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경향 A형 2015.12
레이디경향 편집부 엮음 / 경향신문사(잡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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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생활에서) 아무런 갈등이 없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몰이해가 생기면 그것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 저는 특히 여러분의 주의를 흩어버릴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추문과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매우 겸손하게 하십시오.

 

 

 

요즘 용기라던가 용자가 테마로 뜨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진정 용자라고 생각되는 짤방을 올려보지.

 

 일단 지적하고 싶은 것부터 먼저 지적하겠다.

 

 교황님이 1년 전 우리나라에서 파격적인 발언들을 하고 가셨음은 가톨릭을 좋아하던 싫어하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가톨릭이 무시받는 이유는 교황님 자체의 실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한국 교구가 이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우리 사회와 가톨릭 교회는 아직도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게 낙인을 찍지는 않는가? 추기경이란 작자가 "완전히 비이성적"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일삼으며, 그래도 다 자신처럼 호된 교육을 받고 어렵게 신부가 되었을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다. 방식이 어떻던 간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진정 중산층이 아니라 가난하게 살아가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비웃고 못살게 군다면 이는 강자가 약자를 우습게 보면서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내 말이 틀린가? 내가 보기에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인데도 경향잡지는 이를 무시하고 교황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대형차를 경차로 줄였다느니 성당대학을 세웠다는 등의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교황님이 위로하신 세월호 유가족들과 제주도 강정 사람들 등에 대한 천주교의 지원은 턱없이 모자란다. 이는 교황님이 강조하신 실천을 절반밖에 행한 데 지나지 않는다.

 

 연말에 종말론을 내세운 게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개신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는 듯하여 개인적으로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내세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도 아직 가보지 못했으니까. 물론 사회적인 이야기 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종말론은 어찌보면 굉장히 세속적인 제사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내용이 이상해졌다.

 

 또한 잡지 비용이 오른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될 바엔 띄어쓰기나 기타 맞춤법을 좀 제대로 첨삭하여 편집했으면 좋겠다. 분명 필자 본인들이 한국어로 직접 썼을 텐데 번역투의 글도 상당히 많았고 심할 땐 도저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를 정도로 문장이 뒤죽박죽이었다. 편집자들은 제대로 일하셔서 보기 거슬리는 군더더기들을 좀 싹 정리해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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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수수께끼 삶창시선 40
이진희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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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풍선껌 같은 웃음을 거두려무나

이제 무르익었으므로

너의 발그레한 얼굴에 검뎅을 발라야겠다

거울이란 거울은 모조리 깨뜨려버렸다

 

어깰 움츠려!

봉긋한 가슴을 사내들이 탐내지 않도록 

 

꿈결 같은 저잣거리, 너도 나처럼

무명 손수건에 고이 싼

붉은 열매

아무 사내에게 함부로 내민다면

안 되지

 

설마 했는데

계집애 다섯을 낳아야만 반드시

사내아일 얻는다는 관상쟁이의 틀림없는 말

뱀 새끼 같고 승냥이 같은 너희 중

가장 아리따운 것아

너는 

 

애인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점괘를 얻었구나

그러므로 

 

뭣 하니, 울음 그치고 어서

사다리 없는 탑 꼭대기에 스스로 유폐되지 않고 

 

쓸모 잃은 베틀에 먼지가 수북한 그곳에서 백골이 된

미래의 언니들을 쓰다듬으렴

 

 

  

실비아는 30살에 오븐에 머리를 넣고 죽음을 이룸으로서 삶을 완성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실비아가 그 실비아였다니 맙소사. 설명하자면 천재 시인 실비아 플라스에 대한 시를 이진희 시인이 썼다. 실비아이긴 실비아인데 30살이 넘어서도 살아있는, 어딘가 허당같은 실비아라고. 실비아 플라스에 매혹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녀의 삶도 만만치 않다. 시집만 읽고 추정컨대(혹은 정서만 그런 걸지도?) 어머니는 시인을 포함하여 딸 다섯에 막내아들 한 명을 낳았으며, 아버지는 집을 나와서 계속 겉돌고 있는 듯하다. 어머니는 국수집을 운영하면서 이들을 키웠지만, 역시 아이들의 정서까지 챙기기는 문제였던가. 아무래도 본인처럼 '넌 못생겼으니 웃지 마' 같은 말을 듣고 갖은 폭력을 겪으며 어렵게 자란 듯하다. 애인들과의 관계도 몇 번이나 잘 풀리지 않는 듯.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실비아도 그녀도 휴즈같은 남자를 만나는 게 문제고, 이 시집을 읽는 내내 그걸 지적해주고 싶었다만 내 취향도 만만치 않아서 말이다.

