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이웃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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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면 망한다

선한 이웃, 이정명, 은행나무, 2017-05-29.


  1987년의 6월이 있었지만 2016년의 12월을 겪어야 했다. 아직 2016년, 2017년은 끝나지 않았고 끝이라는 것도 어떤 식으로 결론날지 알 수 없다. 여전히 폭풍이다. 1987년 6월의 함성을 질렀던 이들은 2016년의 상황을 맞닥뜨릴지 알았을까. 그러니 모르는 것이다. 지금, 30년이라는 세월을 흘러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여전히 반복된 악의 고리를.

 『선한 이웃』은 연극연출가를 중심으로 1980년대의 삶을 이야기한다. 연극처럼 꾸며지는 이야기가 연극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30년전의 이야기가 전혀 30년전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을 때 이야기가 갖는 힘은 폭발한다. 무대에 올린 연극을 준비하는 등장인물들처럼 소설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맡은 배역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어떤 식으로든 주어진 일에 호기심을 넘어선 사명감을 투영하며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나치시대에도 그랬듯이 아이러니하다. 비극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역시 죄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을 테니까.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살인자나 테러리스트 같은 악한이 아니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선한 이웃들이다. 인간은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지옥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고해성사를 하는 죄인처럼 말했다.


  운동권은, 특히 7, 80년대에는 지식인이자 삶의 정의를 고뇌하는 철학자이자 세상을 구원하는 세력으로 여겨지고 그렇게 활동했다. 지금의 운동권이란 말은 오랜 동안의 프레임인지 지식인이라는 말보다는 특정집단을 비하하는 말로 다소 조심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30년 전의 운동권이 가진 시대를 고민하는 사색과 행동력은 놀라우리만치 특별한 존재로 여겨진다. 소설 속 영웅으로 등장한 최민석처럼.

  소설속에서 드러나는 등장인물들은 몇되지 않는데도 이야기의 스케일이 거대하다고 느껴진다. 권력이라는 것이 중심에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운동권을 결집시키는 운동가이자 시민들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얼굴없는 운동가 최민석과 정보부 수뇌부의 요원으로 최민석을 쫓는 엘리트 김기준의 대립을 기본으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1차전은 최민석의 승리다. 최민석을 검거하지 못한 김기준과 팀은 해체되고 김기준은 좌천되기까지 한다.


‘로마는 한 사람의 권위 아래 무릎을 꿇을 것인가?’

Shall Rome stand under one man's awe?

그는 ‘awe'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경외‘로 번역되는 그 단어는 공경과 두려움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모든 권력이 존경과 공포의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지녔다는 점에서 다분히 정치적인 함의를 지닌 단어이기도 했다. 두려움은 지배를 용이하게 하고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토록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존경을 얻지 못하거나 혹은 일시적으로 얻었던 존경을 철회당한 지배자들은 어김없이 공포를 행사해왔다. 대본 집필 당시, 태주는 그 단어를 로마인들의 칭송을 받는 시저의 정치적 ’권위‘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 대사가 브루터스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동조와 협력을 이끌어내는 정치적 권위가 아니라 복종과 굴욕을 강요하는 공포, 즉 ’독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쩌면 삶은 철저한 계획, 시나리오를 짠 이후에 실행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기준과 최민석의 대립 사이에 연극연출가 이태주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태주가 무대에 올린 <줄리어스 시저>의 대사 한줄이 문제가 되어 연극 상영이 중단되고 관련자들이 구속된다. 그런데 이태주는 보름만에 방면되었고 극단계에 변절자라 낙인찍히게 된다. 재기를 위해 이태주는 또다른 연극 <엘렉트라의 변명>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 연극에 삼류배우 인생으로 살던 김진아가 캐스팅된다. 재기를 위해 이태주가 열심히 연극을 준비하듯 좌천된 김기준 역시 최민석을 검거하기 위해 보다 더 철저한 검거작전을 위한 시나리오를 준비한다.

  김기준이 최민석을 검거하게 될까. 최민석은 이태주인가. 이태주는 자신이 준비한 연극을 무대에 올릴 수 있을까. 이것은 이야기를 따라 가며 사소하게 느끼는 궁금증이었다. 독재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전형적으로 느껴지다가 문득 한 지점에서 내가 크게 간과한 것이 있음을 알았다.

 오래도록 권력을 잡기 위한 권력층의 행동들은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떠나서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가 너무도 유치하다고 늘 생각해왔다는 점이다. 유치찬란하고 너무도 뻔히 보이는 그릇됨이기에 일견 코믹스럽게도 바라봤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그들은 권력욕을 가진 허영덩어리이자 옮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정도의 지적수준과 사고를 가졌다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들 역시도 그 시대에서든 이 시대에서든 재력과 권력과 학력을 지닌 자들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먹고 있었다. 그들이 실제적으로 드러낸 말과 행동 때문에 너무 수준을 낮게 보았거나 의도적으로 그렇게라도 그들을 무시하려 애썼는지 모르겠다.


