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녀의 일기
옥타브 미르보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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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기말 프랑스를 뒤집어 놓은 사건 가운데 하나가 향후 백 년 동안 지구상 모든 지식인의 양심과 행동의 모범으로 인용되는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여러 지식인이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 편에 서서 시대를 타고 들불처럼 번지는 반유대주의를 극복하고 그의 무죄를 주장해 결국은 해피엔드로 마감을 했다. 이때 가장 눈에 띄는 행동하는 지식인 상像으로 흔히 세 명, 에밀 졸라, 아나톨 프랑스, 그리고 옥타브 미르보를 꼽는다. 그래서 비록 작품은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옥타브 미르보라는 이름 하나는 굳세게 기억하고 있었던 터.
  일은 이렇게 생긴다. 엉뚱하게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의 <저 아래>를 구입하기 위하여 기웃거리다가, 책읽기를 주제로 강의하는 유명 서평가, 평론가, 교육자, 노문학자께서 미르보의 책이 번역해 나와 있으며, 자신의 중요한 직업인 유료 강의에 프랑스 작품 가운데 여성 주인공의 운명을 다룬 작품들을 모아 강의를 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까지 읽게 된다. 책 좀 읽는다 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인사가, 돈 받고 하는 강의 대상 가운데 하나로 꼽은 작품을, 감히 돈 내고 강의 들을 생각은 아니더라도 어찌 한 번 읽어볼 생각이 나지 않겠느냐 하는 것. 그렇겠지? 그렇다니까. 그래 나도 그이의 짧은 소개 글을 읽고 생전 처음으로 한 권을 골랐으니 이게 바로 <어느 하녀의 일기>가 되겠다. 내, 다시는 그이의 쪽글을 읽고 책 사나 봐라.
  그런데, 이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솔직한 느낌을 이야기하자면, 그 선생께서는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거 같다, 는 거.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그 양반이 이 책을 안 읽었다, 가 아니라, 안 읽어본 거 같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분명한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요새 법적으로 호소하는 일이 많아 함부로 입 털었다가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다. 석교도 여러 번 노크한 다음에 워킹 크로스 해야 하는 시대니까 구차하게 말을 끌더라도 용서 또는 양해 바란다.
  나는 특히 장편 소설일 경우 등장인물의 가족, 친구, 친척, 연인관계, 이야기가 갈림길에 접어들 분수령이다 싶은 부분은 메모하면서 읽는다. 모두 17 챕터, 520쪽 분량의 장편 <어느 하녀의 일기>는 1장을 읽고 메모 노트 덮었다. 메모까지 하며 읽을 필요는 없다, 그만큼 정성을 들일 필요가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이의 다른 작품도 여럿 있다. 그것들도 다 이 책과 같은 수준이라고는 주장할 수 없으니 만일 번역되어 나온다면 적어도 한 편 정도는 더 읽고 판단을 하리라.

 

  프랑스 북부의 작은 항구 오디에른에 어부 부부가 딸, 아들, 딸, 2녀 1남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소설을 만들기 위해 가난하지만 행복한 어부 가족에게 시련이 닥쳐 딸이 한 열서너 살 되었을까 했을 때, 아버지가 고기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 며칠 후에 익사체로 떠오른다. 이후 절망한 어머니가 의지한 것은 알코올. 한없이 술을 마시고, 술에 취했다 하면 자식들 가운데 특히 제일 어려서 힘도 없는 막내 셀레스틴을 두드려 패는 걸 멈추지 않았고, 지긋지긋한 살림살이도 하루 이틀이지 언니는 그길로 대강 남자 하나를 꼬드겨 대처로 나가 아마 매춘부가 되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오빠는 무턱대고 해군에 자원해 중국에 있거나 아니면 아프리카 근해에 빠져 죽었을 거라고도. 어린 셀레스틴은 주민들이 수녀들이 운영하는 보육원에 보내 그곳에서 읽기와 쓰기, 셈법, 청소, 바느질 등의 기본 자질을 배우고 출원과 동시에 하녀생활을 시작한다. 셀레스틴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셀레스틴이 최근 2년 동안만 따져서 열두 번째 일터로 선택한 곳이 노르망디 지방의 메닐-루아라고 하는 작은 시골 마을. 하녀로 일할 곳은 백만 프랑의 재산을 보유했으나 구두쇠로 이름이 드높은 알부자 라부르 씨 댁으로 저택의 이름을 르 프리외레라고 한다. 작품은 하녀로 일하기 위해 노르망디의 조그만 시골 동네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때가 9월 중순. 일기는 다음 해 7월 말까지 모두 열일곱 편이다. 셀레스틴은 그동안 세계의 수도 파리에서 하녀생활을 했을 뿐더러 몸매도 훌륭하고, 세기말 작품의 주인공답게 얼굴은 어여쁘고, 험한 하녀 생활을 해도 주로 식사 시중이나 안주인 몸종을 했기 때문에 손도 고운, 갈색 머리카락에 그거 있잖은가, 뽀얀 피부를 과시해, 시골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주민들 입초리 마를 새가 없게 만든다.
  그래 작은 동네에서 무슨 로맨스가 벌어지기도 하고 사건도 생기고 당연히 주인과 주민들 간의 갈등도 생기지만, 이에 못지않게 작품에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당시 부르주아, 귀족들의 허위에 찬 생활양식이다. 귀족, 부르주아의 도덕적 방탕과 물질주의, 어리석음 기타 등등을 나열하는데 오히려 더 열중하는 바람에, 미르보는 작은 마을 메닐-루아에서 벌어지는 엽기적인 소녀 강간 살인 사건과 주인공이 하녀 생활을 하는 르 프리외레에서 생긴 절도 사건을 긴장 없이, 전혀 긴장을 느끼게 하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에피소드 정도로만 읽히게 만들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스토리 라인이 셀레스틴이 다년간 경험했던 주인집들에서 발생했던 에피소드에 비해 분량도 적고, 심각하지도 않아서, 혹시 이게 전작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역자 및/또는 출판사 편집인에 의하여 축약된 결과물이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었다. 아니겠지. 믿고 살아야 건강에도 좋으니까 아니라고 믿겠다.
  그러면 결과는 당연한 것. 세기말의 모든 프랑스 부르주아와 귀족들은 멍청이, 부도덕한 자, 사치와 방탕, 혼외정사에 몰두하는 백치이며, 하인과 하녀들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지배당하거나 적어도 조정당하면서 살고, 모든 부조리의 원흉이라는 거. 하층 계급 역시 부도덕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게 다 먹고살고자 하는 몸부림이란다. 훤하게 그림이 그려지니? 그렇다. 맞다. 그래도 다행인 건 빈자, 약자가 선, 부자는 악이라는 이분법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
  이 책을 강의 목록에 포함시키겠다는 명사분이 읽으면 대단히 기분 안 좋을 독후감이지만 그렇다고 감상을 솔직하게 쓰지 않을 수 없다. 읽지 말라고 비추를 때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권하지는 못할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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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7-09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Falstaff 2021-07-09 09:40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죠, 그 선생이 보면 기분 안 좋겠지요? 뭐 인생인 걸.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07-09 09:43   좋아요 1 | URL
못보시기에는 너무 가까운곳에 ㅋ
제 추측이 맞으면요;;

