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주
김소윤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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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주가 없다


난주, 김소윤, 2018.


죄인 정난주는 더럽고 탐욕스러운 사학에 심취하여 임금께 씻을 수 없는 불충을 범하였고 제사를 폐하는 무부무군한 패륜을 저질렀다…… 죽은 자의 나라가 되살아난다는 요언을 일삼고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혔으며…… 나라를 파는 데 앞장선 대역죄인 황사영의 처로 백성을 현혹한 죄가 죽어 마땅하나……


  지구 탄생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이니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탄생과 죽음이 있었다. 구전과 문자로 전해지고 기록된 사람이 있는 반면 존재함조차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이 세상에 머물렀다. 이렇게 존재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건 아련함으로 인해 흥미를 끈다. 시대와 상황, 생각하는 바가 다른 어떤 사람의 생애가 회자된다는 건 현재에 우리들에게 어떤 종류이든 울림을 주기 때문일 텐데, 난주란 인물은 어떨까.

  으레 사람을 소개할 땐 누군가와의 관계성을 앞세우긴 하지만 난주를 소개할 때에도 이렇게 시작한다. 정약용의 조카. 정약현의 딸. 정약용과 그 집안이 가지는 영향력이 있기에 정난주가 정약용 집안이라는 점에서 예상되는 바가 있다. 지식인, 강인함, 종교적 신념, 더불어 박해, 탄압 그런 것.

  황사영은 신유박해로 천주교가 처형되고 탄압을 받자 그 실태를 명주천에 적어 북경에 있는 프랑스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된다. 포교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 함대를 보내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이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천주교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고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 관비가 된다. 이러한 정난주의 삶을 그려낸 소설이다.

  정난주의 삶은 주어진 환경의 영향과 개인의 심성과 신념에 기인한다. 당시의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에도 천주교에서 구원와 삶의 가르침을 얻고자 한 정난주는 살아가는 내내 종교적 신념을 굳건히 하고 그에 따른 삶을 살아나간다. 흐트러짐 없이 강인하며 품격을 잃지 않는 정난주의 태도는 많은 이들에게 공경과 공격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정난주의 삶의 태도가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고 그 태도가 종교적 신념에 따르는 삶이라고 했을 때 소설에선 종교적인 색채가 그렇게 눈에 띄게 느껴지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핍박받은 천주교인이라는 점과 그 이미지만을 안고 있다. 어쩌면 천주교만이 가진 색채와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 아니라서일 수 있겠다. 그저 매우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수준에서 종교적인 뉘앙스를 다루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살아온 방식보다 살아갈 방식이 더 힘겨운 상황에서 정난주가 지켜가는 삶의 자세는 매우 인상적이다.

  정난주는 매우 격정적인 상황을 자주 맞닥뜨리지만은 가장 격정적인 장면은 아들에 대한 것이다. 난주는 제주도로 유배가는 길목에서 어린 아들을 ‘버린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부모들이 아이를 입양 보낸 것이 생각나는데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로 살아갈 아들의 미래를 염려하며 아들 경헌을 추자도 갈대밭에 내려두고 떠난다. 다행히 경헌은 마을에 살던 노인의 손에 길러졌다. 평생을 그리움과 죄책감 가득 살아가는 정난주의 마음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이후 정난주는 제주에서 다른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거두고 보살피며 살아간다. 아들과 함께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인 장면은 마을에 전염병이 돌 때이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난주>를 떠올리게 된 건 이 부분 때문이다.

  마을에 전염병이 돈다. 그 시작이 난주의 양딸 보말로부터 시작된다. 세상 가장 무서운 전염병, 마마님의 급속한 확산에 전염병 치료를 맡게 되는 정난주는 실로 성심성의껏 치료에 힘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니 어떤 차별도 없이 병의 위중을 보아가며 치료에 힘썼고 최선을 다했지만 병의 시작이 양딸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에 대한 책임감 또한 막중했으리라. 어떤 경우이든, 어떤 종교이든 인간에 대한 존엄과 사랑이 핵심이고 본질이 아닐까. 그런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려고 포교 활동을 하는 게 아닌가?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그런 삶의 태도를 실천하며 자신이 믿는 종교의 뜻을 보여주는 거 아닌가?

