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밤 둘째날 밤 그리고 마지막 밤 - 무라카미 류의 사랑과 요리에 관한 소설
무라카미 류 지음, 이정환 옮김 / 샘터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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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금치에 깃들어 있는 마늘 향은 시금치에서가 아니라 접시 너머에서 풍겨 왔다. 향기란 이상한 것이다. 티가 나지 않는 것일수록 어느 기억과 연결되어 버린다.- p. 42~43

 
   

 

 위에 나오는 음식은 캐나다산 오말새우와 시금치 그라탕. 쿨 부용(향초 야채와 화이트 와인을 졸여서 만든 것)에 오말새우를 넣고 찐득하고 바삭거릴 정도로 가볍게 삶는다. 시금치는 마늘 향을 첨가하여 버터에 볶는다. 완성된 요리에 달걀 흰자를 얹고 살짝 구워 색깔을 낸다. 중학교 시절 반장이자 시대의 반항아였던 야자키는 커서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다. 부반장을 맡았던 얌전한 성격의 미치코는 커서 제대로 사춘기에 걸린 중학생 아들을 한 명 둔 평범한 주부가 되었다. 그들은 중학교 시절을 같이 보냈던 마을에서 만나 레스토랑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호텔을 간다. 3일 동안 벌어졌던 일은 매우 짧고 단순하다. 단순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하다. 그들은 이미 40대 중반이었다. 몸이 서서히 퇴화되며, 자신이 이루어낸 일들에 대해서 돌아보는 시간이다. 야자키는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하고, 미치코는 야자키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며 더 이상 만나지 말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마지막 독백을 들어보면, 미치코는 야자키의 창작력을 샘솟게 해준, 뮤즈 비슷한 여신이었나보다. 그런 뮤즈를 현실에서 만난 것도, 그리고 헤어진 것도, 우울하고 슬프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레스토랑, 그들이 먹은 음식은 결코 그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오징어 소테 르 듀크풍을 먹으면서, 두 사람은 잠시동안이나마 모든 현실의 문제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마냥 생각할 수 있었다. 나도 이 책을 보면서 완벽하게 실패한 내 첫사랑이 생각나서, 잠시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나는 그 당시엔 아무런 충고도 아무런 제약도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그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사랑은 마치 음식을 먹는 것과도 같다. 맛없는 음식이 나와도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기억을 끄집어낸다거나, 다음엔 맛있는 음식이 나올 것이라 상상한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서 행복했던 기억,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기억, 육감으로 느끼는 그 기억들은 내가 제대로 챙기고 있다면, 내가 살아있는 한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 무라카미 류는 아마 그런 느낌을 설명하려고 애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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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묵시록 하이스쿨 오브더 데드 2
다이스케 사토 지음, 소우지 사토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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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려고 하지 않는단 말야. (...) 그 누구도 자신을 부정당하고 싶어 하지 않아.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뭔가가 변해버렸단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잖아." "(...) 그럴때 가장 먼저 나오는 반응은... 현재 상황을 원래로 돌리려고 하는 거야. 그게 어떤 것이든. 때로는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어도 말이지. 왜냐하면,"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의 과오나 어리석음을 인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좀비만화이다. 처음엔 남자친구의 소개로 인터넷에서 접하게 되었는데, 좀비와 에로함을 일본스럽게 잘 결합시켜 놓은 작품이다. 19금이지만, 주인공 여인들이 정말 전투력이 0.000001 프로도 없어보이는 옷을 차려입고 나오지만, (1권에서 사에코라는 분은 무려 누드에이프런 차림으로 목검을 휘둘러 좀비를 때려잡는다.) 아무튼 스토리도 안정적이고 캐릭터 인체비율도 그럭저럭 괜찮아서 꾸준히 구입해서 보려고 한다. 일단 남성들을 위해서 여자캐릭터를 좀 소개하겠다. 사춘기소녀 캐릭터를 담당하는 레이, 전형적인 검도누님계 사에코, 안경츤데레아가씨 사야, 말 그대로 '폭렬몸매' 시즈카, 유일한 로리계 아리스. 뭐... 원래 이런 만화에서 남자주인공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겁니다.
 그 유명한 욘사마 좀비판 그림과 난데없는 여주인공들의 이벤트장면들(...)이 색다른 자극을 안겨다 준다. 어떤 면에선 참으로 보배로운 작품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림그리는 사람의 취향이 너무 편향적이어서 (다시 말해 여주인공들의 슴가가 너무 커서) 부담간다고 하지만 난 어차피 여자라서 그런 논의에선 빠지겠다. 일단 만화책은 그림체가 좋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좀 아쉬운 게 있다면, 번역이 너무 열악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이런 만화에서는 대사를 보지 않는다지만 내가 보기엔 좀 심한 수준이었다. 이래서야 인터넷에서 공짜로 다운로드 받아서 보는 게 낫지. 책 사서 소장하는 사람들을 김빠지게 만드는 요소들 중 하나가 번역이라는 사실을 왜 모른단 말인가. 뭐 대사 자체에서도 문제가 있다. 좀비가 닥쳐올 때조차 우파와 좌파로 나뉘는 일본인들의 상태는 잘 이해하겠으나, 급한 상황에서 억지로 훈계설정 넣지 말라니까.. 심히 부자연스럽다고 요 섬나라 오덕인간들아. 그러나 여러모로 말에 뼈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특히 위에 있는 글귀는 요즘 우리나라 정세에선 정곡을 찌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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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 무라카미 류의 요리와 여자 이야기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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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쾌락이란 금지되어 있는 것에만 잠복되어 있다, 라는 당연한 말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 곳 요리를 먹으면 말일세."- 코르쥐다르의 밤은 요염하다 p. 16

