 업무환경에 대해선 오래도록 지속되어 온 이야기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비해 사회복지사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사회복지사에게 부과하는 ’이미지‘다. 어떤 경우라도 남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쯤은 감수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도 마찬가지다.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에 대한 선하고 착한 일을 하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되어 힘들고 어려운 일을 참고 견디는 것이 당연하다는 은근한 강요가 있다. 그것이 사회복지사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사회복지전담공무원은 민간 사회복지사에 비해서 처우가 높기에 사회복지공무원 선발이 있을 때면 민간에서의 대규모 이직이 발생하곤 했다. 하지만 사회복지공무원의 자살 소식은 끊이지 않았다. 처우가 좋다는 사회복지공무원이 과중한 업무와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할 정도라면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복지사들은 상황은 어떠하단 말인가. 어느 직업에선들 인권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냐만은 유독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에 ‘인권’이라는 말이 계속 붙어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그만큼 잘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 사회복지대상자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사회복지사들 자체의 인권이 침해받고 있다면 건강하게 그들이 보호하고 보장해야 할 대상자들의 인권을 챙길 수 있을까.

  책에서 사회복지사들은 지금의 업무를 맡기까지 어려움과 스트레스가 있었음을 얘기한다. 자신에게 맞는 활동영역을 찾고서도 업무에서의 힘겨움은 줄지 않는다.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이다보니 그와 얽힌 갈등관계도 담겨 있고 감동과 희열의 순간에 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사회복지에 관해서는 이 후자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더 중시여기는 듯하다. 물론 모든 갈등관계를 풀고 사회복지대상자들의 변화된 모습을 이끌어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기적과도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을 가지는 것을 보상처럼 여기며 그 앞의 모든 힘들 과정이나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결과만을 따져서는 안되는 것이 또한 사회복지 영역 아닌가. 그런 점에서 사회복지가 현실과 이상이라는 괴리에서 ‘이상’을 추구하며 그것에 가치를 두면서 ‘현실’에 있는 사회복지사들을 외면하고 있는 듯하다. 열정페이처럼 사회복지사들의 마인드를 강요하며 이상을 추구하자는 한마디 말로 현실적인 힘겨움을 부족한 마인드와 자세 때문이라 치부하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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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화가들 - 네덜란드.벨기에 미술기행
금경숙 지음 / 뮤진트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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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와 튤립은 보이지 않는 그림

플랑드르 화가들 - 네덜란드·벨기에 미술기행, 금경숙 저, 뮤진트리, 2017.


  네덜란드에서 돌아가는 풍차라거나 피어 있는 튤립을 본 적 없다. 그럼에도 네덜란드 하면 풍차와 튤립을 떠올리는 이 자동적인 반응은 네덜란드에 대해서 최초로 ‘배운’ 것이 그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암기처럼 배운 네덜란드의 이미지는 이 책을 읽고서 조금은 바뀌게 되려나. 미술책에서 본 많은 화가들의 고향이 네덜란드라는 사실을 새롭게 각인하게 된다.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는 저자가 직접 네덜란드와 벨기에 화가들의 자취를 쫓으며 들려주는 그들의 인생과 그림 이야기에는 풍차와 튤립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역사가 있고 드문드문 들었던 이야기의 장소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 고흐와 렘브란트의 고향과 『플란다스의 개』에서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성당 속 그림이 있는 장소를 되짚는 기회가 된다.

  플랑드르는 현재의 프랑스 노르 주, 벨기에의 동플랑드르·서플랑드르 주, 네덜란드의 젤란트 주를 이른다. 현재는 세 나라가 어우러진 곳이고 미술의 역사에서 ‘플랑드르 화가들’이란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활동한 화가들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는 얀 판 에이크, 히에로니무스 보스, 피터르 브뤼헐, 루벤스, 프란스 할스,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반 고흐, 페르낭 크노프, 제임스 엔소르, 몬드리안, 르네 마그리트 12명의 화가들의 작품과 생애와 흔적을 보여준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영감을 찾아 방랑하기도 하고 더 배우기 위해 고향을 떠난다. 그렇다면 ‘플랑드르 학파’라 불릴 정도로 이 지역에서 화가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아주 당연한 이유 이외에 그들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림을 그렸는지 그들 그림에 나타난 특유의 분위기는 무엇인지가 플랑드르 역사와 함께 펼쳐진다.


