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믿어라, ‘실험과학’이 아닌 ‘도덕과학’을

 

 ☞ 「과학의 사기꾼」 요리하기(cooking)  

 

  ‘과학’이란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이다.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과학의 발달 속에서 이루어져왔음은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의 진리와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해 오면서 우리는 일상에 존재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전문가가 아닌 경우에야 여전히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렇기에 깊은 의심을 품거나, 그 의심을 증명해 보려는 노력이 덜한 것이 사실이다.

  「과학의 사기꾼」은 그러한 의심에 대한 실행을 보여주고 있다. 즉, 과학분야에서 일반인들이 모르고 감춰졌던 부분에 대한 실제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객관적이고 실험이 강한 부분에서 간과한 비객관성, 비관찰성과 수많은 오류들, 그리고 그 오류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과학사에서 진보하고 위대한 발명과 발견이라 불리는 사건들의 사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 사례에서는 역사책에서, 전기 위인전에서 봤던 위인들이 이야기와 노벨상이라는 엄청난 권위의 상을 받은 과학적 사건들의 허구와 조작이 나타난다.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은 많은 업적들이 사실은 객관성을 잊어버리고 자료를 조작하거나, 혹은 은폐하거나, 남의 것을 가로채기했다는 내용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사례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해관계에 의해 공공연히 묵인되어 왔다는 사실도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우리에게 법칙으로 진리로 읽혀왔던 어떤 사건이 문제였고 누가 문제를 그대로 방관했는가?


☞ 장난질(hoaxing)?

 

  역사상 위대한 천문학자로 알려진 프톨레마이오스가 실제 별자리관측을 하기보단 다른 사람의 연구업적을 이른바 ‘빌려’, 자신의 학설을 펴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정도는 아니다. 어차피 어떠한 진리든, 법칙이든 무언가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되고 다른 것을 참조한 것에서 이뤄진다는 측면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작가가 붙인 제목처럼, 점점 더 의문스러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과연, 단순한 실수인지 그렇지 않으면 천재의 영감인지가 말이다.

  피사의 사탑에서 물체를 떨어뜨리는 실험을 할 정도로 끈질기고, 객관성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 과학자로 알려진 갈릴레이. 지동설과 관련하여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하였지만 마지막까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하였다는  일화는 갈릴레이의 위대성을 더욱 부각시켜줬다. 그러나 갈릴레이의 일화가 실제로는 의심스럽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떨어지는 사과하면 떠오르는 뉴턴의 성격과 관련한 이야기, 아인슈타인의 이야기 등은 그동안 특정한 업적에 의해 그 사람들의 참모습이 얼마나 편견에 가득 찬 채로 조작되고 위인으로 덧씌워진 것인지를 드러낸다.

  무엇보다 이들이 자신들의 연구에서 거짓없이 연구결과를 만들어내고 그 연구의 오류나 문제점을 시인하고 계속적으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들을 더 했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쉬움을 준다. 과학자로서의 실험과 연구를 생각하게 하는 아인슈타인이 실제 연구와 증명을 위한 노력보다는 특정한 이론에 대한 가설을 만들어내는 것이 주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의 이론들이 지금에서도 위대한 이론으로 평가받고 그러한 가설이나 이론을 세운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나, 자신의 이론이나 학설을 증명하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의 뒤따름이 없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론이나 업적에 대해 과소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유명한 학자에 대해 그 연구에 대한 신뢰는 지식에 대한 찬탄과 동시에 실제로는 그들의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포함된 것이리라 본다. 때문에, 『과학의 사기꾼』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과학사의 발견된 연구들이 심각한, 혹은 사소한(?) 수치상의 누락이나 조작들로 가득하고, 실제 검증된 연구와 실험이 생략된 법칙과 이론이다라는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 이르면서 잘 알지 못하는 많은 학자들이 그들의 연구로 노벨상을 받고 인류의 과학학문발전에 기여를 했지만 이러한 조작된 기여가 과연 인류에 어떤 공헌을 했느냐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물리학이나 수학, 화학이라는 분야보다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은 유전학이나 의학분야의 연구와 같은 부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황우석박사의 줄기세포 사건과 같은 일을 생각해 볼 때 그렇다. 슈틀러와 쿠글러가 항체를 통해 암의 치료법을 찾아냈다는 연구를 보자. 암으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은 당연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연구가 거짓으로 밝혀졌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줄기세포로 치료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수많은 사람들의 참담한 심정을 단순히 개인의 업적에 눈이 먼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 다듬기(trimming)


