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소문…?


언어의 온도-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말글터, 2016년 8월.


  작년 봄이었던가. 선물을 받았는데 1년이 지나도록 읽지 못했다. 책이란 소유하게 되면 어쩐 일인지 최대한도로 늦게 읽으려는 의지가 발동하는 것 같다. 어쩌면 뭔가 손이 가지 않은 이유가 은연중에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매번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는 광고를 마주하기도 했는데 얼른 읽을 생각을 하지 못한 이유가. 분명 그때에는 제목에 끌렸고 책을 감싼 보랏빛 디자인에 끌렸고 읽고픈 감정을 가졌다. 이 정도 페이지의 에세이는 한시간이면 읽게 되는 점을 고려하면 일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책을 위한 그 한시간의 짬을 내지 못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일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에세이류를 넘어서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을 이제는 ‘나도 읽었다’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입소문으로 만든 베스트셀러’라는 문구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 100만부를 돌파한 책이니 당연히 부럽지만 나는 또한 베스트셀러와 나의 궁합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좋다고 하는데, 나는 왜 아닌가. 나의 시선은 감정은 도대체 무얼까. 거기에 더해 도대체 ‘입소문’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궁금해졌다. 희한하게도 책을 읽었다는 내 주위의 절대가 ‘좋지 않았다’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과 먼저 이야기했더라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까. 아니면 어쨌든 베스트셀러라니 사람들의 소문으로 이룬 힘이니 그 힘이 궁금해 읽었을까.

  책을 읽고 난 후에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으니 그들의 관점은 내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니 전반적으로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했고 다른 이들의 감상을 들었고 좀더 깊이 들어가 작가에 대한 이야기와 뒷담화와도 같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처음 느낀 감정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거였다. 정확히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책이든 개인의 취향을 타겠지만 에세이는 저자의 생각과 실생활모습이 은근히 드러난다. 에세이가 주는 이야기들과 문장들이 감정을 더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의 끌림은 글을 읽고 난 후 절실하게 다가오는 진정성의 힘 아닐까. 알지도 못하는 저자의 글에서 뭔가 모르게 진솔하고 정겨운 기분이 아니라 한뜻 꾸며낸 듯한 기교가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가지지 않고 자꾸만 멀찍이 떨어져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를 느꼈다. 다른 이들과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진 베스트셀러에 대한 나의 옹졸한 질투인가 생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난 꿋꿋하게 맘에 들진 않았다라고 말했고 다른 이들이 전해준 어떤 입소문에 대해 들었다. 작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어쩌면 홍보라고 할 수 있는 방법들에 관한 것도 있었다. 정치적 성향에 관한 것이야 따질 일은 아니지만 닐로의 차트 석권, 국정원과 드루킹의 매크로 조작 등을 보면서 ‘언어의 온도’를 생각했다. ‘입소문이 만든 베스트셀러’. 나는 언어의 온도에 관한 입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내가 책을 읽고 느낀 감정을 같이 느낀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내가 옹졸하게 베스트셀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보내려는 힘을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어 안심했다.

  사람들의 취향이 다를 수 있음을 알면서도 가끔은 이렇게 소심해진다. 많은 이들이 좋아한 책이나 영화가 내 취향이 아닐 때면 말이다. 그러다가 취향 별나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굳이 기껍지도 않고 말이다. 더해서, 나는 좋다 좋다 하는데 그 좋음을 알리고 싶은데 뭔가 조~용할 때도 기꺼울리 없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이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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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구본형과 함께 일상에서 빛나는 나다움 발견하기 - 딸의 아름다운 변화 이야기
구해언 지음 / 예지(Wisdom)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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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를 헤매는 그대에게

 

아빠 구본형과 함께, 구해언, 예지(Wisdom), 2018.

 

   변화해야 할 때 변할 수 있음은 중요하다. 하지만 변화는 항상 급박하게, 원하지 않음에도 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어 온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변하지 않는 것에 더 많은 수식어와 무게감을 두었지 않은가 싶다. 변하지 않음이 지니는 가치처럼 변화의 가치 또한 진중한 무게를 지닌다. 무엇보다 변화라는 말은 실행력을 안고 있기에 무게감이 있다. 언제부터 사회가 ‘변화’에 대한 가치를 두게 되었을까.