예술가들이 대체로 환경을 거스르는 사람들이긴 해도, 고흐 이전의 플란데런 거장들은 그 시대의 중심지이자 그림으로 생존할 수 있는 사회 환경과 예술가들의 풍성한 움직임이 있던 곳에서 태어나거나 자랐음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예술가를 알아보고 후원을 아끼지 않던 시대의 남다른 예술가들을 끌어들여 붙박이형으로 만들었으나,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우리나라 통영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머물고 활동했던 것처럼 플랑드르 역시 해안가로 많은 물류들이 드나들 수 있었고 여러 국가들이 인접해 있는 지역적 특성이었다. 또한 사람의 삶이란 주어진 환경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기에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정치, 경제, 문화는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소재와 의지를 주기도 한다.


네덜란드 역사에서 1672년은 ‘재앙의 해’로 불린다. ‘민중은 이성을 잃었고(redeloos), 정부는 가망이 없고(radeloos), 나라는 구할 길이 없다(reddeloos)'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입해왔고, 예상치 못한 전쟁에 민중이 분노하여 권력자들은 하야했다. 총독 부재기간 동안 의회의 공화주의자들은 전쟁보다는 조약으로 대립을 완화하려 했으나, 평화는 이들의 의지대로 찾아와주지 않았고 영국과 해전을 치러야 했다. 네덜란드가 이겼다고는 하나 피해는 만만찮았다.


  언제나 세계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플랑드르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구나 계급사회였으니 그림을 향유하는 계층은 언제나 귀족들이나 종교인들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늘 권력에 억압받는 민중의 현실을 폭로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종교권력의 위선을 폭로하는 화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민중들의 일상의 모습을 담담히 그려내는 화가들이 있었다. 사진이 발명되지 않았던 시기에 그림은, 화가는 암울한 현실을 기록하는 역할을, 위선자들을 폭로하는 역할을, 억압당하고 피폐한 삶에도 부패한 권력에 강력히 저항하는 민중의 모습을 기록했다.


예술가들의 삶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면 세기말 벨기에는 신비롭고 근대화된 사회였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생존권과 참정권을 쟁취하려는 투쟁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엔소르가 이 그림을 그릴 때에는 기득권이라 할 가톨릭 정치세력에 맞서 사회민주주의 정치세력이 부상하던 참이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린 곳이 어디인지를 궁금해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모양이다. 네덜란드 일상 풍경을 잘 담아낸 페이메이르가 그린 두 개의 아치가 나란히 있는 문이 그려진 그림의 장소는 진짜 있는 것이지, 화가가 상상한 장소인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한다. 결국 운하세 대장까지 찾아서 그림속 장소를 찾아낸다. 저자가 찾아가는 그림속 장소는 그림에서 보던 것과는 달라졌지만 그냥 그림속 장소라는 이유로 정감어리게 여겨진다. 과거의 플랑드르와 현재의 플랑드르의 간격이 그 시대를 살며 활동한 화가들의 생애와 그림들로 인해 연결된다. 플랑드르의 역사와 함께 화가들이 자취가 가득한 플랑드르 지방으로의 여행은 렘브란트, 마그리트, 루벤스 등 널리 알려진 화가의 명성에 의해서도 보고프지만 점차 플랑드르 지방이 지니는 매력을 느끼고 싶은 기운까지 더하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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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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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할지어다

라틴어 수업-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2017.


  이탈리아 정치 혼란으로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하는데 투자할 금융도 없고, 남의 나라라서인지 그 혼란과 불안이 와닿지 않는다. 그동안 외국인은 한국에 전쟁위협과 정국불안정 소식에 얼마나 불안했을까. 휴전된 나라이니만큼 전쟁 조짐·위협에 매우 민감했는데 정작 한국인들만은 불안을 모르고 무심한 반응이라 의아해 한다는 얘기 또한 수없이 들었다. 전쟁 위협에 덜 민감했더라도 평화 분위기에 벅차오른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역시 ‘조국’ ‘민족’ 이런 것을 무시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한 나라가 어떤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는지, 그것이 현재와 미래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가지며 ‘나’를 형성해 가는데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을.