  위대한 힘들이 위대한 결과를 보여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의 단순하고 불순한 ‘의도’에 의해 참담하게 무너졌는지는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서머린의 경우에서도 그렇듯이 개인의 업적을 드높이기 위해 아주 단순히 싸인펜을 살짝 덧칠하는(실제로 이러한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러한 모습이 과연 연구의 진정성을 얼마만큼 생각하였느냐는 물음을 가지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과학이라는 특성이 구체적이고 정확한 연구와 실험을 중시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특정분야에 권위자의 영향력에 지나치게 매여 있다는 사실은 실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과학’이라는 분야가 가지는 ‘그들만의 요리잔치’의 문제와 윤리의식의 강조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그 학문영역의 특성상 실체를 검증하는데 있어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의 행동력과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때문에 이들은 결국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 연구결과와 연구주제가 이상적이거나 과학사에 큰 역할을 한 것일수록 의심을 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 의심에 따른 검증결과를 드러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과학자의 조작과 실수, 사기를 정당한 연구로 검증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한 처사로 치부되는 것이 과학계의 현실이라는 것을 꼬집고 있다. 때문에 연구의 실질적인 목적과 존립이유를 망각한 채 ‘같은 식구를 음해’하는 일로 간주되고 그러한 일을 한 사람이 오히려 따가운 눈초리 속에서 피해야 하는 일들이 빈번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의 이해를 위해 공모하거나 사건을 눈감아 주고, 혹은 남의 업적을 제 업적인 양 가로채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과학자들의 ‘윤리의식’의 부재, 공명정대하고 올바른 것,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의식의 전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과학이라는 연구를 수행할 때 비이커와 과학사전을 들고 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도덕’교과서를 옆에 두고 연구를 진행해야 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과학은,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였을 때 결국 인간생활의 보다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도구이다. 무엇에 우선하여 가치를 두는가에 대한 의식교육이 끈임없이 강조되고 과학이라는 영역의 한정되고 비공개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기 위해선 이것이 중요하다.

  과학자들이 그들의 연구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보다 더 바른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만이 과학에서의 사기와 조작문제는 사라질 수 있다. 과학이 가지는 무서운 힘의 영향력을 새삼 알게 되고 또한 과학이라는 정교하고 실험적인 학문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의 이러한 사례들에서 강조할 것은 결국 개인의 윤리의식의 확립과 과학전반의 학자들의 윤리의식 확립이다.

  결국 바른 연구결과는 정확한 연구와 더불어 개인의 가치관의 정립을 통해 이뤄진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하인리히 창클이 전하고자 하는 바다.

 고대사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사에 위대한 학자들에서부터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단순한 요리와, 장난, 정교한 다듬기의 모습은 결국 이들의 인간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문제였음을 강조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나타나는 과학의 실제 내용에 대한 의문에 대한 것은 조금 눈감아 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작가는 수많은 과학업적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나 과학에 대해 무지한 일반인들은 연구의 내용이 가지는 실제적인 내용을 이해하기엔 설명이 조금 부족하지 않은가 한다. 단지 어떤 연구결과를 발표했고 그 과정에서 역시 조작과 속임이 있다는 큰 아우트라인을 잡을 수는 있지만 말이다.