잠자냥 2021-07-09 09:43   좋아요 3 | URL
주정뱅이 폴스타프는 보란듯이 직설을 합니다. -제 말은 그러니까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09 09:44   좋아요 1 | URL
아이고.... 내가 졌음. 1:0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07-09 09:46   좋아요 1 | URL
저는 그럼 관람석에서 !

잠자냥 2021-07-09 09: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 전 1964년작 동명의 영화를 너무 재미나게 봐서 이 책 한 번 읽어볼까 싶었는데, 안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ㅎ 책 정보 보니 사람들이 의외로 이 책을 많이 읽어서 놀랐는데, 아....최근 리메이크 작품 때문인 것 같군요(레아 세두 출연작).

500쪽이 넘네요? 이것도 뜻밖입니다. 두껍다.... 안 읽어야지;;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09 09:42   좋아요 2 | URL
뭐 제 입으로 읽지 말라고는 하지 못해도 두껍고 비싸고 그렇습니다. ㅋㅋㅋㅋ

다락방 2021-07-09 0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 책 별로였다고 지난번에 댓글 달고 나서 ‘그런데 폴스타프 님은 엄청 좋게읽으시는 거 아닐까‘ 했는데 별 두 개 주셨네요. 어휴 속이 다 시원합니다.
책에서 갑과 을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공감하는 지점이 있었는데 소녀 성폭행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제가 전혀 공감할 수 없게, 욕하게 써놔서 제가 이 책을 싫어했던 것 같아요. 주인공인 하녀가 성폭행범이라고 의심하는 사람에게 욕망을 느끼는 그런 지점이요. 그래서 제가 이 책은 별로인 책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Falstaff 2021-07-09 09:55   좋아요 1 | URL
하여튼 전체적으로 다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락방님이 이 댓글 다실 줄 알았거든요. 저번에 하신 얘기는 제 감상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ㅋㅋㅋㅋㅋ
예. 강간살인범을 미화까지는 아니어도 지극히 정상인 남자처럼 묘사하는 것이 제일 정떨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거 말고도 다른 흉악범죄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면서 겉으로는 진실한 일꾼인데, 그냥 휙 스케치하듯 지나가버리는 게 진짜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파이버 2021-07-26 2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아 세이두 좋아해서 영화 보고 책까지 읽었었는데 ㅎㅎ 저는 그나마 배우 영향이었던지 영화가 쬐끔 더 나았던 것 같아요…