  그러다 문득 이탈리아하면 무솔리니와 파시즘만을 떠올렸는데, 이탈리아의 역사에 로마제국이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늘 두 나라를 분리해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많은 변화와 재편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별개로 인식하고 있던 것은 여전히 ‘다른 나라’의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로마 제국의 문화적 유산은 전세계에 산재하며 그 중심에 이탈리아가 있다. 심지어 사어가 되어버린 라틴어조차도. 나라만큼은 멸하여 사라졌지만 문화와 언어만은 뿌리를 깊게 두고서 영원히 소멸하지 않았다. 철학, 문학, 과학 등등 모든 학문에도 라틴어가 생생해서 책을 읽다 보면 항상 ‘라틴어’를 배우고 싶다는, 배워야 할까 생각하게끔 한다. 그렇다면 『라틴어 수업』이 매우 효용성 있는 책 아니겠는가.

  실제 수업의 강의안이 책으로 엮어졌다는 이 책은 라틴어를 읽히는 단순 어학 강좌가 아니라 로마와 이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학생들에게 인기있는 강의였다고 하는데 한국인이자 동아시아 최초 바티칸 재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인 작가의 경험과 통찰이 재미와 흥미를 주었기도 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학생들은 학점 이수를 떠나서 인생에 대한 성찰을 하게끔 한 강좌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라틴어를 배우는 수업에서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한두 시간의 이야기로 이루어질 것이 아니다. 언어 속에 깃든 삶의 이야기가 쉴새없이 쏟아지는 강좌에서는 낭만이 지식이 풍겨져 나온다. 익숙히 알고 있던 단어의 어원과 파생된 단어들, 그 속에 깊게 담긴 뜻들을 살펴보다 보면 분명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생기게 된다.

   

어원학을 바탕으로 할 때 ‘거룩한’이란 말은 분리의 개념, 의식의 순결에 해당하는, 특별 조건이 아니면 다가설 수 없는 불가촉의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말합니다. 라틴어 ‘사체르sacer'는 ’거룩한‘이란 뜻도 있지만 ’저주받은‘이란 뜻도 있는, 양가감정이 함께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거룩할지어다sacer esto”라는 말로 저주를 나타냈고, 이 문구는 로마인들의 단죄 양식이 되었어요.


  이 책을 읽지 않았던들 ‘거룩할지어다’가 저주의 표현임을, 로마인의 욕설은 세련되고 섬세하여 마치 욕설인지 모르듯 하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을까. 라틴어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여 ‘거룩’한 느낌 또한 지워지지 않았는데, ‘거룩할지어다’가 이토록 저주의 말로서 단연 으뜸이란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나온다. ‘거룩할지어다’.

  그렇다. 이 책은 거룩하다. 지극히 경건하고 담백하다. 그리하여 정화의 느낌이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불편함도 있다. 말씀을 고이 따르지 않는, 못하는, 불건전한 사람임을 자꾸 느끼게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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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마초를 말하다 - 우리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야기
클레망틴 오탱 지음, 류은소라 옮김 / 미래의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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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가 좋니?

페미니스트, 마초를 말하다, 클레망틴 오탱, 미래의창, 2016.


  맨스플레인(mansplain)이 난무하는 가운데 일찌감치 걸스플레인 콘셉트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누나가 알려줄게, 페미니즘 잘 얘기해주는 누나라고나 할까. 남동생의 질문에 답해주는 형태의 이 책은 짧은 페이지 속에 여성운동의 역사를 잘 설명해놓았다. 무엇보다 ‘마초이즘’이 ‘페미니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재밌고 쉽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파리 부시장을 지낸 정치인이며 성폭력, 강간 피해자이다. '정상적인 남자가 아니라 정신병자에게 당했다'라고만 생각하던 작가가 여성과 억압을 성찰하며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에 관한 관심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바로 2년 전 오늘, 강남역 살인사건이 촉발제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이 단어에 관심을 기울이며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기도 하다. 여성혐오 확산과 미러링과 함께 전개된 남성혐오, 미투운동과 남성 몰카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성별 대결 논쟁으로 치닫고도 있다.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를 테러리스트와 동일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페미니스트를 향한 테러는 끊이지 않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 빗속에서 추모제가 진행되는 가운데 “염산 테러 공격” 하겠다는 글이 어느 싸이트에 올라왔다. 농담으로, 허세 가득한 글로 치부하기엔 지금의 현실이 녹록치 않고 이런 글을 쉬이 게재한다는 것은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세계에서 이처럼 ‘여성이 싫어서’ ‘페미니스트를 증오해서’ ‘여성이 만나주지 않아서‘ 등등의 ’여성 때문에’를 이유로 수많은 이들이 총기난사사건과 테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서. 남자들이 원하는 형태의 ‘여자가 아니라서’의 이유로.