 

 이제 내년이면 나도 29살이다. 그래도 시인과는 달리 아직 30살이 되기까지는 1년 남았다. 미련이 남고 용기가 나질 않아서 그렇지, 내심으로 나는 정말 죽고 싶다. 그 때까지 자살할 용기가 생기던가, 휴즈같은 전 애인들에게 더 이상 잔혹할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일부러' 심하게 굴었고 산산조각으로 깨뜨렸기 때문에 어쩌면 그들이 날 죽이러 올 수도 있다. 혹은 이제까지 뻔뻔하게도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을 사랑하고 살았으니 주님이 큰 결심을 하고 우연을 가장하여 자는 사이 내 영혼을 슬쩍 빼갈 수도 있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마지막 시나리오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솔로 남성들에게 30살이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겠다. 사부니의 말로는 30살이 되어도 크게 변하는 것 없이 그냥 일하게 되지만, 그 전과는 달리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아서 불편하다고 한다. 그리고 무언가 큰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대부분의 솔로 여성들에게 30살이란, 페미니즘이 등장한 아직까지도 '노처녀 히스테리'와 '아직 팔리지 않은 크리스마스 케익'이란 단어를 인식하게 되는 나이인 듯하다. (개인적으로 제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진희 시인을 포함하여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와 시집을 읽어본 일부 여성들에게 30살이란 마음 속 괴물이 날뛰는 시기다. 30살이 지나고 시인은 그 괴물을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사랑할 것인가 함께 죽을 것인가.

 

 

실비아 수수께끼 

 

실비아

실비아이기도 하고 실비아가 아니기도 한

모든 실비아

혹은 특별한 어떤 실비아 

 

처절하게 이기적이고 싶은 실비아

착하구나 장하다 칭찬받고 싶은 실비아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는 실비아 그래서 자신을

어느 날은 소녀라고 어느 날은 소년이라고

틀림없이 믿는 실비아

아무것도 아닌 먼지거나 쓰레기였다가

전능하기 짝이 없는 실비아가 되고 싶은 실비아

죽도록 살고 싶은 실비아 그래서

사는 게 헌신짝 같은 실비아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은 아름다운 실비아

새카맣게 응혈진 피의 매듭을 끊어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고민을 진한 커피처럼 즐기는 실비아

시를 쓰고 싶지만

훌륭한 시를 쓰고 싶지만

쓰고 싶은 시를 쓰지 못하는 실비아

쓰고 싶은 시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는 실비아

다만 쪼글쪼글 늙어가는 실비아

쿠키를 굽지 않는

구운 쿠키를 먹일 아이를 낳지 않는 실비아 

 

무엇이 실비아를

머뭇거리는 실비아로 살게 망쳤을까 

 

실비아가 망치는 실비아

망가진 실비아가 복원하려고 애쓰는 실비아

망가진 실비아를 복원하려고 애쓰는 실비아

 

모두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실비아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실비아

한참 어리고 한참 늙은 실비아

한참 착하고 한참 나쁜 실비아

가스오븐을 분실한 실비아

일부러 분실하고 일부러 살아가는 실비아

혼자 처박혀 있을 때 세상과 함께하는 실비아

 

끝나지 않을

실비아 수수께끼

언젠가는 끝내야만 할, 끝내고 싶은

실비아 수수께끼 

 

 

* 올릴까 말까 고민했다. 난 사춘기라는 시가 더 좋다. 하지만 실비아 수수께끼를 올리지 않으면 어쩐지 시집에 대한 소개가 굉장히 허전해질 것 같아서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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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 2015.12
녹색연합 편집부 엮음 / 녹색연합(잡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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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개발ㅡ성장주의와 함께 지구 전체로 확산되면서 우리는 모두 '탐욕스런 경제 동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경제 동물의 가장 큰 특징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경제 동물은 타인과 더불어 사는 '온전한 사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경제 동물이 모여 사는 도시에는 '인간적 접착제'가 없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결속시키는 접착제를 되찾는 일이 급선무다. 나는 그 접착제 카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 은혜를 기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테이크아웃드로잉을 찾는 사람들 중 조용히 사진만 찍고 나오는

일부 사람들에게 이 귀퉁이에 있는 글귀들이 한 마디 하는 듯하다.