 이 책이 ‘과학’서로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설명이 없는 것은 작가의 의도는 멘델의 유전법칙이 이렇고 그것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초우라늄이 어떤 것인가?, X선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내용들에서 일어난 사기와 조작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가가 핵심이니 말이다. 우리는 과학에 대해 좀더 엄격한 잣대를 과학자에 대해서도 더한 엄중한 기준을 가지고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실험과학의 문제가 아닌 ‘인간과학’의 속임에 대해 끊임없는 경고를 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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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의 세계 

전통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제레드 다이아몬드 저, 강주헌 역, 김영사, 2013.


 

 

    『어제까지의 세계』는 저자가 남태평양의 뉴기니섬에서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까지 전 세계 곳곳을 탐사하며 어제와 오늘의 세계, 전통과 현대 사회를 비교분석한 책이다. 저자가 이 책에 대한 주제와 이 책의 구성에 대해 소개한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의 주제는 지난 50년간 내 연구의 주된 목표였다. 1964년부터 나는 뉴기니 섬에서 연구를 했다. 그곳에는 중앙 정부도 없고, 법정도 없으며, 우리의 삶의 방식과는 매우 다른 전통 사회의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들은 분쟁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며, 위험에 대해 다른 태도들을 취하며, 아이들을 다른 방식으로 키우며, 노인들을 다르게 대우하며, 건강을 대하는 태도 또한 매우 달랐다. 그 방식들 중 어떤 것들은 나를 소름끼치게 했다. 그러나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매우 훌륭했다. 이 책은 내가 뉴기니에서 나의 친구들에게 배운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오늘보다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한 내 연구의 해답이 그곳에 있었다.”


  이 책은 5부 11장으로 구성되고 에필로그가 더해졌다. 1부는 1장으로만 이루어지며, 전통 사회가 어떻게 공간을 분할하는지 설명함으로써 뒤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들의 기초적인 발판을 놓는다.

  2부는 2~4장으로 이루어지며 분쟁 해결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중앙집권화된 국가 정부와 사법제도가 없기 때문에 소규모 전통사회들은 두 방법 중 하나로 분쟁을 해결한다. 국가 형태를 띤 사회의 분쟁 해결 방법에 비하여 하나는 더 타협적이고 다른 하나는 더 폭력적이다.

  3부는 5장과 6장으로 구성되며 인간의 생명주기에서 양극단에 위치한 어린시절(5장)과 노년(6장)이 다루어진다. 전통 사회의 양육방식은 대부분의 국가 사회에서 용납되는 수준보다 억압적인 관습을 지닌 사회부터 다소 방임적인 관습을 지닌 사회까지 무척 다양하다. 하지만 전통 사회의 양육법을 조사한 자료들에서 자주 언급되는 관습들이 있다. 노인의 대우에 대해 살펴보면, 일부 전통 사회, 특히 유목 사회 혹은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회는 노인을 등한시하거나 버리고,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반면에 서구화된 사회보다 노인에게 더 만족스럽고 생산적 삶을 제공하는 전통 사회도 있다.

  4부는 7장과 8장으로 이루어지고, 여기에서는 위험과 그에 대한 반응이 다루어진다. 7장에서는 저자가 뉴기니에서 실제로 겪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세 가지 위험한 경험이 소개되고, 아울러 전통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일반적인 마음가짐으로부터 배운 교훈을 더붙인다.

  5부에서는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현시대에 들어 급속히 변하는 세가지 주제인 종교, 언어의 다양성, 건강이 차례로 다루어진다. 에필로그에서는 프롤로그를 시작했던 공항에서의 감정적인 회상을 기술했다.

  마지막 5부, 10장에서는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현시대에 들어 급속히 변하는 주제인 언어의 다양성을 다루고 있다. 세계의 언어가 왜 다양한 특징을 가지는가, 그리고 다중언어와 이중언어, 단일언어 들에 대해 살퍄보고 있다. 무엇보다 저자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소멸해가는 소수언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의 언어가 소멸되는 것이 당연하가를 묻고 있다. 이중언어 사용이 필요하고 그것이 인간에게, 뇌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 한들 소수민족만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이유로 그것의 효용성이나 필요성을 매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그들의 생활방식이고 사고방식이다. 인간의 언어는 단순한 소통을 넘어서는 부분이다. 이런 언어가 세계의 빠른 흐름을 위해 편리에 의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누구를 위한 논리인가.

