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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제12회 '천상병 시상' 수상작 ㅣ 창비시선 310
송경동 지음 / 창비 / 2009년 12월
평점 :
촛불 연대기
미선이 효순이 때
처음 촛불을 들었다 화염병도 죽창도 아닌
연약한 촛불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지
착하기만 한 사람들이 싫었다
촛불의 열기를 모아 권력이 된 노무현은
부안 핵폐기장 건설을 위해 2만이 사는 부안에
2만 5천의 공권력을 투입했다
미제국의 더러운 석유전쟁에
군대 파병을 결정했다 부안에서 여의도에서
다시 흔들리는 촛불들을 보아야 했다
이듬해엔 WTO 각료회담 저지를 위한
한국투쟁단의 일원으로, 한 손엔 핵과
한 손엔 자유무역협정을 들고
전세계 인민의 목을 조르는 무장한 세계화를 막겠다고
태평양 건너 멕시코 깐꾼까지 원정투쟁을 갔다
그곳에서 '다운다운 WTO'를 외치며 이경해 열사가 자신의 심장에 칼을 박았다
전세계 인민들의 가슴이 부르르 떨렸다
어떤 이는 회담이 열리는 컨벤션쎈터로 돌격했고
나는 커터기로 철책을 끊다 곤봉에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시시때때로 쏟아붓는 열대성 폭우 속에서
촛불 하나를 지키기 위해 두꺼비처럼 몸을 말았다
총구를 들이댄다 해도 꺼트릴 수 없는 증오의 촛불
가장 긴 촛불은 평택 대추리 촛불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800일 동안 촛불을 켰다
한반도는 동북아 전쟁기지가 아니라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공동체를
다국적 전쟁기계들에게 내어줄 순 없다고
포클레인에 철거당하는 대추초교를 부여안고 울었다
700명이 지키는 대추초교를 감싸고
1만 5천의 군경이 몰려오던 5월 4일 새벽
처음으로 손에 든 촛불을 놓고 죽봉을 들었다
이것은 아니라고 아니라고 허공을 향해 휘저었다
그럴 때마다 내 영혼도 따라
바람 앞의 촛불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대추리에서 쫓겨나자
한미FTA 떼강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FTA는 일터 하나를 뺏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 하나를 뺏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쌀과 영화와 의약품과 방송만 빼앗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모든 가치를 빼앗는 것이었다
경쟁력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 아니라는 말
경쟁력이 없는 대지는 대지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다시 촛불을 들고 거리를 뛰었다
싸움이 가물가물해질 때 허세욱 열사는
자신의 몸을 심지로 내놓았다
그는 우리 모두의 양심을 끝까지 소진케 했다
그렇게 몇년 나는 지난 시절
화염병과 돌과 쇠파이프를 들던 손에
촛불을 들고 유령처럼 밤거리를 서성였다
촛불은 진화하면 화살촉이 되는 걸까
들불이 되는 걸까 때로는
백만 촛불로 광화문을 뒤덮어보기도 했지만
광장은 다시 차벽과 공권력의 폭력에 밀리고
나는 다시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위해
그들이 오른 구로역 CC카메라탑 아래에서
콜트, 콜텍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이 오른
양화대교 천변 고압송전탑 아래에서
다시 용산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건물 아래에서
순한 촛불 하나를 들고 있다
단 한번도
민중 무력 없이 세상이 바뀐 적은 없다고
청원으로 민주주의는 성장하지 않았다고
불붙는 심장의 열기는 차마 꺼내지 못하고
가끔 촛농처럼 뜨거운 눈물 몇방울 떨구며
순한 촛불 하나를
어두운 밤 보탠다

김규항 씨랑 왠지 좀 비슷해보이는 외모...
진보(좌파) 지식인들은 어째 다들 비슷한 구석이 있는 듯.
