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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는 손으로만든 공책을 파는 노점이 있다. 늘 지나만 다니던 그 곳에서 공책을 사야지 생각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 보자면

술김에 토지를 다시 읽기로 했다. 살까 말까 고민을 좀 하다가 함께 보기로 한 H님께 한권씩 빌리기로 했다. 지금 집에 토지까지 들어오면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판단. 그러다 보니 왠지 남는 아쉬움. 밑줄도 안긋고 (물론 그어도 된다고 하시며, 그을 것을 적극권장하셨지만, 그렇다해도 나는 기억하지 못하니) 책도 남지 않으니, 이 망각에 또 다 잊어버리겠다 싶어서, 한권한권을 꼭꼭 씹어먹는 기분으로 읽으면서 밑줄그을만한 문구가 있으면 노트에 적어둬야겠다고 결심했던 것. 그럼 좀 더 심혈을 기울여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고를 것이고 (쓸거 귀찮아서 스킵? ㅋㅋㅋ) 좀더 의미있는 형태로 남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달까. 암튼, 이 방법으로 우리 니나까지 꼬셔서 니나도 책을 빌려 읽고 나처럼 노트에 적기로 했다. ㅋㅋㅋ 아무래도 나 설득력도 좀 짱인듯.  

그리고 오늘, 토지를 불라에 맡겨놓으신다는 문자를 받고 퇴근길 잠깐 불라에 들렀다 (고하기엔 회사는 강남이고 거긴 종로이긴 하지만) 가는 길 횡단보도 앞에 있는 그 노점에서 마음에 드는 공책을 발견! 주인을 찾아 두리번거렸으나 주위에 없다. 일단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도 문을 열었으면 사야지, 하고 생각, 나오는 길에 보니, 우옷, 아직 열었구나. 아까 그 노트를 가리키며 이건 얼만가요, 하고 물었더니 아저씨 왈, 이건 우리집의 명품이라 비싸요, 라고 답한다. 왜요? 라며 되묻는 내게 아저씨는 이 노트를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표지를 만들기 위해 다섯번을 무슨 처리를 하고 징을 하나씩 일일이 박아야 하고, 수를 일일이 놓고 (맞나? 가물가물) 암튼 하루에 몇권 못만드는 노트라며 칭찬이 자자하시다. 종이는 고급 크라프트지라 어떤 펜으로 써도 번지지 않고 잘써진다는 말과 함께.

망설이지 않고, 그냥 달라고 했다. 왜냐면, 명품 글귀들이 적힐 노트니까. 평생 간직할 거니까, 뭐 그쯤은 아깝지 않다는 심정으로. 아, 내 눈이 보배인걸 어쩌겠어 -_- 막 이러며 ㅋㅋ 손님 과실로 노트에 이상이 생겨도, 평생 AS는 해드립니다, 라는 말을 듣고 노트를 들고 돌아왔다. 나는 과연 메모를 잘할 수 있을 것인가.


2

돌아오는 길 지하철. 막차는 아니었으나, 거의 막차 가까운 시각이어서 그런지 술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비교적 멀쩡해보이는 사람 옆에 가서 앉으려고 물색하다가 멀쩡해 보이는 사람 발견! 그 옆에 앉으려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 멀쩡한 사람의 정체는 E였다. 졸업하고 처음 만나는 거였던가?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역시나 더해진 세월만큼의 성숙함이 배어있는 듯한 모습.

E는 내가 종종 들어가는, 개혁의 목소리를 내는 기독교 언론인 뉴스앤조이의 편집기자로 얼마 전 입사했다고 한다. 안그래도 얼마전에 기자모집 팝업 뜨는 것 봤던 기억이 난다. 그 팝업이 찾은 당사자가 바로 E일 줄이야. 내가 뉴스앤조이와 같은 곳에서 출간되는 복음과상황을 구독하면서 겪었던 행정적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니, 경영난으로 인한 행정적 어려움이 참 많다는 호소를 한다. 꼭 필요한 것들은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유지가 되더라. 구독자 수도 터무니없이 적고 여러가지 처우들도 좋지 않다고 한다. 거기서 E가 얻는 플러스 알파의 가치가 혹은 기쁨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나도 알고 E도 알지만 말이다.

네가 갔으니, 더욱 기대해볼게! 라는 말을 남기고 우리는 헤어졌다. 조직이나 시스템에 대해 내가 좀 더 알고 있었다면 도움이 될 수 있었으려나. 하지만 나도 짤없이 모르는걸. 어려운 가운데 제목소리를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사재 털어가며 힘들게 운영하는 매체인만큼, 잘돼야 할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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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아저씨의 믿음
    from 지극히 개인적인 2008-07-08 18:51 
    (먼 댓글로 연결해놓은) 지난 번 수제 노트 파는 아저씨에게 다시 노트를 사야 할 일이 있어 종로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여러 번 그 앞을 지났지만, 아저씨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 때마다 노점은 열려 있고, 노트들은 펼쳐져 있는데, 아저씨는 자리에 안계신거다. 몇번을 허탕을 치고, 그렇게 아저씨를 만났다. 노트를 집으며 나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니, 그렇게 가게를 비우시면 어떻게 해요? 저 여러번 왔었는데" "아, 그러셨어요? 죄송
 
 
도넛공주 2008-05-21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곁엔 인재들이 많은 것 같아요.조직 하나 꾸리셔도...(선동하고 있다)

웽스북스 2008-05-21 19:43   좋아요 0 | URL
ㅎㅎㅎ 회장은 도넛공주님이 맡아주세요

Jade 2008-05-21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그 노점 어디예요?? 저도 명품 노트 갖고 싶어요 ㅋㅋ 종로 나가면 사와야겠어요!