  ‘마초’. 마초적이라는 이 외국 단어를 남성들은 매우, 격렬하게 좋아하는 듯하다. 마초가 되지 못하는 것이 삶의 실패라도 되는 양 마초적임을 발산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마초적’임을 과시하는 것이 여성에 대한 허세와 멸시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들의 마초성은 여성을 억압하거나 여성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이런 식의 말에 발끈하는, 억울한 남성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정의하듯 마초는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여성을 지배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다. 어떤가. 마초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토대를 가부장제로 본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에게 “그럼 왜 뛰쳐나오지 않고 같이 사는 거야”라며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장 확실하고 빠른 해결책은 피해자가 집을 나오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식의 이런 판단은 너무 단순하고 미숙한 태도야.

어떠한 권한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세계의 전부인 가정을 박차고 나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런 식의 생각은 정작 심리적 가해자 가 가정 폭력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는 거지. 저마다의 개인이 마른 나뭇가지 꺾듯 단박에 가부장제 역사의 무게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이와 같은 말을 오늘도 보았다. 피팅 모델 알바를 하면서 남성들에게 집단 성추행을 당하고 몰카를 찍힌 여성들의 피해를 알리는 글에서다. ‘속옷 촬영을 거부하고 나오면 되지, 왜 못 나왔냐’는 수많은 사람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이런 사건들이 벌어질 때마다 반응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똑같을까. 경찰이 사건을 수사하겠다고 하니 수사를 지켜봐야하겠지만 당장 피해자도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충격적인 것은 남성들의 집단적인 마초이즘의 발현이다. 그들은 집단으로 함께하고 있어서인지 진정 두려움도 없고 범죄의식도 없이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일들을 지속해왔다. 여성을 억압할 확실한 수단을 쟁취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오래도록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죄의식도 없이 여성에게 성적 욕망을 퍼붓는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생활해 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을 페미니스트를 불편하다 못해 혐오까지 하는 그들의 위선을 다시 한번 느낀다.

  남동생의 질문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여성들이 받는 일상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이들은 일상의 생활에서 무수히 차별받고 성폭력의 피해 또한 일상적인 여성들의 상황은 간과하면서도 차별없는 사회를 위해 내는 여성들의 목소리나 퍼포먼스들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눈은 성폭력 피해자의 울분이나 고용 등 각종 차별받는 여성의 목소리에서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동참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생각하지않고 과장된 제스처로 행주나 브래지어를 태우는 퍼포먼스 같은 것을 행하는 경우에 ‘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는 저런 것’이라며 비이성적, 과격하다는 프레임을 씌운다. 그렇게 페미니스트들이 전하는 ‘내용’에 귀기울이지 않으며 마초이즘을 위협하는 것으로 치부한다.


페미니스트가 원하는 것은 여성과 남성의 지배 관계를 역전하는 것이 아니야. 여성들의 운명이 미리 결정되어버리지 않는 것, 남성과 여성이 대등한 권리를 가지는 것, 가증성의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기를 바라는 거야.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이것, 동등이라고 무수히 외쳐대도 결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오래전부터 내려온 저 마초이즘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강렬한 열망 아닐까. 성차별 정책에 대해 무조건 역차별이라거나 특히 한국의 경우 그러면 여자도 군대가라는 말로 모든 논의를 펼치는 이들에게도 페미니스트 작가의 딱 맞는 설명이 있다.


‘역차별’이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야! 영미권의 ‘적극적 조치’라는 말의 잘못된 표현이야. 이론 인해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오해의 소지가 있었어. ‘적극적 조치’ 또는 ‘자발적 조치’라고 하는 게 옳아. 적극적 조치란 피해를 입은 일부 집단에게 혜택을 주어 불평등을 개선해 나가자는 의도에서 실행되는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말하는데, 특히 남녀 불평등과 관련,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혜택에서 시작되었어.


  페미니즘의 역사는 이제 100년 즈음인데 늘 주장하는 바가 큰 차이가 없다. 본질적인 것을 두고 반복된 투쟁의 역사가 지속된다. 작가가 이토록 남동생에게 설명을 잘하고 있는 것도 반복된 투쟁의 역사속에 남성들의 질문들이 늘 한곁같았다는 얘기 아닐까. 이해하려는 마음없이 상황을 인식하려는 마음 없이 그렇게 늘. 가부장제 안에서 마초이즘의 환상을 붙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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