   변화를 위해서는 준비성이 필요함을 깨우쳐 능동적으로 행동하게끔 한 구본형의 ‘변화경영사상’은 업무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인간관계에서 유용하고 필요한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변화’를 항상 급박하고 어쩔 수 없기에 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형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변화’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 ‘변화’를 이루어내는 방법을 세상에 널리 알린 변화경영사상가 구본형의 5주기다. 그 사상이 현실에서 오롯이 이루어가는 과정을 지켜본 딸이 5주기를 맞아 기억의 책을 내었다.

   딸은 아빠와 함께 살던 집이 영원히 다른 사람에게로 가게 되는 상황에서 현실적인 상실감을 가진다. 슬픔으로 침잠하는 대신 딸은 아빠와의 기억이 가득한 그곳을 되돌아보는 여정을 시작한다. 익숙했던 집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기억 속 아빠와 함께 했던 날들을 떠올리는 그 과정은 애틋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집을 정리해야 하는 현실적 압박감을 가지며 ‘잊기 위한’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떻게 살아갈까’에 관한 되새김의 과정이었다. ‘꿈과 현실, 그 사이의 깊은 심연에 건강한 다리를 놓아라.’ 아빠의 말씀처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미래를 굳건하게 살아가기 위한 자신의 가치를 세우는 과정이었다.

   딸은 맹목적으로 아빠의 말을 소환하지 않는다. 늘 보던 정원의 나무 마다마다, 함께 걷던 동네 산책길에도 아빠의 기억은 어리어있었다. 딸은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며 보여주었던 아빠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다시 자신의 상황에서 재해석한다. 그렇게 자신이 살아가야 할 뿌리를 다지며 나만의 가치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이 책이 아빠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본형의 딸이 아니라 ‘구해언’이라는 자신의 궤적을 그리는 모습으로 대치된다.

   이승욱과 김은산은 『애완의 시대』에서 “정서적인 지체와 정신적인 미숙함의 문제를 제대로 성찰해보지 못한 채 미성숙한 어른으로 살아가게 될” 세대들에 대해 걱정한다. 젊은 세대는 부모에게 ‘길들여진’ 존재이고 부모 세대는 그들 사회에 ‘길들여진’ 존재라고. 배불리 먹기 위해 ‘순응하는 국민’으로 살아온 세대들은 물질적 풍요로움을 유산으로 남겨주고 정신적인 유산을 남겨주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남들보다 풍요로운 유산을 물려받은 셈이다.

   하지만 유산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전적으로 유산을 받는 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  저자는 자신을 소심하고 주눅들어 있던 아이라고 얘기한다.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조급함에 불안하고 초조해 하며 살았다고. 감정의 부침 또한 심해 자괴감에 빠져 있던 나날들 또한 많았다고 말한다. 그런 저자가 의지하던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깊은 우울에 빠지지 않고 이렇게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를 단련시켜왔는지를 느끼게 한다.

 

꿈을 가지고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은 사람을 살아 있게 하고, 일상을 전혀 새로운 날로 바꾸어 준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증거가 필요한 존재다. 즉, 꿈을 이루기 위한 한번의 행동에는 유통기한이 존재하기 때문에 결과물을 만들어 낼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멋진 계획이 나의 현실이 된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저주이자 희망이다.

 

   삶에서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해결치 못한 고민에 힘겨울 때마다 딸은 아빠에게 의지했다. 아빠는 특별하게 가르치는 말 한마디 없이도 문제를 해결해가도록 이끌어 주는 존재였다. 이제 아빠를 잃은 딸은 아빠의 말 한마디를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삼아 이 세상의 미로를 당장 빠져나가려 애쓰지 않고, 그 미로를 탐색하며 즐기며 나아가고 있었다. 책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초조하지 않다. 다감하고 굳건하다. 

   아빠가 준 실타래를 쥐고서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며 탐색하며 삶을 다져가는 저자의 정신적인 성숙함을 보고 있으면 젊은 세대에게 가지는 불신의 눈을 거두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저자가 배우고 느낀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널리 퍼뜨리기를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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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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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풍경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 남해의봄날, 2017-02-10.