Falstaff 2021-07-27 08:35   좋아요 1 | URL
아, 영화도 보셨군요. ^^
 
저 아래 제안들 15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지음, 장진영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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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이름은 샤를-마리-조르주 위스망스(Charles-Marie-Georges Huysmans). 어릴 때는 당연히 이 이름으로 살다가, 나이가 좀 들자, 자신의 부계 쪽이 네덜란드 화가 집안에서 흘러들어온 지라 프랑스 식 이름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이름을 조리스-카를(Joris-Karl)이라고 바꾸어 사용했다. 1848년생으로 프랑스 자연주의의 위대한 작가 에밀 졸라보다 여덟 살 적은 나이인데, 사람이 진득하고 중뿔나게 나서지도 않고 그저 무난해 하급공무원으로 평생을 보내면서 소설도 쓰고, 미술평론도 하고 그랬단다. 젊은 시절엔 에밀 졸라에 경도하여 자신도 자연주의 소설을 써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시절은 벨에포크 시대. 과학은 날로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발전하고, 혁명의 기운과 관계없이 부르주아들은 본격적인 좋은 시절을 맞아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을 착취해가며 온갖 영광을 누리는 와중에 세기말을 맞이한 위스망스. 그가 보기엔 자연주의가 점점 따분해지는 거였다. 그리하여 세기말주의, 예술지상주의, 심미주의로 치달아 쓰게 된 책이 <거꾸로>. 그 유명한, 온갖 보석으로 등껍질을 치장한 거북이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1884년 작품인 <거꾸로>는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59번으로 판매를 하고 있는데 독자들이 그리 열광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나는 무척 인상 깊게 읽었다. 위에서 말한 세기말, 예술지상, 심미주의 같은 계열의 작품들, 퉁 쳐서 데카당 소설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독자와의 합이다. 작품-독자의 합이 좋으면 장땡이고, 맞지 않으면 망통. 중간이 없다. 짐작하건데 <거꾸로>의 별점을 어중간하게 준 독자들은 혹시 위스망스의 이름에 눌린 건 아닐까 싶다.
  작품을 발표한지 14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현대인이 읽기에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거꾸로>를 쓴 위스망스는, 사실 읽기 만만하지 않는 게 작품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독자가 받는 느낌이 생소해서 그런 건데, 당시엔 당연히 획기적인 소설이었을 <거꾸로>, 즉 데카당스 문학을 맹목적인 부류의 문학 장르라고 규정하면서 “플롯, 묘사, 인물까지 거부하며 영적인 대화랍시고 전보문 같은 헛소리를 나열”한다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더 진보된 작품을 구상한다. 이런 진보(라고 주장하는 과정)를 거쳐 7년 후에 발표한 작품이 바로 <저 아래: La Bas>.

 

  La Bas를 우리나라에선 <피안> 또는 <저승에서>로 번역을 해왔으나 절판, 이번에 그동안 말로만 듣던 이 책을 워크룸프레스에서 <저 아래>라는 이름으로 발간했으니 눈이 확 띄어 단박에 골랐다. 내 취향엔 <거꾸로>가 아주 잘 맞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예술지상과 데카당스다운 엽기발랄에서 한 발 더 나갔다. 티포주 성에서 남녀 어린이들을 강간한 후 목 졸라 죽이고 온갖 방법으로 시신을 훼손해 나중에 “푸른 수염”의 원형이 된 ‘질 드 레’ 원수(또는 장군, 성주). 그의 일생을 소설로 쓰고 있는 ‘뒤르탈’을 주인공으로 한, 나 같은 비 기독교인들도 기독교인들과 생각을 같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신성모독의 방법과 전통을 담고 있다.
  뒤르탈 역시 그동안 간통, 사랑, 야망 등 당시 현대소설의 매혹적인 주제를 즐기다가 문득 자각을 했는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백년전쟁 당시 샤를 7세의 명령에 의하여 잔 다르크의 뒤를 받쳐 프랑스에 헌신을 하다가 한 순간에 휙 눈이 돌아 악마숭배와 흑마법의 세례로 뛰어든 질 드 레를 선택한 것이, 자연주의를 포기하고 세기말로 선회한 위스망스와 조금은 비슷하게 보인다. 백년전쟁까지는 중세로 봐야 마땅할 터. 뒤르탈과 그의 저술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는 의사 친구 ‘데 제르미’는 레 원수의 행적을 따라가다 자연스레 온갖 흑마법과 악마숭배의 전통, 더 나가서 연금술과 이 모든 것들이 19세기 말의 프랑스에서 여전히 구현되고 있는 현장까지를 추적한다.
  작품의 초기에 사십대에 이른 뒤르탈이 전에 독일의 카셀 박물관에서 본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가 그린 예수수난그림을 회상하는 여섯 쪽에 이르는 대단한 묘사가 나온다. 여태까지 본 십자가에 매달려 오른쪽 가슴에 창에 찔려 늘어진 고귀한 모습의 예수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 벌어진 상처와 상처의 색깔과 몸에서 분비되는 장액,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경직 현상이 나타나는 근육 등.
  그러나 신성모독이란 주제로 보면 뒤르탈과 비교가 안 될 고수는 병약한 노르웨이인과 까다로운 영국인의 피가 흐르는 파리 의과대학 박사, 데 제르미. 첫 장면부터 뒤르탈과 문학적인 관심사에 대해 격렬하고도 유익한 토론을 벌일 정도로 문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보다 확실하게 작품을 평가하는 안목을 지니기도 했지만 중세 문화에 경도되어 있으며, 중세 이후로 지하로 잠적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악마주의, 흑마법, 연금술 등에 광범위한 지식과, 현존하는 관계 인물들을 알고 있다. 제르미 박사는 뒤르탈에게 미셸 신부와 더불어 파리에 단 두 명 있는 종지기 가운데 한 명인 카렉스와, 점성학자 제뱅제를 소개한다.
  이렇게 모인 네 명의 특별한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카렉스의 종탑에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곁들여 나누는 대화를 통해 갖은 방법의 흑마법과 특히 악마주의의 핵심인 몽마夢魔와 몽정마녀를 이야기한다. 여기에 병렬로 뒤르탈의 작품 속 질 드 레 원수의 생애가 보태진다.

