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들에게


    슈테판 츠바이크


   츠바이크의 글을 읽고 있다 보면 깊이 빠져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안타까운 건 그의 평전을 읽다 보면 평전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보다 그의 글에 홀린다. 그렇게 그 대상에게 츠바이크가 생각하고 느끼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철학을 공부하고 문학과 역사, 심리학 등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써내려간 그의 글은 딱딱하고 건조하지 않고 부드럽고 강단있다. 평전의 대상의 실제의 생활과 생각들, 느끼는 바를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는 듯 감정과 이성이 마구 휘몰아치며 감정이입하게 된다. 문학적인 느낌도 강하다. 그래서인지 츠바이크는 전기 작가로 유명하지만 그의 소설 또한 상당히 매력적이다. 아무튼 츠바이크의 글을 읽을 때면 마냥, 마음이 아련해진다.

  <우정, 나의 종교>는 츠바이크가 쓴 글들의 묶음이다. 장례식장에서 발표한 글도 있고 발표하지 못한 글도 있다는데 핵심은 츠바이크의 글들 중에서 ‘인물’에 관한 글을 추린 것이다. 로맹 롤랑은 츠바이크에 대해 “그에게 우정은 종교와 같다”라는 말을 했다는데, 책의 제목은 이 말에서 따온 모양이다.


로맹 롤랑은 츠바이크에 대해 “우정이야말로 그의 종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츠바이크처럼 우정과 의리를 중시한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는 말만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p11~12


  수많은 평전을 쓰게 된 것은 츠바이크 자신이 거기에 재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자신이 많은 이들과의 교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츠바이크가 많은 언어를 익힌 것도, 여러 나라를 다닌 것도 그렇고. 평전을 쓸 때도 인물과 작품과 자료들을 깊이 연구하고 심리를 분석하는 만큼 사람들과의 교우에서도 섬세함과 감성으로 사람들을 대했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사업에 성공하고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면서도 겸손했다. 스승에게는 늘 제자의 예를 갖추었고, 스승이나 벗한 선배들에게 존경, 앙모, 감격의 정을 품었다. 이는 그의 성품뿐 아니라 그가 큰 스승들에게 받은 가르침을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프로이트는 물론이고 베르하렌, 고리키, 로맹 롤랑에게도 같은 태도를 취했다. p11


  그의 인물 평전은 특정한 분야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과 나눈 우정들이 그가 삶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을 둘도 없는 친구로 여겼고 이 책 속에서도 그의 우정에 찬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엔 프루스트, 프로이트, 베를렌, 롤랑, 톨스토이, 호프만, 슈바이처, 바이런, 말러, 발터, 토스카니니, 릴케, 열 두 명의 이야기들이 있다. 벗들에 대한 짧은 글에서도 이 인물들의 생애와 그들의 감성과 그들에게 가지는 츠바이크의 마음이 섬세한 필치 속에 생생하기에 이들에 대한 평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시대가 그러했던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츠바이크의 마지막 선택 역시도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다. 그래도 조금만 더 힘을 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의 고통을 어찌 가늠하겠냐만 그 시대 수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상황에 있었던 만큼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으로도 비춰진다. 츠바이크의 자살을 알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 생각난다. 이미 그가 사망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러할진대 그와 함께 우정을 나누었던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이들은 나보다 더했을 것이다. 더 이상 친구이자 풍부한 감성과 지식을 지닌 작가를 만날 수 없음에, 그 안타까운 선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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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반복적으로 이 얼굴을 마주쳤다. 한동안 이 작가의 사진이 인터넷에 자주 노출된 것 같다. 익숙한 얼굴인데 누굴까, 누구더라 하며 글보다 작가에 대해 더 궁금하게 한 찰스 부코스키. 역시나 작가의 인생을 엿보다 작가의 삶에 더 관심이 집중됐다.

  <고양이에 대하여>는 부코스키의 테마 에세이로 묶인 1부작이다. 아홉 마리의 고양이를 키우는 작가의 이야기와 고양이에 관한 시가 담겨 있다. 작가는 길 잃은 고양이들을 버릴 수 없어 많은 고양이들을 키우지만, 본질적으로 애정이 없다면 고양이들은 늘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고양이들은 길잃은 고양이, 다친 고양이, 죽을 뻔한 고양이들이다. 작가는 그 고양이들에게서 자신을 본다.