  길을 걷다 보면 눈에 띄는 것은 오로지 편의점뿐이다. 길을 잃어버리면 찾을 수나 있을까 싶게 똑같은 간판의 편의점이 늘면서 동네 가게는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오늘자 한국일보 기사에서 5대 프랜차이즈 점포가 2년 만에 1만개 증가하고 편의점이 과포화 되었다는데 편의점 업계 관계자는 아직 편의점 수가 늘어날 여력은 충분하다고 얘기한다. 편의점 매출이 떨어지고 있다는데도 편의점은 증가하고 동네 가게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걸까. 버찌씨를 받던 위그든 씨가 있는 사탕가게의 추억은 정녕 폴 빌라드에게나 가능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정류장마다 마다의 가게에서 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한통 사던 시절이, 슈퍼집 아이이고 싶던 시절이 있었는데 모두, 추억 저 너머의 일이고 지금은 슈퍼집 아이도 편의점집 아이도 모두 싫다. 내가 겪는 슈퍼의 기억이 폴 빌라드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봄이 오니 담장 위로 솟아오른 나무들에 목련이 매화가 벚꽃이 활짝 피고, 피고 있다. 그런 나무 하나가 보초처럼 서 있는 구멍가게들은 더 이상 볼 수 없는데, 이 책은 그림으로 구멍가게의 추억들을 생각나게 해주고 있다. 정말로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시절의 구멍가게의 풍경이 구멍가게를 찾아 이십여년을 노력한 작가의 그림 속에서 생생하게 전해진다.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오래되어 낡고 소소해서 볼품없어 보이는 가게가 지닌 은근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구멍가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두 다른 지역에 자리한 구멍가게들은 신기하게도 같았다. 가게의 풍경도 구조도 어쩜 그렇게 같은지… 그렇지만 가게 앞 나무들이 사계절을 달리하는 것처럼 이들 가게들은 하나같이 다르기도 했다.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편의점이 전해주는 이미지와 가게들이 전해주는 이미지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이 같으면서 소소하게 다른 구멍가게의 풍경은 편안하고 정겨운 느낌을 때론 조용하고 쓸쓸한 느낌을 주며 감정을 일렁이게 한다.


   

해남 땅끝마을을 찾았다가 발길을 돌려 해남군 산이면 806번 국도 미륵사 옆 오르막을 오르던 중 구멍가게를 하나 만났다. 시대의 애환을 등에 지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어둑어둑한 초저녁 하늘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구멍가게에는 내가 찾아다니며 그리는 가게의 이미지가 모두 담겨 있었다. 숨죽여 한참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불빛에도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청자색 어둠이 깔리고 가게 등 뒤로 빼곡한 나무들이 병풍처럼 당당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묵묵히 서서 현실을 직시하는 듯하였다. 가게 옆에 선 가로등 불빛과 가게 안에서 번져 나오는 주광색 조명은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성인의 밝은 눈빛 같았다. 밤의 그늘과 등불이 만나 자아내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쇠락하는 가게에서만 볼 수 있는 처연한 아름다움이다. 내 작품의 모티브가 이곳에 응축되어 있었다.


  작가의 작품의 모티브가 응축되어 있는 해남의 가게 풍경을 보고 있으면 작가가 전하는 그 처연한 아름다움이 전해져 온다. 점점 사라진다는 낱말과 함께 이들 풍경은 내 지난 시절의 가게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직접 찾은 전국의 구멍가게들 그림 속에서 한없이 추억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한번도 본 적 없는 가게들을 찾아 가방을 둘러메고 싶어지게도 된다. 발품을 팔면 마주할 수 있게 될까. 애잔한 감정이 쌓이면서 아름다운 풍경들이 사라져 가고 있구나 싶어 쓸쓸해진다. 하긴 내게는 풍경이지만 그들에게는 생존의 장일 터인데. 작가도 말한다. 점점 사라지는 가게를 ‘추억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라고. 작가의 생각과 노력 덕분에 이 책은 구멍가게에 대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왜 작고 오래된 쇠락하는 가게 풍경을 그리느냐고. 인류의 가치관을 대변할 좀 더 근사하고 웅장한 상징물을 그리라고 한다. 기억의 향수에 머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더 높이 수직을 보라 한다. 그렇지만 왕조의 유물,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상징물보다 나를 더 강렬히 잡아끄는 것은 보통의 삶에 깃듯 소소한 이야기다. 사람 냄새다고 매력 있게 다가온다.