  그가 접근하는 전통사회의, 소수민족의 언어에 대한 논의는 언어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입장에서, 소수(?)언어가 되어 내 모국어가 사라질까봐 염려스러운 나의 마음을 불질러 놓는다.


  이 책의 결론은 단순하다. 미래의 삶을 지속가능한 가치를 찾아 가기 위한 방법을 전통 사회의 가치에서 찾는다. 한마디로 어제의 세계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저자는 그가 직접 체험한 원주민들의 삶의 이야기를 꺼내든다. 사례가 들어간 이야기는 조금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되고 또한 호기심을 가지게 한다.

  저자는 자신이 가본 전통사회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나 그 애정을 맹목적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그 세계에 대한 자신의 주관과 객관을 적절하게 버무리고 있다. 그리하여 맹목적인 전통 사회의 동경을 주고 있진 않다. 또한 전통 사회를 낭만으로 바라볼 것이 아님을 경고하는 것도 있지 않고 있다.

  방대한 분량에 비해 책은 속도감 있게 읽힌다. 그러면서도 뭔가 부족하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있다. 이야기가 모지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전통 사회의 이야기들도 생각보다 작게 버무러져 있다. 보다 알지 못한 전통 사회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저자는 자시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속에 적절하게 끌어다 사례를 소개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저자가 경험한 세계에 대한 맹목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고 저자가 주장하는 가치를 설명하기 위한 소재의 예로 녹여들 뿐이다. 그 지점이 감칠맛 난다.

  그런데 우리가 미래 사회 속에서 좀더 숙고하기 위한 가치를 전통 사회 속에서 찾아내는데 그가 정리하고 있는 이야기의 목차는 왜 이런가 하는 의문을 들게 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니까 싶지만 그 구성이 용두사미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인가. 각 장이 독립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야기의 흐름이 좀 어색하다. 삶의 방식의 문제의 중요성이 자의적이긴 하지만, 저자가 바라보는 중요성과 내가 바라보는 중요성이 차이가 있다. 왜 저자는 하필 이런 것들을 뽑았을까, 의문이 든다. 그리고 필요하고 중요한 이야기가 빠진 듯한 느낌도 든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맥락을 사회적인 가치와 내면적인 가치, 가족적인 부분 등으로 정리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 스스로도 이야기했듯이 얘기를 하자면 2천 페이지가 넘을 거고 그러면 아무도 안 읽을 거라서 추렸다고 했는데 그가 인류에게 필요한 핵심적인 가치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더 열거되어 제대로 정리가 되었으면 한다. 4장의 위험과 대처라는 부분 역시도 전쟁의 위험, 건강의 위험 이런 부분들과 엮일 수도 있다. 내용의 초점을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논의의 전개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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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다시 보는 방식.....일기를 읽으며

 

   어릴 적부터 이순신은 위인이었다. 어린 내 기억 속에 너무나 당연했던 영웅 이순신. 우리나라의 위인전은 늘 그랬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명확히 이 사람은 ‘위인’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렸을 때부터 ‘남과 다른, 뛰어난’ 특성을 갖추고 있어서 ‘아, 그래서 위인이구나’ 하게 만들었다. 한국 위인전은 늘 특별했던 이들이 결국 특별한 결과를 만들어가는 식이었다. 그래서 늘 사람냄새 가득한 이들을 만나기보다는 경직된 듯 보이고 위엄에 가득찬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이들을 만나야 했다. 특히나 한국화폐공사의 모델이신 이순신인데, 아무리 지폐 아닌 동전모델이라도 그 위엄을 잊을리 있을소냐.

