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집에, 입원하느라 급하게 챙겨온 물건만 가지고 생활을 하다보니 없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옷은 딱 두벌 가지고 왔고, 화장품은 아예 챙겨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면서 화장품 챙겨올 정신머리가 어디....;;;; 그 때는 한달씩 쉬라고 병원에서 권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책은 병실에서 읽으려고 가져온 두권이 전부. 그리하여, 부모님 집에 한달간 기거하러 오니, 이건 뭐, 불편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 와중에도 병실에서 놀기 위한 노트북, 아이팟에 외장하드까지 챙겨온 스스로에게는 경배를!)
하지만 인간이 동영상만 보면서 살 수는 없는 거다. 죽어라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활자가 그리워지게 되어 있는데, 나는 읽을 것이 없는거라, 그런데 문제는 내가 병가 기간 동안의 월급이 없다는 것까지 감안하여 한달 월급으로 두달 생활의 규모를 짜야하는데, 두 번의 대출금과 보험금이 나가면 월급은 거의 사라지는 상황. 책을 함부로 사들일 만한 상황이 전혀 아닌 그야말로 초거지 모드인 것이다. 하지만, 초거지에게도 볕들 날이 있으니, 그간 쌓아놓은 적립금과 마일리지, 쟁여놓은 쿠폰들이 빛을 발해주었다. 오 주여. 중고책 5권과 새책 1권을 3천원에 가뿐하게 사고, (물론 적립금도 돈이지요 ㅜㅜ) 교회 지인들에게 책을 좀 빌려달라고 하여 읽을 책을 쌓아두었다. 그리고, 원효로 집에서 가끔 자는 교회 동생에게 왔다갔다 할 때마다 책 심부름을 시키고 있는 중. 아무리 생각해도 어쩜 이렇게 집에 한권도 안남겨놨는지, 원. 게다가 원효로 집에는 정말이지, 아직 안읽은 책들이, 읽고 싶은 책들이 쌓여 있어서 기분에 따라 골라 읽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선택의 폭이 너무 좁다. 정말 슬픈 일이다.
화장품은 엄마의 화장품을 쓰고 있는데, 마치 엄마 화장품을 훔쳐 쓰는 느낌이다. 다행히 화장할 일은 많지 않아, 가까운 데 나갈 때는 BB크림만 바르는 정도인데, 엄마는 립글로스를 쓰지 않으시는 관계로, (나는 립스틱을 싫어한다, 한 번 엄마 립스틱 발랐다가 싹싹 지웠다) 맨 입술로 다니다보니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교회 사람들...) 정말 니가 어디가 아프긴 아픈가보다, 한다. 그게 아니라, 입술을 안발라서....라고 변명을 하다가, 어제 립글로스를 하나 샀다. 6천원짜리로. 그나마 좀 멀쩡해보인다. 아. 그리운 나의 포지틴트. ㅜㅜ
옷,은 나갈 때마다 매번 똑같이 입다보니, 스스로에게도 민망한 지경. 그래도, 봄옷 없어서 난감했었는데, 봄옷 입을 일 많지 않아 다행스럽기도 하다.
가방,은 그나마 가지고 온 가방에 얼룩이 져서, 매우 난감한 상황. 다행히 두고 간 녀석이 하나 있었다. 5년 전에 가지고 다니던 가방이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신발,역시 플랫슈즈 하나로 버티고 있다. 이거 간염인 줄 모르고 처음 쓰러지던 날 기운 없는 몸으로 남산 산책하고, 차가 막혀서 명동 롯데에 잠깐 내려서 충동적으로 산 신발인데, 없었으면 어쩔뻔했을까 싶다. 매우 편안한 신발이라 다행스럽긴 하지만...
씨디, 디브이디, 등도 모두 다 원효로 집에 있다. 밀린 것들 보고 듣기에 딱 좋은 계절인데.
게다가, 요즘은 볕이 좋고, 종종 산책을 나서니 그리워지는 게 있는데,
내 선글라스...엉엉엉. 렌즈를 끼고부터는 햇볕 아래서 눈을 잘 뜨지 못해 눈에 주름이 갈까봐 걱정하기 시작한지가 벌써 3년째인데, 얼마전부터 날씨가 좋아지니 선글라스 생각 간절하다. 공원에 앉아 책을 읽을 때 책에 쏟아지던 햇살,은 좋은데 너무 눈이 부셨다. 늘 이맘때쯤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어쩜 난 이렇게 완벽하게 선글라스까지 안빼놓고 챙겨갔는지. ㅜㅜ 어제는 공원 가던 길에 백화점에 들러 선글라스는 차마 못보고, 양산이라도, 만지작...만지작...거리다가 그냥 왔다. (초거지모드)
실상 뭐 딱히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니, 없이도 살 수 있는 것들인데도, 나는 괜히 내 물건들이 그립다. 여기도 우리집인데, 내 물건들이 하나도 없으니, 얹혀 있다는 느낌이 너무 강렬하다. 원효로 집에 한 번 가서 가져올까 싶어도, 다시 가져갈 생각을 하면 까마득해서 이내 그만두게 된다. 그냥, 좀 참으면서 살살 살아야겠지만, 그래도 원효로 집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냉장고에서 음식들 썩어가고 있을텐데. 돌아가서도 문제구나.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