 
   

 그의 소설쓰는 형식을 봐서 생활상이 대충 짐작이 가겠지만 무라카미 류는 호텔과 레스토랑을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그의 책에서 소개되는 음식들은 대게 다채로운 편이다. 이탈리아의 음식이라거나 어느 해외의 레스토랑에서나 먹을 수 있을 듯한 사치스런 음식들도 나오지만, 우리나라의 삼계탕이나 야구장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핫도그처럼 소박한 음식들도 많이 나온다. 진정 미학을 추구하는 사람에게서 나올 법한 태도이지 않은가. 음식으로서 자신의 계급이나 드러내고 싶은 사람들은 무작정 고급스런 식당, 깔끔한 식당을 찾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 그리고 미식가들은 알고 있다. 아름다움은 그때그때 다르게 다가오며, 가격으로 매길 수 없다는 것을.
 잡소리가 길어졌다. 이 책은 옴니버스 식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음식과 여성을 관련시켜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무서운 여자들, 혹은 그런 여자들에 의해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남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생굴이 되어버린 스튜어디스, 같은 제목도 등장한다. 위의 단어에서부터 벌써 엑스터시의 향기가 물씬 풍겨오지 않는가. 스튜어디스는 주인공과 섹스를 할 때 자신의 몸이 온통 생굴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고 고백한다. 이보다 더 명쾌하고 노골적인 비유가 어디에 있을까. 아무튼 무라카미 류의 여타 소설과는 달리 전반적으로 밝은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그의 치명적인 단점이 어둡고 딱딱한 분위기였는데 말이다. 
 본인이 제일 먹고 싶었던 음식은 이탈리아의 송아지갈비였다. 비유한 여자는 무려 안네 프랑크처럼 피폐한 마약중독 소녀. 송아지 갈비의 거칠거칠한 껍질을 먹어치우면, 안에는 녹은 치즈와 와인 향기를 풍기는 버섯이 있고, 피가 밴 고기가 있다고 한다. 거칠거칠한 피부와 무관한 소녀의 혀와 점막을 맛보며, 주인공은 행복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모두 다 한 시절의 추억일 뿐이고, 그 여자는 어쩌면 평범하게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순간, 여자와 남자가 온기를 나누는 그 순간은 얼마나 행복한가. 이 책은 그 느낌을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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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
나사니엘 호손 지음, 천승걸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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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죄가 그 가지를 저렇게 시들어 죽게 만든 것인가? - 로저 맬빈의 매장 p. 61

 
   

  이 정도면 눈치챈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한꺼번에 밀린 후기를 쓰고 있다. 그 동안 토익공부와 시험공부를 같이한답시고 너무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 (물론 본인은 공부만 죽어라 하는 스타일이 절대로 아닌지라 적당히 놀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러다가 정신차리고 밀린 후기를 쓰고 있지만 그동안 읽은 책들이 너무 많다... 헉헉. 나는 11시까지 너새니얼 호손 후기를 다 쓰고 집에 갈 수 있을 것인가. 아무튼 시작한다.