  가짜뉴스가 나돌고는 있다고 하지만 감추고, 무질서하며, 보편적인 예의를 갖추지 않은 종교인들의 태도가 종교 자체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소설 <난주>는 집단의 힘이 세상에 내놓은 영향이 아니라 오로지 한 개인의 성정으로 만들어간 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종교적 힘이 <난주>의 삶을 이끌었을까 했던 생각은 종교의 힘이 아니라 개인의 힘이라는 생각을 더하게 한다. 그리하여 지금 ‘난주’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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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8 - 모르는 영역
권여선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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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힘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8-모르는 영역 


  비록 난 대상 수장작가 자선작 <전갱이의 맛>에 더 매료되지만 <모르는 영역>을 읽고 나면 왜 이 작품이 이효석 문학상 대상작인지 느껴진다. <메밀꽃 필무렵>이 바로 떠올려진다. 봉평 장날 풍경은 떠들썩한 식당 안 풍경으로, 메밀꽃 핀 달밤은 어둠 가득한 저수지와 차오르는 달의 이미지로, 부자관계일지 모를 허생원과 동이의 대화는 소원한 부녀관계인 명덕과 다영의 대화와 닮은 듯 여겨진다. 내용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인상에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여운이랄까, 여백이랄까 그런 이야기 분위기가 닮았다.

  가족관계에서 시간이 지나면 더욱 어색해지는 관계, 부녀관계가 아닐까.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딸바보’가 대세처럼 자리하고 있지만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된 딸과 아버지의 관계는, 더구나 어머니가 부재한 부녀관계는 소설 속 부녀관계처럼 소원할 것이다. <모르는 영역>은 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족이란 가깝지만 먼 그런 관계다. 그 관계의 익숙함을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모습을 “모르는 영역”이라는 단어로 “해 입장에서 밤에 뜨는 달은 영영 모르는 거지”라는 문장 속으로 잘 그려내었다.

  <전갱이의 맛>은 권여선 작가의 단편이다. 첫 낚시 경험은 양식장 사이의 바닷가에서 장난감 같은 낚시줄로 우럭을 몰아쳐 잡은 거였다. 함께 장난감 낚시를 하던 이는 전갱이만 잡힌다고 울상이어서 전갱이가 맛이 덜한 물고기인줄 알았다. 그날 밤 잠결에도 우럭을 건져 올릴 때의 짜릿함이 손가락 끝에 머물렀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우럭 잡기가 쉽지 않다는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우럭만을 건져 올린 것에 심취해 있었던 것인지 바닷가에 돌아와서 내내 천원짜리 줄낚시에 대한 경험을 늘어놓던 때가 생각난다. 어쩜 우럭잡기에 대한 이야기는 더 우려먹을 지도.


그러니까 사람은, 사람이란 존재는……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그렇게 감각하는 자체만으로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더라고. 내가 지금 이걸 느낀다, 하는 걸 나에게 알려주지 못하면 못 견디는 거지. 어떤 식으로든 내 느낌과 생각을 내게 전달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감각이나 사고 자체도 그 자리에서 질식해버리고 마는 것 같았어.


  남자는 성대낭종 수술을 받고 회복과정 동안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 시간 동안 남자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말’이라는 게 타인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와의 대화라고. 그런 생각을 하게끔 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말을 들려주기 위해 표현하려는 과정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새삼 말이, 언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내 낚시 바늘을 비껴간 전갱이의 맛은 여전히 모른다. 그럼에도 이혼한 전남편과 우연히 만난다면 전갱이보다는 우럭을 먹을 것 같지만 식당이고 시장이고 널린 것은 우럭이기도 했다. 소설 제목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내게 없는 감각이었다. 나는 전갱이 맛을 모른다. 그 결여된 감각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그 무엇, 그 이야깃거리.