 자, 여기 아름다운 고양이가 있소. 혀는 쭉 내밀고 눈은 사팔이죠. 꼬리는 바짝 잘렸고. 아름다운 녀석이지. 지능도 있고. 우리는 걔를 수의사에게 데려가서 엑스레이를 찍었소. 차에 치였거든. 의사가 이러더군. “이 고양이는 차에 두 번 치였네요. 총도 맞았고. 꼬리는 잘렸어요.” 나는 말했소. “이 고양이는 나요.” 이 녀석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서 우리 집 대문 앞에 나타났소. 어디로 가야 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거지. 우리 둘 다 거리에서 온 건달들이었으니까. p75~76


   독일에서 태어나 세 살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아온 그는 대공황과 전쟁을 겪으며 하층민의 삶을 살았다 한다. 잡역부, 철도 노종자, 트럭 운전사, 주유소 직원, 경마꾼, 집배원 등등의 일들을 하며 글도 썼지만, 처음 글을 발표한 이후 10년 동안은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매일 술을 마셨고 내출혈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며 삶을 전전했다. 25세에 글을 썼고 글이 잡지에 발표되었다면 새로운 감회로 더욱 정진하여 글을 썼을 법한데 10년 동안 침묵했고 술을 마시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의사들의 경고가 있어서야 다시 글을 썼다. 그래도 성실한 부분은 있었던지 14년간 우체국을 다녔고 “우체국 의자에 앉아 죽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우체국을 나와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의 길을 걸었다는 찰스 부코스키. 그 때의 나이가 쉰 살이었다.

  이런 찰스 부코스키에 대한 평가는 거칠고, 이색적이고, 반항아의 이미지인 모양이다. ‘위대한 아웃사이더‘라고 불린다는데, 글을 읽다 보면 왜 이런 이미지가 있는지 알게 된다. 전세계 독자들이 찰스 부코스키에게 열광하는 것은 생경하고 날 것의 느낌과 버무려진 섬세한 감성의 이미지가 아닌가 한다. 투박하고 툭툭이며 내뱉은 말 속에서 담긴 애정과 자조에 연민의 느낌을 받게 되면서.

   고양이와 함께 한 처음의 시작이 어떠하였는지 몰라도 분명 그에겐 고양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 같다. 몰염치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역겨워하며 그에 반한 모습을 고양이에게 투영시키고 있다. 작가는 오래도록 인간들로 인한 상처를 받을 걸까. 알콜중독자마냥 끊임없이 술을 들이키는 것은 그의 성향인 것인지, 겪어 온 삶에서 살아가기 위해 축적된 방어의 형태였을까.

   뼈가 부러지고 총알을 몇 번이나 맞고 불구이기도 하며 사팔이인 고양이를 향해 그는 자신이라고 외친다. 거리의 삶을 알고 있고 건달처럼 떠돌았던 삶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고양이는 살아남았고 이제 뛰어다닌다. 마치 자신이 의사에게 더 이상 술을 먹으면 죽을지 모른다는 경고 속에서 살아 남아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그의 말대로 그 고양이나 그나 “독하게 미친 녀석”들이다.


 의사는 걔가 다시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막 뛰어다녀요. 혀를 내밀고 사팔눈을 뜨고. 독하게 미친 녀석. p76


   거칠다는 느낌의 다른 말이, 치열한 생존의 느낌과 비슷하게 여겨졌다.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또한 거칠어 질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일면들이 어떠했는지 궁금해지는 것은 고양이와의 교감 속에 언뜻 드러나는 인간에 대한 냉소의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작가 자신도 외골수 아니던가.


나는 차로를 올라갔다. 고양이들이 여기저기 퍼져서 똥을 싸고 있었다. 다음 생에서는 고양이가 되고 싶군. 하루에 스무 시간을 자고 가만 앉아 밥을 기다리고. 엉덩이만 핥으면서 빈둥대고. 인간은 너무 비참하고 화만 내고 외골수라서. p139


   그는 동물들이 영감을 준다고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길 잃은 고양이들이 계속 기어들어 와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그들의 성향에 맞는 통조림을 사기 위해 다양한 식료품을 사러 다니고, 아름답게 근사하게 바라본다. 그에게 이 고양이들은 “좋아”의 에너지이다. “특히 모든 게 너무 과하다 싶을 때,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관해 이렇게 너무 많은 생각이 들 때”면 더욱 더.

  그에게 인간은 초조하고 불완전하게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 고양이는 세상에 딱히 호들갑을 떨 일이 없다는 걸 알고 그는 “세계의 힘에 찢기고 있을 때면” 고양이를 바라본다. 그저 보기만 해도 그의 긴장을 가라앉게 해주는 존재가, 고양이이다.