이 카페가 싸이 때문에 문을 닫는다는데 당신들은 한마디 말도 못하고 커피만 마시고 도망치는지.

 심지어 블로그에 검색해보면 '이색카페'라고 분류되어 있더라. 그들에게는 단순한 식당이 될 수 있지만, 남들에게는 그것이 삶이고 먹고 살 수 있는 한 밑천이 될 수 있다. 사람이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해도 사진찍고 페이스북에 올리고 서로 보면서 웃으면 그만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다. 그 사람과 내가 같은 블로거라는 사실에 욕지기가 치민다.

 요즘 SNS에선 글을 조금이라도 덜 올리려 생각하는 중이다. 어떤 사람의 불행한 사정을 쭉 훑어보기만 하고 방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싫다. 자기 혐오에 걸릴 것 같은 느낌이다. 비록 녹색당 모임엔 잘 참가하지 못하고 있지만... 내 주변의 사람과의 추억을 쌓는 데 요즘 시간을 많이 쏟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변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단골집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알고 지내던 어떤 언니의 카카오톡 프로필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고향'이라는 내용의 글귀가 쓰여 있다. 최대한 단골집을 살리려고 후원하고 사회적 공간을 공공재로 등록시키려 노력해도 우리나라의 열악한 복지 실태에선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틈이 날 때마다 좋은 일을 하는 카페, 좋은 일을 하는 식당을 찾아가서 소비하고 사장님과 말을 건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추억을 쌓는 일이 아닐까. 추억이라던가 기억같은 단어들이 너무 남발되서 사실 거론하기가 주저되기도 하다. 아픈 기억들 중에선 대체로 악몽이 많고 빨리빨리 잊어버리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 특히 보수라는 선입견 안경을 쓰고 있거나 돈에 눈이 먼 건물주같은 사람들이 괴물로 변하는 경험이란... 그러나 나처럼 진정으로 그들을 격려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자영업자 분들이 알아줬으면 한다. 대기업에 지지 맙시다!

 이번 호에선 유익한 정보들이 많아서 한번 정리해서 올려본다.

 

젠트리피케이션

1. 젠트리피케이션 한국 상황

 - 주거or상업지역이 재개발건축 사업+도시재생사업으로 환경 개선 (예술가들 활동)

->사람 모이고 땅값 임대료 급등->오래 거주한 세입자들(토지 소유자) 쫓겨남

2. 열쇠말

- 개발이익: 더 높은 용적률

- 권리금: 사회경제적 지역적

- 토지(분 임대료): 상가 임대료 대부분

- 도시: 위치 속성

- 지대추구=불로소득 추구: 마을공동체 소산을 소유권자가 가로챔

3. 역사

- 소유자 사회: 60년대 경제개발

- 토지소유=절대 갑

- 사용자=을

4. 지역자산화 전략

- 공공토지임대제: 토지사용자가 정부 소유 토지를 임차해 토지사용료 치름

- 토지협동조합: 지방정부와 함께 사회자본 조합원 참여->민간토지 지역자산화->지분따라 가치공유

: 재정부담 문제

: 지방정부, 지역주민, 지역에 기반하는 사회적 자본 공동 출자 필요

- 마을협약형: 스스로 재산권 제한(임대료 인상자제), 공간 사용 안정

: 마을 공동체에서 유리but부재지주들 무임승차

 

로컬리티 활동 영역

1. 공동체 소유, 공동체 자산 관리 장려

2. 공동체 기업 운영- 지역경제 내부에서 순환 협업, 자기결정권, 지역에 필요한 것 우선

3. 개방성, 혁신과 배움, 연대, 공생과 협력, 평등, 이익에 대한 사회복지와 시장 규칙(규제X), 환경 지속가능성, 사회경제민주주의

4. 공동체 고유성과 지역지식=자산

5. 지역주민- 현지 연결망과 기존관계로 공동체 참여 장려

 

공동체 자산 양도 장점

1. 미래에 대한 계획 잘 세움

2. 지역주민 일자리 만들기 위해 자산 만듬-보건 상태 개선, 소득 증대

3. 기존 시설 새롭게 활용, 재평가- 승수효과(파급의 총 효과) - 주민과 기업 유출X, 신규투자 가능

4. 다목적 기능->차이 줄이기-응집력 높임 - 자산 소유: 공동체 신뢰, 가치

5. 혁신 프로젝트 지원

6. 의미있는 공간 자리매김-활력

 

