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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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2019.


  「일의 기쁨과 슬픔」이 신인상 수상작으로 SNS에 오르내릴 때 내가 떠올린 건 알랭 드 보통이었다. 보통 책을 다시 읽어 볼까. 그리고 많은 이들이 집중할 때면 으레 그래왔듯이 이 소설에 대해선 잠깐의 호기심 후 뒤로 물러났다. 알랭 드 보통의 책 제목에 기대었음에도 구미가 당기지 않은 까닭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이 소설 하나를 읽게 되었는데 첫 느낌은 ‘이건 SF인가?’였다.

  당황한 건 이 소설에 대한 댓글 반응이었다. 소설이 현실을 바탕으로 한 상상의 영역이라지만 지극히 ‘소설’로 본 나에 비해 댓글은 현실적인 공감 반응이 많았다. 웹에서 읽은 터라 댓글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며 실제로 같은 경험을 했다는 글을 보았을 때, 나는 내 경험과 상상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이 소설이 웹상에서 그토록 뜨거운 반응일 수 있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판교 테크노벨리 스타트업 회사가 배경이다. 중고 마켓 회사 사원 김안나는 우수 이용객인 아이디 거북이알이 매번 새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꺼림칙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해 거북이알을 만나게 된다. 거북이알은 인근 카드사 회사원으로 회장에게 찍혀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고 있었다. 거북이알의 생존법은 포인트로 물건을 구매해 다시 현금화하는 것이었다. 이게 소설의 줄거리인데 4차 산업혁명의 산업 현장에서 실제 이런 경험을 한 이들이 많다니 이 미치도록 리얼한 소설을 어찌 나는 SF쯤으로 생각하였나 싶다. 나는 이 공간이 낯설었다.


굴욕감에 침잠된 채로 밤을 지새웠고, 이미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되었다고. 그런데도 어김없이 날은 밝았고 여전히 자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출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 「일의 기쁨과 슬픔」


  거북이알이 포인트로 월급을 받고 굴욕감에 밤을 지새운 것처럼 미칠 것 같이 잊고 싶은 현실감, 미세하게 구질구질한 속내들을 이 소설집은 담고 있다. 「일의 기쁨과 슬픔」 외에 8편이 담겨 있는데 하나같이 드러내지 않고 있으나 머릿속으로 드러내며 보이는 사람들의 속마음 같은 것이 펼쳐져 보인다고나 할까. 그래서 한편으로는 소설같다기보다 일상을 기록한 녹취록 같다. 가장 가까운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 그러나 내면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고 뚜렷하게 표현되는 것도 아닌 채 공간에 머물러 있는 어떤 불편한 심기들을 잘 뽑아내었다.


“그럼, 제니퍼부터 해볼까?”

제니퍼는 디자이너인데 한국 사람이다. 회사가 위치한 곳이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판교 테크노밸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어 이름을 지어서 쓰는 이유는 대표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한 스타트업의 특성을 고려하여, 대표부터 직원까지 모두 영어 이름만을 쓰면서 동등하게 소통하는 수평한 업무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다. 위계 있는 직급체계는 비효율적이라는 말이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 이러고 앉아 있었다. 이럴 거면 영어 이름을 왜 쓰나? 문제는 대표인 데이빗이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수평문화 도입은 핑계고 촌스러운 자신의 본명―박대식―을 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일의 기쁨과 슬픔」


네 번째 아주머니의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저희 집은 설거지 안 하셔도 돼요. 식기세척기가 있어서”라고 하자마다 대뜸 내 팔뚝을 가볍게 때렸기 때문이었다.

