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의 사랑 노래 타골의 죽음 노래
디팩 초프라 지음, 이현주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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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3~4년쯤 전의 일로 기억한다. 터키에서 지진이 났을 때 한국에서 발벗고 나서서 도와준 지방자치단체가 꽤 있었다.(2002년 월드컵의 터키 형제국 소동 이전의 일) 그중 하나가 서초구였다는데, 사태가 수습된 뒤 한국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메블라나 댄스팀이 서초구청 문화센터에 와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상업적으로 조직된 팀이 아니라 루미 교단 댄스팀이었다.) 루미와 나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메블라나 댄스... 긴 양털모자를 쓰고 흰 치마를 입은 남자들이, 단순하지만 가슴을 파고들어오는 음률에 맞춰 우아한 회전을 선보인다. 몸집 큰 남자들이지만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요가를 익힌 수행자들이 움직이는 듯 부드럽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 공연장에 와 있던 주한 터키 대사는 자신조차 그 공연을 보는 게 일생의 두번째 기회라 했다. 이 댄스를 보기 위해 나중에 터키 여행을 간다면 12월에 코냐(루미의 교단이 있었던 곳, 지금도 매년 12월에 축제가 벌어진다)에 도착하도록 일정을 짤 생각까지 했었는데, 이런 행운이 찾아들다니... 

잘랄웃딘 루미, 신비한 인물이다. 다른 종교권이라면 모르겠으나, 형상에 대한 숭배가 극히 금기시되는 이슬람에서 이런 꽃이 피다니...  당시 즐겨 읽던 라즈니쉬의 책에서 그의 무용이 어떤 영적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설명과 몇 가지 우화를 보고 루미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아쉬운 것은 수없이 많은 마스터들에 대해 이야기한 그의 강론집 가운데, 루미의 시를 이야기한 책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찾지 못했다는 것 뿐.)

그러다가 최근에, 의사 출신이면서 묘하게 영적인 메시지들을 툭툭 내뱉는 디팩 초프라란 사람이 엮은 루미 시집이 나왔다기에 보았더니... 나온 책의 성격이 더 수수께끼였다. 분명 상업적 출간은 아니었다. 한국기독교연구소? 도대체 기독교 목사가 왜 뉴에이지 과학자 초프라가 추린 이슬람 신비주의와 힌두교 시집을 번역해서 냈을까? 흠... 아마도 시집 안에 표현된 '절대자에 대한 사랑'을 이용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목적의식을 가지고 책을 내니 당연히 의미 전달이 왜곡된다. 예를 들어 '사랑에 굴복하여'(22페이지)를 보면...

사랑에 굴복하여/ 달빛의 광휘(光輝)로/ 창공이 환하게 밝았습니다./ 너무나도 강렬해서/ 나는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나에게 확신을 심어줍니다./

세속의 삶을/ 포기하고/ 당신 존재의 장엄(莊嚴)에/ 무릎 꿇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무릎 꿇다'의 원문은 surrender로 되어 있다. kneel down이 아니란 말이다. 번역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시의 번역이다. 다른 부분들을 보면 번역자의 솜씨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이렇게 옮겼을까? 기독교 교리에 끼워맞추기 위해 본래의 의미를 왜곡한 것이다. 나라면... 아니, 메블라나 댄스를 본 사람들이라면 surrender를 무슨 말로 옮겨야 할지 바로 떠오를 것이라 확신한다. 그 단어는 바로 '내맡기다.'

그밖에도, 초프라가 특별히 해설을 많이 붙인 건 아니지만 영어본 텍스트에서 누구 번역을 기준으로 했고, 이 시들 가운데 자신이 특별히 외워 음미하는 시 네 편이 있다고 소개한 부분을 싹 빼버렸다. 역시 종교적 의도가 의심되는 행위이다.(일일히 대조하진 않았는데, 네 편 중 하나는 '비둘기처럼'(31페이지)이고, 나머지 세 편은 누락된 것 같다.)