근데 생각해보니 전 명품노트에 적을게 없는데 ㅋㅋ 일기나 써야겠다 -_-

2008-05-21 1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08-05-2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명품 참 궁금하네요. 어찌 생긴것인지..
만약 제게 그런 명품이 생긴다면 전 거기에 뭘 적을까요?
가계부 적어야지 하면 슬플것 같아.. ㅡ.ㅜ

웽스북스 2008-05-21 19:44   좋아요 0 | URL
아 스믈스믈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으니
어쩐지 사진올리기도 쫌 부담스럽고 그렇네요 ㅋㅋㅋ

다락방 2008-05-21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트 보여줘요, 웬디양님. 저도 어떤 노트인지 궁금해요.


그리고 저도 비록 가난하여 명품 가방은 없답니다. 흣.

웽스북스 2008-05-21 19:44   좋아요 0 | URL
으흐흐 민망해요
그 집에서의 '명품'이라는 건데 말이죠 -_-

춤추는인생. 2008-05-21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그런 곳이 다있네요. 저도 처음들어봐요 웬디님. 그런노트사면 정말 정성스럽게 한자한자 쓸것 같아요 저는 그냥 가방속에 잡히는 노트 혹은 수첩을 꺼내서 아무거나 적고 그러는데. 습관이기도 하고 성격이기도 한것 같아요 제가 그리 꼼꼼하지 못해요.
그런데 저도 그런 노트를 사면 비싸기 때문에 아마 정성스럽게 써보지 않을까 싶어요.
기회가 되면 한번 보여주세요^^

웽스북스 2008-05-22 13:46   좋아요 0 | URL
네 춤인생님
그런데, 그렇게까지 비싼 노트는 아니랍니다.
제가 명품이라는 표현을 써서 좀 과장되게 표현됐을까봐 걱정 ^^

나중에 보여드릴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깜소 2008-05-21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에 밑줄을 긋지도 따로 옮겨 적지도 않아요 그래도 그 집만의 명품 노트를 알고 싶어요^^ 아끼는 친구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 그 집 알려 주실꺼죠?ㅎㅎㅎㅎㅎ 인사는 첨~!! 방문은 셀수없이~!!

2008-05-22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코코죠 2008-05-22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거기 어디인지 알 것 같아요. 근데 말 안할래요. 왜냐하면 나는 이제 거기를 지나갈 때마다 여기 나랑 웬디님이랑 아는 곳이지, 하고 생각하게 될 텐데. 아니라고 하면 그걸 할 수 없으니까요. 얼핏 수줍게 생긴 그 아저씨 있는 가게죠? 손으로 만든 간판이 달린? 예쁜 포장마차? 옷가게 앞에 있는? 맞죠?(이젠 우기고 있다)나도 그 가게의 명품은 아니고 준명품 노트를 사서 스물 아홉의 일기를 썼지요. 웬디님의 공책에 쓰여질 토지의 글귀들이 정말 궁금하네요. 그건 정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오마주가 될 거예요. 박경리 선생님은 정말, 정말 행복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에 또 마음이 찡-


웽스북스 2008-05-22 13:48   좋아요 0 | URL
오즈마님, 맞아요 거기. ㅎㅎㅎ 손으로 만든 간판이 달려있어요
거기를 지나칠 때 저를 떠올려주세요
그리고 진열된 노트를 보면서, 제가 산 노트가 뭘까 한번 맞혀보세요 ^^

블리 2008-05-2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머, 로그인 안해도 글쓰기 가능하게 바뀌었네~ 기념으로 덧글하나!
그집(?)의 노트 쓰다 말고 기능정지 중인데 [토지] 어록으로 나도 쓸까봐?
이로써 새로운 그룹 결성? ㅋㅋ

웽스북스 2008-05-22 23:00   좋아요 0 | URL
우후후후
언니를 위해서 정보 고쳤다는 거죠 ㅋㅋㅋ

순오기 2008-05-22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지를 읽으면 정성들여 쓸 님의 명품노트...진짜 명품이 될 것 같아요! ^^
참 잘했어요~ 도장 꽝!!

웽스북스 2008-05-22 23:00   좋아요 0 | URL
ㅋㅋ 우리 순오기님의 도장꽝! 은 추천버튼인거죠?
감사합니다~~~

누구엄마 2008-05-23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가 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