 

  데 제르미가 말하는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의 악마숭배의 전통을 한 번 보자.
  16세기에는 카틀린 드 메디시스와 발루아 왕가 사이의 악마와의 계약이 유명했고, 17세기 들어서는 우르술라 수녀회 수녀원에서 더욱 은폐된 환경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는데 최고 전문가는 사제 기부르로 벌거벗은 여자의 배 위에서 미사를 집전했다고 한다. 이 미사엔 수많은 여성들이 기원발복을 위하여 참석하였으며 루이 14세 치하에서는 아주 흔했단다. 18세기엔 뒤레 참사원이 마법에 몰두해 강령술로 악마를 소환하다 적발되어 1718년에 마법사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고, 베카렐라 사제는 남성과 여성을 강간하고 교미촉진제를 개발해 신성모독죄로 기소되어 1708년에 7년간 갤리선의 노 젓는 노예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19세기에 들어서 1843년에 잡지 <라 셉텐의 목소리>에 한 악마단체가 25년 동안 악마의식을 통해 3,320명을 살해했다고 보도했는데, 살인과 관련된 모든 가학적인 광기를 엑소시즘이라는 고대의 경건한 외투로 가리고 있단다. 19세기, 그러니까 당시 현대에 강신 미사가 집전되는 것으로 파리, 로마, 브뤼헤, 콘스탄티노플, 낭트, 리옹, 아일랜드로 모두 가톨릭이 성한 곳이다. 왜냐하면 강신 자체가 신화神化, 즉 성체를 다룰 줄 아는 사제에 의하여 행해져야 했기 때문이란다.
  이 외에, 잔 다르크 사후에 티포주 성에 틀어박힌 질 드 레 원수의 사치스러운 행동을 기술한 것도 매우 흥미롭다. 전쟁이 끝나자 원수에게서는 완고하고 난폭한 군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열성적인 예술적 세련미로 삼오한 문학, 악마를 부르는 예술에 관한 눈물 저술에 힘써, 수많은 장서에 직접 칠보로 그림을 그리고 화가를 고용해 장식글자와 세밀화로 꾸미고, 수소문해서 간신히 찾은 전문가가 금세공된 장정본 표지에 상감을 새겨 넣는 등 온갖 사치를 하느라 거의 무한대였던 재산을 다 탕진하게 된다. 이 모습을 위스망스는 “15세기의 데제생트”라고 말하는데, 데제생트가 누구냐 하면, 7년 전의 자기 작품 <거꾸로>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질 드 레 원수의 파산이 가까이 오자 그는 소생할 방법으로 연금술에 몰두했고 서서히 빙의망상에 빠져버린다. 그리하여 과격한 악마숭배자, 잔혹한 학살자로 변해버리는 것. 이어서 그의 악행이 소개되는데, 레 원수의 악행에 비하면 사드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그저 소심한 부르주아이자 보잘 것 없는 몽상가에 불과할 정도다.

 

  이 독후감을 읽는 분께, 나는 이 책 <저 아래>를 선택하기에 앞서 <거꾸로>를 먼저 읽어보시기 권한다. <거꾸로>가 위스망스의 대표작이고, 분량도 약간 적고, 가격도 얼마 아니지만 저렴하니 우선 읽어보시고, 위스망스가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판단한 연후에, 호기심이 돋는다면 <저 아래>를 구입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단지 내 의견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당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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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7-08 09:2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항상 흥미진진한 작가 이야기로 몰랐던 작가와 작품을 Falstaff 님 글을 통해 만나네요. ^^

Falstaff 2021-07-08 09:31   좋아요 5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근데요, 위스망스는 함부로 권하지 못하겠습니다. 연이 맞지 않으면 진짜 곤란한 책이거든요.

그레이스 2021-07-08 10: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별점 다섯개 올려주시네요
내용이 확 끌리네요
일단 시대가...^^

Falstaff 2021-07-08 10:32   좋아요 4 | URL
오.... 이 작품은 신중하셔야 할 텐데, 이거 참. 조금 난처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07-08 10:41   좋아요 3 | URL
^^;;
데카당 작품이라니 조금 그렇긴 하겠네요
거꾸로로 테스트!
더 자세히 보니 컬트 문학!
ㅋ ㅋ
점점 멀어지네요
ㅎㅎ

얄라알라 2021-07-08 11: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피안/저세상/저아래/거꾸로 - 진폭이 상당한데요? 저도 Falstaff님 취향 따라 ˝거꾸로‘에 한 표를^^

Falstaff 2021-07-08 11:13   좋아요 2 | URL
ㅎㅎㅎ 하여튼 전 책임 안 집니다.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7-08 11: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당신의 선택 ㅋ 별다섯에 그런말을 하시다니 ~! 근데 <거꾸로>를 이야기하시니 이거 한번 읽어봐야 겠어요 😄

Falstaff 2021-07-08 11:15   좋아요 4 | URL
오죽하면 그리 하겠습니까. 에휴. 오늘 조금은 죽을 맛이네요. ㅋㅎㅎㅎㅎ
이 책은 함부로 추천하면 말 그대로 귀싸대기 세 대... 같아요. ㅎㅎㅎㅎ

그레이스 2021-07-08 19:33   좋아요 4 | URL
중매도 아닌데...^^ 뭘 그렇게까지
이런 책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책이 많다보니 이제는 구입에 신중을 기하게 됩니다^^ 만권이 넘었거든요
읽고 싶은 책에 넣었다가 취소했어요
장바구니 보니까 falstaff님 소개하신 책이 많네요
몇개 구입한 책들도...!
잘 모르는 작가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Falstaff 2021-07-08 19:53   좋아요 3 | URL
ㅋㅋㅋ 말씀이 맞습니다.
근데요, 기껏 돈 주고 사서 읽었는데 폭망이면 진짜로 린치는 아니겠지만 속으로 욕 한 바가지 안 하겠습니까? ㅋㅋㅋㅋ
와..... 만 권이 넘었다, 이거 보관함 + 장바구니 합계지요? 설마 댁에 만 권의 책은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ㅎㅎㅎ 제 독후감을 즐겁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꾸벅!

