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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입국 심사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56
김경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8월
평점 :
<오렌지주스 캔을 누가 백금으로 만들겠는가>
2007년 1월 아침부터 안개비가 가로등 불빛에 섞여 내렸다
커피와 빵 냄새 속 비행.......기는 지연되고 초청단은
공항 근처 레스토랑에서 경제학자의 강의를 당겨 들었다
ㅡ가격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대한 정보의 집약체죠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 얼마나 가치를 부여하는가
최고의 생산 방법은 무엇인가 값은 곧 그 물건,
그 존재입니다
가격이 없으면 당연히 교환도 안 이뤄지죠
실은 다 가격 때문이었던 거야 안 이뤄지는 사랑도
이별도 나와 그들의 가격 원하는 원치 않는 가격의
이마나 콧날이 등 뒤가 다른 가격
저 크레용 두께 같은 안개와 낭만의 가격이
모두의 발목을 묶어버리는 거지
ㅡ사회주의도 가격 제도를 얕보다 망했죠
인생의 먹구름들도 값을 얕봐서였나 먹구름이어서
값이 망한 건가 갑자기 유리창에 서리는
부러진 우산살들과 곰팡이 번진 구두와
6월의 장대비 냄새 11월의 나뭇잎, 그들의 가격 제도를
내가 얕봤던가 그들이 나를 얕봤던가
ㅡ오렌지주스 캔을 누가 백금으로 만들겠습니까
학자는 일월의 하늘 여기저기 가격표를 붙이고
나는 두 귀를 붉히며 그러니까 내 가격은 얼마쯤인가,
진열대 앞에서 우왕좌왕한다
오렌지 주스가 나와서 올려본 추억의 오렌지 주스 유리병.
오렌지 주스 다 마시면 이 유리병에 물도 담고 과일청도 담그고 나름 활용도가
높았다.
지금은 다 플라스틱이나 팩같은 걸로 나와서 유리병은 아예 멸종된 게 아닐까 싶음.
옛날에 서울우유인가 연세우유인가가 다 마시고 접은 종이우유팩으로 의자도 만들고
했었는데
어느날인가 사라져버린 그 행사 다음으로 아쉬운 오렌지주스 병.
(그런데 부자들은 백금캔 만들어서 오렌지 주스 담을 수 있지 않을까? 건강식품이
트랜드라는데 유기농 오렌지 담아서...)
이 시의 좋은 점부터 얘기해보겠다. 우리나라의 사노 요코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파격적인 시를 많이 써냈다. 시를 보면 여행을 많이
다닌다던가, 자신을 어머니와 닮았다고 주장하는 애인을 만났다던가 굉장히 일상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써낸 탓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 시를 보면 자연을 사랑하고, 녹색연합 구독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진보적인 생각을 많이 담고 있는데도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것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육식성의 아침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녀는 웰빙을 위해 채소를 먹는 사람들을 조롱하면서, 동시에 아침부터 고기를 먹는
자신을 클로즈업하고 있다. 소위 옛날에 유행했던 '막 이래~'라는 문장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집에선 케이크를 놓고 축제를 벌이고 있는데도 그
안에 있는 화장실같은 좁고 컴컴한 남의 방 같은 데에서 철사같은 김밥을 먹고 있는 자신을 묘사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그 시는 북적북적하고
시끄러운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작은 집에 들어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김경미 시인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혹은 진보라 불리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명박근혜 시대를 살면서 덴마크를 보고 느끼는 참담한 심정을 표현하는지도. 사실 기가 찰 일이다. 한때 민중시를
썼다는 시인인데 지금은 왜 이렇게 암담한 삶을 살고 있을까.
그러나 이 책이 비슷한 분위기와 상황에 처한 요즘 글쓰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기 좋은 이유는,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 이상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말로 남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다. 그녀를 이상하다고 수군거리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 비수를 꽂는
질문이다. 그것도 이중으로 말이다. 그녀가 시에서 대놓고 이상하다고 지적하는 것들은 사실 별반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 학자에게 만큼은 그녀가
조금 달라진다. '아. 그래? 아아. 그렇구나. ㅅㅂ. 그렇구나.' 같은 말투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사회의 정말 이상한 것들에게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학자에게 혹은 쇼핑을 하다 진열대에 문득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그래서 제 가격은 얼마쯤인가요?' 이는
이수영의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동시에 어감이 약간 다르기도 하다. 그녀는 당연히 분개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는 자기 자신을 비판함으로서 문학을 창작해내려는 모든 한국 예술가들이 갖춰야 할 기본 사항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시는 한없이 개인적이고 가벼워보이지만, 이는 그녀가 정치에 휘말려들고 연애의 암흑기에 휩쓸려보고 이 세상의 온갖 사기에 머리채 잡힌 채로
끌려가봐야 얻을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민중시의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채 점점 자신의 내부로 파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는 건 안타깝지만,
민중시의 그 새빨갛고 뜨거운 분위기가 싫다면 이 시를 읽어보길 바란다. 예술성은 상당히 높다.
이 시를 읽고서 아리아가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기에 한 번 남겨본다.
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 중에서
얇은 백합꽃 같은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면
봄도 겨울도 같은 계절 같은 생각
바다 위의 수상가옥 한 채, 물 드나드는 골목들,
언제고 발밑을 찰랑이는 물의 기척과
팔에 서린 노 자국
다만 수면을 스치는 햇빛의 굴절일 뿐
땅 위의 국경들 끝없는 듯해도
발밑은 언제나 같은 물속입니다
등장하는 음악과 시:
https://youtu.be/qNgXg1FkQc8
나,라는 이상함 중에서
독시체르 같은 이름
어딘지 지독한 음정과 박자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그 악기의
단단한 뺨
그 흉내에 번번히 실패하는 것
슬픔에 담갔다 꺼낸 것들은 안심이 된다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이들은
무조건 믿어도 좋다
https://youtu.be/HUCJkwBNtTE
실패들
머루나무처럼 크는 데 실패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연주에도 실패했다
얼굴 검은 고양이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
골목과 서재를 가진 집에서
수녀가 되는 데 실패했다
* 라벨의 피아노곡과 스카보르의 추억이 나오는 시는 뭘 어떻게 잘라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전문을 올리기도 난감하더군요.
직접 찾아서 보시길.
https://youtu.be/5NeifukySv8 (밤의 가스파르)
https://youtu.be/mGfUszwN5x0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The Gothard Sis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