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이마고 - 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
우성주 지음 / 한언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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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이미지


호모 이마고-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 우성주, 한언, 2013.


  세계 최대 ‘항손둥 동굴’(Hang Son Doong Cave)을 보다보니 역시 여행과 탐험에 대한, 베트남 여행에 대한 의지가 생겼다. 동굴을 보기 위해서인데 제한적 허용이라고 하니 기분을 스르륵 가라앉히지만, 생각해보니 동굴 탐험에 대한 의지와 욕구는 항손동 동굴 이전에도 가지고 있었다. 그때의 의지도 가라앉혔으니 동굴탐험은 시간이 지나면 무뎌졌다가 다시 피어올랐다가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동굴에 대한 관심으로 읽은 책이 ‘호모 이마고’다.

  『호모 이마고Homo Imago』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이란 부제를 가지고 동굴을 탐험하고 있다. 항손둥 동굴과 호모 이마고 속에서 다루는 동굴들은 느낌이 다르다. 항손동 동굴이 자연이 동굴 속에 있는 것이라면 호모 이마고속 알타미라 동굴, 라스코 동굴은 저자의 말대로 갤러리같다. 동굴을 이야기하지만 이 책은 동굴탐험이라기보다는 동굴 속 이미지를 다룬다. 호모 이마고는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왜 이미지에 관심을 두고 있을까.


인간은 이미지를 통해 삶의 본질 면면을 사유하고, 소유하며, 소통하는 존재이다. 이런 특징은 인류가 문화를 만들고 문명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하는 창조적 동력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독창성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은 내면에 오롯이 떠오르는 생각을 개인가 사회가 가진 문화와 예술적 코드가 내포된 이미지로 탄생시킨다. 따라서 이미지는 앞으로도 인류의 문명을 지속해나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저자는 문화원형을 탐색하기 위해 문화가 속한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을 추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동일 시공간에서 인간이 만든 메시지를 ‘이미지 코드’로 추출·분석해서 ‘인류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탐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문화원형을 탐색하기 위해 저자가 추출한 이미지코드는 문자, 그림 등등 다양하다. 이것을 신화와 종교,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을 적용해 분석한다. 저자가 대표적인 ‘이미지’ 분석으로 사용한 것이 ‘라스코 동굴벽화’다. 구석기인들이 쇼베 동굴, 알타미라 동굴, 라스코 동굴 등등에 그린 많은 벽화를 분석한다. 특히 저자는 라스코 동굴벽화는 다섯 개의 갤러리로 나누어 생생하게 라스코 동굴벽화를 현재 탐험하듯이 보여준다. 이러한 이미지 코드 분석을 통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후기구석기인들이 남긴 동일한 동물 이미지를 통해, 지역은 달라도 그들이 가진 감성의 소산에 의해 공동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라스코 동굴의 들소 그림은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으로, 실제로 그 부근에서 주로 서식했던 들소를 그린 것이다.


  후기구석기인들은 벽화를 ‘신성한 곳’ ‘신성한 구조’에 그리고 있다. 후기구석기를 대표하는 동굴의 구조가 여성의 자궁과 같은 구조이며 동굴은 여러 중요한 의식, 사냥꾼이 될 청년의 입문식의 장소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의 사냥꾼은 샤먼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로서 입문식과 같은 통과의례를 통해 샤먼이 되는 것이 고대 그리스의 영웅인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완수와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인류가 문명으로 나아가는 시대, 그리스와 이집트 문명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비교하고 그 속에 나타난 건축과 의식에서 여성의 이미지를 찾아내면서 동일성과 유사성을 발견한다.  


문화적 현상에 대한 동일한 이미지는 비단 제한된 특정 장소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차별성을 초월하여 동일한 하고를 하였다는 점은 인간이 가진 사고의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떤 민족이든 어느 시대에 어느 곳에서 태어나 어떻게 살고 가더라도 이 지구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결국 지구에 형성된 자연환경과 그 안에서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회환경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류가 이미지를 통해서 구현해낸 생각의 결을 읽고 있으면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 생각할 수 있고 필요한 것은 어쩌면 한정적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창조라고는 하지만 필요에 의해서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은 정해진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시공간을 초월한 동일하고 유사한 ‘사고’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한, 인간의 삶을 위해 추구하는 형태가 세밀화되어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 지금보다 더 머언 미래의 인류가 지금 현재의 인류가 남긴 이미지를 추출해내서 비교분석하면서 그들은 뭐라고 해석을 할지가 궁금해진다. 살기 위해서 이토록 무식하게 버둥거린 인류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려나. 외경심을 가지려나. 그 이전의 인류가 해온 행위들을 통해 살아갈 미래를 위한 방법을 학습한다고 할 때 어느쪽에 무게를 더 두게 될지, 쓸데없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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