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인문학 -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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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걸었어


걷기의 인문학, 리베카 솔닛, 김정아 (옮긴이), 반비 | 2017-08-21.


  일찌감치 ‘걷기’에 사유의 요소가 가득함을 인지한 리베카 솔닛의 걷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2017년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고 초판은 걷기의 역사였다. 굳이 ‘인문학’이라 제목만 바꿔 표지도 그대로 재출간되었는데 꼭 그래야 하나 싶을 정도로 어느 순간 국내의 출판시장에서는 ‘인문학’이라는 제목을 강박적으로 붙이는 것 같다. 역사이든 인문학이든 이 책은 리베카 솔닛이니까, 리베카 솔닛의 글이니까 자알 넘어간다. 솔닛이 생각하는 걷기 역시도 누구라도 흔히 걷기에서 연상하듯 건강함, 자유로움이다. 


생태주의 용어로 보행은 ‘지표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표종은 생태계 건강의 지표이고, 지표종이 위험해지거나 감소하거나 멸종 위기에 처한다는 것은 생태계에 문제가 있다는 초기 경고 신호다. 보행은 여러 가지 자유와 기쁨, 예컨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 닫혀 있지 않은 멋진 공간, 구속받지 않는 육체라는 생태계의 지표종이다.


  솔닛의 다양하고 깊게 펼쳐지는 사유의 세계 속에서 다시 한번 ‘걷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요소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다. 많은 자료들을 검토하고 거기에 사유와 주장이 곁들여져 걷기가 일반적인 의미의 ‘운동’ ‘감상’ ‘소일거리’ 이상이 있음을 솔닛은 글을 통해서 보여준다.

  일상을 생각하는 일에 소요하다보니 “생산 지향적 문화에서는 대개 생각하는 일을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아무 일도 안 하기란 쉽지 않다.”라는 말이 눈에 확 들어왔다. 늘 ‘생각한다’는 행위가 ‘비효율적’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의 우회적인 말인 듯이 치부되어 서러웠는데 걷기나 생각하는 일에 관해 왜 좀더 당당하게, 정치·경제·철학적 관점을 덧붙여 말하지 못했던가 하며 리베카 솔닛의 글에서 위안받고 걷기와 생각의 환상적인 조합을 적극 지지했다.

  수많은 철학자가 걷기를 통해 사유의 세계를 확장해왔고 이를 통해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대표적인 철학자로 루소와 키에르케고르를 들 수 있다. 걷기, 보행은 그 자체로 수단이자 목표이기도 하지만 의식적 문화 행위이기도 하다. 솔닛은 단지 걷는 행위를 두 발로 걷는 것에서 나아가 생각, 사유속에서 걷기와 연결하는데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기법의 글이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걷기와 사유가 결합된 형태로 이야기한다.

  걷기, 직립 보행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직립 보행은 인간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진화론적 관점에 박혀 있는 백인중심주의와 여자는 보행에 서툴다거나 사유가 부족하다는 등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하고 있다. 어떠한 경우든 솔닛은 “우리가 보행을 어떤 행위로 만들 것인지가 아니라 보행이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지를 질문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말이지 보행은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을까. 오랜 시간 동안 걷기, 보행의 삶을 살아왔지만 자동차 등등이 발명된 이래로 사람들은 걷는 일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걷는 일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보다 순례 또는 의지의 표현의 형태로 점차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종교적인 순례 뿐 아니라 특정한 운동으로서의 순례, 걷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종교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지와 결합된 이것은 혁명, 행진, 축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민주주의를 위한 일반 시민들의 걷기로 확장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촛불행진 역시도 포함된다.

  솔닛은 보행문학과 등반문학, 보행수필에 대해서도 말한다. 다양한 작품을 살펴보며 문학속에서 나타난 걷기와 등반의 이미지가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에 갈망을 알려주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적 대도시의 출현으로 이제 이 걷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자유를 획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대의 도시를 산책하는 일엔 제약이 따른다. 도시는 범죄, 가난, 위생 등의 위험을 안고 있기에 도시를 활보하는 일은 이런 위협에 노출될 수 있음을 감수해야 한다. 더구나 인종, 계급, 종교, 민족, 성적지향에 따라 제약은 더해진다. 특히 여성의 경우 이런 제약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달라지지도 나아지지도 않았다. 보행에 관한 많은 인상적인 기록이나 일과 관련된 인물들이 남성이었던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고 여성들은 단지 걷는 행위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좌절을 토로하고 있다. 실비아 플래스, 조르주 상드, 캐럴라인 와인버그 등등이 이 좌절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의 글들은 아래에서 보듯 당장 오늘 누군가 쓴 글이라고 해도 전혀 괴리감이 없다.


여자의 보행은 많은 경우 이동이 아니라 공연으로 해석된다. 그런 해석대로라면 여자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걷고, 자기의 경험이 아니라 자기를 보는 남자의 경험을 위해서 걷는 셈이다.


내가 밖에 나가면 살아 있을 권리, 자유로울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없어지는구나, 세상에는 생판 남인데도 내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내가 괴롭기를 바라는 것 같은 사람이 많구나, 성은 이렇게 금방 폭력이 되는구나, 이런 상황을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은 나 말고는 거의 없구나 하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보행’이 성립되기조차 어렵다면 보행이 지닐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상황이라면 정말 보행은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어 가고 있는 걸까. 걷기가 사유의 힘을 주지만 걷지 못할 시공간, 건강을 위한 걷기는 건물속 러닝머신으로 대체되고 정치적 메시지를 위한 행진은 정치적인 이유로 억압당하고…. 걷기를 장려하는 듯하지만 걷기가 제약되고 있는, 점점 거닐 수 있는 공간은 축소되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솔닛이 생태계 건강의 지표종이라 말하는 걷기가 이처럼 위태롭다는 것은 ‘걷기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 삶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여유로움과 낭만은 고사하고 사유할 수 있는 시간도 자유롭게 거닐 시공간마저 빼앗긴 인간의 하루가 닫힌 생각속으로만 휘몰아치는 듯한 기분이다.

  걷기와 사유. 한파라서 제약당한 걷기와 사유가 아니라 걷기와 사유할 시간에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만한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심적인 압박감이 걷기의 속도에서 나를 내몰고 있다. 내 몸의 지표종도 한껏 빨간불을 반짝거리고 있는데 그나마 리베카 솔닛의 언어를 담아서 한결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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