 <주홍글씨>는 <데미안> 이후로 내가 읽다가 짜증내면서 덮은 두번째 책이다. 물론 <데미안>처럼 스토리가 막장으로 간다거나 어렵게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분은 소설을 쓸 때 굉장히 말을 길게 끈다는 특징이 있다. 비록 그런 문체가 우회적으로 비꼬는 효과를 거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진도를 나갈 때마다 점점 스토리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이 단편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처음에는 과제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집은 책이었다. 재미없는 책을 억지로 읽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던 중.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언니가 내 책을 보더니 "너 <나사니엘 호손 단편선> 읽는구나?" 이렇게 말을 거시는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껴안고 고개를 끄덕거렸더니 "이거 재밌어"라면서 <목사의 검은 베일>을 가리키셨다. 그 이후부터 왠지 좋은 예감이 들어서 무작정 펼쳐서 읽었다.

 엄청 편안하고 가볍게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본인이 좋아하는 공포와 호러의 요소가 있어서 책을 펼치는 행위에 속도가 붙었다. 너새니얼 호손은 냉정하게 보면 전혀 공포같지 않은 장면을 공포스럽게 표현하는 재주가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미국 초기의 도시가 신시티같은 느낌으로 표현되었다고 할까. 창작의 고뇌와 남성예술가에게 작용하는 여성의 뮤즈역할이 우화로서 리얼하게 드러나는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 액자형 소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다 할 수 있는 <라파치니의 딸>. 누가 죄를 지었는지, 혹은 누가 죄를 숨기고 있는지를 추적해보라. 소름끼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남의 눈에서 대들보를 발견했을 때 가장 큰 희열을 느끼는 법이다. 그러나 그 시선은 부메랑처럼, 결국 독자에게 되돌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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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하
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 보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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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하 태학에는 늙은 학구가 있었는데, 이름은 왕곡정이다. 왕곡정은 한인인 어린아이 호삼다에게 글을 가르쳤다. 호삼다는 나이 열세 살이었다. 또 만주 사람으로 왕나한이란 자가 있었는데, 나이는 바로 일흔셋으로 호삼다에 비하면 한 갑자가 더한 무자생이다. 곡정에게 강의를 받는데 매일 신새벽이면 삼다와 함께 책을 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을 맞추어 곡정을 찾는다. 더러 곡정이 이야기때문에 틈이 없을 때는 노인은 언뜻 몸을 돌려 호삼다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주저하지 않고 글을 한 차례 받아 가지고 간다. - p. 208  
   

 전에 열하일기 중권을 도둑맞았었다는 것까지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정말 어지간히 정신없고 혼란스러웠나보다. 열하일기 하권의 후기를 쓰지 않았다니.. (눈물) 좋은 글귀에 있는 것도 페이스북에 적은 짜투리 후기덩어리들을 뒤적거린 결과 간신히 발견해냈다. 아무튼 난 정확히 10월 21일에 이 책을 다 뗐다. 다른 책들의 반납기간이 밀리는 것도 다 감수하고 열하일기 상중하를 열심히 뗀 게 언젠데 후기를 쓰지 않았다니. 정말 자학스러울 정도로 세게 내 머리를 한 대 때리고 싶다. 그렇지만 어차피 밀린 것은 밀린 것이고, 워낙 강렬한 문체이다 보니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살아있다. 그러므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도의 느낌들을 충분히 옮겨내겠다.

 청나라에서도 특별한 경우라 하지만, 위에 있는 글은 정말 보면 볼수록 감탄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그놈의 인권 때문에 마음대로 학생들을 때릴 수도 없다"라고 불평하는 선생이 있는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라. 정말 보기가 민망하고 화가 날 정도로 차이가 나지 않는가. 박지원은 초반엔 오랜 시절부터 역사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과거들을 낱낱이 들추며, 망한 명나라의 환상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선비들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본인은 요즘에도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정말 시대에 따라 빠릿빠릿하게 행동할 줄 모른다. 눈치볼 줄도 모르고 염치도 없다. 좋은 점은 다 빼버린 채 네거티브로 FTA 체결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명나라와의 신의를 지킨다'는 변명과 '미국과의 대의를 지킨다'라는 변명의 차이점은 대체 무엇인가.

 단 한 가지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곡정필담>에서 곡정이 지적했듯, 박지원 또한 중국의 옛 사상인 유교에 너무 깊이 빠져있다.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탓인지, 그의 이론은 너무나 단순명확하고 순수하다는 생각이 든다. 원리만으로 세상이 바로잡힐 수는 없는 법이다. 중국도 많은 피를 뿌렸고, 청나라도 결국 세계를 오랑캐 취급만하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서양에게 망했다. 이 책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직접 생겨난 철학과 사상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단, 현재 세계의 상황을 볼 때 피를 쏟아내진 못하고 그래서도 안 된다. 전쟁이 아닌 갈등을, 육탄전이 아닌 심리전과 두뇌싸움을 벌이면서 직접 찾아내야 한다고 본다. 우리들의 근본적인 철학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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