  <고양이에 대하여>를 읽으며 그의 글쓰기는 멋스럽게 꾸미는 글이 아니라 탁탁 박히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글에서 느껴지는 그의 진솔함이 그의 삶이겠거니 생각하게 된다. 특히나 그의 삶과 같이 느껴지는 맹크스 고양이에 관한 글은 그 자신이 왜 고양이에게 진한 애정을 가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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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서 내리지를 못하네

 

           김영하, <보다>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집이다. <보다>, <말하다>, <읽다>의 삼부작 첫 번째다. 작가의 말에서 왜 ‘보다’가 제일 첫 번째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보는’ 것은 깊이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데 거의 전제와도 같다.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 좀더 나아가야 한다.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가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p208

 

  그래서, 말하고 쓰기 위해서 작가는 무엇을 보았을까. 이 책에서 작가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본다. 일상에서 맞닥뜨린 것에 섞여 사물을 사건을 바라보는 김영하식 시각을 전해준다.

  증가하는 스마트폰 사용과 중독을 작가는 어떻게 볼까. 그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스마트폰 의존도가 높다며 그것은 부자나 권력자에 비해 사회적 약자가 스마트 폰을 받지 않았을 때 ‘타격’이 크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 전화가 ‘중요한 전화’일 수 있으니까. 그렇게 가진 자들이 애플과 삼성과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사며 가난한 이들의 시간까지도 사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시간을 헌납하며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자본주의의 삶에서 힘의 논리로 감싼 ‘자유’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세상의 불평등은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세상의 불평등 속에서 미래는 있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긍정적이진 않다. 적어도 우리들 아버지들의 미래에 대해선 말이다.

  

386세대로 불리는 이 도덕적 아버지들은 노무현 정권에서 그들 자신의 무능과 직면한 후, 급속하게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약속하는 물질의 세계로 전향한다. 때마침 너무나 상징적이게도 여자의 얼굴을 한 박정희가 권좌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부자 아빠의 꿈은 요원하기만 하다. 독재자의 딸이 무능해서일수도 있겠지만 시대가 더 이상 아버지의 자리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부자는커녕 아빠조차 되기 힘들다. 부자 아빠든 가난한 아빠든 이제 아버지의 자리 자체가 없는 것이다. p165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주저앉아야 하는가. 암울한 미래가, 자리 자체가 보이지 않는 삶에 대해 순응하고 말아야 하는가.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고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이라지만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라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p148)기에 삶의 운명도 숙명도 견디어 내는 것, 견디어 가는 것은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맞게 되는 돌이라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운명예정설 따위를 믿을 게 아니라면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에게 자기실현적 암시가 꼭 필요한 인생의 순간들이 있다는 것. p154


  그런데, 우리의 운명은 택시 같은 것일까. 버스와의 경쟁에서 힘에 부친 택시업계는 정치권을 압박해 대중교통인정 법안을 국회 본회의에 통과시켰다. 그러나 맞불 버스파업과 함께 대중들이 ‘택시=대중교통’이라는 공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정을 내린 택시의 운명은 그렇게 되어 버렸다.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로 어영부영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상황이 정치권에 의해 이렇게도 어영부영한 채 끌려가고 있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어떤 결정을 내렸지만 그 삶의 아우라를 무엇이 막고 있다면 크나큰 꿈도 세밀한 꿈도, 아무것도 꿀 수 없게 된다. 결국 삶은 유예되어야 할까.


우리는 모든 문제를 본원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한다. 세상 모든 문제에 단순하고 명쾌한 해결책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그런 깔끔한 해결책이 없는 영역도 있다. 택시가 그렇다. 택시는 교육이나 정치가 그렇듯이 한 사회의 문제를 그대로 반영한다. 택시는 음주 문화, 육체노동자 천시 풍조, 무질서한 교통, 높은 강력범죄율 같은 문제를 떠안고 있는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누군가 이걸 간단하고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적어도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p177


  작가는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두루 보며 자신의 시선을 정리한다. 가벼운 농담과 진중한 고민들 속엔 보지 못한 생각들, 함께 고민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일상의 작은 부분들에 얽힌 사회 구조와 우리의 모습들을 작가의 시선을 통해 보면서 이제 우리가 말해야 할 것들을 새롭게 얻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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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마크툽 Maktub

 마크툽이란 단어를 보면 ‘툽’에서 오래 머문다. 