   강제적으로 이순신은 자동 위인이 된 사람이다. 내 스스로 그에 대한 경외심을 찾아가기 보다, 내가 생각하는 위인과 영웅에 대한 정의를 정리하기 전에 이미 위대한 영웅이며 위인이라는 도식으로 자리잡은 사람...그리고..또 어렸던 어느 날, 선생님은 이순신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원균의 모함으로 죄를 추궁받던 중 전쟁으로 다시 그의 자리에 복귀되었을 뿐이라 전쟁이 끝나면 다시 감옥으로 가게 될 것이었기에 죽은 것으로 위장하였다는, 그래서 그의 무덤에는 이순신이 아닌 다른 이가 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

   그래서 그에 관한 무수한 이야기들이 나왔음에도 딱히 재밌지 않은 이야기, 더 들어볼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던 이순신이었다. 그리고 경남에서의 이순신 사랑은 더욱 각별하여 곳곳에 이순신 동상과 이순신 관련 문화유적지 조성이 이어지고 있었고, 연구원에서는 남해안 특별법과 더불어 이순신 프로젝트가 중대한 과업이었다. 이순신이 먹었던 이순신 반상이 만들어져 있고, 이순신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조금만 이순신과 걸쳐져 있으면 이순신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다. 이순신 프로젝트는 거대했고 ‘거북선을 찾기’, 해저유물탐사도 있었다. 판옥선과 거북선의 차이, 이순신이 전쟁에 사용했던 총통들이 기억나는 것도 대대적인 프로젝트라 본 기억이 있다.  선거철이면 이순신의 리더십을 강조하는 이야기도 부지기수다. 어느 때인가는 이순신의 리더십에 관한 주제로 김훈의 초청강연까지 있었다. 그렇게 이순신 관련 보고서가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보고서들이 넘쳐나고 이순신 강연이 이뤄지던 그 때에도 이순신은 ‘일’로 만나고 스치는 사람이었을 뿐, 강연의 내용보다 강연자에 더 관심을 기울였을 뿐, ‘아, 이순신!’이라는 공명을 느끼지 못했다. 딱히 느낄 여유도 없었거니와 이미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부분적으로 봤던 난중일기를 읽으며 타인들 때문에도 너무나 기대를 했던 탓일까. 몇 장 넘기고서 ‘이게 뭐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게 다 인가? 계속 이런 형태인 건가? 반복되는 ‘공무를 보았다’를 보면서 선생님들이 절대로 일기를 쓸 때 쓰지 말아야 할 구절로 강조했던 ‘나는 오늘 ~했다’라는 문장이 생각났다. 도대체 이순신은 구체적인 내용도 없이 ‘공무를 보았다’는 한 줄을 일기라고 적고 있는 건가. 이것은 일기가 아니라 그의 업무일지였던 것인가. 몇 번 본 난중일기의 내용이 이렇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라는 생각과 더불어 기대의 강도를 0을 놓고 난중일기를 읽었다. 정지된 바늘이 점점 올라갈 때까지.

   남의 일기를 읽는데 감동이고 뭐고를 따지는가. 그저 소소한 일상의 날들이 아니, 격랑의 날들의 소소한 기록들이 애처롭고 애처롭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는데, 공무를 보았다는 그 한줄마저도 마냥 가슴이 아린다. 전장에서 기록한 그의 글 하나하나가 어찌 울림이 없을까. 갈수록 길어지는 그의 문장도 짧은 단문들도 그저 이순신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삶과 죽음에 관한 글들은 항상 애처롭다. 그리고 그의 기록들은 대체로 같은 패턴이다. 그의 일기 전반에 흐르는 이순신의 마음이, 알리도 없음에도 나 혼자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이 여겨진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의 일기를 모은 책이다. 일본과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시작되어 그가 전사할 때까지 씌어진 일기이며 기록의 해는 임진년(1592), 계사년(1593), 갑오년(1594), 을미년(1595), 병신년(1596), 정유년(1597), 무술년(1598)이다.

