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파버 을유세계문학전집 113
막스 프리슈 지음, 정미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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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막스 프리쉬의 소위 3대 소설 <슈틸러>, <호모 파버>, <내 이름은 간텐바인>을 완독했다. 아시다시피 프리쉬의 관심은 자아의 정체성, 개별성, 책임감, 도덕성, 정치적 책무 등에 있으며, 다양한 아이러니의 사용을 작품의 특징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 책에서도 다양한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이것들을 찾아내 즐기는 건 다 독자들의 몫이겠다.


  호모 파버. Homo Faber. 도구적 인간. 건조한 성격의 주인공 발터 파버를 비아냥거리기 위해 한때 그의 애인이었던 한나 란츠베르크가 지어준 별명이기도 하다. 1인칭 화자인 발터 파버는 작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전형적인, 거의 인간계를 벗어난 수준으로 성격이 고착되어버린 엔지니어다. 유네스코에서 근무하며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은 세계의 수도인 뉴욕. 자기 수준으로는 비싼 아파트에서 살면서 스물여섯 살 먹은 유부녀 아이비로부터 결혼하자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발터는 비혼주의자.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1933년부터 35년까지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의 조교로 재직할 당시, 3백 프랑켄의 월급을 받았는데, 문학을 공부하던 한나 란츠베르크라는 반half 유대인과 연애를 했었다. 1930년대의 반유대주의는 독일에서만 창궐했던 지역적 질환이 아니어서, 스위스도 유대인 여권을 무효화시키려 하자(알베르 코엔, <주군의 여인> 참조), 발터는 한나에게 스위스 국적을 유지시키려는 목적도 겸해 아직 가정을 꾸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입이지만, 결혼을 제의한다. 여기에 더해 나름 조심한다고 했건만 한나가 그만 덜컥 임신을 해버렸던 것. 그러면 한나가 잘 됐다 싶어 얼른 결혼할 줄 알았지? 천만의 말씀. 한나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상당한 동정을 수반한 청혼이라고 이해해서 결혼 직전에 취소해버린다. 발터는 한나가 의사 친구인 요하임 헹케를 찾아가 중절수술을 받겠다는 말을 듣고 국외로 떠나버린다.

  그리고 발터는 아무것도 모르는 20여 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극적인 기계인간으로 성격이 굳어져버렸으며, 한나는 딸 엘리자베트를 낳고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서 살다가 동베를린을 거쳐 지금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박물관 일을 하고 있다. 한나는 참전하자마자 포로수용소에서 전쟁기간을 보내고 돌아온 의사 요하임 헹케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공산주의자인 파이퍼 씨와 두 번째 결혼을 하지만 파이퍼 씨가, 어제 무효라고 한 것을 오늘 유효하다고 공표하는 인간, 즉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기회주의자일 뿐임을 알고는 1953년 6월에 다시 이혼해 딸 엘리자베트 파이퍼와 단둘이서 산다.  

  발터와 한나가 결혼하려다가 한나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스위스 안에서의 에피소드는 막스 프리쉬가 젊어서 겪은 경험을 그대로 썼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후 주로 개발도상국의 댐과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터빈 조립 공사를 담당하느라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세상의 모든 사물을 벡터 계산의 가능 범위로 해석하게 된 발터 파버에게, 1957년의 어느 날, 지금은 존 F 케네디 공항으로 불리는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한 DC-4, 슈퍼 컨스텔레이션 기종에 탑승해 남아메리카로 향하던 중, 멕시코만 상층에서 왼쪽 날개의 엔진이 정지 (한 개 정도야 그럴 수 있지), 탑승객 전원이 구명조끼를 착용한 채 가벼운 불안에 떨다가, 곧이어 또 하나의 엔진까지 멈춰버려(지극히 낮은 가능성), 모두 네 개의 엔진 가운데 절반만 가지고 더 이상의 비행은 불가능하다는 실력 좋고 경험 많은 기장의 판단으로, 멕시코 고원 타마울리파스 황무지에 성공적으로 불시착하는 일이(거의 불가능한 확률로!) 벌어진다. 황무지에 빠져 죽을 물도 없으면서 여전히 구명조끼를 입은 채.

