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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자 - 연인번역희곡총서 1
브라니슬라브 누쉬치 지음, 김상환 옮김 / 연극과인간 / 2003년 1월
평점 :
1864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난 브라니슬라브 누쉬치는 극작가, 풍자작가, 소설가, 수필가, 그리고 현대 세르비아어의 수사학자 등, 하여튼 펜으로 할 수 있는 건 다트를 향해 펜을 던지는 일 빼놓고 뭐든지 잘 해서, 세르비아의 고골로 불린다고 한다. 누쉬치는 1887년에 이 작품 <수상한 자>를 완성했지만 세르비아 왕조의 부패와 무능한 공무원들을 사정없이 풍자하는 내용이라 실제로 공연을 하기까지는 35년이란 세월이 더 필요했다.
웃기는 건, 이 사이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전쟁의 화마가 1915년 드디어 세르비아에까지 튀어, 누쉬치는 자신의 원고 가운데 아끼는 작품들을 친한 이에게 맡겨두고, <수상한 자>는 월세 살던 알바니아 사람의 집에 그냥 ‘버리고’ 피난을 떠난다. 그러나 맡겨둔 작품들은 가택수색의 와중에 몽땅 불태워지고, 팽개쳐버린 <수상한 자>만 알바니아 사람의 집에 덩그러니 남아 있더라는 것.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출판사 ‘연극과인간’에서 나온 시리즈 연인번역희곡총서 시리즈 안에는 그래도 다행히 읽어본 작품도 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가 루이 14세 시절의 극작가 몰리에르를 빗대 소비에트 정부를 풍자했다는 <위선자들의 밀교>. 이 작품을 비롯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흔쾌하게 선택할 예정인 게오르크 카이저가 쓴 <메두사의 뗏목>, 류보미르 씨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이 들어있어 기대를 품게 만든다.
연인번역희곡총서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나온 <수상한 자>는 전형적인 희극이다. 연출에 따라 얼마든지 슬랩스틱 코미디로도 만들 수 있고, 스탠딩 코미디로도 가능할 것 같다. 읽어보면 어디서 한 번 본 듯한 기시감을 느낄 수 있는데, 우리나라 방송 희극 대본가나 연출가 가운데 이 작품을 슬쩍 차용한 적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야 우리나라가 콘텐츠 선진국이지 20세기 후반만 해도 소위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건 그까짓 지적재산권 따위는 개나 줘라, 하고 노골적으로 일본의 유사 방송을 베껴오기 일쑤였으니, 당시만 해도 거의 금단의 영역이었던 공산주의 동유럽 극작가가 쓴 작품의 일부를 가져와 변주를 거쳐 선보이는 정도는 양심의 가책 따위조차 느끼지 않았을 듯하다.
* 말이 나와 하는 얘긴데, 예능 프로그램은 무슨 “예능”이냐. 그냥 오락 방송, 오락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될 것을 ‘오락’이란 말을 쓰기 어째 어감이 좋지 않은 듯하니 예능이라고 하는 거 아닌가. 세월이 가면 갈수록 언어 인플레이션이 보통 아니다. 난 이런 게 별로 좋지 않다.
19세기 말의 세르비아에 ‘예로띠예 빤띠치’라는 이름의 우체국장이 살았다. 이이가 참으로 자랑할 만한 취미를 가졌으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심심하기만 하면 우체국에 쇄도하는 편지를 개봉해 읽어보는 것. 원래 다른 사람들 훔쳐보는 게 재미나는 일이라 한 번 맛을 들인 예로띠예는 점점 간이 커져 편지의 발신, 수신인을 가리지 않게 되고, 그게 사달이 나 드디어 징계해고를 당하고 만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시라. 명색이 주인공, 아직 연극은 막도 올라가지 않았다. 이후 옛 말로 ‘사바사바’에 관해 훌륭한 재질을 타고 나서, 이번엔 엉뚱하게도 경찰서장의 자리에 오른다. 덩치만 무지하게 크지 겁이 엄청나게 많아 자신이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를 상정해놓고 제일 먼저 자신의 안위부터 따진 다음에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며, 병력의 배치나 작전 수행, 범인 취조 등 하여튼 뇌 세포의 활발한 운동을 전제로 하는 어떤 일도 자신의 전문적인 부하들의 입을 빌리려는 경향이 있다. 나이 들어 낙하산 타고 떨어진 인간들의 공통점이기도 해서, 우리나라 공기업에도 이런 인간들 숱하게 깔려있으니 짐작을 하실 수 있을 터이다.
예로띠예는 아내 안자와의 사이에 외동딸 마리짜를 두었는데, 도무지 딸에 대한 애정이 없는지 마리짜가 열아홉 살 때까지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가, 열아홉부터 스물하나 까지는 부모더러 결혼 상대를 찾아달라고 요구했지만 어떻게 된 엄마, 아빠인지 상대를 찾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제 부모에게 자신이 직접 남편감을 찾아내겠다고 머리 조아리며 말씀드리고, 약국의 약사 보조를 하고 있는, 참, 민망해서 이거, 유럽 사람들 이름이 이상하긴 한 걸 감안해 들으시면, ‘조까’라는 이름의 청년을 찾아낸 거였다.
그런데 예로띠예 씨도 참. 이 경찰서장이, 그동안 뭐했는지 여태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경찰서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비차’한테 꽂혀서 딸을 주기로 결심을 한 거였다. 왜냐하면, 비차가 인물 없고, 배운 것도 없고, 교양까지 없지만 특별하고도 탁월한 능력이 하나 있으니 이 군郡 지역의 상인, 농민, 시민들의 뒤통수를 후려쳐 현금을 알겨내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나이 서른 조금 넘어 벌써 직장은 취미생활로 다니고 있는 중일 정도면 말 다 한 거지 뭐. 요즘 같으면 뭐라 그러더라, 파이어 족? 근데 문제는, 마리짜가 비차라는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하는 터, 이게 희극에서 제대로 되겠느냐는 말이지.
마리짜가 뇌를 짜 일단 조까를 자기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유럽 호텔에 방을 잡게 했다. 때는 19세기 말이라 마리짜가 호텔에서 조까를 한 번 만나기만 해도 이는 빼도 박도 못 하고 동네 전체에 소문이 나 결혼하지 않고는 견뎌낼 수가 없었기 때문.
그러나 생각한대로 다 되면 연극이 아니지. 때를 맞춰 중앙정부에서 일급비밀의 암호 전보가 와, 이 지역에 혁명적이고 반정부적인 수상한 자가 침투했으니 즉각 잡아 대령하라는 지령이 떨어진다. 정부도 이 수상한 자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젊은이라는 것만 확실하단다. 그럼 독자들은 순식간에 눈치 챌 수 있는 것. 마침 유럽 호텔에 묵고 있으면서 마리짜의 지시대로 방 밖으로 전혀 나오지 않는 조까가 수상한 자로 오인되어 체포당할 것임을. 그리고 진짜로 독자의 짐작대로 일이 벌어진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수상한 자의 정체에 대하여 궁금해 하고 있는 터. 원래 혁명분자들은 몸 안에 자폭 장치를 달고 다니는 법이라서 초동 취조는 서기관들에게 맡기고 잠시 출타를 한 겁쟁이 예로띠예 서장이 시간이 지나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자 드디어 경찰서 내부로 들어와 시민 가운데 뽑힌 증인 두 명과 모든 서기관, 서기 보조 들이 보고 있는 가장 큰 사무실에서 앞으로 자기 사위가 될 청년에게 이렇게 묻고 대답한다.
이름이 뭔가?
조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