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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17년 2월
평점 :
정겨운 풍경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 남해의봄날, 2017-02-10.
길을 걷다 보면 눈에 띄는 것은 오로지 편의점뿐이다. 길을 잃어버리면 찾을 수나 있을까 싶게 똑같은 간판의 편의점이 늘면서 동네 가게는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오늘자 한국일보 기사에서 5대 프랜차이즈 점포가 2년 만에 1만개 증가하고 편의점이 과포화 되었다는데 편의점 업계 관계자는 아직 편의점 수가 늘어날 여력은 충분하다고 얘기한다. 편의점 매출이 떨어지고 있다는데도 편의점은 증가하고 동네 가게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걸까. 버찌씨를 받던 위그든 씨가 있는 사탕가게의 추억은 정녕 폴 빌라드에게나 가능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정류장마다 마다의 가게에서 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한통 사던 시절이, 슈퍼집 아이이고 싶던 시절이 있었는데 모두, 추억 저 너머의 일이고 지금은 슈퍼집 아이도 편의점집 아이도 모두 싫다. 내가 겪는 슈퍼의 기억이 폴 빌라드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봄이 오니 담장 위로 솟아오른 나무들에 목련이 매화가 벚꽃이 활짝 피고, 피고 있다. 그런 나무 하나가 보초처럼 서 있는 구멍가게들은 더 이상 볼 수 없는데, 이 책은 그림으로 구멍가게의 추억들을 생각나게 해주고 있다. 정말로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시절의 구멍가게의 풍경이 구멍가게를 찾아 이십여년을 노력한 작가의 그림 속에서 생생하게 전해진다.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오래되어 낡고 소소해서 볼품없어 보이는 가게가 지닌 은근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구멍가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두 다른 지역에 자리한 구멍가게들은 신기하게도 같았다. 가게의 풍경도 구조도 어쩜 그렇게 같은지… 그렇지만 가게 앞 나무들이 사계절을 달리하는 것처럼 이들 가게들은 하나같이 다르기도 했다.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편의점이 전해주는 이미지와 가게들이 전해주는 이미지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이 같으면서 소소하게 다른 구멍가게의 풍경은 편안하고 정겨운 느낌을 때론 조용하고 쓸쓸한 느낌을 주며 감정을 일렁이게 한다.
해남 땅끝마을을 찾았다가 발길을 돌려 해남군 산이면 806번 국도 미륵사 옆 오르막을 오르던 중 구멍가게를 하나 만났다. 시대의 애환을 등에 지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어둑어둑한 초저녁 하늘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구멍가게에는 내가 찾아다니며 그리는 가게의 이미지가 모두 담겨 있었다. 숨죽여 한참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불빛에도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청자색 어둠이 깔리고 가게 등 뒤로 빼곡한 나무들이 병풍처럼 당당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묵묵히 서서 현실을 직시하는 듯하였다. 가게 옆에 선 가로등 불빛과 가게 안에서 번져 나오는 주광색 조명은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성인의 밝은 눈빛 같았다. 밤의 그늘과 등불이 만나 자아내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쇠락하는 가게에서만 볼 수 있는 처연한 아름다움이다. 내 작품의 모티브가 이곳에 응축되어 있었다.
작가의 작품의 모티브가 응축되어 있는 해남의 가게 풍경을 보고 있으면 작가가 전하는 그 처연한 아름다움이 전해져 온다. 점점 사라진다는 낱말과 함께 이들 풍경은 내 지난 시절의 가게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직접 찾은 전국의 구멍가게들 그림 속에서 한없이 추억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한번도 본 적 없는 가게들을 찾아 가방을 둘러메고 싶어지게도 된다. 발품을 팔면 마주할 수 있게 될까. 애잔한 감정이 쌓이면서 아름다운 풍경들이 사라져 가고 있구나 싶어 쓸쓸해진다. 하긴 내게는 풍경이지만 그들에게는 생존의 장일 터인데. 작가도 말한다. 점점 사라지는 가게를 ‘추억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라고. 작가의 생각과 노력 덕분에 이 책은 구멍가게에 대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왜 작고 오래된 쇠락하는 가게 풍경을 그리느냐고. 인류의 가치관을 대변할 좀 더 근사하고 웅장한 상징물을 그리라고 한다. 기억의 향수에 머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더 높이 수직을 보라 한다. 그렇지만 왕조의 유물,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상징물보다 나를 더 강렬히 잡아끄는 것은 보통의 삶에 깃듯 소소한 이야기다. 사람 냄새다고 매력 있게 다가온다.
수직에서 느껴지는 경쟁과 성공 지향의 이미지와 엄숙함, 숭고함이 나는 낯설다. 그저 동시대의 소박한 일상이나 사람과 희망에 의지하여 오늘도 작업에 임할 뿐이다.
그림을 모르면서도 펜을 움직여 그림을 그리고픈 느낌이 들만큼 눈길을 사로잡는 구멍가게의 그림들이다. 이렇게 작가의 손으로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아름다움과 향수와 개발과 보존, 사람의 삶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될 수 있고 이에 대한 시선이 더욱 깊어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오늘도 편의점에 밀려난 가게로만 바라보았을지 모르겠다. 안타까움만을 부여하면서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에서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가치를 후순위로 미뤄두고 개발과 독재와 이익에 몰두하며 삶의 쇠락을 가져다주는 가치를 심고 뿌린 이가 누구던가. 보다 편리한 환경에서 살고픈 욕망이야 있다 한들, 마냥 무계획적인 채 특정한 집단의 이익 챙기기를 중시한 가치로 일관한 ‘건설’과 ‘개발’ 속에서 결코 편리하고 쾌적한 환경은 주어졌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어디를 둘러보든 도대체 쉴 곳이, 마음 둘 곳이, 그만큼의 정겨운 곳이 없다. 편리함은 있지만 불편하다는 것. 참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