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자 - 연인번역희곡총서 1
브라니슬라브 누쉬치 지음, 김상환 옮김 / 연극과인간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864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난 브라니슬라브 누쉬치는 극작가, 풍자작가, 소설가, 수필가, 그리고 현대 세르비아어의 수사학자 등, 하여튼 펜으로 할 수 있는 건 다트를 향해 펜을 던지는 일 빼놓고 뭐든지 잘 해서, 세르비아의 고골로 불린다고 한다. 누쉬치는 1887년에 이 작품 <수상한 자>를 완성했지만 세르비아 왕조의 부패와 무능한 공무원들을 사정없이 풍자하는 내용이라 실제로 공연을 하기까지는 35년이란 세월이 더 필요했다.
  웃기는 건, 이 사이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전쟁의 화마가 1915년 드디어 세르비아에까지 튀어, 누쉬치는 자신의 원고 가운데 아끼는 작품들을 친한 이에게 맡겨두고, <수상한 자>는 월세 살던 알바니아 사람의 집에 그냥 ‘버리고’ 피난을 떠난다. 그러나 맡겨둔 작품들은 가택수색의 와중에 몽땅 불태워지고, 팽개쳐버린 <수상한 자>만 알바니아 사람의 집에 덩그러니 남아 있더라는 것.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출판사 ‘연극과인간’에서 나온 시리즈 연인번역희곡총서 시리즈 안에는 그래도 다행히 읽어본 작품도 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가 루이 14세 시절의 극작가 몰리에르를 빗대 소비에트 정부를 풍자했다는 <위선자들의 밀교>. 이 작품을 비롯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흔쾌하게 선택할 예정인 게오르크 카이저가 쓴 <메두사의 뗏목>, 류보미르 씨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이 들어있어 기대를 품게 만든다.

 

  연인번역희곡총서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나온 <수상한 자>는 전형적인 희극이다. 연출에 따라 얼마든지 슬랩스틱 코미디로도 만들 수 있고, 스탠딩 코미디로도 가능할 것 같다. 읽어보면 어디서 한 번 본 듯한 기시감을 느낄 수 있는데, 우리나라 방송 희극 대본가나 연출가 가운데 이 작품을 슬쩍 차용한 적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야 우리나라가 콘텐츠 선진국이지 20세기 후반만 해도 소위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건 그까짓 지적재산권 따위는 개나 줘라, 하고 노골적으로 일본의 유사 방송을 베껴오기 일쑤였으니, 당시만 해도 거의 금단의 영역이었던 공산주의 동유럽 극작가가 쓴 작품의 일부를 가져와 변주를 거쳐 선보이는 정도는 양심의 가책 따위조차 느끼지 않았을 듯하다.
  * 말이 나와 하는 얘긴데, 예능 프로그램은 무슨 “예능”이냐. 그냥 오락 방송, 오락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될 것을 ‘오락’이란 말을 쓰기 어째 어감이 좋지 않은 듯하니 예능이라고 하는 거 아닌가. 세월이 가면 갈수록 언어 인플레이션이 보통 아니다. 난 이런 게 별로 좋지 않다.

 

  19세기 말의 세르비아에 ‘예로띠예 빤띠치’라는 이름의 우체국장이 살았다. 이이가 참으로 자랑할 만한 취미를 가졌으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심심하기만 하면 우체국에 쇄도하는 편지를 개봉해 읽어보는 것. 원래 다른 사람들 훔쳐보는 게 재미나는 일이라 한 번 맛을 들인 예로띠예는 점점 간이 커져 편지의 발신, 수신인을 가리지 않게 되고, 그게 사달이 나 드디어 징계해고를 당하고 만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시라. 명색이 주인공, 아직 연극은 막도 올라가지 않았다. 이후 옛 말로 ‘사바사바’에 관해 훌륭한 재질을 타고 나서, 이번엔 엉뚱하게도 경찰서장의 자리에 오른다. 덩치만 무지하게 크지 겁이 엄청나게 많아 자신이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를 상정해놓고 제일 먼저 자신의 안위부터 따진 다음에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며, 병력의 배치나 작전 수행, 범인 취조 등 하여튼 뇌 세포의 활발한 운동을 전제로 하는 어떤 일도 자신의 전문적인 부하들의 입을 빌리려는 경향이 있다. 나이 들어 낙하산 타고 떨어진 인간들의 공통점이기도 해서, 우리나라 공기업에도 이런 인간들 숱하게 깔려있으니 짐작을 하실 수 있을 터이다.
  예로띠예는 아내 안자와의 사이에 외동딸 마리짜를 두었는데, 도무지 딸에 대한 애정이 없는지 마리짜가 열아홉 살 때까지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가, 열아홉부터 스물하나 까지는 부모더러 결혼 상대를 찾아달라고 요구했지만 어떻게 된 엄마, 아빠인지 상대를 찾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제 부모에게 자신이 직접 남편감을 찾아내겠다고 머리 조아리며 말씀드리고, 약국의 약사 보조를 하고 있는, 참, 민망해서 이거, 유럽 사람들 이름이 이상하긴 한 걸 감안해 들으시면, ‘조까’라는 이름의 청년을 찾아낸 거였다.
  그런데 예로띠예 씨도 참. 이 경찰서장이, 그동안 뭐했는지 여태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경찰서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비차’한테 꽂혀서 딸을 주기로 결심을 한 거였다. 왜냐하면, 비차가 인물 없고, 배운 것도 없고, 교양까지 없지만 특별하고도 탁월한 능력이 하나 있으니 이 군郡 지역의 상인, 농민, 시민들의 뒤통수를 후려쳐 현금을 알겨내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나이 서른 조금 넘어 벌써 직장은 취미생활로 다니고 있는 중일 정도면 말 다 한 거지 뭐. 요즘 같으면 뭐라 그러더라, 파이어 족? 근데 문제는, 마리짜가 비차라는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하는 터, 이게 희극에서 제대로 되겠느냐는 말이지.
  마리짜가 뇌를 짜 일단 조까를 자기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유럽 호텔에 방을 잡게 했다. 때는 19세기 말이라 마리짜가 호텔에서 조까를 한 번 만나기만 해도 이는 빼도 박도 못 하고 동네 전체에 소문이 나 결혼하지 않고는 견뎌낼 수가 없었기 때문.
  그러나 생각한대로 다 되면 연극이 아니지. 때를 맞춰 중앙정부에서 일급비밀의 암호 전보가 와, 이 지역에 혁명적이고 반정부적인 수상한 자가 침투했으니 즉각 잡아 대령하라는 지령이 떨어진다. 정부도 이 수상한 자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젊은이라는 것만 확실하단다. 그럼 독자들은 순식간에 눈치 챌 수 있는 것. 마침 유럽 호텔에 묵고 있으면서 마리짜의 지시대로 방 밖으로 전혀 나오지 않는 조까가 수상한 자로 오인되어 체포당할 것임을. 그리고 진짜로 독자의 짐작대로 일이 벌어진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수상한 자의 정체에 대하여 궁금해 하고 있는 터. 원래 혁명분자들은 몸 안에 자폭 장치를 달고 다니는 법이라서 초동 취조는 서기관들에게 맡기고 잠시 출타를 한 겁쟁이 예로띠예 서장이 시간이 지나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자 드디어 경찰서 내부로 들어와 시민 가운데 뽑힌 증인 두 명과 모든 서기관, 서기 보조 들이 보고 있는 가장 큰 사무실에서 앞으로 자기 사위가 될 청년에게 이렇게 묻고 대답한다.