더 나쁜 건, 해적출판이란 사실. 1980년대라면 몰라도 2000년대에 나온 책이 저작권을 무시하고 멋대로 두 권이나 가져다가 도둑출판을 해버렸다. 사실 초프라가 특별히 시들을 해설한 건 아니니, 원저작자는 루미라고 봐야 되고, 그렇다면 13세기 작품이니 저작권은 소멸했다고 해도 말은 된다. 그런데 번역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초프라 편역의 책이라고 내세우고 서지사항을 버젓이 실어놓았다. 이건 아니지. 이런 짓은 기독교 망신이고 국가 망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을 세 개나(?) 주는 이유는, 원작시의 메시지가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페르시아어에서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약간의 손실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시를 이해하고 루미를 이해하는 사람이 옮겼다는 건 분명하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원서로 보시길 추천한다.

원제 및 서지사항 : The Love Poems of Rumi(edited by Deepak Chopra, Harmony Book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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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왕기 1 - 형제
이우혁 지음 / 들녘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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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십여 년 전, 한낱 무협지로만 생각했던 '퇴마록'을 처음 손에 잡았을 때 느꼈던 충격이 생각난다. 세련된 글쓰기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상상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이렇게 이집트 신화와 중세유럽의 전설을 뒤지고 한국사 공부를 열심히 하는 작가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적지 않게 감동했었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허구의 예술이다. 하지만 허구가 '그럴듯'해질수록, 독자들은 작품에 빨려들게 되어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이우혁은 그 2%의 '그럴듯함'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작가이다. 매력적인 캐릭터고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글장이다.

총 9권으로 구상된 <치우천왕기>에서, 아직 5권까지밖에 못 읽었다. 그러나 이 정도면 대충의 스케일은 파악했다고 보기에 일단 첫 권의 리뷰를 써보기로 한다.

서두의 <작가의 말>에 보면, 1994년 첫 구상에 들어간 이래, 얼마나 고심하고 우여곡절을 거치며 원고가 탄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다. 최초에는 아예 사용 언어까지 당시의 말을 복원해보려 애썼다는 것, 중국 책들을 찾아 읽고, 현지를 답사하고, 최종고라 생각했던 원고를 파기하고... 이건 단순히 내세우기 위한 말이 아님은, 문장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노력한 흔적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치우천왕기>에서 가장 감탄스러운 부분은 주인공 캐릭터들의 통찰력이다. 주신과 지나족의 대결구도가점차 드러나는 가운데에서도 태산 회의에 가면 자신의 발을 틀림없이 고칠 거라고 판단한 희네(치우천)의 헤아림이나, 말투 속의 작은 단서에서 상대방의 의중을 읽어내는 공손헌원(黃帝)의 지략 등은 절대 하루아침에 짜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작가의 수고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반면 은연중에 풍기는 남성우월주의 사고방식은 이 책에서 오히려 더 심해진 듯한 느낌이다. 희한하게 지금까지 이우혁의 글쓰기에서 이 부분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거의 보지 못했는데... 절세미인인 여성 주인공들은 남성 주인공을 돕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헌신적 태도가 아름답게 묘사되는 반면, 남성 주인공은 사랑을 뿌리치고 자신의 갈 길을 가다 보면 여자 쪽에서 접근해오는 식이다. 소녀(素女)는 치우천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고 부족을 버리며 옛친구를 서슴없이 죽인다. 같은 카린족인 무라는 겉으로는 내색을 못해도 치우천을 흠모하며 부족에게서 추방당하고서도 계속 치우천을 따라다니며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거의 선인의 경지에 오른 맥달도 어린시절에 한 번 만난 치우천을 계속 마음에 두고 가슴을 태운다. 그런데 치우천의 반응은? 군자의 도리답게 그녀들을 이용하지는 않지만 결코 감정과 정서의 묘사가 소설의 전면에 부상하지 않는다. 반면 공손발을 못 잊어하는 치우비의 마음은 치우천의 '대의'아래 접히는 것이 미화된다. <왜란종결자>야 남존여비가 강했던 조선시대의 일이니 그렇다 치지만, 모계사회의 유풍이 강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당시라면 좀 다른 구도를 시도해보아도 좋지 않았을까?