수직에서 느껴지는 경쟁과 성공 지향의 이미지와 엄숙함, 숭고함이 나는 낯설다. 그저 동시대의 소박한 일상이나 사람과 희망에 의지하여 오늘도 작업에 임할 뿐이다.


  그림을 모르면서도 펜을 움직여 그림을 그리고픈 느낌이 들만큼 눈길을 사로잡는 구멍가게의 그림들이다. 이렇게 작가의 손으로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아름다움과 향수와 개발과 보존, 사람의 삶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될 수 있고 이에 대한 시선이 더욱 깊어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오늘도 편의점에 밀려난 가게로만 바라보았을지 모르겠다. 안타까움만을 부여하면서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에서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가치를 후순위로 미뤄두고 개발과 독재와 이익에 몰두하며 삶의 쇠락을 가져다주는 가치를 심고 뿌린 이가 누구던가. 보다 편리한 환경에서 살고픈 욕망이야 있다 한들, 마냥 무계획적인 채 특정한 집단의 이익 챙기기를 중시한 가치로 일관한 ‘건설’과 ‘개발’ 속에서 결코 편리하고 쾌적한 환경은 주어졌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어디를 둘러보든 도대체 쉴 곳이, 마음 둘 곳이, 그만큼의 정겨운 곳이 없다. 편리함은 있지만 불편하다는 것.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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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인문학 -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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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걸었어


걷기의 인문학, 리베카 솔닛, 김정아 (옮긴이), 반비 | 2017-08-21.


  일찌감치 ‘걷기’에 사유의 요소가 가득함을 인지한 리베카 솔닛의 걷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2017년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고 초판은 걷기의 역사였다. 굳이 ‘인문학’이라 제목만 바꿔 표지도 그대로 재출간되었는데 꼭 그래야 하나 싶을 정도로 어느 순간 국내의 출판시장에서는 ‘인문학’이라는 제목을 강박적으로 붙이는 것 같다. 역사이든 인문학이든 이 책은 리베카 솔닛이니까, 리베카 솔닛의 글이니까 자알 넘어간다. 솔닛이 생각하는 걷기 역시도 누구라도 흔히 걷기에서 연상하듯 건강함, 자유로움이다. 


생태주의 용어로 보행은 ‘지표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표종은 생태계 건강의 지표이고, 지표종이 위험해지거나 감소하거나 멸종 위기에 처한다는 것은 생태계에 문제가 있다는 초기 경고 신호다. 보행은 여러 가지 자유와 기쁨, 예컨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 닫혀 있지 않은 멋진 공간, 구속받지 않는 육체라는 생태계의 지표종이다.


  솔닛의 다양하고 깊게 펼쳐지는 사유의 세계 속에서 다시 한번 ‘걷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요소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다. 많은 자료들을 검토하고 거기에 사유와 주장이 곁들여져 걷기가 일반적인 의미의 ‘운동’ ‘감상’ ‘소일거리’ 이상이 있음을 솔닛은 글을 통해서 보여준다.

  일상을 생각하는 일에 소요하다보니 “생산 지향적 문화에서는 대개 생각하는 일을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아무 일도 안 하기란 쉽지 않다.”라는 말이 눈에 확 들어왔다. 늘 ‘생각한다’는 행위가 ‘비효율적’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의 우회적인 말인 듯이 치부되어 서러웠는데 걷기나 생각하는 일에 관해 왜 좀더 당당하게, 정치·경제·철학적 관점을 덧붙여 말하지 못했던가 하며 리베카 솔닛의 글에서 위안받고 걷기와 생각의 환상적인 조합을 적극 지지했다.

  수많은 철학자가 걷기를 통해 사유의 세계를 확장해왔고 이를 통해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대표적인 철학자로 루소와 키에르케고르를 들 수 있다. 걷기, 보행은 그 자체로 수단이자 목표이기도 하지만 의식적 문화 행위이기도 하다. 솔닛은 단지 걷는 행위를 두 발로 걷는 것에서 나아가 생각, 사유속에서 걷기와 연결하는데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기법의 글이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걷기와 사유가 결합된 형태로 이야기한다.