 

  이름이 뭔가?
  조까.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21-10-12 09: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름 탈락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10-12 09: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너무 재미있겠는데요. 조까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10-12 10:12   좋아요 3 | URL
ㅋㅋㅋ 이거 20세기 초 희극이잖아요. 악당들은 다 물 먹고 사랑은 언제나 맺어지지 않겠습니까. ㅋㅋㅋㅋㅋ

- 2021-10-12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름이 뭔가?
조까.
탈락!!!

Falstaff 2021-10-12 10:13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그죠. 어감이
경찰서장 예로띠예 씨가 유대인이 아니어서 더 확실하게 탈락이었을 겁니다. ㅋㅋ

- 2021-10-12 16:03   좋아요 2 | URL
요즘 퐐스타프님 중간에서 끊기 실력이 아주 물이 오르셨어요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10-12 16:09   좋아요 2 | URL
ㅋㅋㅋ 이걸 제가 좋아해서 나날이 연구 발전시키는 중입니다!!!

stella.K 2021-10-12 11: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바사바. 친근합니다. ㅎ 글 제목도 좋고.이거 사바사바아닙니다.ㅋㅋ

Falstaff 2021-10-12 11:10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알라딘에서 사바사바 할 일이 있나요 뭐. ㅋㅋㅋㅋ

scott 2021-10-12 12: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반전 ㅋ zocca 인것 같습니다 세르비아 에서 흔한 이름인뎅 ㅎ ㅎ

Falstaff 2021-10-12 13:12   좋아요 4 | URL
아, 세르비아엔 조 서방이 많군요! 오호~ ㅋㅋ
 
호모 파버 을유세계문학전집 113
막스 프리슈 지음, 정미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막스 프리쉬의 소위 3대 소설 <슈틸러>, <호모 파버>, <내 이름은 간텐바인>을 완독했다. 아시다시피 프리쉬의 관심은 자아의 정체성, 개별성, 책임감, 도덕성, 정치적 책무 등에 있으며, 다양한 아이러니의 사용을 작품의 특징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 책에서도 다양한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이것들을 찾아내 즐기는 건 다 독자들의 몫이겠다.


  호모 파버. Homo Faber. 도구적 인간. 건조한 성격의 주인공 발터 파버를 비아냥거리기 위해 한때 그의 애인이었던 한나 란츠베르크가 지어준 별명이기도 하다. 1인칭 화자인 발터 파버는 작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전형적인, 거의 인간계를 벗어난 수준으로 성격이 고착되어버린 엔지니어다. 유네스코에서 근무하며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은 세계의 수도인 뉴욕. 자기 수준으로는 비싼 아파트에서 살면서 스물여섯 살 먹은 유부녀 아이비로부터 결혼하자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발터는 비혼주의자.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1933년부터 35년까지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의 조교로 재직할 당시, 3백 프랑켄의 월급을 받았는데, 문학을 공부하던 한나 란츠베르크라는 반half 유대인과 연애를 했었다. 1930년대의 반유대주의는 독일에서만 창궐했던 지역적 질환이 아니어서, 스위스도 유대인 여권을 무효화시키려 하자(알베르 코엔, <주군의 여인> 참조), 발터는 한나에게 스위스 국적을 유지시키려는 목적도 겸해 아직 가정을 꾸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입이지만, 결혼을 제의한다. 여기에 더해 나름 조심한다고 했건만 한나가 그만 덜컥 임신을 해버렸던 것. 그러면 한나가 잘 됐다 싶어 얼른 결혼할 줄 알았지? 천만의 말씀. 한나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상당한 동정을 수반한 청혼이라고 이해해서 결혼 직전에 취소해버린다. 발터는 한나가 의사 친구인 요하임 헹케를 찾아가 중절수술을 받겠다는 말을 듣고 국외로 떠나버린다.