비슷한 맥락일 수 있는데... 남녀간의 심리묘사 기법이 별로 유려하지 못하다는 것도 눈에 거슬린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둔하고, 여자들은 토라져서 우회적인 말로 탁탁 쏘아대는 게 전부다. 남자 주인공들이 여자들 감동시키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여자를 구하는 패턴 하나 뿐이다. 작은 배려로 은은한 감동을 준다던가, 유머러스하게 부드러운 말로 여자의 마음을 풀어줄 줄 아는 캐릭터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공손발과 치우비의 티격태격은 너무 질질 끌어서 싫증이 날 정도이다.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치우천왕의 행적 고증 문제. 치우학회 사람들과 만나보고 재야사서들은 제법 뒤져본 모양이지만,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치우에 관련된 창작 출판물은 지금껏 단 한 권도 없었다. 심지어는 <황제내문경> 즉, 황제가 전했다는 최초의 의학서를 제외하고는 황제를 예찬하는 시집 두 권이 전부인 실정이었다.'라 섣불리 단정해버리는 우를 범한다. 박문기의 <대동이>(전6권, 정신세계사) <맥이>를 읽어보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못했을 텐데...(작가의 말에 전혀 언급이 되지 않고 스토리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의 존재를 몰랐거나 무시한 듯) <대동이>의 1권도 치우제와 황토인(지나인)의 대결국면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지만, <전국책> <춘추좌전> 등의 경서류, <산해경>이나 <포박자> 등의 도가류 서적들을 풍부하게 인용하면서 정사의 기록을 보완한다. 게다가 최근에 쏟아져나오는 중국의 고고학 발굴 보고서, 도록들은 중국어를 잘 몰라도(웬만한 것들은 영어로도 병기되어 있다) 눈으로 형상은 파악할 수 있으니 참고했다면 소설의 배경 설정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겠는가. 고대사 연구자들이 이우혁을 같잖게 본다고 해서(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역사 이해를 오도할 가능성... 뭐 대충 그런 생각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도 역사학자들을 만나보고 조언을 얻으려조차 않는다면 결국 손실은 자신의 작품 질에 반영되는 것  아닌가?

이 책만큼 별점 주기에 고민했던 경우도 없다. 드러난 흠들을 가지고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내 평가 기준으로는 별 셋이 적당하다. 그러나 주제가 워낙 참신하고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면이 좋아 넷을 줄까 하다가... 사실 별 0.5가 있었다면 셋 반을 주었겠다. 고심 끝에 반올림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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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과학한다 - 마음에 관한 선구적 과학자 6인의 최신 강의, 뉴사이언스 1
카렌 N. 샤노어 외 지음, 변경옥 옮김, 김수경 감수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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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목으로 10년쯤 전에 책이 나왔다면 틀림없이 사이비라고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본래 불가의 용어였던 '마음 다스림'을 수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달나라와 원자폭탄과 월드컵과 헐리웃 블록버스터에 열광하던 사람들이 '마음'이란 것의 실체에 대해 진지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인류의 관심사가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바깥 세계가 아니라 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다.