그레이스 2021-07-08 20:04   좋아요 2 | URL
집에요^^
남편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ㅋ

Falstaff 2021-07-08 20:06   좋아요 3 | URL
헥!
저 까무러칩니다...... 꼴딱!

coolcat329 2021-07-08 16:2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어중간한 점수를 준 사람들의 심리까지 꿰뚫어보시는 폴스타프님. 위스망스 저는 자연주의 소설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예술지상주의 탐미주의 작가로 나아갔군요
...

Falstaff 2021-07-08 16:24   좋아요 5 | URL
ㅎㅎㅎ 말 하자면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지요, 꿰뚫어보기는요. ㅋㅋㅋㅋ
위스망스, 자연주의에서 데카당으로, 정말 극에서 극으로 변신한 셈이지요.

mini74 2021-07-08 20: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폴스타프님 별 5개!! 방금 타타르인의 사막읽고 아프고 허한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데 ㅎㅎ 근데 내용은 재미있겠는데요*^^*

Falstaff 2021-07-08 20:59   좋아요 4 | URL
아이고, 아이고.... 일단 도서관에서 <거꾸로>를 먼저.... ㅋㅋㅋㅋㅋㅋ
근데요, 정말 타타르, 괜찮지요? 저만의 명작 아니지요? 그죠???

초딩 2021-08-06 17: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2관왕 축하드려요!

Falstaff 2021-08-06 19:3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그레이스 2021-08-06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 책 생각나요.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잠시 멈추게 하신 그...!^^
축하드려요~♡

Falstaff 2021-08-06 19:35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도 기억납니다. 이 책이 걸릴 줄은 저도 몰랐답니다. ^^

mini74 2021-08-06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폴스타프님 *^^*

Falstaff 2021-08-06 19:35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미니74님! ^^

이하라 2021-08-06 18: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Falstaff 2021-08-06 19:3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독서괭 2021-08-06 18: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님 2관왕 축하드립니다^^

Falstaff 2021-08-06 19:36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

새파랑 2021-08-06 19: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과 폴스타프님 영혼의 투톱 인거 같아요. 그래서 2관왕? 축하드려요. 왠지 당선이라는 단어를 싫어하시기는 하지만 ^^

잠자냥 2021-08-06 19:36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 영혼의 투톱 ㅋㅋㅋㅋㅋㅋ 서로 낚시하는 영혼의 투톱, 싸다귀 날리고 맞는 영혼의 투톱입지요. ㅋㅋㅋㅋ

Falstaff 2021-08-06 19:36   좋아요 1 | URL
근데 솔직히 저하고 잠자냥 님을 투 톱이라고 하시면 잠자냥 님이 기분 언짢지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8-06 19:51   좋아요 2 | URL
폴스타프 싸다귀 찰싹! 정신차려! 아닙니다. 제가 영광입죠!

오네긴 2021-08-06 19: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Falstaff 2021-08-06 19:37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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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읽어간다. 다음 주 목요일에 독후감 업로드. 난 별로. 사건 해결 과정이 치밀은커녕 조밀하지도 않다. 근본적으로 선과 악의 근원을 찾는 종교소설이란 건 설득력이 거의 없다. 느슨한 사건과 증거 없이 통박으로 넘겨짚는 해결. 기대가 과했다. 그래도 그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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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7-07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다들 좋다고 한 작품인데, 폴스타프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Falstaff 2021-07-07 12:50   좋아요 1 | URL
ㅎㅎㅎ 기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 재미 없을 거예요. (다 써놔서 알아요!)

잠자냥 2021-07-07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그린 그레이엄 그린 라임이 잘맞는뎁쇼? ㅋㅋㅋ

Falstaff 2021-07-07 12:50   좋아요 1 | URL
옙. GG 라인이라서....

새파랑 2021-07-07 1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의 읽어가는데 다음주 목요일 업로드인가요? ㅎㅎ 왠지 예고 리뷰가 기대되네요~!!

Falstaff 2021-07-07 13:45   좋아요 2 | URL
쿳시가 쓴 해제만 남겨놓았는데, 아마 안 읽을 거 같습니다. 독후감까지 다 써놓고 새삼스레 해제는 무슨 해제. 그잖아요? 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7-07 14:11   좋아요 1 | URL
그래도 쿳시 해제인데요?

Falstaff 2021-07-07 14:30   좋아요 2 | URL
해제는 작품이 아닙니다만, 전 쿳시의 작품들이 조금 거북해요.
분명히 필요해서 삽입한 장면들이긴 한데, 그게 좀 과하단 말입니다. ㅠㅠ

페넬로페 2021-07-07 14: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주일뒤의 리뷰예고는 ‘모든 것이 계획적‘이다 이시지요?
더 기대됩니다 ㅎㅎ

Falstaff 2021-07-07 14:31   좋아요 2 | URL
음하하하....
계획적이진 않고, 그저 1주에 네 편씩만 올리는 걸로 했더니 진도가 좀 빨리 나가면 이런 일도 벌어집니다. ㅋㅋㅋㅋ

아침에혹은저녁에☔ 2021-07-07 19: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궁금한게 있이서 질문드립니다 챙피한 이야기 지만 주로 휴대폰으로 북플에 글을 쓰는데 가끔기다 여러종류의책을 하나 하나 나열하면서 소개하는 페이퍼에 대해물어보고 싶네요 그글은 pc에서만 가능힌지 그리고 도서 하나 하나를 어떻게 클릭하는지 그 방법이 궁금하네요좀 자세히 설명해주실수 있으면 하는 부탁 드려 봅니다