  그리고 발터는 아무것도 모르는 20여 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극적인 기계인간으로 성격이 굳어져버렸으며, 한나는 딸 엘리자베트를 낳고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서 살다가 동베를린을 거쳐 지금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박물관 일을 하고 있다. 한나는 참전하자마자 포로수용소에서 전쟁기간을 보내고 돌아온 의사 요하임 헹케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공산주의자인 파이퍼 씨와 두 번째 결혼을 하지만 파이퍼 씨가, 어제 무효라고 한 것을 오늘 유효하다고 공표하는 인간, 즉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기회주의자일 뿐임을 알고는 1953년 6월에 다시 이혼해 딸 엘리자베트 파이퍼와 단둘이서 산다.  

  발터와 한나가 결혼하려다가 한나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스위스 안에서의 에피소드는 막스 프리쉬가 젊어서 겪은 경험을 그대로 썼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후 주로 개발도상국의 댐과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터빈 조립 공사를 담당하느라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세상의 모든 사물을 벡터 계산의 가능 범위로 해석하게 된 발터 파버에게, 1957년의 어느 날, 지금은 존 F 케네디 공항으로 불리는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한 DC-4, 슈퍼 컨스텔레이션 기종에 탑승해 남아메리카로 향하던 중, 멕시코만 상층에서 왼쪽 날개의 엔진이 정지 (한 개 정도야 그럴 수 있지), 탑승객 전원이 구명조끼를 착용한 채 가벼운 불안에 떨다가, 곧이어 또 하나의 엔진까지 멈춰버려(지극히 낮은 가능성), 모두 네 개의 엔진 가운데 절반만 가지고 더 이상의 비행은 불가능하다는 실력 좋고 경험 많은 기장의 판단으로, 멕시코 고원 타마울리파스 황무지에 성공적으로 불시착하는 일이(거의 불가능한 확률로!) 벌어진다. 황무지에 빠져 죽을 물도 없으면서 여전히 구명조끼를 입은 채.

  이 장면을 읽으면서 마치 그리스 고전이 생각날 거 같았는데, 그게 어떤 작품일지, 뭐와 비슷한지 책을 읽고 열여덟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궁리중이다.

  이렇게 세상에서는 가끔 거의 불가능한 확률로 한 인생을 좌우하게 될 ‘우연’이 생기기도 한다. 발터 파버가 전혀 믿지 않는 낮은 확률임에도. 발터는 멕시코의 황무지 타마울리파스에서 여든다섯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 옆 좌석에 앉았던 뒤셀도르프 출신의 못마땅한 청년 헤르베르트와 팬티만 입고 웃통을 벌겋게 벗은 상태로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비행기 뒷날개 그늘을 쫓아다니며 자리를 잡고 앉아, 대화를 극도로 즐기면서 시간은 효과적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체스 게임에 몰두하면서, 헤르베르트의 이름이 헹케이며, 과테말라 플랜테이션에서 두 달 전에 연락이 두절되어버린 유일한 백인인 친형 요하임 헹케를 만나러 간다는 얘기를 4일 만에, 요하임이 한나와 이혼했다는 얘기도 얻어듣고, 즉각 계획을 변경해 자신도 과테말라의 조그만 간이역, 세상의 끝이며 최소한 문명의 끝인 팔렝케로 함께 가기로 결정을 해버린다. 이미 철사줄로 목을 매 죽어버려 피가 통하지 않은 얼굴이 퍼렇게 변색된 채 퉁퉁 부어버린 요하임 헹케를 찾아, 먼저 사진 촬영을 하고, 매장을 해주기 위해. 물론 그땐 몰랐지만.

  그렇지? 이 정도니 저 세상의 오지, 황무지 타마울리파스에서의 불시착을 그리스 고전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운 거 아냐?


  다른 우연 하나 더.

  과테말라에서 친구를 장사지내고 뉴욕으로 돌아와 아파트에 오르니 기다리고 있는 워싱턴 공무원의 아내 아이비. 스물여섯 살 아이비는 쉰 살 넘은 발터하고 일주일을 지낼 수 있다는 꿈에 푹 젖어 행복해 미칠 지경인 반면, 타마울리파스에서 아이비한테 헤어지자는 편지를 보낸 바 있는 발터는 일주일이 끔찍하기만 해, 새롭게 비행공포증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크루즈 선을 예약하고 다음날 배에 올라버린다. 아이비는 이걸로 책에서 삭제된다. 인생이 다 그렇다. 사는 공부했다고 치자, 아이비야.


  배에 젊은 아가씨, 검은색 카우보이 바지에 붉은색 말총머리를 한 자베트. 장학금으로 예일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이제 유럽으로 가는 중. 장래 희망은 비행기 승무원이며 원래는 엄마한테 곧바로 가려 했으나, 파리에서 로마까지, 남프랑스와 이탈리아 북쪽 지역의 온갖 명승지와 문화재를 구경하면서 히치하이킹으로 갈 예정이란다. 엄마의 승낙을 받아놓았다고. 발터가 자베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는 두 가지. 하나는 절대로 비행기 승무원은 되지 말라는 것. 두 번째는 제발 로마까지 히치하이킹을 하지 말라는 것.