해결하지 못한 2015년 10대 환경문제

1. 월성 1호기

- 2022년까지 계속 운전

-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캐나다 서부에서 세슘 135, 세슘 137 발견(자연상태 존재X)

2. 케이블카 사업

- 월출산, 마이산, 신불산, 지리산, 설악산 등

- 덕유산 설천봉 소형 케이블카 곤돌라 스트레스 지수 1위

3. 5대강 개발 계획

- 4대강+섬진강

4. 가리왕산 파괴<활강 경기장 공사 중단 손실 판단

5. 초미세먼지

- 어린이 천식 위험

-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석탄발전 비중 높음

6. 군기지 오염물질

- 부산 미국 국방부 물자 재활용 유통사업 기지, 동두천 캠프 캐슬 기지: 오염정화 없이 반환받음

- 강정 연산호 사망: 제주해군기지 주변

7. 라운드업 제초제

- 지엠오 재배에 쓰임

- 글리포세이트: 거의 확실한 발암성

- 국내 관련 기준X

8. 지하수 말라감

- 대표 37곳 가운데 21곳 빠져나가는 양이 임계점 넘음

- 물 35% - 해수면 상승 원인 40%

9. 6차 대멸종

- 인간에 의해

- 100년간 척추동물 멸종속도: 인간 없던 시대보다 114배 빠름

- 생물 종 75%가 60년만에 사라질 가능성

10. 작은 플라스틱 알갱이로 인해 위기에 빠진 바다 생태계

- 비누, 치약

- 미국에서만 8조 개 버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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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시인선 24
서대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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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길은 말라 있었다 바람 불자 빙판에 엉긴 비닐 조각들 일제히 휘날렸다 쓸쓸해하는 애인의 손을 잡고 여관에 들어섰다 여관의 문 앞에서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 모퉁이를 급히 돌아가는 사내가 보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가만 감싸쥐었다 날이 쉽게 저물었다 여관방 유리창은 미세한 정적을 머금은 잔금들로 가득했다 그녀가 기침을 하며 몇 개의 얼음을 뱉어났다 잔금들이 환하게 빛났다 멀어져가는 나는 상관할 것 없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는 말없이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엷은 김이 방 안을 채웠다 

 

투명한 정사가 시작되었다 그녀가 내 위로 난폭하게 올라섰다 나는 고양이처럼 소리를 내었다 전봇대 곁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여관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리칼이 언뜻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와 나는 내가 이곳에서 그들을 엿보며 서성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거리는 너무 추웠다 나는 옷깃을 목 깊숙이 끌어올린다 나는 그녀를 쓰러뜨리고 그녀의 위로 올라선다 그녀가 내 목에 팔을 감으며 미안해, 미안해 속삭였다 흐느끼는 목소리 나는 그녀의 차디찬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갠다 네 잘못이 아냐 네 잘못이 아냐 그녀의 목에서 윽윽 사무치듯 얼음이 올라왔다 혀끝에 달라붙는 뜨거운 얼음

 

 나는 눈을 감았다 뜬다 나는 그들의 동작을 하나하나 볼 수 있다 나는 내가 그녀의 전신을 으스러지도록 안으며 속으로 속삭이는 파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그녀와 나를 나의 문법에서 이탈시킨다 나는 그녀와 나의 슬픔을 향해 그녀와 내가 벌이고 있는 투명한 정사를 향해 더듬더듬 속삭인다 너희들의 잘못이 아냐 너희들의 잘못이 아냐 어느새 가로등이 켜져 있다 저편에서 골목 모퉁이를 돌아오는 그녀가 보인다 전봇대에 기댄 체 그녀는 내게서 담배를 받아든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한다 여관 창문에서 침대 삐걱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우리는 천천히 그 골목을 빠져나간다

 

 

  

나중에 나올 파일럿이란 시에선 파일럿을 이마 정중앙에 앉힌다.

에반게리온으로 인해 덕후에 입문한 나로선 굉장히 생소한 로봇 조종방식이다.

로봇을 리모컨으로 조종했던 이후의 방식이라고 하던데.

로봇 덕후도 아닌 내가 뭐라고 왈가왈부할 수 없으니 링크 참조. https://zibitblog.wordpress.com/2013/10/08/atom01/

맨처음 정보를 제공해주신 니니 혹은 니니의 사부니에게 이 공을 돌립니다.