“새댁, 설거지는 손으로 뽀드득하게 해야 하는 거야. 그건 기계가 따라갈 수가 없어요.”  ― 「도움의 손길」


  4차를 지나 5차, 6차 끝없이 N차의 산업혁명이 이야기되는 시대. 인간의 패턴의 묘하게 다른 지점들. 그럼에도 직장인이라 이름 붙였을 때는 여전히 고수되는 기류. 이 미묘한 상황이 만들어낸 현실의 지점들이 잘 녹아 있다. 세상은 이렇게 달라지고 있고 이것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된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 「잘 살겠습니다」


  이제 현재의 삶은 이런 형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묘하게 다른 공간의 질서다. 거시적 세계보다는 미시적 세계의 일들에 대한 포착, 그것을 더욱 중시하는 듯이 아니 그 무엇에도 절대성을 갖지 않는 이들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마냥 쭈구려 있지 않고 반사할 줄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라 해야 할까. 잘 살기 위한 세상의 이치는 가게 주인의 마음씨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특 에비동에 맞는 현금을 지급할 때에야 새우 몇 개를 더 먹는 것처럼 그런 사실을 깨치면서 살아나가야 한다고 누군가에게 지적받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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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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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디디의 우산, 황정은, 창비, 2019.


  곧 오월이다. 며칠째 차고 강한 바람이 분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더니 참말로 잔인토록 바람만 분다. 꽃이 핀 것도 진 것도 모르게 세상은 흘러가고 있다. 멈춰 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도 세상도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고 변해야 하는데 나는 변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본래로 돌아온’ 것도 아니니, 도대체 이건 뭔가.


d는 그동안 자신이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세계가 변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야. 본래 상태로 돌아왔을 뿐이라고 이제 생각했다. dd가 예외였다. dd가 세계에, d의 세계에 존재했던 시기가 d의 인생에서 예외. 따라서 나는 변한 것이 아니고 본래로 돌아왔다……


  디디하면 어느 소설 주인공이 떠오른다. dd하면 45도로 몸을 비튼 채 들어 올려 흔드는 양손 엄지손가락이 떠오른다. 나는 이 간극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 등장인물의 이름에도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는데 왜 디디인지 왜 d이고 dd인지, 이런 이름인지. 이것이 왜 중요한지는 자꾸 선점해버린 디디가 생각나서, 그와 평행하게 dd에선 엄지 척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버스 밖으로 튕겨 나가버린 dd임에도 엄지 척,이라니. 이건 너무 어이없게 슬프지 않나.

  <디디의 우산>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생각나게 한다. 디디가 있고 분위기가 겹쳐 떠오르고 ‘혁명’도 기여한다. dd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자신도 모르게 말하고 놀라고 재밌어 했다. 그러나 혁명을 행하던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속 인물들은 어느 누구도 혁명을 말하며 행하며 웃지 않는다. 우리가 거쳐 온 세계는 좌절과 환멸 또한 가득 뿌려놓아서 혁명을 말하며 웃음짓기란 쉽지 않다. 혁명을 말할 때 생각할 때 웃음지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dd를 잃어버린 후의 d는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웃지 않는 모든 주인공의 재연 같다. d를 도려내어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보내버리면 그 시대와 분위기에 딱 맞을 것이다.

  그러나 d는 <디디의 우산>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dd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아 dd를 기억해야 한다. dd는 운동권도 아니고 단지 혁명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을 보며 혁명을 말했을 뿐이지만 그 모습을 기억하며 dd를 기억하는 d에겐 모든 혁명의 현장이 dd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기제가 된다. 소설은 절여진 배추처럼 곰삭아 있는 d가 다시 소금기를 털어 내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까. 그것은 ‘여소녀’를 통해 제 주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해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내는 이들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생각하고,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d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愛人)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다. 하찮음에 하찮음에.


  d가 이렇게 광장에서 공명한 소리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제목으로 이어져 좀더 구체화된다.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저항하는 것, 그들이 싸우고 있는 것.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는 그나 그녀로 또는 익명으로 d나 dd가 아닌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형태가 등장한다. 이름을 가진 하나하나의 인물들로 말이다. 이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고민하고 생각한다. 어떤 사건과 현상에 대해 책과 영화 등을 빌려 생각하고 생각하는 모습은 그저 관념으로 비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유가 많아지고 깊어질수록 이들 걸음 방향은 광장으로 향해 있다.


산다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 저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지난 계절 내내 새로운 문장을 써왔고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제 그 문장은 완성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날일까. 혁명이 이루어진 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은 마침내 도래한 것일까.