  이 장면을 읽으면서 마치 그리스 고전이 생각날 거 같았는데, 그게 어떤 작품일지, 뭐와 비슷한지 책을 읽고 열여덟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궁리중이다.

  이렇게 세상에서는 가끔 거의 불가능한 확률로 한 인생을 좌우하게 될 ‘우연’이 생기기도 한다. 발터 파버가 전혀 믿지 않는 낮은 확률임에도. 발터는 멕시코의 황무지 타마울리파스에서 여든다섯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 옆 좌석에 앉았던 뒤셀도르프 출신의 못마땅한 청년 헤르베르트와 팬티만 입고 웃통을 벌겋게 벗은 상태로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비행기 뒷날개 그늘을 쫓아다니며 자리를 잡고 앉아, 대화를 극도로 즐기면서 시간은 효과적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체스 게임에 몰두하면서, 헤르베르트의 이름이 헹케이며, 과테말라 플랜테이션에서 두 달 전에 연락이 두절되어버린 유일한 백인인 친형 요하임 헹케를 만나러 간다는 얘기를 4일 만에, 요하임이 한나와 이혼했다는 얘기도 얻어듣고, 즉각 계획을 변경해 자신도 과테말라의 조그만 간이역, 세상의 끝이며 최소한 문명의 끝인 팔렝케로 함께 가기로 결정을 해버린다. 이미 철사줄로 목을 매 죽어버려 피가 통하지 않은 얼굴이 퍼렇게 변색된 채 퉁퉁 부어버린 요하임 헹케를 찾아, 먼저 사진 촬영을 하고, 매장을 해주기 위해. 물론 그땐 몰랐지만.

  그렇지? 이 정도니 저 세상의 오지, 황무지 타마울리파스에서의 불시착을 그리스 고전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운 거 아냐?


  다른 우연 하나 더.

  과테말라에서 친구를 장사지내고 뉴욕으로 돌아와 아파트에 오르니 기다리고 있는 워싱턴 공무원의 아내 아이비. 스물여섯 살 아이비는 쉰 살 넘은 발터하고 일주일을 지낼 수 있다는 꿈에 푹 젖어 행복해 미칠 지경인 반면, 타마울리파스에서 아이비한테 헤어지자는 편지를 보낸 바 있는 발터는 일주일이 끔찍하기만 해, 새롭게 비행공포증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크루즈 선을 예약하고 다음날 배에 올라버린다. 아이비는 이걸로 책에서 삭제된다. 인생이 다 그렇다. 사는 공부했다고 치자, 아이비야.


  배에 젊은 아가씨, 검은색 카우보이 바지에 붉은색 말총머리를 한 자베트. 장학금으로 예일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이제 유럽으로 가는 중. 장래 희망은 비행기 승무원이며 원래는 엄마한테 곧바로 가려 했으나, 파리에서 로마까지, 남프랑스와 이탈리아 북쪽 지역의 온갖 명승지와 문화재를 구경하면서 히치하이킹으로 갈 예정이란다. 엄마의 승낙을 받아놓았다고. 발터가 자베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는 두 가지. 하나는 절대로 비행기 승무원은 되지 말라는 것. 두 번째는 제발 로마까지 히치하이킹을 하지 말라는 것.

  파리에 도착한 발터. 배에서 자베트가 박물관 이야기를 많이 했고, 자신은 절대 박물관 따위엔 가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 생각나, 루브르를 연이어 관람한다. 혹시 자베트를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그리고 결국 만난다. 자베트는 이틀 연속 발터를 보았던 터. 이들은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발터는 자베트에게 터무니없는 수작도 전혀 부리지 않으면서, 오페라도 같이 보러가고, 이젠 다시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는데, 때마침 회사에선 발터에게 휴가를 부여하는 동시에 미국 출장 가는 부장이 시트로앵을 쓰라 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자베트의 로마까지 히치하이킹을 걱정하던 터라, 어이쿠나 잘 됐다 싶어, 자기 차로 히치하이킹을 하라고 제의해서 둘은 함께 온갖 곳을 다 구경하게 된다.