안경과 특유의 머리가 유행인건가.
https://youtu.be/_AWCRrm8Tp0
사실 (학력과 전과 여부를 따지는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출신과 살아온 날을 보면 지식인이라고 말하기도 상당히 민망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송경동은 자신의 분노를 전문시위꾼으로서의 활약과 끈질긴 창작으로 발휘했고, 결국 시집을 여러편 발행하여 꽤나 유명세를 탐으로서 지식인의 등급에
올랐다. 깡패시인, 땜빵시인, 거리의 시인 등등 그의 이름 앞에 붙는 키워드는 상당히 강렬했고 특히 그가 처음 기획한 희망버스는 중산층이
'시인'과 함께 인생의 쓴맛을 직접 경험해본다는 데서 누가 봐도 상당히 창의적이었다.

사실 나의 현실친구들에겐 노래를 잘 부르는 게 2016년의 버킷리스트라고 했는데,
사실 개뻥이고 진실은 송경동 시인처럼 시원하게 예술적으로 민중시를 낭송해보는
것이다.
https://youtu.be/aEL-PW7seJ8
그가 희망버스를 기획한 이후로 시를 안 쓴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하지만 송경동 시인이라고 해서 왜 그런 내부의 갈등이
없었겠는가. 그는 시인답게 시집에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는다. 지금은 촛불을 들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경찰의 버스를 타고 넘어가 청와대로
나가서 싸우고 싶다고. 평화시위따위 다 얼어죽고 혁명이 살아남으라고. 냉동고를 열으라고. 그러나 그의 폭발적인 감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무난하게 명성이 있고 시도 정말 무난하게 쓰는 안도현 시인을 중요한 자리에 앉혔다. 난 안도현 시인도 좋아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빽이
있었기에 그가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박근혜가 정권에 앉았다고 하여 그 동안 절필을 하다니 정말 잘못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가
열심히 정권에 맞서 싸우는 데 참여를 했다면 모르겠다. 그가 몸을 사린 결과 도종환 시인같은 사람들은 '정치 욕심에 예술혼이 더럽혀졌다'는 욕을
먹고 있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돼지처럼 먹고 싸느라 정치엔 아무것도 관심없는 척하는 방관자들은 그나마도 모르겠지만, 굉장히 우리나라는 순결이라는
걸 따진다. 예전에 열사라는 호칭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자살한 비정규직 해고 조합원 사람을 어떻게 감히 열사로 부를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살이 문제가 아니라 해고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논란을 불러일으킨 '정규직' 주도자는 10년 후 내연녀가 민노총 여성위에
성폭력 행위자로 고발하여 공개사과문을 쓰게 된다. 이는 마치 조선 시대 열녀문을 세우느냐 마느냐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것과 흡사하여 지켜보는
사람의 역겨움을 유발했다. 문단 계열에서 시인의 예술 순수성을 운운하는 데 나는 아주 넌덜머리가 난다. 시간이 많이 흘러 이명박근혜 시대가 되자
그제서야 종교와 작가들과 시민들이 정치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많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내 입장에서는 이제라도 관심을 가져주니 감사할
노릇이다. 하지만 노무현 시대도 아닌 김대중 시대부터 알게 모르게 정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다수 운동권에서 발을 떼었다. 수없이 차별을 당한
그들은 이제 터무니없는 국가의 폭력성과 무책임성에 슬픔보단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머릿속으론 인정할 수 없지만,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고 얼굴을
보면 마치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가정폭력을 당하거나 혹은 소년원에 수감된 청소년 소년소녀들같다. 양 극단 최단 끝에 서 있는 사람
둘은 닮는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내 친구 중엔 진심으로 북침을 주장하는 군인들도 있는데, 이들은 정말로 가정생활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어
실생활에서 현재진행형으로 피해를 받는 사람들이다. 정말 청원은 소용 없는 걸까, 민중 무력이 답일까. 그 전에 국가가 이 둘을 모두 위로하고
품어줄 순 없는 걸까. 촛불집회에서부터 운동권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촛불집회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막막해지는 시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