  

  그리고, 그러나…. ‘혁명’속에 갇힌 것, 외면하는 것이 있음을 소설은 또한 보여주고 있다. 올바름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이루기 위해 힘쓰지도 않는다는 것. 침묵하거나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럼에도 ‘혁명’이란 나를 우리를 세상을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그를 위한 이야기들을 써내려가야 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도 모든 이야기 끝에 남은 것 역시 이야기. 글을 쓰는 것이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도 ‘나’는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 한편을 완성하고 싶다”고 말한다. “말할 필요가 있다”고.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산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무섭도록 패배한 분위기와 운동권의 교조적인 문체가 후일담 문학이 가지는 특성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살아남은 건가, 살아있음이 죄인듯 더 가라앉은 모습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것이 실제 그러했던 것이더라도 나를 미워하는 것만으로 있던 모습은 달라져야 한다. <디디의 우산>은 과거에 이어 현재 진행이고 어쩜 황정은이기에 혁명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다르다. 여러 책들을 인용하며 사유하는 방식에서 언뜻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내리꽂히는 연설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의 갈래 속에서 확실한 나의 신념을 세워가기 위한 것으로 느끼게 된다. 올바름을 지기기 위해 행했던 ‘혁명’과 그 과정은 ‘혁명’이라는 단어에 무게감을 지우므로 어렵고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겪어왔던 여러 사건을 통해 혁명을 가장 어렵게 하는 것은 “그것을 알 필요가 없다-묵자(墨字)의 세계관”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묵자의 세계관을 지닌 이들에게 세상에 살아남은 자가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그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혁명이 도래했다.” 언제나 말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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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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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허블, 2019-06-24.


  오로지 비현실적인 상황 자체로만 ‘이것은 SF소설이오’라고 내미는 소설이 있다. SF라는 소재를 반감시키며 대체로 경직된 분위기, 옅은 과학적 상상력, 매력적이지 않은 문체로 인해 오랜 여운을 주는 SF소설을 찾기란 어려웠다. 그래서 잘 읽어지지 않고 찾게 되지 않는다. 열광하는 외국 작가 몇몇에 의지하게 되는 이유다. 이들의 소설이 소재와 생각의 무한함을 보여주며 얼마나 우아하고 매력적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지 말이다.

  과학도였다는 작가의 이 소설집은 그동안 읽어본 한국 작가의 SF 소설과는 다른 느낌이다. 과학이라는 표피만을 훑어서 이야기를 쏟아놓지 않았다. 익숙한 주제들을 푹 고아서 독자들에게 먹기 좋게 내밀어 준 듯 느껴졌다. 다소 테드 창의 소설을 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서 좀더 편안하게 읽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상적이고 좋았다.

  소설 주인공으로 할머니가 제법 등장한다. 우주는 항상 아득한 느낌인데 할머니라는 단어 또한 그런 느낌을 준다. 아득함과 아득함이 만나 소설은 친숙하기도 하고 낯선 감정과 조금은 서글픈 감정에 빠지게 한다. 이런 감정은 잘 팔릴까.

  「감정의 물성」은 다양한 감정을 물성처럼 만들어 판매하는 회사와 이를 소비하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기쁨이나 즐거움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들도 잘 팔린다. 왜?


“부정적 감정 라인은 판매되는 물량에 비해 실 사용량이 적대요. 다들 쓰지 않아도 그냥 그 감정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언제든 손안에 있는, 통제할 수 있는 감정 같은 거죠.”  -「감정의 물성」


  눈물 흘리는 누군가를 위로할 때 “울지 마”가 아니라 “그래, 실컷 울어”라고 말할 때의 기분을 생각했다. 실제로 이렇게 통제만 적절히 이뤄진다면 온갖 부정적 감정들을 물성화해 생산해 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현대 사회가 다채로운 감정을 펼칠 기회를 주지 않고 특정한 감정만을 발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 말이다. 감정적 동물이어서는 안되겠지만 감정이란 필요한 것이니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는 유전자 선택으로 장애도 없고 혐오와 차별도 없는 그리고 사랑도 없는 유토피아 같은 행성을 그린다. 그리고 여전히 혐오와 차별과 장애가 있는 그런 지구가 있다. 지구로 순례 여행을 떠난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마치 「감정의 물성」에서 우울체를 손에 쥐고 있으려는 구매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떠올려진다. 하지만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이미 없는 것이 가득한 그 세계보다 단 하나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어쩌면 늘 정답으로 정해진 그 하나의 이유,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당장 내일도 미래이지만 과학기술이 좀더 발전된 어느 미래라고 해서 인간의 삶이 특별히 달라져 보이지는 않는다. 삶은 기술발전에 따른 편의와 편리를 경험한다 해도 감정의 스펙트럼은 특별히 달라질리 없으니까. 여전히 희로애락이란 삶을 지배하는 절대적 요인이 된다. 여전히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는” 기술적 한계와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가득한 세상이다. 달라진 듯 달라지지 않은 풍경 속에서 그럼에도 의지하고 기대고 위로받는 것은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 그래서 「스펙트럼」속의 루이는 할머니에게, 인간에게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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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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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만들어진다