  파리에 도착한 발터. 배에서 자베트가 박물관 이야기를 많이 했고, 자신은 절대 박물관 따위엔 가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 생각나, 루브르를 연이어 관람한다. 혹시 자베트를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그리고 결국 만난다. 자베트는 이틀 연속 발터를 보았던 터. 이들은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발터는 자베트에게 터무니없는 수작도 전혀 부리지 않으면서, 오페라도 같이 보러가고, 이젠 다시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는데, 때마침 회사에선 발터에게 휴가를 부여하는 동시에 미국 출장 가는 부장이 시트로앵을 쓰라 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자베트의 로마까지 히치하이킹을 걱정하던 터라, 어이쿠나 잘 됐다 싶어, 자기 차로 히치하이킹을 하라고 제의해서 둘은 함께 온갖 곳을 다 구경하게 된다.

  크루즈 항해에 이어 파리-로마 여행. 이것도 어디서 본 것 같지? 오뒷세이아? 아이네이스?

  이 여행을 통해 벡터 해석 범위의 발터는 자신의 독자적인 호모 파버 적인 형질을 비록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자베트에게 양보하고 있는 것을, 독자는 발견할 수 있다. 괜찮게 늙은 발터, 스포츠로 몸을 다진 건장한 중년의 욕망을 제거한 부드러움과 친절. 딱 이 수준이다. 스무 살이 조금 넘은 자베트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남성으로서가 아닌 편한 상대로 의지하게 된다.

  그러다가 하루, 발터는 엄마의 이름을 묻고, 발터가 자베트라고 부르는 이 아가씨의 정식 이름이 엘리자베트인 건 벌써 알고 있었지만, 엄마가 한나 파이퍼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적어도 겉으로는 조금도 놀란 시늉을 하지 않은 채, 엄마의 처녀 때 이름이 란츠베르크 아니었느냐고 물으면서, 속으로 재빨리 자베트의 나이 계산을 해보고, 적어도 자기 아이가 아니란 걸 확신한다. 그리하여 이 그리스식 로드무비이기도 한 <호모 파버>는 그리스식 결말을 위해 드디어 에게해를 건너 아테네에 이른다. 이들 앞에는 또 어떤 그리스식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는 미안하지만 직접 확인하시라.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1-10-11 19: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미있을거 같아요. 주인공이 엔지니어라 호모 파버이군요. 소설에서 계속 우연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Falstaff 2021-10-11 19:07   좋아요 4 | URL
호응이 별로 없어서 저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꽤 좋은 작품인데 말입니다.
아마 프리쉬 자체가 대중성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읽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요. 뭐 인생이고 그 양반 팔자지요.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1-10-11 2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리스식이라면 당연히 엘리자베트는 파버의 친딸이고, 아니라고 생각한 파버는 당연히 그녀와 섹스를 하고 아닌가요? ㅎㅎ

Falstaff 2021-10-12 08:52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절대 안 알려드립니다!

그레이스 2021-11-05 1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샀습니다^6^
축하드려요 당선 아니고 선정?

Falstaff 2021-11-05 17:11   좋아요 1 | URL
사셨어요! 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ㅎㅎㅎ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서괭 2021-11-05 16: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님 당선.. 아니 선정 축하드립니다 ㅎㅎ

Falstaff 2021-11-05 17:12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이 책 정말 재미나요. 더 많이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는데 아쉬운 작품입니다. ^^

새파랑 2021-11-05 17: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선정 축하드립니다~!! 진정한 을유 출판사 마니아 이신듯 합니다~!!

Falstaff 2021-11-05 19:32   좋아요 3 | URL
냅. 제가 을유를 좋아했었는데요, 지금은 별롭니다.
예전만큼 책 만드는 데 정성을 쏟는 거 같지 않아서요.
교정교열도 예전과 비교가 되지 않고 뭐 그렇습니다. ㅎㅎㅎ

이하라 2021-11-05 17: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축하드립니다.
11월도 기쁜 일 가득한 달 되세요.^^

Falstaff 2021-11-05 19:33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언제나 조용히 지켜봐주시는 것에 늘 감사드립니다. ^^

초란공 2021-11-05 22: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매달 Falstaff님의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글이 기다려집니다~

Falstaff 2021-11-06 09:47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잘 읽어주시는 분들 덕택입니다. ^^

mini74 2021-11-05 22: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의 박력넘치는 글 재미있게 보고있어요. 선정 축하드랴요 *^^*

Falstaff 2021-11-06 09:49   좋아요 2 | URL
미니님도 축하해요!
아이고, 저야 뭐 그저.... ㅋㅋㅋ

초딩 2021-11-07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
아늑한 가을 일요일 되세요~

Falstaff 2021-11-07 20:2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편히 쉬세요. ^^
 
왼손잡이 여인 범우문고 74
패터 한트케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소설가 지망하는 분은 <왼손잡이 여인>을 읽지 마시라. 당신이 절망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겠는가. 싼 맛에 사서 읽었다가, 세상에 이런 일이, 대박났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1-10-08 16: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소설가지망생은 읽지 말라는 리뷰라니. 저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아니 왜요, 왜 그러는건데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10-08 19:2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다 아시면서.....