  크루즈 항해에 이어 파리-로마 여행. 이것도 어디서 본 것 같지? 오뒷세이아? 아이네이스?

  이 여행을 통해 벡터 해석 범위의 발터는 자신의 독자적인 호모 파버 적인 형질을 비록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자베트에게 양보하고 있는 것을, 독자는 발견할 수 있다. 괜찮게 늙은 발터, 스포츠로 몸을 다진 건장한 중년의 욕망을 제거한 부드러움과 친절. 딱 이 수준이다. 스무 살이 조금 넘은 자베트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남성으로서가 아닌 편한 상대로 의지하게 된다.

  그러다가 하루, 발터는 엄마의 이름을 묻고, 발터가 자베트라고 부르는 이 아가씨의 정식 이름이 엘리자베트인 건 벌써 알고 있었지만, 엄마가 한나 파이퍼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적어도 겉으로는 조금도 놀란 시늉을 하지 않은 채, 엄마의 처녀 때 이름이 란츠베르크 아니었느냐고 물으면서, 속으로 재빨리 자베트의 나이 계산을 해보고, 적어도 자기 아이가 아니란 걸 확신한다. 그리하여 이 그리스식 로드무비이기도 한 <호모 파버>는 그리스식 결말을 위해 드디어 에게해를 건너 아테네에 이른다. 이들 앞에는 또 어떤 그리스식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는 미안하지만 직접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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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10-11 19: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미있을거 같아요. 주인공이 엔지니어라 호모 파버이군요. 소설에서 계속 우연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Falstaff 2021-10-11 19:07   좋아요 4 | URL
호응이 별로 없어서 저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꽤 좋은 작품인데 말입니다.
아마 프리쉬 자체가 대중성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읽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요. 뭐 인생이고 그 양반 팔자지요.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1-10-11 2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리스식이라면 당연히 엘리자베트는 파버의 친딸이고, 아니라고 생각한 파버는 당연히 그녀와 섹스를 하고 아닌가요? ㅎㅎ

Falstaff 2021-10-12 08:52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절대 안 알려드립니다!

그레이스 2021-11-05 1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샀습니다^6^
축하드려요 당선 아니고 선정?

Falstaff 2021-11-05 17:11   좋아요 1 | URL
사셨어요! 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ㅎㅎㅎ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서괭 2021-11-05 16: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님 당선.. 아니 선정 축하드립니다 ㅎㅎ

Falstaff 2021-11-05 17:12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이 책 정말 재미나요. 더 많이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는데 아쉬운 작품입니다. ^^

새파랑 2021-11-05 17: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선정 축하드립니다~!! 진정한 을유 출판사 마니아 이신듯 합니다~!!

Falstaff 2021-11-05 19:32   좋아요 3 | URL
냅. 제가 을유를 좋아했었는데요, 지금은 별롭니다.
예전만큼 책 만드는 데 정성을 쏟는 거 같지 않아서요.
교정교열도 예전과 비교가 되지 않고 뭐 그렇습니다. ㅎㅎㅎ

이하라 2021-11-05 17: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축하드립니다.
11월도 기쁜 일 가득한 달 되세요.^^

Falstaff 2021-11-05 19:33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언제나 조용히 지켜봐주시는 것에 늘 감사드립니다. ^^

초란공 2021-11-05 22: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매달 Falstaff님의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글이 기다려집니다~

Falstaff 2021-11-06 09:47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잘 읽어주시는 분들 덕택입니다. ^^

mini74 2021-11-05 22: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의 박력넘치는 글 재미있게 보고있어요. 선정 축하드랴요 *^^*

Falstaff 2021-11-06 09:49   좋아요 2 | URL
미니님도 축하해요!
아이고, 저야 뭐 그저.... ㅋㅋㅋ

초딩 2021-11-07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
아늑한 가을 일요일 되세요~

Falstaff 2021-11-07 20:2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편히 쉬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