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문학동네, 2018.


  여성에게 소설쓰기와 아이 기르기는 어떤 의미일까. 구병모 작가의 여덟 단편을 읽고 난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지속되는 호의」와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를 보며 끝날 줄 모르는 짜증과 답답함이 있었다. 그 감각이 여전히 뒷목을 서늘하게 한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산골로 거주지를 옮긴 정주에게 모든 것을 간섭하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 다른 아이들을 보살피는 과정에서 점점 노골적으로 무례함을 보이는 아이들의 태도, 그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가 잊히지 않는다. 공동육아, 육아에 대한 사회서비스가 증가하고 체계를 갖춘다 해도 ‘내 아이’에 관한 한 관대하고 편협하게 행동하는 부모의 존재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움직여야 하지만 합의된 방식이란 여전히 모성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건 아닌가.

  엄마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모성신화는 실존을 뛰어넘는다. 그보다 우선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모성신화만큼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프레임이 있을까. 환상적 신화에 맞추어 현실이 창조된다. 그래서 엄마는 있지만 나의 엄마는 없는 듯이 생각되기도 한다. 모든 것에 우선해 ‘나’라는 존재의 확립이 중요할 거라는 건 완벽하게 짜여진 신화 앞에 기꺼이 무너진다. 그래서 여성 자신의 자아 찾기에 관한 담론이 늘어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현실을 벗어난 가상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신화를 찾아보고자 만들어보고자 하는 것인지도.

  소설집을 읽으며 거듭 나의 언어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현실 세계이든 가상 세계이든 상황을 인식하며 나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하며 살기 위해선 어떤 ‘말’이 필요한지, 어떤 ‘말’에 휘둘리지 않아야 하는지 그런 생각들. 글이란 글쓰기란 존재를 자각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언어 자체가 한계를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오토포이에시스」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주체는 AI 소설 기계이지만. 그 이름이 ‘백지’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는 날마다 수많은 한 문장을 쓰고 버렸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였다. 꿈은 이 세계 바깥의 현실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거나 모든 것을 기억하라. 미로에서 빠져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솟아오르는 것이다. 모든 것을 관조하라. 우아함은 정열의 독이다. 이 같은 문장들 사이사이에는 아무런 서사적 인과관계가 없었으나, 한 문장 한 문장은 저마다 자꾸만 무언가 의미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백지가 그토록 버리려고 했던 의미를.   ―「오토포이에시스」


  미래를 상상하는 건 무궁무진하지만 어느 상상력이든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삶의 연장선이다. 새로운 세계에도 그 세계를 지칭하는 신화와 말은 존재한다. 그곳에서 또한 나는 규정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이야기의 주제를 압축하는, 나아가 그 모든 이야기와 무관한 궁극의 문장”. 본질적인 나를 규정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규정된, 원치 않는 신화를 깰 언어가 문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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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주
김소윤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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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주가 없다


난주, 김소윤, 2018.


죄인 정난주는 더럽고 탐욕스러운 사학에 심취하여 임금께 씻을 수 없는 불충을 범하였고 제사를 폐하는 무부무군한 패륜을 저질렀다…… 죽은 자의 나라가 되살아난다는 요언을 일삼고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혔으며…… 나라를 파는 데 앞장선 대역죄인 황사영의 처로 백성을 현혹한 죄가 죽어 마땅하나……


  지구 탄생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이니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탄생과 죽음이 있었다. 구전과 문자로 전해지고 기록된 사람이 있는 반면 존재함조차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이 세상에 머물렀다. 이렇게 존재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건 아련함으로 인해 흥미를 끈다. 시대와 상황, 생각하는 바가 다른 어떤 사람의 생애가 회자된다는 건 현재에 우리들에게 어떤 종류이든 울림을 주기 때문일 텐데, 난주란 인물은 어떨까.