이내 ‘툭’으로 바꿔버리는 이 단어는 

뜻을 알기도 전에 손에서 놓아 버리는 느낌을 준다. 

‘툭’ 그렇게.

 

 그래서 마크툽은 슬픈 단어다. 아픈 단어다. 안쓰러움이 묻어 나는 단어다. 모든 것은 이미 기록되어 있다니. 운명이, 존재가 흔들림 없이 정해져 있는 이 느낌. 내가 살아가는 동안의 기록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달려간다. 난 온 힘을 다해도 ‘툭’ 그 끝을 만날 수밖에 없다.

  파울로 코엘료가 묶은 이야기들이 이 책에 정리되어 있다. 저자는 이 단어로 묶은 책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나. 이미 신문에 연재한 글에서 뽑아내고 싶었고 그래서 <마크툽>이라 이름 붙인 이야기들은 뭔가.

  여기에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이 11년 동안 스승에게 받은 가르침과 친구나 다른 이들로부터 들은 인상 깊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공자이야기나 선집에서 많이 보듯이 제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거기에 스승님께서 인생의 가르침을 전한다. 인생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과 영감을 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전한 이야기들이 파울로 코엘류에겐 보다 더 깊이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인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늘 비슷한 깨달음을 전한다. 늘 어리석고 모자란 우리들은 사건을 접하며 1차원적인 사고에 머물지만 스승들은 더 큰 깨달음과 시각을 던져준다. 가끔은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애매한 것들도 분명 있다. 깨달음이란 또한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이 책의 목적은 인간 영혼의 풍요로움이라고 파울로는 말한다. 그래서 내 영혼은 풍요로워졌나?!

  풍요로워진 것은 모르겠고 조금은 깊어지긴 한 것 같다. 슬픔과 아픔이 버무려진 인생의 ‘툭’을 생각하게 되니까.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에서 전해지는 조금의 허무는 왜인지 지금 내 인생이 원하는 바로 가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같기도 하다. 그래서 조금 슬펐던가. 인생이 기록되어 있다는데 힘차게 전진하지 않고 기뻐하지도 않은 채 이미 움츠러져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생에 대해 미련이 많다는 것, 후회가 많다는 말과도 닮아 있다. 어찌 살았기에. 가끔 이런 때에는 내게 종교가 있어 이 의미를 맹목적인 종교의 느낌으로 수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허나 절대로 그렇지 못하다는 것.

  듣기 싫었던 말이 “네 어깨에 진 짐을 내려 놓아라, 하나님을 믿으면 다 알아서 해 주신다”라는 것이었다는 것을 종교를 가진 이들은 모른다. 그 말은 자신들의 영역에선 마음을 평온케 해주는 말이겠지만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내 맘에 평온을 주지 못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위로였겠지만 위로가 되지 못했다는 걸 모른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교회에 나오라고? 요렇게 되어 버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하겠지. 이 불쌍한 어린 양이 하루빨리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나오도록 해 주세요라고......교회에만 나가면 모든 일에 해결되는데 헤매고 있느냐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손에 꼽을 정도다. 친구의 위로를 들은 것이 아니라 전도사를 만난 느낌이다.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쓸쓸하다.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바꿀 의지도 힘도 없다. 믿지 않으며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말을 믿는 것은 또 뭔가. 위로의 한마디를 파울로는 하고 있는 걸까. 그는 말한다. 오, 그 말은 잘된 번역이 아니에요라고. 번역을 거슬러 온전히 그 느낌을 받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마크툽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랍 사람들에게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잘된 번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미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신은 자비롭고 우리를 돕기 위해서만 펜과 잉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p30

 

  인생의 스승이 하시는 말씀에 더할 나위 없는 깨달음으로 영혼을 정화하고 싶은 때가 있다. 이 마크툽이 과연 내게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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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처럼을 들이키며!




20-20-20


        내가 그를 만났다!

           언제였던가. 스무살. 그때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이십대에 감옥으로 끌려가 20년이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생활한 그의 강연을 듣는 날. 스무살은 어찌 해도 방방뛰는 나이였으니 앉아서 그의 강연을 들을 때만 해도 ‘지루해’라는 느낌이 들려고 했다. 혁명투사의 이미지, 투옥될 정도의 혁명가의 이미지로 '투쟁' '투쟁' 할 거라 생각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강연은 좀더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인지 그의 조용조용하고 차분한 음성의 말들이 흘러가는 것이 내 뛰는 심장의 속도와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강연이 끝나고...되돌아가는 길,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부터 내 심장이 다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귓전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 그의 숨소리, 그의 몸짓, 그의 글들이 생각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조용한 그의 음성은 차분히 나를 뒤따라와 아주 오래도록 머물렀다.


