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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녀의 일기
옥타브 미르보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5년 8월
평점 :
세기말 프랑스를 뒤집어 놓은 사건 가운데 하나가 향후 백 년 동안 지구상 모든 지식인의 양심과 행동의 모범으로 인용되는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여러 지식인이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 편에 서서 시대를 타고 들불처럼 번지는 반유대주의를 극복하고 그의 무죄를 주장해 결국은 해피엔드로 마감을 했다. 이때 가장 눈에 띄는 행동하는 지식인 상像으로 흔히 세 명, 에밀 졸라, 아나톨 프랑스, 그리고 옥타브 미르보를 꼽는다. 그래서 비록 작품은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옥타브 미르보라는 이름 하나는 굳세게 기억하고 있었던 터.
일은 이렇게 생긴다. 엉뚱하게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의 <저 아래>를 구입하기 위하여 기웃거리다가, 책읽기를 주제로 강의하는 유명 서평가, 평론가, 교육자, 노문학자께서 미르보의 책이 번역해 나와 있으며, 자신의 중요한 직업인 유료 강의에 프랑스 작품 가운데 여성 주인공의 운명을 다룬 작품들을 모아 강의를 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까지 읽게 된다. 책 좀 읽는다 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인사가, 돈 받고 하는 강의 대상 가운데 하나로 꼽은 작품을, 감히 돈 내고 강의 들을 생각은 아니더라도 어찌 한 번 읽어볼 생각이 나지 않겠느냐 하는 것. 그렇겠지? 그렇다니까. 그래 나도 그이의 짧은 소개 글을 읽고 생전 처음으로 한 권을 골랐으니 이게 바로 <어느 하녀의 일기>가 되겠다. 내, 다시는 그이의 쪽글을 읽고 책 사나 봐라.
그런데, 이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솔직한 느낌을 이야기하자면, 그 선생께서는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거 같다, 는 거.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그 양반이 이 책을 안 읽었다, 가 아니라, 안 읽어본 거 같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분명한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요새 법적으로 호소하는 일이 많아 함부로 입 털었다가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다. 석교도 여러 번 노크한 다음에 워킹 크로스 해야 하는 시대니까 구차하게 말을 끌더라도 용서 또는 양해 바란다.
나는 특히 장편 소설일 경우 등장인물의 가족, 친구, 친척, 연인관계, 이야기가 갈림길에 접어들 분수령이다 싶은 부분은 메모하면서 읽는다. 모두 17 챕터, 520쪽 분량의 장편 <어느 하녀의 일기>는 1장을 읽고 메모 노트 덮었다. 메모까지 하며 읽을 필요는 없다, 그만큼 정성을 들일 필요가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이의 다른 작품도 여럿 있다. 그것들도 다 이 책과 같은 수준이라고는 주장할 수 없으니 만일 번역되어 나온다면 적어도 한 편 정도는 더 읽고 판단을 하리라.
프랑스 북부의 작은 항구 오디에른에 어부 부부가 딸, 아들, 딸, 2녀 1남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소설을 만들기 위해 가난하지만 행복한 어부 가족에게 시련이 닥쳐 딸이 한 열서너 살 되었을까 했을 때, 아버지가 고기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 며칠 후에 익사체로 떠오른다. 이후 절망한 어머니가 의지한 것은 알코올. 한없이 술을 마시고, 술에 취했다 하면 자식들 가운데 특히 제일 어려서 힘도 없는 막내 셀레스틴을 두드려 패는 걸 멈추지 않았고, 지긋지긋한 살림살이도 하루 이틀이지 언니는 그길로 대강 남자 하나를 꼬드겨 대처로 나가 아마 매춘부가 되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오빠는 무턱대고 해군에 자원해 중국에 있거나 아니면 아프리카 근해에 빠져 죽었을 거라고도. 어린 셀레스틴은 주민들이 수녀들이 운영하는 보육원에 보내 그곳에서 읽기와 쓰기, 셈법, 청소, 바느질 등의 기본 자질을 배우고 출원과 동시에 하녀생활을 시작한다. 셀레스틴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셀레스틴이 최근 2년 동안만 따져서 열두 번째 일터로 선택한 곳이 노르망디 지방의 메닐-루아라고 하는 작은 시골 마을. 하녀로 일할 곳은 백만 프랑의 재산을 보유했으나 구두쇠로 이름이 드높은 알부자 라부르 씨 댁으로 저택의 이름을 르 프리외레라고 한다. 작품은 하녀로 일하기 위해 노르망디의 조그만 시골 동네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때가 9월 중순. 일기는 다음 해 7월 말까지 모두 열일곱 편이다. 셀레스틴은 그동안 세계의 수도 파리에서 하녀생활을 했을 뿐더러 몸매도 훌륭하고, 세기말 작품의 주인공답게 얼굴은 어여쁘고, 험한 하녀 생활을 해도 주로 식사 시중이나 안주인 몸종을 했기 때문에 손도 고운, 갈색 머리카락에 그거 있잖은가, 뽀얀 피부를 과시해, 시골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주민들 입초리 마를 새가 없게 만든다.
그래 작은 동네에서 무슨 로맨스가 벌어지기도 하고 사건도 생기고 당연히 주인과 주민들 간의 갈등도 생기지만, 이에 못지않게 작품에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당시 부르주아, 귀족들의 허위에 찬 생활양식이다. 귀족, 부르주아의 도덕적 방탕과 물질주의, 어리석음 기타 등등을 나열하는데 오히려 더 열중하는 바람에, 미르보는 작은 마을 메닐-루아에서 벌어지는 엽기적인 소녀 강간 살인 사건과 주인공이 하녀 생활을 하는 르 프리외레에서 생긴 절도 사건을 긴장 없이, 전혀 긴장을 느끼게 하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에피소드 정도로만 읽히게 만들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스토리 라인이 셀레스틴이 다년간 경험했던 주인집들에서 발생했던 에피소드에 비해 분량도 적고, 심각하지도 않아서, 혹시 이게 전작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역자 및/또는 출판사 편집인에 의하여 축약된 결과물이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었다. 아니겠지. 믿고 살아야 건강에도 좋으니까 아니라고 믿겠다.
그러면 결과는 당연한 것. 세기말의 모든 프랑스 부르주아와 귀족들은 멍청이, 부도덕한 자, 사치와 방탕, 혼외정사에 몰두하는 백치이며, 하인과 하녀들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지배당하거나 적어도 조정당하면서 살고, 모든 부조리의 원흉이라는 거. 하층 계급 역시 부도덕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게 다 먹고살고자 하는 몸부림이란다. 훤하게 그림이 그려지니? 그렇다. 맞다. 그래도 다행인 건 빈자, 약자가 선, 부자는 악이라는 이분법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
이 책을 강의 목록에 포함시키겠다는 명사분이 읽으면 대단히 기분 안 좋을 독후감이지만 그렇다고 감상을 솔직하게 쓰지 않을 수 없다. 읽지 말라고 비추를 때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권하지는 못할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