  걷기, 직립 보행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직립 보행은 인간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진화론적 관점에 박혀 있는 백인중심주의와 여자는 보행에 서툴다거나 사유가 부족하다는 등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하고 있다. 어떠한 경우든 솔닛은 “우리가 보행을 어떤 행위로 만들 것인지가 아니라 보행이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지를 질문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말이지 보행은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을까. 오랜 시간 동안 걷기, 보행의 삶을 살아왔지만 자동차 등등이 발명된 이래로 사람들은 걷는 일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걷는 일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보다 순례 또는 의지의 표현의 형태로 점차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종교적인 순례 뿐 아니라 특정한 운동으로서의 순례, 걷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종교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지와 결합된 이것은 혁명, 행진, 축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민주주의를 위한 일반 시민들의 걷기로 확장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촛불행진 역시도 포함된다.

  솔닛은 보행문학과 등반문학, 보행수필에 대해서도 말한다. 다양한 작품을 살펴보며 문학속에서 나타난 걷기와 등반의 이미지가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에 갈망을 알려주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적 대도시의 출현으로 이제 이 걷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자유를 획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대의 도시를 산책하는 일엔 제약이 따른다. 도시는 범죄, 가난, 위생 등의 위험을 안고 있기에 도시를 활보하는 일은 이런 위협에 노출될 수 있음을 감수해야 한다. 더구나 인종, 계급, 종교, 민족, 성적지향에 따라 제약은 더해진다. 특히 여성의 경우 이런 제약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달라지지도 나아지지도 않았다. 보행에 관한 많은 인상적인 기록이나 일과 관련된 인물들이 남성이었던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고 여성들은 단지 걷는 행위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좌절을 토로하고 있다. 실비아 플래스, 조르주 상드, 캐럴라인 와인버그 등등이 이 좌절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의 글들은 아래에서 보듯 당장 오늘 누군가 쓴 글이라고 해도 전혀 괴리감이 없다.


여자의 보행은 많은 경우 이동이 아니라 공연으로 해석된다. 그런 해석대로라면 여자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걷고, 자기의 경험이 아니라 자기를 보는 남자의 경험을 위해서 걷는 셈이다.


내가 밖에 나가면 살아 있을 권리, 자유로울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없어지는구나, 세상에는 생판 남인데도 내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내가 괴롭기를 바라는 것 같은 사람이 많구나, 성은 이렇게 금방 폭력이 되는구나, 이런 상황을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은 나 말고는 거의 없구나 하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보행’이 성립되기조차 어렵다면 보행이 지닐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상황이라면 정말 보행은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어 가고 있는 걸까. 걷기가 사유의 힘을 주지만 걷지 못할 시공간, 건강을 위한 걷기는 건물속 러닝머신으로 대체되고 정치적 메시지를 위한 행진은 정치적인 이유로 억압당하고…. 걷기를 장려하는 듯하지만 걷기가 제약되고 있는, 점점 거닐 수 있는 공간은 축소되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솔닛이 생태계 건강의 지표종이라 말하는 걷기가 이처럼 위태롭다는 것은 ‘걷기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 삶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여유로움과 낭만은 고사하고 사유할 수 있는 시간도 자유롭게 거닐 시공간마저 빼앗긴 인간의 하루가 닫힌 생각속으로만 휘몰아치는 듯한 기분이다.

  걷기와 사유. 한파라서 제약당한 걷기와 사유가 아니라 걷기와 사유할 시간에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만한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심적인 압박감이 걷기의 속도에서 나를 내몰고 있다. 내 몸의 지표종도 한껏 빨간불을 반짝거리고 있는데 그나마 리베카 솔닛의 언어를 담아서 한결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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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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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노래의 도돌이표