이순신은 한글이 만들어지고 태어났지만 한글은 여전히 벼슬아치들에게서부터 널리 활용되지 못한 탓에 이순신은 전쟁 중에 초서로 몹시 흘려 쓴 일기를 남겼다. 특히 치열하게 전투가 일어난 해일수록 흘림의 정도가 심하였고 부분 부분 누락된 날들이 있다. 그만큼 치열하고 긴박한 날들을 이 일기가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이순신의 일기는 많은 부분을 제대로 읽어 낼 수 없었기에 후대에 이르러 그의 일기가 오독되어 전해진 글자가 많다고도 한다.

이 글은 그날 그날의 일들-그날의 날씨, 일어난 일들, 자신의 느낌과 감상 등-을 기록하고 있다. 년원일의 순으로 일기를 기록하며 하루에 한줄 기록을 남긴 날도 있으나 대체로 매일 매일을 충실히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통해 영웅 이순신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누차 들어왔다. 그렇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 수 있다. 그의 일기 속에 늘 반복되는 것은 날씨. 어머니. 아이들. 그리고 임금과 나라와 부하 장수들에 대한 걱정들. 그리고 홀로이 외로움에 가득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글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므로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개인적인 심정을 토로한 것이니, 그런 그의 글을 나중에 묶어 엮어 책으로 만든 것이니, 여기에 목차이며 내용의 면면이 이렇다 저렇다 말해 무엇하랴. 그가 작정하고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기록하겠다는 목적적인 글쓰기가 아니었을 터이므로 더더욱.

   장수의 병무일지라고 하기엔 너무나 개인적인 토로인 것 같고, 개인적인인 토로라 생각하면 업무와 관련한 일들이 나열되어 있다. 전쟁에서 어떻게 적은 무찌를 지에 대한 구체적인 병술일지도 아니거니와 기록된 글들을 읽다 보면 너무나 자질구레한 일들같이 느껴지는 기록에 웃음이 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전쟁의 상황, 늘 긴장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그의 일상들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개인적인 자신의 심정을 기술하면서 달이 밝은 밤에도 비가 오는 밤에도 흐린 날에도 맑은 날에도 그는 근심걱정이 마를 날이 없는 사람이었다. 전쟁이라는 상황, 어지러운 나라에 중책을 맡은 책임감, 그리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그의 일기는 자신의 마음을 가누기 위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다시, 타인의 일기를 읽는 이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의 일기를 읽다 보면 답답한 면이 적지 않다. 그래서, 원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알고 싶다. 그저 원균이란 자의 행태가 말이 간계하다라는 글만 적고 있으므로 구체적으로 어떠한 원균의 행동과 처사가 그토록 다른 이들에게 애정을 가지는 그를 날이면 날마다 욕하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은데 그런 글이 없다는 것이다. 주관적인 감정으로 적는 일기에 객관적인 사건의 개요를 요구하는 나는 참....

   날들마다 날씨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더욱 애잔한 마음이 가득한 느낌이다. 전쟁과 날씨, 그리고 병영의 소소한 모든 것을 기록하려는 그의 마음과 의지가 되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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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 삼국유사



 아, 사진과 함께 만나는 삼국유사는 아주 옛날 삼국의, 신라의 모습을 현재 속에서 찾아보는 감흥을 배가시켜주었다. 잠시 잠시 글의 여운을 느끼게 해주는 사진이 너무나 아름답게 자리잡아 이 책이 더욱 빛났다고 책장을 덮으며 생각한다.