청아 2021-10-08 18: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런 유혹이 어디있습니까 저도 찜ㅋㅋㅋㅋ😆👍👍

Falstaff 2021-10-08 19:30   좋아요 1 | URL
아우, 증말 좋더라고요. 전 한 방에 뻑 가버렸습니다!
ㅋㅋㅋㅋ 물론 약 올리는 겁니다. ^^

테레사 2021-10-08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 주문대열에 합류하는 중입니다만..ㅋ

Falstaff 2021-10-08 21:21   좋아요 0 | URL
코드만 맞으시면, 저한테 고맙다고 하실 겁니다. ㅋㅋㅋㅋ
이걸 자뻑이라고 한다네요. ^^

행복한책읽기 2021-10-08 2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휴 낚시밥 지대루 던지시는 폴스타프님. 얄미워요^^

Falstaff 2021-10-09 22:52   좋아요 0 | URL
책값이 싸잖아요. 한 번 속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요, 이 책에 <소망 없는 불행>이 커플링되어 있답니다. 가성비 진짜 갑이예요. ^^

독서괭 2021-10-09 0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세상에 이런 백자평이!! 궁금증 폭발!!

Falstaff 2021-10-09 22:5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오랜만에 제 스타일을 만났습니다!

coolcat329 2021-10-09 06: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폴스타프님
아 너무 궁금하네요. 어떤 코드길래 자뻑의 경지로 이끌었을지요.

Falstaff 2021-10-09 22:53   좋아요 0 | URL
아오, 읽어보셔요! 죽입니다.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10-09 10: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트케 뛰어난 작가 맞는것 같아요
전 페널티킥... 읽고 소름!

전 이 책 있어요
전자책으로 ! 함께 수록된 <소망없는 불행 >만 읽었는데 좋았어요~^^

Falstaff 2021-10-09 22:54   좋아요 1 | URL
저는 한트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가 이번에 대박을 쳐서, 기쁨이 두 배인 거 같습니다. ㅎㅎㅎ 기분 좋아라..... ^^

파이버 2021-10-09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께서 대박이라고 하시니 저두 보관함 속으로 쏙~!

Falstaff 2021-10-09 22:54   좋아요 1 | URL
훌륭한 선택입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1-10-09 1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판매지수 확 올라서 범우에서 어리둥절…. ㅋㅋㅋㅋ

Falstaff 2021-10-09 22:55   좋아요 0 | URL
앗, 많이들 사신 모양이지요?
책만 좋으면 영업은 알아서 독자가 한다니까요, 진립니다, 진리. ㅋㅋㅋㅋ
 
다른 목소리, 다른 방 트루먼 커포티 선집 1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트루먼 커포티 역시 자신이 쓴 첫 번째 장편소설인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은 자신의 유소년 시대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의 초년 팔자를 한 번 보자.
  1923년이 저물어가던 시절, 아출러스 퍼슨스라는 이름의 어느 세일즈맨이 뉴올리언스에 왔다가 크리스마스 베이비를 만들어, 24년 9월에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니 트루먼 스트랙퍼스 퍼슨스라는 이름이었는데, 이때 엄마 릴 매 포크가 글쎄 열일곱 살이었다. 그러니 열여섯 또는 갓 열일곱의 청소년을 건드렸다는 말이다. 지금 같으면 미성년 약취 간음으로 수십 년 동안 콩밥을 먹어야 하는 중죄이거늘 그냥 혼인신고 한 장으로 때웠다. 이런 아빠는 결국 사기죄로 큰 집에 들어가 인생교도의 목적 아래 도를 닦는 시간을 보내야 했고, 어린 아내는 당연히 이혼을 해 유년 트루먼은 엄마의 친척집에서 5년가량 지내야 했단다.
  엄마 릴 매 포크는 쿠바 출신 사업가와 새로 결혼을 했고, 이이의 성이 커포티라 이제 정식으로 트루먼 커포티라는 이름을 단다. 이때 나이 아홉 살.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의 주인공 조엘 해리슨 녹스는 열세 살 사내아이로 목요일에 뉴올리언스를 떠나 금요일에 남부의 파라다이스 채플 고속도로변 모닝스타 카페에 혼자 도착해 하루를 묵었다. 오늘 눈시티에 가야 하지만, 눈시티로 가는 어떤 버스나 기차도 없어서 주 6회 우편물 따위를 전해주는 추레리 터펜타인 컴퍼니 소속, 기사 샘 래드클리프가 몰고 다니는 포드 픽업트럭에 얹혀 타고가려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소설은 시작한다.
  조엘과 함께 외출을 했다가 열병에 걸려 그길로 엄마가 숨을 거두자 친절하고 다정한 엘렌 이모가 조카를 거둔다. 하지만 이모 역시 다섯 명의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키우는 처지고, 가정의 유일한 수입원이 신발가게 점원을 하는 이모부 한 명이라 폰차트레인에서 가까운 더러운 2세대 주택에서 그냥저냥 살고 있었다. 조엘이 아주 어려서 부모가 이혼을 한 터라 이제 초년 팔자 걱정이 한창일 때, 저 멀리 눈시티에서 정기 구독하던 신문을 통해 조엘의 엄마가 세상 등진 것을 알게 된 조엘의 생부가 직접 엘렌 이모에게 편지를 써서, 반드시 학교공부를 시키겠다는 것, 크리스마스 휴가는 엘렌 이모와 함께 지내게 해주겠다는 것 등 전혀 지킬 생각 없는 약속을 남발한 채, 그래도 눈시티까지 여행비용에 쓰라고 서명한 수표를 동봉한 거였다. 편지를 받은 엘렌 이모가 한 숨 돌린 건 당연했겠지.
  근데 조엘 해리슨 녹스를 데려가기 위해 그를 부른 아빠의 이름은 에드워드 R. 샌섬. 음. 녹스는 엄마가 재혼한 남자의 성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주민등록에 올라있는 이름이 녹스라서 조엘은 책이 끝날 때까지 녹스라고 불린다. 이쯤 되면 조엘 녹스와 트루먼 커포티의 초년 팔자가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인지 신경 안 쓰고 그냥 읽어나갔더라도 마지막 문단 쯤 오면 저절로 성장소설이란 걸 알게 된다.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쓴 대로 읽으면 제일 먼저 탁, 감잡히는 게, 미국 남부의 고딕소설이라는 것. 누가 생각나느냐 하면 당연히 카슨 매컬러스. 그이의 전매특허인 거친 여자아이 아이다벨이 등장하고, 눈시티로 태워주는 터펜타인 컴퍼니 소속 운전수 샘 래드클리프를 비롯해 다수의 남부 사람들은 거대한 체격에 털이 숭숭난 마초들이며, 식음료 판매점인 ‘R.V. 레이시의 프린시스 플레이스’ 사장 로버타 V. 레이시 양은 거구에다 입 주변에 난 사마귀 근처의 빳빳한 털을 쓰다듬는 취미를 즐기고 있으며, 조엘의 의붓어머니, 어쨌건 간에 호적상 계모인 에이미 스컬리는 분명히 샌섬 씨와 혼인신고를 했건만 여전히 에이미 양이라고 불리는 건 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에이미의 사촌인 랜돌프 스컬리는 천식발작을 가끔 일으키는 허약체질이다.
  이 집안의 마차꾼이면서 젊은 시절엔 거의 집사 일을 했던 지저스 피버 노인은 아흔 살이 넘은 건 확실하고, 아마 백 살도 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게 눈시티 사람들이 의견을 같이 하는 바인데, 이 흑인 노인이 언제 죽을지 몰라 노후를 조금이나마 편히 보내게 해주려고 세인트루이스에서 살던 소녀 미주리를 불러온 것도 벌써 12년 전이다. 에이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주’라고 부르는 미주리는 열네 살 때 케그 브라운이라는 불한당 깡패 같은 작자에게 몸을 망친 것도 모자라 면도칼로 목을 주욱 그었음에도 흉터만 남기고 아직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는 우아한 얼굴과 몸매의 20대 초반 흑인 여성이다.
  이것들 말고도 이 소설을 남부 고딕으로 규정할 요소를 무지하게 많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고딕소설이다, 맞지?

