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닌 계절
구효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평점 :
계절로 남은 이야기
아닌 계절, 구효서, 문학동네, 2017-04-03.
많은 작품을 쓴, 수많은 문학상 수상작가 구효서의 소설집 「아닌 계절」은 아닌 계절 겨울, 여름, 봄, 가을에 관해 이야기한다. 통상적으로 사계절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말하나 작가는 아니다. 통상적인 말의 수순을 버리고 아닌, 특정한, 사계절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이야기, 이야기는 계절을 배경으로 그러나 계절을 주인공으로 불러낸다. 그 계절에, 그 겨울과 여름과 가을과 봄에 겪었던 이야기들은 그 계절이 ‘아닌’ 계절을 떠올리기 아려울 만큼 그 계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아닌 계절은 그 계절을 느끼느라 그 계절에 갇혀 있느라 더디게 읽힌다. 작가가 전하는 말의 리듬은 터벅터벅, 고독을 아픔을 짊어진채 느리게 느리게 나아간다. 그럼에도, 읽은 문장을 다시 읽는 일이 반복되어도, 그래서 문장들과 이미지는 반복해서 마음에 쌓이는 모양이다. 모호한, 부정칭 같은 인물들의 이름이 멀게 느껴져 거리를 두고 이들을 보다가도 한발자국씩 가까이 가게 만든다. 적당히 떨어진 채로 말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누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하고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일이므로 누구든 어디든 상관없었다. 분명한 건 각막을 에는 듯한 추위뿐이었다.
주위 누군가 사라져도, 온통 낙서로 뒤덮인 벽이 늘어가도, 세상이 어떤 일이 벌어져도 기억하는 것은 오직 겨울, 춥다는 느낌과 생각인 「세한도」의 [세한도]의 여자처럼. 아이가 물에 빠져도, 양식장 주인이 아이를 죽이는 것을 보아도, 어느 어머니에게서 촌지를 받아 다른 어머니에게 부치는「바다, 夏日」의 ‘미음’처럼. 세상을 보고 있지만 보고만 있는 그러한인물들의 모습이다. 이것은 「봄나무의 말」속 회화나무의 역할이 아닌가. 오히려 이 회화나무가 감정을 가지고 이야기를 건넨다. 다른 인물들이 그들이 겪는, 그들이 보고 있는 상황을 익숙한 거리감으로 그저 ‘보고만 있는’데, 회화나무만이 마을의 일꾼 닷근이와 꽃서방과 새악시의 이야기를 전한다. 화자의 목소리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이렇듯 다른 인물들이 아니라 ‘회화나무’인 것이 우연일까.
찌고 숨 막히는 듯하다가 더위는 고스란히 살을 에는 통증이 되었다. 어떤 느낌도 여자에게 이토록 명징했던 적이 없었다. 혹독했으며 처음이며 마지막일 것 같았다.
「여름은 지나간다」의 인물은 전쟁통에 헤어져 육십년이 지나 재회한 노부부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묻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그 말들을 하지 않는다. 그들 부부의 이름을 기억하려 해도 그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아 기억하기 어려울 지경인데 이름마저도 ‘파’와 ‘하’다. 감탄사이거나 혹은 의미없는 소리일 뿐이 이 단어가 이름이 되면서, 이 노부부의 이미지는 그 주위를 둘러싼 배경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러니, 선명하게 부각되는 계절. 이들이 만난 그 계절, 지나갈 여름, 아닌 여름이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모호한 이름이나 모호한 시공간적 배경을 의도했다고 했다. 이 의도가 문학적 익숙함은 아닐지언정 일상적 공간에서는 익숙하다는 것, 아닌 계절을 덮은 후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말이 회화처럼 번지는 통에 한참을 이미지에 갇혀 있게 하는 맛이 있었다. 요즘처럼 스토리를 부각하는 소설이 인기임을 생각한다면 이 책을 잡는 손길은 더뎌지겠구나 싶었다. 한편으론 이 책에서 추리와 미스터리를 읽을 때와 같은 장르적 느낌을 짙게 받았다. 단편소설에서 ‘문학’이란 느낌이 가득한, 문장 때문에 더디게 읽게 되는 글들을 만나는 즐거운 일이 계속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