Falstaff 2021-07-07 21:00   좋아요 4 | URL
휴대폰으로는 페이퍼 작성이 참 힘들더라고요. 답글도 이렇게 글에 바로 달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아침저녁 님도 참. ㅋㅋㅋㅋㅋ 이런 거 술주정뱅이 배불뚝이 폴스타프한테 물어보시면 제가 뭘 제대로 알아야 답을 해드리지요. 전 휴대전화 기능의 10%도 못쓰는 인류 가운데 한 명이랍니다. ㅋㅋㅋㅋㅋ

아침에혹은저녁에☔ 2021-07-07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시에서는 어떻게 하는지요

Falstaff 2021-07-07 21:09   좋아요 2 | URL
페이퍼 쓰기를 열고요, 책 그림을 올리고 싶으면 왼쪽 상단(아주 상단 말고요 글 쓰는 박스 바로 위에) 알라딘 상품을 클릭하시면 검색 창이 나옵니다.
거기에 원하시는 책 제목을 입력하시고, 위치 선택(이걸 신중하게 하셔야 합니다. 저는 거의 언제나 ˝글 위˝를 선택합니다), 사진 크기 등을 결정하시면 글 쓰는 창에 상품의 사진이 올라옵니다.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

아침에혹은저녁에☔ 2021-07-07 2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단한번해보고 안돼면 다시 물어볼께요 자세히 설명좀 해주세요 빨갱이 소주 먹고 물어보는거니까흉보지 말고 자세히좀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1-07-07 23:52   좋아요 2 | URL
핸드폰으로는 여러 권의 책을 올릴수가 없어요.
피시나 노트북에서 알라딘 서재로 들어가야 해요~~
서재로 들어가서 글쓰기 중 리뷰 또는 페이퍼에 클릭해서 들어가서 글을 쓰시면 돼요~~
여러권의 책은 페이퍼만 가능하고 리뷰에는 사진을 첨부하시면 돼요~~
알라딘이 좀 불안해서 저는 글이 몇 번 날아갔어요
그래서 한글에 글을 쓰고 알라딘서재에는 그것을 복사 븥여넣기를 해요~~
알라딘서재에 글을 바로 쓰시려면 꼭 임시저장을 계속 하시기 바래요~~

페넬로페 2021-07-07 23:55   좋아요 2 | URL
제가 잘 알아서 그런게 아니라 저도 처음 북플에 들어와 헤맨 경험이 있어서요 ㅎㅎ

Falstaff 2021-07-08 08:47   좋아요 2 | URL
ㅋㅋㅋ 어젠 저도.... 빨갱이 소주 말고요, 아예 두꺼비 그림 있는 진짜 진로 한 병 마시고 댓글 달았는데, 친절하신 페넬로페 님 덕에 잘 마무리가 됐군요. ^^

아침에혹은저녁에☔ 2021-07-08 0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 합니다
 
펠레아스와 멜리쟝드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12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유효숙 옮김 / 연극과인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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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발견한 순간, 일각의 망설임 없이 집어든 것은 우습게도 원작자인 마테를링크가 아니라 클로드 드뷔시가 작곡한 동명의 오페라 때문이었다. 드뷔시의 음악에 관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로맹 롤랑의 작품 <장 크리스토프>. 이제 거장 작곡가의 자리에 오른 장 크리스토프가 친구 올리비에와 함께 극장에 가서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감상한다. 1막이 끝나고 이들이 나누는 대화.

 

  올리비에: 어떤가, 자넨 어떻게 생각해?
  크리스토프: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가나?
  올리비에: 응
  크리스토프: 그럼 아무 것도 없군.
  올리비에: 자넨 정말 속물이네.
  크리스토프: 전혀 아무 것도 없어. 음악이 없어. 반전이 없어. 앞뒤 맥락이 없어. 앞뒤 관계가 없어. 무척 섬세한 화성은 있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지.

 

