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감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민음사, 2016.
이 책이 보통의 베스트셀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응원에 힘입어 문학상의 수상까지 이뤄낸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책으로 또한 82년생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김지영이라는 이름이 신문에 인용되는 현상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내내 82년생 김지영의 돌풍이 이어져 웬만한 이들은 모두 이 책을 읽었으리라 의심치 않고 있었는데 얼마 전 알라딘에서 이 책에 대한 1000명 읽기였는지 구매였는지 그런 이벤트가 게재된 것을 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읽어서 이제 더 이상 읽을 사람도 책을 구매할 사람도 없을 만큼 무수히 읽고 무수히 구매를 했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의 구매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어쨌든 좀 놀랐다.
이 책이 한창 돌풍을 일으켰지만 이 책에 대한 나의 감상은 꽤나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열풍은 책 자체에서 기인한 저력 외에 외적인 요소가 상당 부분 작용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나 역시 기대만큼의 만족감이 없었기에 그 실망의 강도가 강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서 페미니즘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공감이라거나 82년생뿐만 아니라 여성 보편의 삶에 대한 인식을 달리한 것도 없고 무엇보다 소설에, 문학에 기대하는 문학적 요소를 느끼지 못해서 그냥 그랬는데, 그런 내 감상 때문인지 이 책에 대한 또한번의 이벤트라고 해야 할까, 아니 ‘주목해서 읽으세요’라는 어떤 강요의 느낌이 마뜩치 않았다. 이보다 더, 읽어야 할 책이 많은데. 아니 이것말고 다른 것을 더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했다. 뭐,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베스트셀러라서 부러워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책이 안 팔리는 시대에,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베스트셀러인 것이 마냥 부러워서.
나는 왜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공감하지 못했나를 생각했다. 책이 쉽게 읽힌다는 점은 장점인데 내게는 그 점이 단점으로 작용했나 보다. 나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자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내게는 소설이 아니라 인터넷 까페나 게시판에 올라오는 사연으로 읽혀졌다. 그런 사연에 대해서는 위로나 공감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할 뿐이지 내 문학적 감수성이 특별히 더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면서도 82년생 김지영이 겪는 일들은 너무도 특별할 게 없어서 별 감흥이 없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정도를 가지고, 뭘. 아마도 그런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더 자극적인 삶을 기대했나 싶기도 하다. 82년생 김지영의 삶의 여건은 확실히 평균 이상으로 느껴졌다. 나는 어쩌면 82년생 김지영이 삶이 지금보다는 특별한 층에 속하는 여성의 삶이라고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게시판에 올려진 사연같은 이 글이 처음엔 ‘너무 문학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문학적’인 것이었으면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겠나 하는 쪽으로 다소 옮겨갔다. 이런 형태로 작가가 글을 쓰면서 사람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사람들로부터 ‘김지영’에 대한 공감을 할 수 있도록 설계를 한 것이구나, 그런 생각으로. 82년에 태어났든 70년에 태어났든 90년에 태어났든 지금 현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같기에 김지영을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어쨌든 이 삶들은 왜 이토록 달라지지를 않았니, 그런 거였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갔고 여전히 경제적인 여건이 힘겨운 여성이 아님에도 그 삶이 자아를 상실할 정도로 치닫는 다는 건 얼마나 모순적이고 얼마나 문제적인가. 그렇다면 작가가 전달하고픈 의도는 내게도 잘 전달된 것이구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