책 자체의 가치,  종이미디어로서의 전달력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이 책은 그리 흡족한 수준이 아니다. 일단 필자의 수준이 고른 편이 아니다. 여섯 명의 저자들 가운데 제인 가켄바흐와 디팩 초프라의 글은 비교적 조리있고 맥점을 짚는다. 당연히 호기심이 솟는다. 그러나 카렌 샤노어의 글은 두서가 없고 밋밋하며 프랑크 퍼트넘은 구체적인 사례 지적이 거의 없어 맥이 빠진다. 최악은 카를 프리브람. 19세기 영국 귀족들만을 상대로 강연하는 스타일인지, 문장이 현학적이고 거창하지만 알맹이가 없다. 철학논고인지 정신과학 이론인지 헷갈릴 정도다. 본래 각기 다른 상황에서 제출된 학술적 보고서였던 것을 무리하게 한데 묶은 것이라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제의 참신성, 즉 지금까지는 과학의  대상이라고 상상조차 못 해 본 분야에 대해 연구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하고 싶다. 여기 참여한 과학자들이 모두 신과학운동과 뉴에이지사상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정신적 전통(꿈을 중시하는)이라든가 최면술과 플라시보, 명상 등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과학의 진정한 자세로 돌아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여섯 편의 글은 주제가 서로 겹치지 않지만, 공통적인 것은 영혼, 마음, 혹은 정신이라 불리는 그 어떤 것이 단순히 몸과 물질, 육체에 종속적인 존재가 아님을 밝혀냈다는 점이다. 서양 근대과학의 기반을 이루는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본질적으로 이탈한 과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선한 시도인 셈이다. 일반 대중을 상대로 쓰였다고 보기엔 설명이 너무 부족하고(예를 들면 210페이지의 '자기조회 자동제어 피드백 고리 self-referral cybernetic feedback loop'는 아무 설명 없이 이해할 독자가 몇이나 될까?) 특히 뒤로 갈수록 번역자의 무성의와 오역으로 의심되는 문장들이 빈발하지만, 과학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이해하기에는 이만한 책도 없다. 신과학의 개설 혹은 입문서로는 괜찮은 저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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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누아님의 "우리집에는 난이 세 개 있다. "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바가바드 기타에 보면 아르쥬나가 친척들에게 칼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서 고심할 때(생명에 대한 존중), 마부로 변신한 크리슈나 신이 설복시키는 내용이 나옵니다.(더 큰 우주적 질서에서 보면 생사존망이 모두 우주법칙 안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이 세상 생명들의 어울림 가운데에는 공존하기 어려운 조합도 있기 마련이고, 그것도 자연의 일부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살심을 버리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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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NI(야니) - Live At The Acropolis
야니 (Yanni) 연주 / 소니뮤직(SonyMusic)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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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찰랑이는 흑발, 멋진 콧수염에 다정한 미소의 상당히 제비스러운 뉴에이지 뮤지션, 야니의 대표작이다. 1993년 9월 25일 고대 아네테 극장 유적에서의 실황이라 두 번 다시 재현되지 못할 음색이라 그런지 청중의 박수소리도 묘하게 마음을 흔들고, 감동이 더한 것 같다. 뮤직비디오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 그날 밤 잠을 못 자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야니는 뉴에이지 음악가들 가운데서는 가장 대중적인 축에 든다. 전자악기를 채용하는 비중이 높은 것도 그렇고, 실험주의적 기법이 적고 감미롭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좋아한다는 점도 그렇고...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TV드라마에서 야니 음악을 채용하는 경우도 참 많을 거라 생각한다. 전혀 귀에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달콤한 분위기를 내기는 딱이니까.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정신적 깊이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에(이 점이 같은 그리스 뉴에이지 뮤지션인 크리스 스피어리스와 차이나는 부분 - 개인적 취향) 썩 즐기면서 음반들을 모두 찾아 듣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이 음반에서는 그의 다른 레이블에 비해 토속음악적 분위기가 강하다. 야니가 고향을 떠난 지 20년만의 귀국 리사이틀이라는 의미도 있어서 그랬을까? 그리스 전통악기 부주키를 사용한 것도 그런 맛이 난다.(부주키 음색만으로는 약간 중동풍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6번(One Man's Dream)이 가장 좋고 1번(Santorini)도 마음에 든다.

근대올림픽 108년만에 그리스에 돌아온 이번 올림픽... 개막식에서 이 아름다운 사람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설레임을 안고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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