 

 그러나 Y와 벌였던 논쟁이 잠시 생각났다. 무슨 이야기를 했다가 그런 대화로 진행이 되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난 '사람은 머리로 살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 말을 내뱉었을 땐 단순히 그동안 감정적으로 행동했던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었다. 좀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자는 다짐 하에. 그러나 Y는 '사람은 가슴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시종일관 나에게 너무나 냉정했으니까, 혹시나 그게 부끄러워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일까? 그의 논리에 의하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야 진정으로 행동에 옮길 수 있지, 머리로 생각하면 머뭇머뭇거리게 되서 늦어진다고. 그러나 우리 둘 다 틀렸다.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이성도 감정도 모두 뇌에서 주관한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잠시 존경의 감정을 품었던 것도 뇌에서 일어난 하나의 착시 현상이었을까?

 그러나 서대경 시인은 놀랍게도 영혼을 믿는다. 그는 안타깝게도 다중인격자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수많은 목소리들을 듣는 듯하다. 그의 정제되지 못하고 산문으로 주절주절 흐르는 시가 그것을 반증한다. 원숭이라는 시를 보면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가 그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렇게 간단히 정의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서대경 시인도 좀 다르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쉴새없이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그 원숭이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자신의 어린 시절, '소설가와 사귀는 전애인'을 곰곰히 곱씹어본다. 그 둘은 다 그의 상처를 이루는 일부분이다. 담배연기와 같이 허망하고 희디희게 사라질 뿐이지만, 그는 그 꿈을 쫓고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아름답기 때문에 나와 너와 우리들은 죄가 없다고. 설사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서, 백치라서 가난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빈털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짓거리를 했더라도.

 머리로 생각한다는 게 고작 추악한 정념과 망상 뿐이다. 어떤 말을 해도 너와 내가 되어버린 우리 둘 사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기차가 지나가는 순간의 그 봄을 곱씹어봄으로써, 상처를 좀 더 깊이 아프게 헤집음으로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당신을 만났던 그 추운 날은 흐릿한 담배연기를 배경으로 하여 다시 꿈 속에 찾아온다. 그리고 서서히 몰입하기 시작한 독자들은 이 시집을 덮을 때까지 시집이 계속 소리치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가지 말아요. 나랑 좀 더 놀아줘요. 그는 귀신과 좀 놀 줄 아는 시인이다. 뇌에 탑재되어 있는 파일럿인데도, 멀쩡한 정신인데도 불구하고 시라는 엄청난 몸짓을 계속할 수 있다. 난 개인적으로 그의 꿈이 영원히 깨지 않기를 바란다.

 

  

아마도 파일럿 시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진정한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진마징가 Zero(...)

만약 서대경 시인이 몰랐다면 대예언이 아닐까...

수트가 지네같긴 하잖아?

 

 

파일럿

 

 그는 거대한 로봇의 이마 정중앙에 위치한 조종석에 앉아 있었다. 조종간 위쪽에 달린 유리창을 통해 부슬비가 내리는 바깥 풍경이 내다보였다. 로봇은 배터리가 나가 있었다. 로봇은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쪽 다리를 지면에 붙인 상태로 두 팔을 공중에 치켜들고 비행 자세를 취했었다. 그러나 그때 전력 공급이 중단되었고 로봇은 팔을 치켜든 채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뿌연 안개가 스멀거리는 대지 위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조종간 핸들 위로 두 다리를 걸친 채 창밖을 바라본다. 그는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로봇 부대의 파일럿이라면 대체로 그러하듯이 스물을 넘지기 않은, 눈이 크고 윤기가 흐르는 생머리를 가진 그런 부류의 미소년은 아니었다, 그는 아랫배가 처져 있었고 면도를 하지 않은 얼굴에는 여드름이 뒤덮여 있었다. 조종석 바닥에는 축축한 정액이 묻은 휴지 뭉치가 뒹굴었다.