나의 말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기억되거나 발견되는 거야. 내가 어떤 언어를 간절히 원했던 순간을 기억하거나, 그 간절함이 생겨나는 그 순간을 발견해서 내 말로 삼는 거지. 그러니까 내 말들은 어원을 잃는 법이 없어. 최초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그 위에 다른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말 속에 삶이 깃드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때로는 뜻을 알 수 없는, 그저 표현으로 먼저 생겨난 말도 있고, 가끔 아주 외설적인 말도 뛰어나와.


  전갱이의 맛을 읽고 조금 벅찬 감정이었는데 언어가 가지는 힘에 대한 경외감이라고 할까. 타인과의 대화를 몇날 며칠 하지 않는다고 질식하지 않으리라 자신하지만 끊임없이 생각이란 걸 하고 있다는 건, 남자가 말한 것처럼 자신과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그 수단인 말. 내가 말을 하는 방식, 내가 말을 생각하는 방식, 그런 것들이 내 삶을 채워간다는 생각에 나는 좀더 말에 대해 겸허하겠다 생각하는 동시에 보다 많은 말을 건져 올려야겠다 싶다. 내가 기억하고 발견하는 만큼 나의 ‘말’이 내 언어의 ‘어원’이 많아질 것이므로. 작가는 원고를 마치고 나면 술을 마신다고 했는데 이런 감각을 얻으려면 소주에 전갱이를 먹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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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
박솔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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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움이라 할 수 있을까


을, 박솔뫼, 자음과모음(이룸), 2010.


  ‘을’이란 제목을 보자마자 갑을병정 사회에서 살아가기에 그 ‘을’이라 생각했다. 을이 있으려면 갑이 있어야 하고 그런 이야기일거라는 예상은 빗나갔고 시공간이 어딘지 짐작할 수 없을 소설을 만난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을이란 걸 알았음에도 책을 덮고 나서 뿌연 안개를 걷어내지 못한 채 생각했다. 이건 갑을의 그 을이 맞노라고.

  어쩌면 이렇게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 ‘을’이라는 소설은 세 사람에 관한 소설이고, 그런데 그들은 연인도 친구도 아니고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없었다고. 외딴 호텔에 그들은 머물렀고 호텔은 어느 나라,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데나 갈 수 있잖아’라는 대사처럼 도대체 등장인물들의 마음이 행동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이 소설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소통의 매개가 아니라 기호의 등가물이 되는 것들을 사랑’하는 을처럼 소설은 독자와 소통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 익숙한 소설의 서사 방식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기호와 메시지같아 소설은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작가의 의도를, 이야기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언제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글을 읽었던가. 그래서 등장인물의 이름 ‘을’이 아니라 갑을관계의 ‘을’이란 기호로 읽어버린다.

  소설 속 인물의 이야기보다 ‘을’이 본 영화 얘기가 더욱 흥미롭다. 하긴 그것이 그들의 관계를 암시하는 내용일 것이다. 호텔은 행복한 낙원은 분명 아니지만 막상 한방의 총성이 울린 호텔은 더욱 불온하게만 느껴진다.


을이 보았다는 영화는 세 사람에 관한 영화였다. 어떤 외딴 곳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연인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다. 을은 그들이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없었다. 을은 그들이 외딴 곳으로 몰린 사람들로 보였다. 그들이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외딴 곳’이라는 장소가 그들에게 동지애 비슷한 것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는 외딴 곳에 새로운 사람이 방문하게 되었다.


  장기 투숙자를 대상으로 한 호텔에 ‘을’이 머물고 있고 ‘민주’를 불러들였고, 또다른 투숙객 ‘프래니’와 ‘주이’가 있고 하우스 키퍼 ‘씨안’이 있다. 이렇게 세어 보면 다섯이 되지만 이야기는 늘 셋을 말한다. 처음부터 셋이 아니라 둘이었다가 더해진 셋의 이야기로서. 그래서인지 둘 사이에 더해진 셋은 관계를 흐리게 한다. 둘일 때에는 마치 명확해 보였던 관계가 셋으로 인해 다르게 보인다.