힐빌리의 노래-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아무런 정보없이 이 책을 읽은 저녁 일찌감치 차지한 것은 할머니에게, 늙어가는 엄마, 아빠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더 잘해야겠다의 구체적인 내용은 설정하지 않았으니 책을 읽으면서의 반사적이고 수사적인 생각이었겠지만 또한, 다짐이기도 했다. 할모, 할보라는 호칭에 대응해 나의 할매와 할매와 할배로 불리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 나이든다는 생각,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 속에 머물러 있을 때 울려대는 전화는 내 다짐이 얼마나 실행력 있는지를 확인하겠다는 듯, 늦은 건 아니냐는 듯 불안하게 들렸다. 이럴 때면 영화나 드라마에선 불길한 음악이 삽입되며 긴장을 조성하는 연출을 했다. 다음 장면에서 중환자실에 앉은 나는 다시금 깨달음은 항상 늦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병원을 오가며 긴장과 불안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저자의 할모와 할보처럼 나의 할매의 굴곡진 삶에 대해 생각했다. 선거 때면 각자의 주장에 소리높였던 때를 떠올리기도 했다. 자식, 손주들의 더 나은 삶을 바라고 지지하면서도 자신이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에 대한 비판에 결코 여유롭지 못했던 할매가 삶의 위기를 넘나들다 기억의 끈을 놓는 시간 동안 할매의 기쁨이 되는 자식들이 연이어 방문했다. 하나같이 연로한 노인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고 아프다는 말에 대해 일상적으로 반응한 것을 자아비판하는 동안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 그 사람의 생애를 거듭 회고하면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낸 할매가 가질 수밖에 없던, 그렇게 형성된 가치관을 이해하지만 수용하지 못한 비판과 함께 다음 선거에는 할매랑 그런 일로 투닥투닥하진 않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이 책에 대해서도 뭔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을 가지고 감정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비판을 찾고 있었을 테다. 이해는 되지만 수용하기엔 마냥 탐탁지 않은 것은 무얼까 생각하며 저자의 말대로 논문이 아니니까 저자가 겪은 일들에 대해 일단 위로와 공감을 표하며 어쩌면 ‘성공한 삶’이라 불리는 그의 인생에, 힐빌리 문화에서 탈출한 것에 적지않은 박수 또한 보냈다.     

  이 책의 흥미 요소는 이른바 슬럼가로 묘사되는 쇠락한 공업 지대인 러스트벨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특성, 특히 저자의 조부모님과 같은 쉽게 볼 수 있는 독특한 캐릭터의 향연이다. 저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재밌는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초반 이 책을 흡입력있게 몰아갔고 또한 내 조부모님과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더해져 애틋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벗어나는 후반부의 이야기, 어쩌면 저자의 생각이 더해지고 설교조처럼 이야기하는 후반부에서는 흥미와는 다른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논쟁적이 될 수밖에 없는 생각들이 펼쳐졌고 복지와 정책, 정치 등의 쟁점이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저자가 자신의 삶을 겪으며 가지는 시각에 대해 자꾸 거리낌이 느껴졌다. 저자의 인식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나의 감정을 느꼈고 저자의 생각에 불안과 위험, 불편함이 들었다. 나에게는 무엇이 그토록 와닿지 않았던 걸까. 모든 생각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 부분 부분 맞다고 수긍하는 점은 있었다. 다만, 그것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시선에 대해서 동조하지 않고 있는 나를, 그리고 감정적인 것을 떠나서 이성적으로도 명확한 근거와 가치관으로 설득하고픈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이래저래 지친 상태로는 ‘그것은 아닌데’ ‘위험한 생각인데’라는 말만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흩어졌을 뿐이다.

  복지 문제 또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정책은 정치행위와 연관되어 결정되니까. 다만 그 정도가, 그것의 기본 바탕에 대한 합의와 추구해야 할 것은 지켜져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다. 그렇기에 정치적인 형태로, 아니 무조건적으로 복지정책이 나올 때마다 제 것을 뺏긴 양하며 공산주의를 외쳐대거나 복지대상자에 대한 맹렬한 비난이 형성되는 것은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 책 속 저자가 가난과 마약과 폭력이 가득한 그들 힐빌리 문화에서 자신은 벗어났다고 말하며 혐오가 담긴 시선을 건네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개인의 힘으로, 의지로 벗어나 그곳을 바라보며 지긋지긋함을 느낄 수는 있겠다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저자에게서 우리나라 6~70년대, 80년대에도 가난한 시골에서 힘겹게 살다가 가족들의 희생을 업고 서울로 공부하러 가 출세한 자가 제 가족과 고향마을에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특유의 시선이 느껴졌다. 드라마 속에서 자주 다루던 ‘나는 내 가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를 강조하는 주인공들의 모습. 대개는 법학을 공부하지만 기업쪽으로 빠지기도 하는. 그런 주인공들. 너희들의 그 가난하고 힘겨운 삶은 모자라 머리와 못난 몸뚱아리 때문이라 말하는 그런 주인공들의 모습이, 언뜻.