지금 기준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기껏해야 말도 안 된다는 말을 거듭하는 것밖에 없었다. 관리관은 잠시 턱을 불끈거리더니 냉랭하게 대꾸했다. “인간은 무언가에 사로잡히기를 원하는 존재야. 예수, 마르크스, 모택동, 무슨 주의니 무슨 주의니 하는 이념들, 하다못해 엉터리 점쟁이까지. 앎으로써 믿게 되는 진실이 있는가 하면 믿는 대로 알게 되는 진실도 있다는 거지. 그러니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거야.


  막나감이 권력과 합쳐졌을 때 가지는 파괴력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소설속 관리관에게 뒤통수를 맞은 나는 다시 한번 기존에 가졌던 생각들 때문에 어질하다. 사과하나를 더 먹기 위해 어떻게 사과를 베어무는 양과 사과를 씹는 속도를 조절하는 것과 같이 권력과 야망을 위한 본능적인 시나리오를 아는 자들을 너무 쉽게 유치하고 한심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빠져서 그들의 시나리오조차도 한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나리오로도 무대를 올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간과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 상영관을 꽉 채우면 볼 것은 그것뿐이 없게 되리라는 것도. 시나리오가 뭐 별건가. 프레임이란 말로도 대체가 가능할 거다. 얼마든지 정교한 시나리오를 짜고 그에 맞는 배역들을 섭외할 힘을 가지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실감해야 할 듯하다. 지금 역시도 관리관은 새 판을 짜고 있다. 쉽게 무시하고 간과하다가는 열심히 일하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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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사람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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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다

괜찮은 사람, 강화길, 문학동네, 2016-11-30.


   다른 사람, 괜찮은 사람, 귀한 사람, 친한 사람, 중요한 사람, 눈사람?

  ‘사람’이라는 말이 제목으로 내용 중에도 자주 쓰인 작가의 단편집 『괜찮은 사람』은 읽기에 괜찮았다. 단편마다 가득한 스릴이 괜찮지 않은 상황을 보여주지만 그 느낌이 괜찮았다. 이렇게 말하고보니 또 이상하다. 그 느낌이란 것이 살아가면서 익숙하게 느끼는 불안감을 담고 있기에 낯설지 않았다가 더 적당할까.

  산다는 건 명확하게 딱 떨어지는 것은 없다. 누구나 살면서 경험하는 것일 게다. 모호한 상황과 그로 인해 겪는 모호한 심리가 인생 전체를 지배한다. 타인에게 이야기할 때조차도 불확실함을 전하면서 확실성을 얻고자 한다. 그렇다고 늘 확실성을 얻어가는 것은 아니기에 인생은 늘 불안할지도 모른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사소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삶의 불안과 긴장을 더해 우리의 삶들은 과민성대장증후군과 신경증에 시달리는 것 아닐까.

  타인이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괜찮은 사람이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나 또한 적정의 추켜세움을 받을 만큼의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픈 욕구가 불안속에 내재해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은근한, 확고한 폭력에 대해서도 확실함이 아니라 모호함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나에게 일어난 일인가. 내 생각이, 느낌이 확실한가. 내가 예민한 것이 아닌가. 이 예민함이 나를 괜찮지 않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그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들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늘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실망하거나,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 빈약하고 허름한 트랙에서조차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불안이 밀려왔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불안은 순식간에 번지는 곰팡이와 같아서 쉽게 눈에 띄었고, 그러면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느끼는 것과 정말로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건, 굉장한 차이였으니까.


  상황에 대해 모호함으로 일관하는 것은 모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안과 공포를 뛰어넘는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한 소설속 불안을 느끼는 이들의 삶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상황은 늘 되풀이될 것이다. ‘참는’ 것이 ‘모른 체’가 되고 나면 모든 상황은 그것에 맞추어 흘러가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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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감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민음사, 2016.


  이 책이 보통의 베스트셀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응원에 힘입어 문학상의 수상까지 이뤄낸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책으로 또한 82년생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김지영이라는 이름이 신문에 인용되는 현상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내내 82년생 김지영의 돌풍이 이어져 웬만한 이들은 모두 이 책을 읽었으리라 의심치 않고 있었는데 얼마 전 알라딘에서 이 책에 대한 1000명 읽기였는지 구매였는지 그런 이벤트가 게재된 것을 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읽어서 이제 더 이상 읽을 사람도 책을 구매할 사람도 없을 만큼 무수히 읽고 무수히 구매를 했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의 구매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어쨌든 좀 놀랐다.

