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열전
허경진 엮음 / 웅진북스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요즘 리라이팅 클래식이 유행이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사회과학 쪽에서 잘 나가는 들뢰즈를 박지원과 연결시켜 풀어내려고 한 시도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듯하다.

주제와 제목만 보았을 때는, 이 책도 그렇게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이 상당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저자의 가공능력 부족으로 평범한 자료집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해 새 책이 아니고 개정판이다. 1997년에 냈던 <조선위항문학사>를 제목을 바꾸고 본문에 컬러 삽화를 넣는 등 모양새를 예쁘게 손질한 것뿐이다. 따라서 <평민열전>이라 부르기엔 좀 문제가 있다. 제목을 그렇게 고쳤지만 출발점이 문학사 책이었기 때문에, 대상으로 삼은 인물 110명 가운데 여전히 시인이 41명나 되어 균형을 잃은 상태이다. <조선 후기 시인 위주 인물선> 정도가 가장 내용과 부합하는 책 타이틀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인물의 행적묘사가 너무 평면적이라 <열전>으로 부르기도 좀 민망하다. 시인들의 예만 보아도 최대립(51페이지)이나 김규(162페이지) 같은 이들은 아예 인명사전에 나올 법만 두세줄 소개로 끝내버리고 해당자의 시만 한두편씩 올려놓았다.

행적에 관한 기록이 조금 자세한 경우라도,해당 사료의 원문을 직역한 게 전부이고, 조선왕조실록을 찾아서 해당 인물이나 주변인물과 비교해서 분석하는 공정이 전혀 없다. 자가 뭐고 호가 뭐고, 문집으로 뭐가 있고, 기질이 자못 호방했고... 대충 이런 식이다. '한문 번역작업' 이상의 노력이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왕태(126~128페이지)의 경우를 보자. 조선시대에 왕씨들은 정책적으로 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전(全)씨 가운데에는 조선시대에 성을 바꾼 왕씨들이 꽤 된다고도 한다. 그런데 왕태란 인물은 원래 가난해서 돈을 받고 공익근무를 대신해주는 것으로 생계를 꾸릴 정도였는데, 우연히 지나가던 학사 윤행임을 통해, 임금(영조?)에게 불려가서 어전에서 시를 짓고, 중부학당의 국비장학생으로 발탁되기도 한다. 재미있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덕일 같으면 이런 사례 하나를 추출해서 "조선시대 왕씨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나?" 같은 식으로 한 꼭지 썼을 게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 궁금증에 대해 아무런 분석이 없고 어전으로 소환되는 과정도 너무 간결하여 정황추측이 잘 안 된다.

이곳에 수록된 110명의 인물은 조희룡의 <호산외기>(1844) 유재건의 <이향견문록>(1862) 이경면의 <희조질사>(1866)에서 추렸다고 하는데, 본문을 보면 의외로 장지연의 <일사유사>에서 가져온 인물 기록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서두에서는 원전자료와 큰 관계가 없는 <소대풍요> <풍요속선> <풍요삼선>에 대해서는 자세히 해제를 달았으면서도 <일사유사>가 어떤 책인지 언급이 전혀 없는 점도 아쉬운 부분. 아마 <조선위항문학사> 편집시의 서문을 제대로 보완하지 못해서 그런 체제가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던 한문 자료를 번역하고 어려운 어휘는 각주를 잘 달았으며 관련 삽화까지 충실히 보강해놓은 것으로 자료집으로서의 가치는 있는 셈이다. 국문학사나 조선시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사서 비치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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