 

  고딕소설, 카슨 매컬러스를 이야기하면 작품 속의 동성애 코드도 꼭 거론한다. 트루먼 커포티의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저 위에 작가의 초년팔자 얘기할 때 커포티라는 이름을 준 쿠바 출신의 계부를 언급한 적 있다. 이 책에서 쿠바가 한 번 나온다.
  스페인에 그림공부를 하러 간 에이미 양의 사촌 랜돌프는 스페인 박물관에서 대가의 그림만 죽자사자 모사하고 있다가 미모의 돌로레스를 만난다. 당연히 연애 시작. 이들은 마음먹고 쿠바로 가서 열대와 해변을 만끽하는데, 거기서 멕시코 출신 권투선수 페페 알바레스와 안면을 튼다. 근데 가만 보니까, 돌로레스, 이 촌스런 이름의 아가씨가 페페 알바레스, 건장하고 힘세고, 돈도 잘 벌고, 인기도 많은데다가 생기기도 잘 생긴 권투선수하고 연애를 하는 거였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나. 페페 알바레스하고 맞장을 뜨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정도의 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불쌍한 사촌 랜돌프. 그러나 안심하시라. 랜돌프의 질투는 돌로레스를 향한 것이 아니라 페페 알바레스를 향해 있던 거니까. 이렇게 드러나는 동성애적 취향. 물론 동성애에 대한 관심은 조엘의 뉴올리언스 시절에 친구들과의 탐정놀이에서 언뜻 내비치기도 하지만. 이 와중에 여기까지 와서야 알게 되는 거. 권투선수 페페 알바레스의 매니저가 바로 조엘 녹스의 친아빠 에드워드 샌섬.
  근데 이 네 명 사이에서 어떻게 계모 에이미가 등장할까. 랜돌프, 돌로레스, 페페, 에드워드가 난마처럼 엉겨버린 가운데 돈 많고 철없는 젊은이들이 항용 그렇듯 (뉴올리언스로 자리를 옮겨) 방탕한 생활을 영유하다가 하루는 페페가 술을 잔뜩 먹고 숙소에 들어와 온갖 기물을 다 때려 부수고 불쌍한 랜돌프의 코뼈를 부러뜨린 다음 쫓아내버린다. 열을 받은 랜돌프는 위험한 장난감 권총을 들고 이들에게 다시 접근해 술을 마셔 어질어질한 상태에서 페페인줄 알고 총을 두 방 쐈는데, 에그머니, 에드워드가 맞아버렸다. 자기 혼자는 문제해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베이비 보이 랜돌프는 급하게 눈시티 스컬리시 랜딩으로 전보를 쳐 사촌 누이 에이미와 그 집에서 오래 집사생활을 하는 지저스 피버 노인을 부른다.
  한 눈에 상황을 정리한 에이미. 이이는 지극정성으로 에드워드 샌섬 씨를 간호하는 한편 즉각 돌로레스와 페페를 떨쳐버리고 목사를 초빙해 샌섬 씨와 혼인을 해버린다. 이어 새신랑과 함께 스컬리시 랜딩으로 돌아와 새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이후 몇 년이 지나 샌섬의 전 아내가 죽어 이제 천애고아가 된 조엘의 팔자를 신문에서 읽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것.