  이 책이 한창 돌풍을 일으켰지만 이 책에 대한 나의 감상은 꽤나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열풍은 책 자체에서 기인한 저력 외에 외적인 요소가 상당 부분 작용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나 역시 기대만큼의 만족감이 없었기에 그 실망의 강도가 강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서 페미니즘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공감이라거나 82년생뿐만 아니라 여성 보편의 삶에 대한 인식을 달리한 것도 없고 무엇보다 소설에, 문학에 기대하는 문학적 요소를 느끼지 못해서 그냥 그랬는데, 그런 내 감상 때문인지 이 책에 대한 또한번의 이벤트라고 해야 할까, 아니 ‘주목해서 읽으세요’라는 어떤 강요의 느낌이 마뜩치 않았다. 이보다 더, 읽어야 할 책이 많은데. 아니 이것말고 다른 것을 더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했다. 뭐,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베스트셀러라서 부러워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책이 안 팔리는 시대에,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베스트셀러인 것이 마냥 부러워서.

  나는 왜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공감하지 못했나를 생각했다. 책이 쉽게 읽힌다는 점은 장점인데 내게는 그 점이 단점으로 작용했나 보다. 나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자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내게는 소설이 아니라 인터넷 까페나 게시판에 올라오는 사연으로 읽혀졌다. 그런 사연에 대해서는 위로나 공감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할 뿐이지 내 문학적 감수성이 특별히 더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면서도 82년생 김지영이 겪는 일들은 너무도 특별할 게 없어서 별 감흥이 없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정도를 가지고, 뭘. 아마도 그런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더 자극적인 삶을 기대했나 싶기도 하다. 82년생 김지영의 삶의 여건은 확실히 평균 이상으로 느껴졌다. 나는 어쩌면 82년생 김지영이 삶이 지금보다는 특별한 층에 속하는 여성의 삶이라고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게시판에 올려진 사연같은 이 글이 처음엔 ‘너무 문학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문학적’인 것이었으면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겠나 하는 쪽으로 다소 옮겨갔다. 이런 형태로 작가가 글을 쓰면서 사람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사람들로부터 ‘김지영’에 대한 공감을 할 수 있도록 설계를 한 것이구나, 그런 생각으로. 82년에 태어났든 70년에 태어났든 90년에 태어났든 지금 현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같기에 김지영을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어쨌든 이 삶들은 왜 이토록 달라지지를 않았니, 그런 거였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갔고 여전히 경제적인 여건이 힘겨운 여성이 아님에도 그 삶이 자아를 상실할 정도로 치닫는 다는 건 얼마나 모순적이고 얼마나 문제적인가. 그렇다면 작가가 전달하고픈 의도는 내게도 잘 전달된 것이구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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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계절
구효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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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로 남은 이야기


아닌 계절, 구효서, 문학동네, 2017-04-03.


  많은 작품을 쓴, 수많은 문학상 수상작가 구효서의 소설집 「아닌 계절」은 아닌 계절 겨울, 여름, 봄, 가을에 관해 이야기한다. 통상적으로 사계절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말하나 작가는 아니다. 통상적인 말의 수순을 버리고 아닌, 특정한, 사계절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이야기, 이야기는 계절을 배경으로 그러나 계절을 주인공으로 불러낸다. 그 계절에, 그 겨울과 여름과 가을과 봄에 겪었던 이야기들은 그 계절이 ‘아닌’ 계절을 떠올리기 아려울 만큼 그 계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아닌 계절은 그 계절을 느끼느라 그 계절에 갇혀 있느라 더디게 읽힌다. 작가가 전하는 말의 리듬은 터벅터벅, 고독을 아픔을 짊어진채 느리게 느리게 나아간다. 그럼에도, 읽은 문장을 다시 읽는 일이 반복되어도, 그래서 문장들과 이미지는 반복해서 마음에 쌓이는 모양이다. 모호한, 부정칭 같은 인물들의 이름이 멀게 느껴져 거리를 두고 이들을 보다가도 한발자국씩 가까이 가게 만든다.  적당히 떨어진 채로 말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누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하고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일이므로 누구든 어디든 상관없었다. 분명한 건 각막을 에는 듯한 추위뿐이었다.


  주위 누군가 사라져도, 온통 낙서로 뒤덮인 벽이 늘어가도, 세상이 어떤 일이 벌어져도 기억하는 것은 오직 겨울, 춥다는 느낌과 생각인 「세한도」의 [세한도]의 여자처럼. 아이가 물에 빠져도, 양식장 주인이 아이를 죽이는 것을 보아도, 어느 어머니에게서 촌지를 받아 다른 어머니에게 부치는「바다, 夏日」의 ‘미음’처럼. 세상을 보고 있지만 보고만 있는 그러한인물들의 모습이다. 이것은 「봄나무의 말」속 회화나무의 역할이 아닌가. 오히려 이 회화나무가 감정을 가지고 이야기를 건넨다. 다른 인물들이 그들이 겪는, 그들이 보고 있는 상황을 익숙한 거리감으로 그저 ‘보고만 있는’데, 회화나무만이 마을의 일꾼 닷근이와 꽃서방과 새악시의 이야기를 전한다. 화자의 목소리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이렇듯 다른 인물들이 아니라 ‘회화나무’인 것이 우연일까.