  유사(遺事)는 이전의 역사서와 기록에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말한다. 이 이름에서 보듯이 삼국유사는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등 기존 사사의 기록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연은 삼국사기를 국사(國史)라고 하여 정사로 인식하고 인용하고 있으며 해동고승전의 기사도 10여 군데 인용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삼국유사는 이러한 사서들에 빠져 있는 분의 사료들을 다방면에 걸쳐 수집하여 일연의 의도에 맞게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서문이 없고 동기를 보여 주는 글이 따로 전하지 않는다. 1278년 이후 일연이 73~76세 무렵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본격적으로 편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문도들도 다수 참여하였는데 민간에 전해지는 고기(古記)들을 비롯 사지, 금석문(金石文), 고문서, 문집과 승전류의 책 등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직접 답사하여 보고 들은 전승이나 설화들을 채록하여 서술하였다. 또한 시기적으로 삼국유사는 원의 간섭을 받고 있던 시기에 서술된 책이다. 몽골의 30여 년에 걸친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굴복하게 된 상황에서 민족의 위기에 대응하여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 사관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기이편의 서문이다. 여기서 일연은 우리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긍심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고조선조에 천신의 자손이 최초의 국가를 세웠다는 단군왕검 신화에서 파악해 볼 수 있는데, 일연은 이를 기록하면서 중국의 요 임금과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사 중심의 삼국사기에서 누락되거나 고쳐서 기술된 사료들이 삼국유사에서 그대로 전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삼국유사 내용을 번역하고 있지 않다. 삼국유사를 해설하고 있다. 저자의 차례 역시 삼국유사가 쓰여진 순서를 밟고 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발췌하며 그와 관련된 배경을 설명하고, 일연에 대한 설명이나 의도, 작가의 의견 등을 피력하고 있다. 그가 설명을 하고 있는 부분은 우리가 궁금해 하는 부분을 잘 찾아내어 잘 정리해 주고 있으며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들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글만큼이나 아름다운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역사서를 뒷받침하기 위한 객관적 자료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라 아름다운 시로 보이는 사진이다. 더구나 그 사진은 저자가 직접 찍은 것이 아니라(저자가 찍은 사진도 드물게 있더라만), 사진가가 따로 있다. 그러니 이 책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과 그 삼국유라를 현대적으로 풀어간 고운기, 그리고 삼국시대의 흔적과 현 시대의 접점을 찾안 양진, 이 세사람의 각각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에 비해 좀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지만, 마냥 옛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사실 현대에 사는 사람으로서 가지는 여러 의문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의문점들을 저자가 잘 이야기해주고 있어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러한 의문에 대해 풀어가는 방식이 논문에서 나타나는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가 아니어서 좀더 편안하게 읽을 수있었다. 또한 곳곳에 보이는 저자의 시인의 향내가 감성적인 느낌에 젖어 들게 하면서 같이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부분을 잊지 않되 지난 역사의 흔적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굳이 내가 보완할 점을 어찌 찾으리오. 오히려, 책이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유사가 이야기가 많은데 왜 여기서 끝나버리는지, 왜 이 이야기만 뽑아서 쓰고 있는지 등등, 그러한 점이 아쉽다고나 할까. 저자는 삼국유사를 시리즈로 엮어 내고 있으며 또한 다양한 버전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다. 그 수많은 이야기를 이 한권에서 나타내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든 다른 저작물들을 읽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 그러다 보면 삼국유사를 매개로 쓴 또다른 책들과 이 책의 차별성 또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자신이 다양한 버전으로 정리하여 이미 삼국유사를 읽어 가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으니 보완할 부분으로 얘기하겠다고 하는 것이 이미 그가 새롭게 편찬한 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에 나타나고 있는 시와 관련된 부분만을 뽑는다거나, 설화만을 뽑는 것, 인물별로 정리하여 이야기 해보는 것, 논쟁적인 부분을 추려서 이야기 해보는 것 등. 하나의 원전이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을 때 거기에서 파장되는 이야기가 무수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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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유원언 하옥사有怨言 下獄死


■ 가업을 이은 아들의 사부곡......아, 아버지! 


  저를 구차하다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목숨 부지하는 사내는 없다 하시겠습니까.