두 명이 있을 때는 다른 할 일이 없다는 듯 뒤엉켜 뒹굴기만 했으나 세 명이 되자 그들은 나라라도 세울 듯이 열심히 일했다. 머릿속으로는 인류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비장하며 가슴 떨리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비장하며 건설적이고 청교도처럼 부지런한 날들이 흘렀다. (…) 노동 후 피곤했던 그들은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데 누군가가 살며시 일어나 어둠 속에서 칼을 들어 누군가를 찔렀다. 푹 하고 찌르는 소리와 끅 하는 비명이 짧게 순차적으로 들렸다. 또 다른 한 명은 가만히 일어나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칼을 들었던 이는 죽은 이의 시체를 질질질 끌고 나갔다. 모리세이는 계속 노래를 부른다. 방 안에는 다시 두 사람이다. 그들은 짙은 어둠 속에 앉아 있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엉겨 붙어 뒹굴었다.


  을과 민주, 프래니와 주이의 관계는 기존 사회질서에서 쉬이 용인되는 관계는 아니다. 그렇기에 사촌 자매인 프래니와 주이는 가족과 나라를 떠나왔다. 남성이 안정된 경제력을 가지고 여성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상황이 통상적인 사회에서 을과 민주는 그렇지 않다. 변화를 위해서 그들이 호텔로 온 것인지 아리송할 정도로 호텔 투숙객으로서 이들의 삶은 목적도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로운 듯 위태로워 보이는 일상이기에 지켜보는 입장에선 불안하기만 하다. 서로 자신이 ‘을’인 것처럼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을질’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관계는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인지 깨려고 하는 것인지조차 아리송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셋의 존재가 중요할 것이다. 그들 서로의 관계를 명확히 해줄 세 번째의 존재, 그 세 번째 인물의 위치가.


이 세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음이 보였다. 그것을 질투나 시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긴장감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감정. 그들은 공을 던지듯이 긴장감을 던졌다. 던지는 사람은 늘 서툴렀고 받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렇게 쉼 없이 빠른 속도로 강력한 감정들을 주고받아냈다. 던지고 싶어서 던지는 것도, 받고 싶어서 받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긴장감 안에서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던지는 것이고, 어디선가 날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얼떨결에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다시…… 그러다 그렇게 주고받던 감정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사람이 칼을 든 것이었다. 그가 들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칼을 들었을 것이다.


  둘 사이에선 더 많이 이야기하는 자가 을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더 많이 지켜보고 그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렇게 알고 있음에도 더 알고 싶고 그러나 더 다가가지 못하는 어떤 관계들. 신인문학상을 받은 소설로 심사위원은 노마드적 사고, 자유로움이 소설에 가득하다고 이야기한다. 분명 끈적이지 않는 이야기다. 새로운 투숙객을 맞이하는 깔끔하게 정리된 침구류를 만진 듯한 느낌과 건조한 문체는 분명하지만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진 않았다. 씁쓸하고 쓸쓸하며 지극히 공허한 느낌이 가득한데 어쩌면 그건 타인과의 소통과 관계를 미적거리며 남긴 탓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쿨한 관계 정리가 아니라 쿨내 나 보이게 했을 뿐인 관계로 인한 미적거림. 그렇게 소통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이유로,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머물렀다는 생각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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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매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8
김금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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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소리 그쳤다


나의 사랑, 매기, 김금희, 현대문학, 2018.


  옛날의 금잔디 동산의 매기, 이런 서정적이고 아련한 노래를 부르면서도 머릿속엔 매운탕의 그 매기가 떠올랐다. 백발의 매기만큼이나 긴 수염을 가진 매기였다. 어릴 때란 어찌 그토록 단순하고 즉각적인 것인지 물레방아 도는 물가 어딘가에 매운탕이 되기 전의 매기를 놓았는데 생각보다 잘 섞였다. 이 책을 읽는 때에도 변하지 않았으니 여전히 두 개의 매기를 떠올리는 나는 아직도 어린 모양이다. 아니, 너무 너무 커버렸나. 재훈의 ‘나의 사랑 매기’에 그들의 사랑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했고 그 이유가 다른 무엇보다도 매기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사랑은 프라이빗한 것이지만 쇼잉이기도 하다는 것’을 재훈이 마포구 와우산로 17길에서 깨달을 때 나 역시 재훈이 매기, 매기할 때마다 어색하고 이것은 사랑일까에 관한 잡다한 생각을 했다. 재연 배우인 매기의 행동은 역할극에 빠진 듯 ‘쇼잉’에 집착하는 듯했고 그리하여 과장되게 느껴졌다. 매기가 아니라 영희, 미자, 지영, 수린…이런 이름이었다면 달랐을까. 매기로 불리지 않았다면 좀 달랐을까. 재훈의 입을 통해 그려지는 매기는 재훈의 그 사랑이 절절하다 아무리 외친다한들 통속적이게 느껴질 뿐.