찌고 숨 막히는 듯하다가 더위는 고스란히 살을 에는 통증이 되었다. 어떤 느낌도 여자에게 이토록 명징했던 적이 없었다. 혹독했으며 처음이며 마지막일 것 같았다.


  「여름은 지나간다」의 인물은 전쟁통에 헤어져 육십년이 지나 재회한 노부부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묻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그 말들을 하지 않는다. 그들 부부의 이름을 기억하려 해도 그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아 기억하기 어려울 지경인데 이름마저도 ‘파’와 ‘하’다. 감탄사이거나 혹은 의미없는 소리일 뿐이 이 단어가 이름이 되면서, 이 노부부의 이미지는 그 주위를 둘러싼 배경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러니, 선명하게 부각되는 계절. 이들이 만난 그 계절, 지나갈 여름, 아닌 여름이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모호한 이름이나 모호한 시공간적 배경을 의도했다고 했다. 이 의도가 문학적 익숙함은 아닐지언정 일상적 공간에서는 익숙하다는 것, 아닌 계절을 덮은 후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말이 회화처럼 번지는 통에 한참을 이미지에 갇혀 있게 하는 맛이 있었다. 요즘처럼 스토리를 부각하는 소설이 인기임을 생각한다면 이 책을 잡는 손길은 더뎌지겠구나 싶었다. 한편으론 이 책에서 추리와 미스터리를 읽을 때와 같은 장르적 느낌을 짙게 받았다. 단편소설에서 ‘문학’이란 느낌이 가득한, 문장 때문에 더디게 읽게 되는 글들을 만나는 즐거운 일이 계속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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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지 않도록.


바깥은 여름, 김애란, 2017-06-28.


  한파주의보가 내렸다. 비도 내리고 바람도 거칠게 불었다. 깊은 가을로 들어선지 오래다. 그러니, 바깥은 이미 여름이 아니다. 한 해가 두달도 남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면 이젠 겨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니, 바깥은 여름을 향해 조금 더 가고 있다.

 올 여름께 베스트셀러였던『바깥은 여름』은 김애란 작가의 일곱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상문학상과 젊은작가상 수상작이 실려 있지만, 단편명에 『바깥은 여름』은 없다. 「풍경의 쓸모」에 스치듯 나오는 문장에서 단편집의 제목을 삼았다. 쓸모라는 단어를 보면서도 풍경의 쓸쓸함과 씁쓸함으로 읽혀진 것처럼 『바깥은 여름』의 이미지는 기인 그림자가 사그라지지 않는 풍경으로 남았다. 작품마다 상실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입동」과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상실은 같은 것처럼 다가왔다. 아이를 잃은 부부와 남편을 잃은 아내의 무너진 일상의 생활들이 아프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아이와 남편이 사망한 일이 하나의 사건으로 여겨졌다. 하나의 사건이 일으키는 파장이 얼마나 큰지, 당사자와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간극은 크다는 걸 소설을 통해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이 두 작품에서 세월호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생각나는 더없이 트라우마로 남은 큰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두 작품에서 아무리 트라우마를 겪는다 해도 함께 공감을 나눈다한들 결국 타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참으로 슬퍼졌다. 나 역시 그들처럼 결국엔 바깥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일 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우리는 자식을 잃은 부모는 남편을 잃은 아내는 ‘어떠해야 한다’ ‘어떠한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는 굴레를 씌우고 우리의 편의대로 애도를 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 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제자를 구하다 사망한 교사의 아내의 말이다.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는 문장에서 내 심장은 덜컥거렸다. 우리는, 그들에게 타인인 우리는 그가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대해서 더 특별히 애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들을 은근히 비난하며…. 13일, 세월호에서 제자를 구하다 사망한 교사의 장례가 있었다. 그날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소설 속 아내의 말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다. 마치 「입동」에서 겪은 일로 이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아니라 기계에 대고 슬픈 물음들을 물어대는 것만 같았다.

  새삼 공감이라는 것이 언제나 내 경험치 안에서 움직이고 있음도 느껴졌다. 그것이 시리가 대답할 수 있는 최대치. 나는 타인의 일에 관해서 언제나 시리일 수밖에 없는 걸까. 조사 ‘은’이 가리키는 성실한 저 대조의 의미. 바깥은 여름이고…. 바깥은 여름이라고 제목 지은 작가의 의도를 알 것 같다 말함으로써 시리에서 비켜가고 싶은 나의 의지를 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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