우리 집안에서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가족들은 하나같이 다른 배경을 지닌 배우자와 결혼한 사람들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다.

이런 것들을 깨닫는 순간, 그동안 내가 내 삶이라고 생각했던 모습이 산신이 부서졌다. 머릿속에서 나는 과거보다 더 나은 사람이고 강한 사람이었다. 가능한 한 빠르게 동네를 떠났고, 해병으로 복무하면서 나라를 지켰으며,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명문 로스쿨에 진학했다. 내게는 나쁜 영향력도, 성격적 결함도, 어떤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행복한 배우자와 꾸리는 행복한 가정’이라는 가장 소중한 꿈을 이루려면 끊임없이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야 했다. 내 자아상은 오만함이라는 가면을 쓴 괴로움에 가까웠다.


  힐빌리 문화에 속한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접하고 있기에 저자처럼 때로는 징글징글하다는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긴 하다. 하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방식이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도 느끼고 있듯이 노력이 필요하지만 노력이 아닌 것이 주요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사회적 자본 말이다. 실력보다 운이 낫고 운보다는 인맥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저자의 경험이다. 이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이 상황, 가진 자에게는 유리하고 가지지 못한 자에겐 불리한 형태의 방식을 유지하도록 달려갈 것이다. 거기에 맞서 적절한 인식과 대응으로 제동을 걸고 공평과 공정이라 불리는 가치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 체제를 만들어가기 위한 방안을 애써 나가야 하는데 이것이 당연하게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살고 있다.

  자칫 저자의 이야기는 ‘성공’의 힘은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의지이며,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거대한 사회의 흐름을 따라야 하리라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그 흐름이라는 것은 내게 불필요한 것에 대한 외면과 비난은 당연한 것이고 이익이 되고 필요한 것에 대한 줄잡기이고, 그것이 어떻게 불공정하게 이루어지든 상관없이.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힐빌리 문화에서처럼 복지의 대상자인 이들에게는 마구 비난을 퍼부으면서 부정과 사기로 권력과 재력을 형성하는 이에 대해서는 약하게 비난하거나 또는 비난없이 그들의 방법을 수용하는 것은.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한 시선은 이토록 다르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 사람들의 무기력하고 의지없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비난하면서 부정과 거짓, 사기, 착취로써 삶의 권력과 재력을 형성한 이들에 대한 비난과 혐오는 없다, 혹은 약하게 있다.  

  힐빌리문화라 불리는 공간에서 성공한 하나의 사례로 얘기되는 저자의 경험담, 성공담에 굳이 열광하지 못할 것도 없긴 하다. 잘 살고 만족한다니 다른 이들 또한 자신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몇 주 사이 각지에서 모인 친척들의 견해와 친구들,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의 힐빌리문화층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넘어선 혐오를 들으며,  책의 저자가 생각하는 힐빌리 문화와 복지를 떠올리며 이래저래 많은 생각들을 했다. 확실히 저자가 바라보는 복지정책의 시각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사고에 가깝긴 하다. 사람들의 의견과 생각은 다양하고 한자기를 들어 정책을 수립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프레임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성을 따르기에 쓸데없이 우려가 된다. 이 책이 사례를 넘어선 대안으로 굳어질까,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가 된 이유, 트럼프가 당선된 것 등등 그리고 우리나라의 상황을 대입하게 되면서 이 책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었다.

  내가 정녕 못마땅한 것은 무엇일까. 힐빌리 특유의 문화적인 특성들이 일반적으로 만연된 빈곤한 자들의 태도들이라는 것은 대체로 수급자들에게서 보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지 않는가. 전혀 몰랐다고 할 수 없고 늘 얘기되어 오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들에 대한 지지는 항상 정서적 지지가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되어 왔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새로운 사실인양 하며 정치놀음에 끼워 맞추는 것이 마땅치 않은 걸까. 아님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한 비판이 가난한 이들에게만 가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일까. 저자가 말하는 ‘성공’한 삶에 대한 의문과 회의 때문일까. 결론없이 되풀이되는 문제인식과 해결방안에 대한 답답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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