  어쩜 사랑도 사랑이야기도 그렇다. 행복한 사랑이야기는 모두 비슷하지만 어딘지 불행한 사랑이야기는 구구절절하게 설명적이라는. 현재와는 달리 먼훗날에 지난 시절을 되돌아볼 때는 어김없이 애틋할 뿐인 사랑, 그 사랑의 모습.


내가 매기의 말을 기다리다가 안 되겠어서 먼저 물었다. 매기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냥 재훈아, 먹고 싶은 것 먹고, 보고 싶은 사람 보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라고만 했다. 들어보면 환자를 돌보는 사람의 특별할 것 없는 대답이었는데 나는 아주 확실히 절망했다. 매기의 대답에는 말의 진기랄까, 온도랄까, 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사라지고 있는 중인지도 몰라서 나는 용기를 내서, 그러고 있잖아, 라고 답했다.


  사랑을 타인에게 ‘쇼잉’하지 못하는 그들의 사랑은 사랑일까. 14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매기와의 사랑이 마무리될 수밖에 없는가를 이 소설은 이야기한다. 14년만에 재회해 사랑속으로 ‘툭툭 떨어져 내린‘ 둘의 관계는 쇼잉하지 못하기에 위태롭다. 그 옛날에는 미숙함에 어긋나기만 했다면 지금 재훈이 돌아서야 하는 이유는 넘치는 그 사랑을 ’쇼잉‘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재훈은 “동산 수풀은 사라지듯 옛날의 노래로서”만 매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재훈은 닭기름 냄새가 올라오는 2층집에서의 매기와의 섹스를 그 닭튀김이 주는 친숙함에 아주 자연스럽고 무해하게 생각한다.


매기 역시 내가 보지 못하는 어느 영역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장바구니 위로 어느 푸성귀의 푸른 잎이 보일 때마다, 비닐봉지를 묵직하게 누르는 야채의 부피감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심지어 당근도 자기 삶을 감당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절은 기름 냄새를 맡으며 재훈과 매기가 닭집 2층에 있어야 했던 건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더 컸다. 그 “아주 위험하고 격정적이며―여러 의미에서―파괴의 행위를 하고 있는” 재훈과 매기의 사랑은 “옛날의 금잔디 동산의 매기”로만 불려질 거다. 재훈은 그것을 안다. 쇼잉이라는 영어 단어로 뭔가 달라 보이고 있어 보이게 위장되었을 뿐 정확히 말해 불륜인 그들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이라 말할 수 없고 남들에게 보일 수 없고 손잡고 거리를 활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묵직한 무게의 당근을 통해 현실을 인식하며 매기의 추억으로 소환하고 더 이상의 관계는 없음을 이야기하는 소설, 이 지극히 ‘프라이빗’한 이야기는 모든 쇼잉하지 못하는 사랑 이야기가 나아가는 결론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는 언제나 전혀 프라이빗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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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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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잡아


진이, 지니, 정유정, 은행나무, 2019.


  포털 메인 사진기사엔 뱀이 가득한 흙탕물에 선 인간에게 오랑우탄이 손을 내밀고 있다. 사진을 찍은 작가의 인상처럼 ‘내 손을 잡아’ ‘도와줄까?’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사진 속 인물은 오랑우탄의 손을 잡진 않았다고 한다. 그 손을 잡았다면 이후의 사진은 어떻게 찍혔을지.