신2.jpg 

 


아버지로부터


  또한 그 시절의 많은 청춘들이 그러했듯이 나는 신영복 또한 시골 출신의 가난한 농군의 아들인 줄 알았다. 흔히들 하는 말로 소팔고 논팔아 서울로 공부하러 보낸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 그리하여 그들 부모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을까, 걱정하게 되는 그런.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의 부모는 아들의 수감에 잘 견디어냈을 듯했다. 아마도 신영복의 가치와 신념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전해졌을 테니 말이다. 신영복의 아버지 역시 지식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신학상은 대구사범학교를 나온 교사로 평생 교직에 몸담았다. 한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천생 학자로 늘 책상에 앉아 무언가 집필하고 있었고 여든둘에 <사명당의 생애와 사상>, 여든다섯에 <김종직의 도학사상>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의 아버지는 1995년 여든여덟 나이로 타계하셨으니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책을 쓰셨던 것이다.

  신영복의 고향은 경남 밀양으로 밀양과 의령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가 교장으로 근무한 경남 의령의 간이학교 사택에서 태어났고 유년시절은 아버지의 고향인 밀양에서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졸업했다. 그러니까 그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밀양교육감을 역임했고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가세가 기울긴 했지만 말이다.


 청춘의 시절에

 


 가세 때문인지 그는 부산상고에 진학하고 한국은행 면접시험 대신 서울대에 시험을 봤고 합격했다. 당시국어 선생님의 권유였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 1, 2학년 때는 가정교사 일로 바빴고 공부따라 가기 바빴다. 그러다 4.19와 5.16을 겪으며 그가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3학년, 1961년이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현실에서 장기적인 학생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서울 상대에 독서 동아리를 만들게 된다. 경우회, CCC 산하 경제복지회, 동학연구회, 고대연대 학생 동아리 세미나 등에 참석하고 마오쩌둥, 마르크스, 케인스, 슘페터, 고리키들의 책을 읽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1965년 무렵에는 숙명여대 강사로 경제학을 가르쳤다. 강사로 있으면서 <청맥> 잡지의 예비 필자 모임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안병직 등 선배를 따라갔다가 선배인 김질락을 만나게 되었다. <청맥> 은 통일혁명당의 핵심인물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로, 종종 반미적인 논설이 실렸다. 어느날 김질락과 이진영 등이 신영복에게 혁명을 지지하느냐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따로 만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된 모임이라 한다. 통혁당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은 사형되었고 무기징역을 받은 신영복이 살아 있는 사건 관련자 중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되는데 신영복은,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핵심 간부들이라 불리는 이들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김종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 한다. 그리고 김질락과 이진영이 따로 만난 것은 5번 정도라고 한다.


신3.jpg

<더불어 숲(신영복 홈페이지)  http://www.shinyoungbok.pe.kr>


  그렇게 신영복은 통일혁명단 사건의 주동자로 엮이게 된다. 모진 고문을 받았고 그가 활동했던 모든 행적들이 조직적인 관곌 규정되어 수사 기록으로 남겨졌다. 고문을 받으면서 그는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라는 노래가 생각났다고 한다. 수사기관의 논리, 무엇이든 갖다붙여 벗어날 수 없는 수사기관의 연상법 놀이.

 ‘통일혁명단(통혁당사건)’은 1968년 일어난 대규모 간첩사건이다. 거물간첩 김종태가 운수업으로 위장하여 북한노동당의 재남지하당인 통일혁명당을 조직하고 전(前)남로당원·혁신적 지식인·학생·청년 등을 대량 포섭하여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정부전복을 기도하려고 하다가 일망타진된 사건이다. 이 사건에 관련되어 검거된 자는 158명으로 문화인·종교인·학생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73명이 송치(23명은 불구속)되었는데, 김종태는 1969년 7월 10일 사형이 집행되고, 이문규 등 4명은 9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그는 1966년부터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과 교관으로 활동하던 중이었기에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는데 1심에서는 사형, 대법원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최종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안양과 대전, 전주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성폭력, 살인 등으로 감옥에 가는 이들의 형량이 10년을 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허접한 수사와 당연한 귀결로 결론맺은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도 개탄받을 일이긴 하지만 무려 20년이 지나서야 가석방으로 감옥문을 열고 나올 수 있었다. 청춘의 그가 중년이 되어 세상을 밟았다. 당연,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걱정이 없을 리 없다. 다행히 그는 한한기 후에 성공회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었다.