  으레 사람을 소개할 땐 누군가와의 관계성을 앞세우긴 하지만 난주를 소개할 때에도 이렇게 시작한다. 정약용의 조카. 정약현의 딸. 정약용과 그 집안이 가지는 영향력이 있기에 정난주가 정약용 집안이라는 점에서 예상되는 바가 있다. 지식인, 강인함, 종교적 신념, 더불어 박해, 탄압 그런 것.

  황사영은 신유박해로 천주교가 처형되고 탄압을 받자 그 실태를 명주천에 적어 북경에 있는 프랑스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된다. 포교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 함대를 보내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이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천주교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고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 관비가 된다. 이러한 정난주의 삶을 그려낸 소설이다.

  정난주의 삶은 주어진 환경의 영향과 개인의 심성과 신념에 기인한다. 당시의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에도 천주교에서 구원와 삶의 가르침을 얻고자 한 정난주는 살아가는 내내 종교적 신념을 굳건히 하고 그에 따른 삶을 살아나간다. 흐트러짐 없이 강인하며 품격을 잃지 않는 정난주의 태도는 많은 이들에게 공경과 공격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정난주의 삶의 태도가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고 그 태도가 종교적 신념에 따르는 삶이라고 했을 때 소설에선 종교적인 색채가 그렇게 눈에 띄게 느껴지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핍박받은 천주교인이라는 점과 그 이미지만을 안고 있다. 어쩌면 천주교만이 가진 색채와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 아니라서일 수 있겠다. 그저 매우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수준에서 종교적인 뉘앙스를 다루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살아온 방식보다 살아갈 방식이 더 힘겨운 상황에서 정난주가 지켜가는 삶의 자세는 매우 인상적이다.

  정난주는 매우 격정적인 상황을 자주 맞닥뜨리지만은 가장 격정적인 장면은 아들에 대한 것이다. 난주는 제주도로 유배가는 길목에서 어린 아들을 ‘버린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부모들이 아이를 입양 보낸 것이 생각나는데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로 살아갈 아들의 미래를 염려하며 아들 경헌을 추자도 갈대밭에 내려두고 떠난다. 다행히 경헌은 마을에 살던 노인의 손에 길러졌다. 평생을 그리움과 죄책감 가득 살아가는 정난주의 마음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이후 정난주는 제주에서 다른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거두고 보살피며 살아간다. 아들과 함께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인 장면은 마을에 전염병이 돌 때이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난주>를 떠올리게 된 건 이 부분 때문이다.

  마을에 전염병이 돈다. 그 시작이 난주의 양딸 보말로부터 시작된다. 세상 가장 무서운 전염병, 마마님의 급속한 확산에 전염병 치료를 맡게 되는 정난주는 실로 성심성의껏 치료에 힘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니 어떤 차별도 없이 병의 위중을 보아가며 치료에 힘썼고 최선을 다했지만 병의 시작이 양딸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에 대한 책임감 또한 막중했으리라. 어떤 경우이든, 어떤 종교이든 인간에 대한 존엄과 사랑이 핵심이고 본질이 아닐까. 그런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려고 포교 활동을 하는 게 아닌가?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그런 삶의 태도를 실천하며 자신이 믿는 종교의 뜻을 보여주는 거 아닌가?

  가짜뉴스가 나돌고는 있다고 하지만 감추고, 무질서하며, 보편적인 예의를 갖추지 않은 종교인들의 태도가 종교 자체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소설 <난주>는 집단의 힘이 세상에 내놓은 영향이 아니라 오로지 한 개인의 성정으로 만들어간 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종교적 힘이 <난주>의 삶을 이끌었을까 했던 생각은 종교의 힘이 아니라 개인의 힘이라는 생각을 더하게 한다. 그리하여 지금 ‘난주’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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