 그는 지네의 형상을 한 적군의 기갑 군단과의 교전중에 낙오되었다. 적군은 점액질로 된 독극물을 사방에 뿌려대었었다, 그것은 신형이었고 놀라운 마력을 자랑하는 엔진을 달고 있었다. 그는 지네 다리에 칭칭 감긴 채로 교성을 지르던 그녀의 표정을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타고 있던 로봇이 지네 다리에 감긴 것이지만. 그러나 그녀는 소리를 질렀었다. 그녀의 팔이,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조종하던 로봇의 팔이 지네 형상인 그것의 머리를 향해 조준되었고 주먹이 발사되었었다. 그는 그녀의 교성을 생각한다. 마이크를 통해 전해오던 그녀의 젖은 음성을 생각한다. 미사일 버튼을 필사적으로 쾅쾅 내리치면서, 그녀가 내뿜던 거친 숨소리를 생각한다. 그는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하나 꺼내어 딴다. 그는 의자를 비스듬히 뒤로 눕힌 다음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녀는 적군의 포로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요즘도 그녀는 타이즈 바지를 입고 새벽 조깅을 할까? 그는 몸을 둥글게 웅크린다. 부슬비가 조종석 유리창 위로 가늘게 부서져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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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을 달리는 코뿔소 난다詩방 1
최승호 지음 / 난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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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모텔

 

교성으로 지은 모텔이

사라진 자리

고구마밭

꼬부랑 할머니가 고구마를 캐고 있다 

 

 

태양의 황금 손가락들이 옥수수 붉은 수염들을 어루만지는 가을날, 잘 익은 옥수수 통째로 찐 옥수수를 들고 고갯마루에 불쑥 나타나는 시골 할머니. 강원도 산길은 구불구불하고 뿌리가 고구려도 백제도 신라도 아닌 도민들은 메밀이나 감자나 옥수수를 먹기도 하지만 묵사발이나 막국수나 토종닭을 팔기도 하고 골프장에 가서 풀을 뽑거나 모텔에서 청소나 빨래를 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송전탑 너머로 개밥바라기 별 뜨면

큰 엉덩이에 부엉이문신을 한 여자가 부엉 부엉 울면서

밤의 두더지들을 잡아먹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할거면 호텔이라도 좀 가던가 이것들아...

사진은 크로스앙쥬 천사와 용의 윤무 중 아침 교미 장면()

시에서 모텔이 나오길래 갑자기 이 애니메이션이 생각났다.

 

 솔직히 저 올빼미와 밤의 두더지에 관련된 시 구절이 어디에 실려있는지 몰라 계속 찾고 있었는데 이 시집에서 우연히 찾게 되어 상당히 반가웠다. 동시를 지은 사람이라고도 들었는데 의외로 이 시집은 18금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아서 인상적이었다. 쌍봉낙타가 종종 여자의 가슴에 비유되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시에 실려있는 건 처음 보았다. 색신(녀)를 데려다가 '막걸리'를 마시게 하지만 밑 빠진 술자루에 술을 붓는 것 같고 술주전자도 밑이 빠진 것 같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야했다. (그러니까 코뿔소가 나온다고 해서 좋은 책인 줄 알고 자녀를 옆에 앉히고 읽으면 절대 안 되는 시라는 뜻이다. 그러고보니 코뿔소조차 야하다;;;)  

 이 책이 성인 시집에 속하는 이유 두번째는 철저히 종교를 조롱한다는 데에 있다. 불교에 염증이 생기신 건지 특히 그쪽에 대한 욕이 상당히 많다. 물론 신을 욕한다기보다는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음에도 자신들이 신인 줄도 모르는 바위 불상들을 불쌍히 여기는 식이지만... 홀로그램 반딧불을 보며 반디'불'이라고 좋아하는 스님들과 개똥벌레 부활하셨네 할렐루야 찬양하는 수녀들의 모습을 보면 그가 날카로운 펜으로 겨냥하는 목표는 언제나 종교이다. 종교인들이 세상을 자기들 식으로밖에 세상을 받아들일 줄 모른다는 대예언은 2차 총궐기의 '평화 시위'에서 증명되었다. 신자들이 받들어 모시면서 당장 죽게 생긴 가난하고 다급한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다 쳐내니 아주 그냥 배가 불러서는 신이 났더라.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승호 시인은 일찍부터 이 시를 지음으로서 그 분노를 밖으로 표출해내었다.

 세번째로 자연에 대한 숭앙. 멸종한 동물들과 상품으로 가공되어 포장되고 있는 곡물들을 열거함으로서 이기적으로 메말라가는 되우리나라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런 시도 나름 세상에 물들지 않으려는 그의 투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하나 마음 속에 새김으로서 잊지 말아야겠다. 살려면 몸이라도 팔아야 한다는 대도시라는 시를 읊어도 충분히 여가부에게 뺨맞을 일이긴 하지만, 그런 상상을 하고 그런 시를 짓는 시인이라도 한 가지는 올바르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는 메시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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