  사실 나는 드뷔시의 <펠레아스...>를 그리 잘 듣지는 않았지만, 누가 이 작품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감히 드뷔시, 인상주의 천재가 작곡한 유일한 오페라에 관해서 솔직한 의견을 내지 않았었다. 지금이야 한 마디로, 골 아파서 안 들어, 라고 하는 단계이지만 젊은 시절의 나는 혹시라도 누구한테 까일까봐 비겁하게 몸조심을 했다. 뭐 당신들은 그런 적 없는가. 다 사는 게 그렇지. 그러다가 고전음악에 권위가 있는 로맹 롤랑이 <장 크리스토프>의 입을 통해 위와 같이 말하는 걸 듣고, 세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각성을 해 다른 건 몰라도 ‘감상’에 관해서는 솔직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속 좁은 사람들이 항용 그러하듯이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해결하고 넘어가야 하는 장애물 가운데 하나로 치부하고 있었다. 같은 프랑스 언어를 사용하는 마테를링크와 드뷔시가 서로 협의 하에 대본작업을 하고 화성을 입혀 오페라가 탄생했는데 이 과정에 두 명의 천재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도 있었다고 한다, 라는 걸 애초에 알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희곡집을 발견했으니 어찌 순간의 망설임이 있을 수 있었을까.
  먼저 드뷔시를 경험해보았으니 그것부터 이야기해보자. 드뷔시의 <펠레아스....>를 듣는 건 장 크리스토프가 얘기한대로 섬세한 화성을 듣는 일이다. 처음 장면, 숲 속 외딴 연못가에 아름다운 멜리장드가 길을 잃고 앉아 있는데, 사냥을 하다 역시 길을 잃은 골로가 도착해 멜리장드를 데리고 가는 장면까지, 마치 아련한 몽환 속을 헤매는, 여태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꿈결 같은 화성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이 다음이 문제다. 일찍이 옛 어른들께서 말씀하셨듯, 꽃노래도 삼세번인데 이건 세 시간에 육박할 때까지 노냥 비슷한 (것처럼 들리는) 화성이 계속되니, 객석의 관객들은 가사 또는 반수면 상태에 빠지는 것이 또 당연하다. 이런 드문 경험(오케스트라 반주에 의한 깊은 수면)을 하고 극장을 나서면서, 그래도 드뷔시의 유명한 작품 <펠레아스....>는 역시 걸작이야, 입을 털지 않으면 무식하다는 얘기를 들을 거 같아 전전긍긍하는 인종들이 모르긴 모르지만 무진장 많을 거 같다.
  그런데, 오페라 대본과 거의 비슷한 마테를링크의 원본 희곡을, 원어인 프랑스 말이 아니라 우리말 번역을 읽었는데도, 놀라워라, 물론 역자 유효숙이 될 수 있는 대로 원문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몽환과 에스프리를 느낄 수 있도록 번역을 해서 그랬겠지만, 오페라를 들을 때와 유사하게 시적인 감상, 이미지즘 적 몽환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런 효과음도 없이 다만 배경, 즉, 연못, 바닷가 동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탑, 바다가 보이는 방과 짧고 연속적인 문장들로.
  이런 효과를 더 높이기 위해 1893년 초연 당시, 골로로 직접 출연까지 했던 연출가 뤼네-포는 명도가 낮은 조명을 머리 위에서 내리 비추게 했고, 반투명 막을 무대 전면에 걸어 배우들의 모든 행동과 동선이 마치 안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엽기 치정극이다. 적국의 공주와 혼인하기 위해 떠난 홀아비 왕자 골로가 도중에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어 도착한 연못가에서 연못에 왕관을 빠뜨린 채 울고 있는 멜리장드를 만나 결혼하고, 멜리장드와 함께 성으로 돌아오니 엉뚱하게 동생 펠레아스와 정분이 나, 이걸 참지 못해 펠레아스를 쳐 죽인다. 멜리장드 역시 핍박당하지만 결국 딸을 낳고 죽는다는 이야기.
  멜리장드를 취하는 장면은 유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물귀신 이야기, 예컨대 널리 알려진 <루살카>나 로르칭의 <운디네> 이야기의 한 에피소드와 적어도 많이 유사하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불륜관계는 여지없이 단테의 <지옥>에서 지옥에 떨어져 “가장 비참할 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건 없다.” 요지랄을 하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와 많이 비슷하다. 골로는 <지옥> 장면에서는 조반니 말라테스타의 대체 인물이랄 수 있다. 한 가지 다른 건, 골로는 멜리장드의 몸을 통해 딸을 낳는 거 하나가 있지만.
  하지만 역시 이 작품의 매력은 스토리가 아니라 희곡을 읽어가면서 저절로 감응하게 되는 모호한 몽환과 신비의 색채이다. 이외에도 숱하게 많은 비유와 해석이 가능한 다중적 작품이라 읽은 사람들마다 감상이 다 다를 것이 분명하다. 1893년에 초연되고, 드뷔시가 오페라로 만들어 1904년에 초연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분명히 이미 고전 희곡의 자리에 오른 작품. 이제야 읽어 어찌 만시지탄이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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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7-06 10: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할 일이 많아지는 리뷰네요!ㅎㅎ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듣고
<루살카>,<운디네>가 어떤 이야기인지 슬쩍 찾아보고 마지막에 이 책도 읽구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는 무수히 변주되었을 듯 합니다.😆

Falstaff 2021-07-06 10:54   좋아요 5 | URL
ㅎㅎㅎ 우짜 그걸 다 하시려고요.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만만치 않은 걸요.

청아 2021-07-06 11:07   좋아요 3 | URL
유튭으로 찾아놨어요ㅋㅋㅋ스콧님과 폴스타프님 덕분에 온통 클레식입니다.✌

Falstaff 2021-07-06 11:13   좋아요 3 | URL
아, 유튭이면 라흐마니노프의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rachmaninoff francesca da rimini>도 검색해보셔요.
그게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불 붙는 오페랍니다. 완전 러시아판 치정 잔혹극. ㅋㅋㅋ

청아 2021-07-06 11:12   좋아요 2 | URL
오호! 러시아판!!!감사합니다ㅋㅋㅋㅋ

잠자냥 2021-07-06 11: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불면증 환자에게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와 마테를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동시에 처방하면 꿀잠 직행이로군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06 11:35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잠자냥 님 재치가 만땅이셔요. ㅋㅋㅋㅋㅋ 바로 직행 맞습니다.

syo 2021-07-07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급독서와 클래식, 오페라 막 이런 품격있는 음악은 기필코 같이 가는 건가요?? 🥲 오늘날 이 시점까지 드뷔시가 드비쉬인줄 알았던 음알못 syo는 서재이웃님들이 음악에 대한 박식을 공개하실 때마다 우옵니다😢