  제게 이 기록은 당신께 바치는 것이자 저의 울분입니다. 당신에 대한그리움이자 당신에 대한 원망입니다.

 제게 당신이 아버지였지만 세계 또한 아버지였습니다. 당신을 통해 천문과 역법을 배우고 고스란히 태사령을 이어받아야 할 운명, 그것이 관습이었고 또한 그렇게 길들여졌기에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연 태사령이 되어 이 기록들을 이어가야지요.

  당신의 사명을 알고 당신의 책임을 알고 당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당신이 국가의 주요 의식을 담당했으니 봉선대전(封禪大典)에는 참여치 못한 것이 분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단지 주남(낙양)에 거주하였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었음이기에 그렇게 화를 이기지 못해 돌아가심은 제겐 모지게 사무쳤습니다. 당신을 걱정하며 부랴 부랴 달려간 제게 또 당신은 마지막까지 사적을 걱정하며 그것을 제게 이루어달라 하셨지요.

  그러니 자, 보십시오. 제 것이기도 하나 당신의 것이기도 한 이 기록을 보십시오. 이것은 저 혼자의 기록이 아니니 다시 한번 보십시오. 당신이 태사로 있으면서 현명한 군주와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행적을 기록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듯이 저 또한 그러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당신이 시도하셨고 체제만이 아니라 내용도 집필하신 것이 적지 않고 자료도 모으셨으니, 당신의 책이지 않습니까.

  당신이 돌아가시고 태사령이 된 그때부터 시작하여 실로 15년이 넘는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당신에게 보내는 마음 후련함과 회한이 밀려옵니다. 죽음으로 싸우지 못하고 적군에게 항복한 이릉을 비호한 것은 이릉이 패한 소식에 침울해하고 있는 황제의 뜻을 넓혀주고 이릉을 노리는 참언들을 막아보고자 하는 충성스러운 마음이었소이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할까요.

  그때 격노한 한무제로부터 받았던 죽음이라는 형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러 애타게 당부하시던 아버지의 뜻을 잇지 못하겠구나, 당신과 나의 세계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사그러드는구나. 좀더 소신있게 죽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나서 이은 가업이라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당연 제게 은전 50만전이 있었다면야 벌금을 내고 풀려났겠지요. 기껏해야 관리인 제게 그만한 돈이 없었으니 제 선택을 치욕스럽다 하지 않으시겠지요. 제가 선택한 궁형이란 벌이 얼마나 치욕적이며 천시를 받았는가를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렇게 천시받은 자가, 벌 받은 자가 쓴 글이라 이 기록도 천시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궁형에 처한 채 감옥에 갇혀 서럽지 않았다  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못하는 것에 어찌 두렵다 하지 않을 수 있었겠소이까. 감옥을 나오면서 제가 더 이상 제가 아니게 되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겐 울분으로 세상을 보낼 수만은 없었지요. 세상이 다르게 보였음을 세상의 인물이 다르게 보였음을 당신은 아시겠지요. 무제는 당신만큼이나 욱합니다. 제가 다시 환관 최고의 직위인 중서령까지 오른 것을 보십시오. 이 몸으로 이만한 위치에 올랐으니  한편으로는 이룬 것이 없다고는 못하겠지요. 그렇게 오래 써간 기록입니다. 문득 문득 제 속에 들어 있는 울분들을 이 역사서에 쏟아 붓습니다. 나는 그렇게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그 비참하고 처절한 심정이 보이시는지요. 이 심정들을 임안에게 편지로 보낸 적이 있지요. 그도 나처럼 옥에 갇혔으니 동류의식이었겠지요.

  유원언 하옥사(有怨言 下獄死:원한을 말하고 옥에 갇혀 죽는다)라 했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저는 다시 옥에 갇힙니다만, 이제 더 이상 삶을 이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구차한 목숨 부지한 이유, 이제 다 끝맺었으니 당신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세상에 다 내놓았으니 이제 이 한 세상 편히 뜨려 하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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