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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레레 ㅣ 문예중앙시선 34
김안 지음 / 문예중앙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메멘토 모리
나는 내가 복무하고 있는 이 쓰기가 마뜩지 않네. 언어 바깥에서 존재하는 몽상과 내가 복무하고 있는 쓰기와 쓰기라는 복무함에게 요구되는
윤리들이 맞부딪치는 것. 결절과 관계되어짐과 사람처럼 사는 것이 뒤엉키는 것. 과연 그 이상일까? 내가 자네를 본 것은 이런 생각들을 하며
비틀비틀 밤거리를 홀로 걷고 있었을 때였네. 자네는 흠뻑 젖은 작은 인형을 안고 있었지. 내가 자네의 팔을 붙잡았나? 아니면 자네가 내게 담배를
빌렸나?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네는 찬 바닥 위에 인형을 내려놓았고, 인형은 희뿌연 연기를 뿜으며 물이 되어 우리의 발밑으로 흘려들었고,
우리의 발은 젖어 들었고, 젖은 채로 우린 같이 긴 시간 동안 앉아 있다가 일어났지. 귀에서 뚝뚝 물을 떨어뜨리면서. 그게 다네. 그리고 자네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나는 어디로 온 것일까? 요 근래 전집을 낸 소설가에게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그가 자네의 인형을 꺼내더군.
그러고서 그는 술 한 잔을 비우고 담배를 피워 물더니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지는 소리를 흉내 내며 그가 놓고 간 자네의 인형을
들고 거리로 나섰지. 나는 나의 쓰기들이 바깥을 향해 열려 있지 못하다는 지적을 되뇌며, 간혹 집 앞에서 보던 새끼 고양이가 어느 날 다리
한쪽이 뭉개져버린 사실에 내가 얼마나 울었던지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지. 나의 쓰기라는 것은 이 싸구려 멜랑콜리와 바늘 하나 들어가지 못할
만큼 굳어져버린 당대의 심장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 중얼거렸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아내 몰래 바람을 피웠었어도, 책방에서 몰래 내
책을 훔쳤었어도 거대한 윤리 앞에서 나는 자유롭지 않은가. 딱딱한 밤 속을 부유하고 있는 수많은 사념들. 인형은 내가 걸으면 걸을수록
무거워졌다. 이 밤 나는 자네의 인형과 말없이 앉아 있네.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로 내가 복무하는 수많은 쓰기들이 붕붕거리네. 그것이 나의
사념인지 인형의 사념인지 쓰기의 사념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나의 쓰기가 완성되는 지점이 공중이라는 것이 마뜩지 않을 뿐이네. 왜 저 공중의
쓰기들이 물이 되어 내 귀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가? 자네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나는 어디로 온 것일까?
위의 메멘토 모리라는 시를 읽다가 이 그림이 생각나서 황급히 찾아내어 가져온
그림이다.
저작권이 문제된다면 사전에 댓글로 미리 알려주시길 바란다. 즉시 지우도록
하겠다.
사실 길다란 시는 왠만하면 싫어하는 편이다. 읽기 불편하다는 요소도 조금 있기는 하지만, 스토리도 생각보다 짤막하며 함축미가 없다. 물론
서대경 시인처럼 기발한 무협 스토리같은 것들이 밑바탕으로 깔려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는 사실 얼마 없으며, 대부분은 굉장히 추상적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서대경 시인의 산문시 중에선 약간 지루하게 질질 끄는 듯한 투의 시도 있었다. 아마 그런 것들은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과
그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은 종류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김안의 시는 좀 특이한 경우이다. 천장에다가 자신의 몸을 매달아 놓고 교수대 밧줄을 세게 졸라 머리와 몸뚱아리를 분리시키질
않나, 눈알을 부수질 않나, 그런 점에선 카프카의 자학 정신을 투철하게 따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백번 양보해 카프카가 아니라고 해도
자살하거나 불우한 삶을 살았던 문학인들의 기질을 묘사한 것이리라. 사실 이 메멘토 모리에서 어느 정도는 그들을 추모하고 애도하는 게 아닐까,
멋대로 상상하고 있다.
문화당 서점이라는 시가 나와서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의외로 켄터베리 이야기를 사니 별로 살 것이 없어서 아쉬운 서점이었다.
두번째로 방문했었을 땐 어떤 아주머니가 자꾸만 자신의 책을 팔려고 하면서
돈이 얼마 안 나온다고 하니 검색창이 없어서 책을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 주인에게 뻑뻑
성질을 내더라.
최근엔 근처에 알라딘 헌책방이 세워지면서 경영이 더욱 불안해지는 서점인데...
서점 직원으로서 남의 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저 옆에 오코노미야키 집이 맛있게 하는 집이라 한다.
아무튼 이 김안이라는 시인은 마치 '성공하는 방법은 간단해요. 나처럼 안 하면 돼요.'라고 말하듯 집요하게 실패를 찾아다닌다. 책상
밑에서 거주하고, 글쓰기에 의무적으로 복무하면서 백지를 한참동안 공포에 질린 눈으로 들여다보기도 하고, 정치를 증오하면서도 결국 요즘
정치계를 비난하면서 정치계에 빠져든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비판이 모호하게 전개되다보니 우리나라 NL파같은 인간들에게는 우파라고 욕먹고
새누리당같은 인간들에게는 비웃음을 받는가보다. 이야 ㅅㅂ 잠깐만. 이거 남의 말이 아닌 거 같은데? 그는 이런 세계에 염증반응을 일으키면서도
결국은 자신도 세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세상도 결국 자신같은 염세주의가 필요할 것이라 주장한다. '나는 건담 아니 사람이다', '니가
사람 새끼냐' 따위를 말하는 애새끼들 중에 제대로 사람같은 존재가 있는가? (대체 어떤 게 '일을 한다'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일을 하지
않는 히키코모리라고 해서 그를 쓰레기라고 부를 자격이 당신에겐 있는가? 선한 사람은 진실로는 미친 게 아닐까? 광인은 어찌보면 이 공화국에서
가장 정상적으로 살 수 있도록 특화된 인간이 아닐까? 얼마나 평범해야 악해질 수 있는가? 일요일에 출근할 필요가 없는 인간들은 대체 얼마나 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짓뭉개온 것일까? 그의 시에서는 이런 물음을 수없이 던지고 있다. 나에게는 이미 너무나도 '일상적인' 질문이지만, 만약 과하게
희망에 찬 인간을 본다면 이 책을 선물로 주어도 좋을 것 같다. 가격도 8000원으로 저렴하다. 아마 어려워서 읽다 말고 집어던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의미를 눈치챈다고 해도 마침 요새 최고의 유행을 누리고 있는 시집이기 때문에 선물한 사람에게 화내지는 못하고 일단 소장하지
않을까 싶다. 지가 만약 철이 들어서 세상의 모든 인류가 다 썩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놀라서 눈이 똥그래진 채로 다시 한 번 이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겠지. 나도 시 메멘토 모리정도는 생각날 때마다 읽어보지 않을까 싶다.
P.S
무의식적으로 맞춤법 검사를 하다가 시를 고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관계되어짐'을 '관계됨'으로 고치고 나서, 내가 '되어짐'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의식하고 싫어하는지 깨닫고 깜짝 놀랐다. 분명 관계되어짐과 관계됨은 다른 말이다. 이게 소설에 쓰여 있다면 당장에 편집자가 수정할 것
같다만, 시에서는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듯하다. 플라톤이 싫어할 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