Falstaff 2021-07-07 11:43   좋아요 0 | URL
흥. 뽕짝 얘기할 때는 한 마디도 안 하시더니, 뭐 음악 차별하는 거예요? ㅋㅋㅋ
세상에 음악에 품격이 어딨어요. 듣는 사람하고 맞느냐 아니냐 이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톨스토이냐 야설이냐! 난 둘 다 기호에 맞는 사람입니다. 물론 직격으로 비교는 상상도 못하겠지만, 이들 사이에 다른 건, 내놓고 보느냐, 숨어서 보느냐의 차이 말고, 또 다른 호오의 관점이 있나요?
우리의 초사이언, 사이오 님 그렇게 안 봤는데 차별을 허시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7-07 11:46   좋아요 0 | URL
뽕짝 그건 저도 꽤 아는 거니까요 ㅋㅋㅋㅋ 😆 나도 좀 아는데 남이 아는 게 뭐 그리 특별해보이겠어요 기본지식인가보다 했지 ㅋㅋㅋㅋㅋㅋㅋ 제가 클래식을 겁나 많이 알고 뽕짝을 하나도 몰랐으면 폴스타프님 뽕짝 페이퍼에 이런 댓글이 달렸겠죠? ㅋㅋㅋ
 
크리스마스 캐럴 펭귄클래식 43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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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급기야 읽고 말았다. 몇 번에 걸쳐 안 읽겠다고 광고를 했었지만. 글쎄 이게 디킨스의 힘이라니까. 본문이 2백 쪽 조금 넘어 그냥 <크리스마스 캐럴> 한 작품이겠거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골랐더니, 디킨스가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해서 쓴 에세이와 단편소설을 포함한 모음집이다. 이 가운데 <크리스마스 캐럴>만 따지면 136쪽 분량. 이것만 가지고 책을 엮기엔 분량이 애매할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펭귄 클래식 원본도 모두 일곱 편의 작품을 실은 것처럼 보인다. 불만 갖지 말자.
  작품은 당연히 중편 분량의 표제작이다. 이외에도 <크리스마스 케럴>을 쓰기 위한 워밍업처럼 읽히는 <교회지기를 홀린 고블린 이야기>도 들어있다. 고블린, 유령과 도깨비의 중간단계. 주로 무리지어 생활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유령보다는 도깨비라고 해야 마땅하겠다. 옛날 옛적에 가브리엘 그럽이라는 이름의 교회지기가 있었는데, 교회지기라 함은 교회를 돌보면서 교회묘지에서 무덤 파는 일을 겸했던 사람이다. 그럽 씨는 성질이 괴팍하고 고집스럽고 무뚝뚝한 사람으로 성격 역시 까다롭고 침울한 외톨이 성향으로 몇 백 년이 흐르면 이런 스타일을 ‘외로운 늑대’라고 칭할 전형적인 사람이다.
  이이가 비록 교회지기라 하지만 유럽 사람들 최고의 명절인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그게 도대체 나하고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이냐, 하는 심정으로, 하필 또 때맞춰 죽어준 사람이 있어 성탄전야에, 아이고 잘 됐다 싶게, 필요도 없는 성탄전야 만찬이나 뭐나 하여튼 별 잡스런 모임에 가는 대신 밤이 내린 묘지에 가서 내일 하관을 할 묘지를 파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래 삽을 가지고 가 땅을 다 파놓고 넓은 묘석에 앉아 담배 한 대에 질 나쁘고 쓰기만 한 네덜란드 진 한 모금을 마시려는데, 앞 묘지의 묘비에 길고 괴상한 모습의 다리를 달고, 힘줄로 불거진 맨 팔을 내놓았으며, 깃털 장식이 하나 달린 원뿔 모자를 쓴 고블린이 자기를 빤히 바라보고 앉았는 거 아니냐 말이지. 그래 기겁을 했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고블린이 자기 머리통을 잡아 아래로 꾹 누르니까 몸 전체가 땅 밑으로 쑥 들어가 고블린들의 앞마당으로 떨어져버렸다. 거기서 생고생을 하고, 다음날 눈을 떠보니 자기가 앉았던 넓은 묘석에 누워 서리를 덮은 채 잠을 자다 깬 거였다.
  가브리엘 그럽 씨는 그 길로 삽과 진이 든 병과 기타등등 사소한 물품을 팽개친 채 외지도 도망을 가,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마을로 돌아와 성탄을 축복하며 지내더라는 이야기. 뭐 한 마디로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동화 비슷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수없이 많이 각색되어 갖가지 콘텐츠로 발표가 된 작품이라 누구나 내용을 알고 있을 듯하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각색 과정에 분량을 줄이기 위해 몇 가지 생략한 에피소드는 있을지언정, 아마 숱하게 접한 콘텐츠를 모아 짜깁기하면 원본과 다 맞추어질 수 있을 것. 그리하여 새삼스레 뭐 독후감이라 쓸 거리도 별로 없다. 당신에게 권하지도 않거니와, 나 역시 이럴 줄 알았으면 선택하지도 않았을 듯. 아, 몰라. 이제 디킨스는 정말 안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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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1-07-05 10: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 저도 디킨즈 좋아합니다

Falstaff 2021-07-05 10:24   좋아요 2 | URL
ㅋㅋㅋ 전 변덕이 심해서 좋았다, 싫었다, 다시 좋았다가 미워지고 막 그렇습니다.

유부만두 2021-07-05 10:27   좋아요 1 | URL
팔스타프님, 디킨스에 정드셨어요.

Falstaff 2021-07-05 10:41   좋아요 2 | URL
이거, 미운정 맞죠? ㅠㅠ

유부만두 2021-07-05 12:31   좋아요 3 | URL
고운정 2: 미운정 8 인걸로 해두죠.
(사귄지 오십 년 넘으셨죠?)

Falstaff 2021-07-05 12:52   좋아요 1 | URL
그렇게 하겠습니다. 2:8. ㅋㅋㅋㅋ 사귄 기간은 3급 대외비입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