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자연사 -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유령 현상에 대하여
로저 클라크 지음, 김빛나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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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은 죽지 않는다


유령의 자연사, 로저 클라크, 글항아리, 2017-11-03.


  『유령의 자연사』를 자연스레 유령의 자연사(自然死)로 인식했기에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손이 뻗었다. 유령의 죽음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정말로 유령에게 죽음이란 있는 것인지 그 세계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등등. 유령에 대한 관심은 죽음에 대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일 지도 모른다. 타인의, 타국에 대한 관심만큼의 다른 나라에 대해 가지는 관심처럼 유령의 존재를 인정하며 뻗치는 유령의 세계. 많은 것이 미스터리로 존재하는 가운데 유령의 죽음을 알아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은… 自然史에 다소 멈칫했지만 막연하지만 단순하게 대상화했던 유령과 유령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힘’이 ‘필요’가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유령의 죽음에 대한 물리적인 실체를 알고 싶었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유령이 영국에서 특히 많이 출몰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저자는 유령 출몰이 많은 것에 대한 과학적·객관적 입증은 없다고 말한다. 단지 목격자, 증언이 많을 뿐이다. 과학적인 입증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들였지만 유령 존재에 대한 과학적 입증을 할 방법은 결국 없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유령에 대한 믿음과 관심을 가진 저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령이 변화했다는 것을 확실히 간파할 수 있었고 유령은 더 이상 영혼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령의 죽음은 결국 소멸이다. 그것은 그 유령을 ‘보는’ 이가 더 이상 없다는, 그 유령은 ‘발견되지 않았다’가 되는 것이다. 유령이 언제 발견되고 발견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죽은 혼령이라는 맥락에서 유령은 한국귀신인데 생각해보면 귀신이나 유령이나 출몰하는 장소나 이유는 같다. ‘귀신을 보았다’에 대해 ‘심리적 요인’이라는 처방이 내려지거나 공동묘지나 사람이 죽거나 살해된 장소에 유령이 대부분 ‘발견’된다. 이러저러한 상황을 볼 때 유령 발견에 대한 역사에 심리적인 역사도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개개인의 심리를 좀 더 조직적으로 ‘이용·활용’하는데 어쩌면 기인 역사의 영국이 탁월했다는 점에서 유령들의 잦은 영국 출몰은 충분히 이해가 됨직하다. 앤 블린과 ‘몽스의 천사들’은 매우 유명한 유령들이며 문학속에도 수많은 유령들이 존재한다. 유령 문학이 많은 것은 유령을 목격한 이들이 무수히 존재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관심에 비례하는 것이니까.


수 세기 동안 유령의 존재는 인식되어왔고, 언제나 목적이 있었다.


  한국의 곤지암에 위치한 정신병원이 CNN으로부터 ‘탁월하게’ 소름끼치는 장소로 선정된 후 단순 폐업하고 건물을 인수할 자가 없던 병원이 유령 출몰 장소로 유명세를 떨치는 과정은 저자가 말하는 바에 딱 들어맞는다. 오래도록 유령은 등장했고 한편으로는 ‘오락’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거대한 자본과 맞물려 ‘유령’이 콘텐츠화되면서 유령은 특정한 이가, 또는 미디어가 그려내는 대로 그 모습을 갖추어 특정 장소를 누비게 된다. 시대마다 유령에 대한 이미지가 변화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상업적인 이유 외에도 유령이 필요한 ‘목적’은 존재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종교, 미디어, 사회적 지위”로 들었다. 유령이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공포심을 안겨주는 존재임을 인식하며, 유령의 존재를 조작·조장하며 국가도 종교도 그들의 체제를 강화하는데 활용했다. 전통적으로 인식되는 유령에서부터 엘리멘털, 폴터가이스트, 타임슬립 등 다양한 종류의 유령이 나타나는 것도 효율적인 유령 활용의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왕정복고 이후의 유령들은 불의를 바로잡고 정의를 바로 세우며 잃어버린 문서나 소중한 물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돌아왔다. 섭정 시대의 유령들은 고딕풍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유령들은 강령회에서 질문에 답을 내리는 존재였고, 유령을 보는 것은 여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초자연적 현상이 발아들여졌으며, 유령을 목격하는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자연법칙의 현현이라고 여겨졌다. 1930년대에는 폴터가이스트가 발견되었다.


  존재에 대한 의아함을 품으면서도 유령에 대한 관심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다. 또한 과학의 발전에 따라 유령을 발견하는 상황들도 좀더 발전되어 왔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저자가 발견한 유령의 법칙을 살펴보면 유령 또한 소비재의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시대의 목적에 맞게 변화·구현된 유령은 인간의 감정, 욕망의 정도에 따라 달리 인식되고 있다. 실체를 규명하려는 과학적인 시도와는 별개로 ‘유령’은 소멸되지 않은 채 일상에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한스 홀처의 말처럼 결국 “유령은 어찌 됐든 인간 또는 인간의 일부이며, 따라서 정서적 자극의 영향을 받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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