  며칠 전에는 ‘원숭이가 구석기 시대 돌입하다’라는 과학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3천년전부터 돌을 도구로, 뗀석기로 이용하고 있긴 했지만 점점 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고 있다고. 이렇게 학습하고 전수하며 지금보다 문명화되어 갈지 모른다. 마치 인류가 구석기 시대 그러했던 것처럼.

  원숭이, 고릴라, 침팬지, 보노보, 오랑우탄… 그 특징을 명확히 구별하지 못하고 통칭하여 원숭이류로 분류하는 이 종들은 인간과 유사점이 많다. 분명 지적인 면에서 인간과 비교될 수 없을 텐데 가끔 이러한 동물이 인간보다 낫다 생각될 때가 있다. 인간에 대한 실망에서 오는 작용일 것이다. 퍼져가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초기 상황 때에도 이런 위급한 상황에 일어나는 일련의 상황 혹에 어떤 어떤 인간들의 모습 때문에도 더욱 더. 그래서 감정적인 부분이야 헤아릴 수 없겠지만 보편적 정서는 같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런 동물들의 행동에 감정이 끌려지게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결론은 구달 박사가 침팬지 연구에 그렇게 매진을 하고 있나 보다, 정유정 작가의 『진이, 지니』의 판타지가 판타지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두 인물은 김민주와 사육사 ‘진이’다. 그리고 보노보 지니가 있다. 영장류 연구자가 되기 위한 오랜 노력을 포기하고 사육사로 일해 온 진이의 마지막 출근날,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보노보 구출작업에 투입된 진이가 보노보를 구출하고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나는 늘 그래왔듯 내 영혼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건너서 버스 승강장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넋 나간 사람처럼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서 길 건너 병원 앞마당을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내 문제는 사소하게 느껴졌다. 작아서 사소한 게 아니라 멀어져서 사소해진 경우였다.


  삶에 무력하고 의지없는 주인공의 등장으로 세상만사가 느리고 질서없이 흘러갈 듯하지만 스릴러를 전개해온 작가의 문장답게 속도감이 있다. 정유정 작가의 그동안의 작품과는 결이 너무 달랐던 소설이지만 그 세밀한, 리얼리티는 사라지지 않았다. 분명 이 소설은 맹백한 판타지임에도 상황과 심리를 묘사하는 작가의 정교함에 휘둘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보노보가 등장하는, 영혼의 바뀜이 일어나는 이 소설이 말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진이’라는 사육사가 처한 상황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기보다는 진이가 품어가는 생각과 감정이 현실적이었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물들여져 간 게 맞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또한번 놀란다. 이 이야기가 사흘간 펼쳐진 일이니까 말이다.

  그 많은 시간 동안 해결치 못한 삶의 태도가 주인공들이 겪는 이런 사건을 맞닥뜨린다면 사흘 안에 달라지리란 건 너무도 당연할 것이다. 터닝포인트,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의 발생, 쿵! 쾅! 하지만 내면에서 쌓아올린 그 무수한 생각과 감정이 없었다면 한번의 충격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변화란 그저 보여지는 것만일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 변화란, 그동안 품고 있던 내면의 트라우마를 끄집어내어 그것과 맞닥뜨리고 해소하는 것일 테니 비로소 ‘나’로서의 삶을 살아갈 여정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소설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지만 그와 더불어 진행되는 건 트라우마다. 죄책감 또는 책임이라는 무게. 제 삶에 대해서, 타인의 삶에 대해, 이 세상 모든 생물의 삶이라는 실존에 대해. 소설은 ‘살아 있는 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한다. 삶에 무척이나 무력한 이의 입에서 나오는 이 말의 무게는 소설이 전개되어 나가면서 달라진다. 당연 그럴 것이다. 작가가 전력을 다해 말하고픈 바가 그것일 테니까.

  오랑우탄이 손을 내민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오랑우탄의 손을 잡지 않았다. 물론 진이 또한 지니를 만나기 전 위급한 상황의 보노보에게 손을 내밀지 못했다. 어쩌면 그 기억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그 시간을 되돌리고픈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한 그런 이야기지만 소설을 덮는 시점엔 진이와 지니가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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