 

휴지와 봉함엽서 속의 살아있는 글


  그는 오래도록 살았다. 감옥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감 생활. 무기징역이라는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젊은 청년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그 시대가 수많은 젊은 청춘을 감옥에 몰아넣었다. 그 시대의 특정한 이들이 많은 이들의 영혼을 억압하고 신체를 억류할 권리를 부여받은 듯이 행동했다. 그리고 다시, 그것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그는 감옥에서 책을 읽었고 글을 썼다. 그러나 읽을 수 있는 책 수는 제한적이었고 글을 쓸 종이도 없었고 검열도 당했다. 20년하고도 20일의 시간 동안 그는 부모님, 형수, 제수에게 편지를 썼고 그렇게 그가 옥중에서 쓴 편지들이 책으로 엮이게 되었다. 그는 휴지와 봉함엽서 속에 가족에게 보낼 글들을 띄웠던 것이다. 그렇게 1976년부터 1988년까지 감옥에서 그가 감옥에서 휴지와 봉함엽서 등에 써내려간 글들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어떻게 그러한 힘든 일을 겪고도 사람의 마음이 고요하고 예쁠 수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산문집이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도. 그는 사형선고를 선고 받고 곧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책이 바로 <청구회 추억>이다. 1966년 봄 서오릉으로 가는 소풍길에서 만나 약 2년 동안 우정을 나눈 여섯 어린이들과의 추억을 담은 글이다. 이 글 역시 교도소 두루마리 휴지에 볼펜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의 글들은 이렇게 흐물흐물 사라질지도 모르는 아주 얇은 휴지 속에 위태롭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기에 더욱 애잔하다.

  교도소의 생활들을 어떻게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으랴. 다만 그의 책의 제목처럼 그에겐 그 긴 시간이 ‘사색’의 장소가 되었다. 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는 다른 장소에서도 역시 ‘사색’하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교도소에서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많은 책들을 만났다. 대전교도소 복역 시절에는 남파공작원 출신 한학자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과 4년간 한 방을 쓰면서 한학과 서예를 익혔다. 이구영 선생과의 만남은 그를 동양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를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동양고전을 접하면서 ‘관계의 철학’에 대한 보다 깊은 사유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감옥생활을 하면서 자살하지 않은 것은 두가지 이유라고 한다. 햇빛과 그가 죽으면 슬퍼할 가족, 친구들이다. 그가 있었던 방은 북서향으로 2시간쯤 햇빛이 들어오는데 가장 햇빛이 클 때가 신문지 펼쳤을 때 정도였다 한다. 그 햇빛을 무릎에 올려 놓고 앉아 있을 때 정말 행복했다고 한다. 내일 햇빛을 기다리고 싶어 안죽었다고, 그는 그렇게 말한다.


 

처음처럼을 마신다! 


원샷!  신4.jpg 원샷!  


  소주회사는 처음처럼이라는 도수 낮은 소주를 내놓았다. 이름은 처음처럼. 이 처음처럼이란 글자, 어딘가 낯설지 않다. 세상에, 신영복 글씨란다. 세상에, 신영복 선생님이 소주회사에 글씨를 넘겼단 말이야? 놀라고. 놀라고.

  성공회대학교 퇴임 무렵 두산에서 브랜드명과 상표 글씨체로 시 <처음처럼>의 제목과 글씨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그는 수락하고 1억 원을 받는데, 성공회대학교에 기부했다 한다.

  그의 그림과 글씨체는 이미 유명하다. 그는 감옥에 서예반이 생기면서 만당(晩堂) 성주표(成周杓)와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에게 지도를 받았다 한다. 그는 자신만의 서체를 구사하고 많은 글씨와 그림들을 창작한다. 그리고 그의 붓글씨는 '신영복체', '어깨동무체', '협동체, '연대체'로 불리며 곳곳에 그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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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한다 -한겨레21[2006.05.16 제609호]

•한길사 '사회와 사상 제 15호':대담/인터뷰 통일혁명당사건으로 20년 만에 가석방된 신영복씨 - 월간 '사회와 사상' 1989년 11월 통권 제15호

•다음 백과사전, 신영복(브리태니커)

•네이버 지식백과, 통혁당사건(두산백과)

•더불어 숲(신영복 홈페이지)  http://www.shinyoungbok.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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