 

  성장소설이라니까 조엘이 눈시티에 올 때 시작해 떠나면서 작품이 끝나나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소년기가 어떤 기점으로 끝난다는 것을 모르고 어영부영 살다보니 청소년이 되고, 성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늙어가는 것을 느끼지만 한 소설 작품의 주인공이 되려면 적어도 자신의 소년시절이 이것으로 끝났다는 자각이 있어야 하는가보다. 조엘도 마찬가지. 자기가 그런 마음이 들 때를 딱 짚어서 땅 위에다 줄을 긋고 이렇게 말하면서 끝난다. “여기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아생트 제안들 7
앙리 보스코 지음, 최애리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26번 시내버스 타면 대방동 돈 보스코 회관 앞을 지난다. 돈 보스코는 19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사제로, 뒷골목 빈민가 청소년의 교육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죽은 지 46년 만에 시성諡聖되었다. 이 돈 보스코의 친척 가운데 한 명이 프랑스 사람으로 공부 잘 해 이탈리아어 교수를 지내면서 소설을 쓴 앙리 보스코다.
  앙리 보스코는 1937년에 <반바지 당나귀>를 열린 결말을 갖는 소설로 쓰고,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래 곧이어 후속작 <이아생트>를 시작해 3년 후인 1940년 발표한다. 그래도 미진했던지 1946년에 3부작을 완성하는 <이아생트의 정원>을 출간한다. 이래서 <이아생트>를 제대로 감상하고 싶으면 <반바지 당나귀>의 내용을 미리 알아두어야 편하다.

 

  <반바지 당나귀>의 장면은 저 산골 마을 오스피탈레에서도 몇 시간 산을 오르면 마법사 시프리앵이 만들어 살고 있는 멋진 정원과 과수원이다. 마법사는 당나귀에 반바지를 입혀 오직 당나귀만 마을로 보내 물건을 사 오고, 농사지은 것들을 내다 팔기도 한다. 오래전에 읽은 작품이라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아서, 마을의 성령에 바쳐진 초라한 성당, 막달라 경당에서 복사로 있었던가, 심부름 다녔나, 아니면 그냥 동네 소년일 뿐이었나 까무룩한데, 소년 콩스탕탱 글로리오를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고자 했던 마법사 시프리앵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다. 좌절한 시프리앵은 콩스탕탱의 집에 얹혀살던 소녀 이아생트를 유괴해 사라지고 만다. 이게 끝이다. 그러나 다는 아니다. 작품은 시프리앵이 가꾸던 정원과, 여우를 제외한 모든 짐승과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시프리앵의 능력, 사과나무 가지에 둥지를 틀고 사는 뱀의 출현 등 많은 상징이 등장하는 환상 풍의 소설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렇다고 <반바지 당나귀> 3년 후에 출간한 <이아생트>를 전작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서사 위주의 책이라 생각하면 <이아생트>는 못 읽는다. 3백 쪽 분량의 장편 소설이지만 읽는 속도가 여간해서 붙지 않는다. 재미없는 책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107쪽에 와서야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는 화자 ‘나’의 멀고 먼 기억 속에서 자신을 키워준 시골의 순박한 할아버지와 지혜로운 할머니를 떠올리고, 집 앞에 무표정한 눈을 하고 다닌 이아생트라는 어린아이가, 어느날 떠났고,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하면서, 처음으로 ‘이아생트Hyacinthe’를 소개한다.
  그러면 처음부터 107쪽에 이르기까지는? ‘나’가 도착한 곳은 성 가브리엘 고원이다. 완전히 적막한 고장. 황량한 벌판. 언뜻 미셸 트루니에의 <마왕>에서 거구의 아벨 티포주가 소년들을 납치하기 위해 하늘같은 검은 말을 타고 배회하던 동프로이센의 황야가 떠올랐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황량한 고원에 성모에게 성령으로 잉태했음을 알린 대천사 성 가브리엘의 이름을 붙였을까. 내 의견으로는 백 쪽이 넘어야 등장할 이아생트와 콩스탕탱이 마법사 시프리앵이 만들고자 한 낙원, 에덴으로의 실바칸에서 도망한 곳이 이곳, 황량한 벌판이라, 작가가 아담-하와-뱀의 완전히 반대 위치에 있는 황야의 예수-성모-가브리엘을 선택했으리라는 것이다.

 

  성 가브리엘 고원은 16 평방킬로미터(484만평)의 광활한 황야로 고원의 북동쪽 가장자리엔 습지가 펼쳐져 있다. 이 넓은 대지의 사막 속에 단 두 채의 집이 있을 뿐. 이 가운데 라 코망드리, 기사관騎士館, 기사knights들의 숙소라 이름 지은 집에 ‘나’가 세 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이 몽롱한 몽상의 작품을 시작한다.
  그러면 고원의 다른 한 집은 어떨까. 그 집은 규모가 라 코망드리와 비교해 작아서 마치 소작 농가처럼 보이는데, 이름을 라 주네스트, 금작화라고 불렀다. 야트막한 담벼락과 경사진 지붕만 땅에서 솟아나 있는 집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근 십 미터가량 되는 암벽 위에 지은 집이다. 그것보다 ‘나’와 독자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등불이 켜져 있다는 점이다. 근 5백만 평의 거친 황야의 밤에 오직 하나의 지표가 될 불빛. 이것을 볼 때마다 ‘나’는 마치 인류의 마지막 영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집주인과 늙은 하인 내외가 워낙 비사교적이라 ‘나’의 거의 유일하게 남은 취미인 산책 중에도 라 주네스트 쪽으로는 발걸음을 삼갈 정도.
  생각해보시라. 넓고 넓은 거친 황야. 조명이 없어 무한히 보이는 별의 홍수와 돋보이는 별자리들. 이 어둠의 대해에 단 하나, 구리 등잔에 석유 등불이 이 광활한 벌판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지침이 된다는 것. 기어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 누구의 시선을 끌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감안 한다는 것. 라 주네스트. 그들을 그토록 오래 견디게 한 것은 한 인간의 고통뿐이었으리라는 ‘나’의 사색, 침잠, 상상, 이런 것들을 다 합쳐 몽상은 점점 깊어만 간다.

 

  그렇다. 이 소설의 특징을 한마디로 하자면 “몽상”이다. 작품의 앞자리에 삼분의 일 분량을 성 가브리엘 고원과, 밤이 새도록 등불을 밝히는 라 주네스트와, 라 주네스트 옆에서부터 펼쳐지는 늪지대를 대상으로 아름답지만 장황하게 펼쳐지는 몽상의 파노라마를 견딜 수 있는 독자는 행복할 것이고, 견디지 못하는 독자는 책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도 앞으로 이 몽환은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책을 읽으면서 단 한 순간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적어도 문장을 다시 읽어야 하는 고난을 계속할 수 있는 끈질긴 독자라면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약간의 잘난 척이지만, 난 견뎠고, 즐겼고, 만족했다. 대신 읽는 시간은 다른 작품에 비해 배는 들었던 거 같다.
  읽는 내내 생각났던 보스코와 동시대 프랑스의 미학자, 가스통 바슐라르. 그는 모네의 수련 그림이나 칠리다의 비구상 조형물을 보면서 독자가 질릴 때까지 미학적 몽상을 풀어내는 사람이다. 이런 미학적 몽상을 각오하지 않는 독자라면 책을 열고 백 쪽에 이르기 전에 덮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라.
  크리스마스, 12월 25일 자정이 되기 조금 전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황야에서 ‘나’의 집 현관을 두드리며 (전부 해 310쪽의 작품에서) 140쪽에 등장하는 이아생트. 앞뒤 다 잘라버리고 얘기하자면, <반바지 당나귀>에서 이아생트를 데리고 사라진 마법사 시프리앵은 일단의 집시 무리를 규합해 6월 24일 성 요한 축일과 성탄일을 맞추어 성 가브리엘 고원의 늪지에서 이를 기념하여 회합을 갖는다. 올해는 하필 ‘나’가 라 코망드리에서 살고 있을 때 이아생트가 마법사의 손길에서 벗어나 무리로부터 탈출을 감행한 것.
  그리고 밝혀지는 등불의 집 라 주네스트 집주인의 정체. 바로 콩스탕탱 글로리오, 오래전 시프리앵이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바로 그 아이였던 것. 이렇게 황량하기 그지없는 성 가브리엘 고원에서 다시 만난 옛 시절의 인물들. 만남이 필연적으로 마련해두는 이별. 화자 ‘나’는 이의 해소를 위하여 걸어서 여섯 날이 걸리는 먼 옛 시절의 장소 오스피탈레 마을, 막달라 경당, 그리고 잊어버린 낙원일 뻔했던 실바칸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독자들은 주의하시라. 쉽지 않은 소설이다. 천천히, 느린 속도로 읽으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 그리고 싶은 풍경, 꿈꾸고 있는 몽상을 함께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살다 보면 내 돈 내고 산 책을 읽으며 스스로 어려운 과정을 사서 거칠 때가 있는데, 이 책을 읽는 일이 그렇다. 그러나 다 읽기만 한다면 절대 후회하는 일은 없으리라. 그러기 위하여 다시 한번 말씀드리오니, 아무쪼록 <반바지 당나귀>를 먼저 읽으시옵기를.


 

 내가 읽은 책.

 

요즘 민음사 세계문학에서 팔고 있는 책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1-10-07 08: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눈길을 확 잡아끄는데요?

Falstaff 2021-10-07 09:03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저 유일한 불빛에 관해 무지하게 장황한 미학이 펼쳐진답니다.

얄라알라 2021-10-07 1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버스타고 어디를 지나든 그냥 눈에 나무나 차만 보이는 사람도 있는데 Falstaff님의 시선에서는 돈 보스코라는 먼나라 먼 시대인물의 친척까지 들어오는 군요. 이야!!! 같은 대방동 버스를 타도 말이죠^^

문학 읽는데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Falstaff님 서재만 들어오면 새록새록!

Falstaff 2021-10-07 12:51   좋아요 3 | URL
근데 저는 아주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아직 26번 버스가 다니나요? 아주 오래 전이라서 에휴.....
ㅋㅋㅋ 무슨 분발 씩 하십니까. 그깟 소설책 한 권 읽는 것으로요. 그냥 즐기는게 장땡입니다. 제 철학입지요. ^^

얄라알라 2021-10-07 1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 ˝분발˝ 요 단어 엄청 FM적으로 들리네요^^ Falstaff님 철학에 동의합니다. 저도 어려서는 오로지 문학작품만 읽었는데 제대로 이해 못하고 읽은 책이 90% 같아요^^;; 다시 천천히 친해져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