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십대 사이 우리들사이 시리즈 2
하임 기너트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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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지도를 받지 않고도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들을 대출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면서도, 재정적으로 자립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부모라는 은행이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 주어도, 대출 받은 십대들은 이자에 대해 화를 내는 경향이 있다. 십대들은 도움을 주면 간섭한다고, 관심을 보이면 어린애 취급한다고, 조언을 하면 지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율을 두려워하긴 하면서도, 최고의 가치로 평가한다. 자율을 방해하는 사람은 누가 되었든 그들에게 원수가 된다.

 
   

 

 기타 접어놓은 대사들이 있었는데 깜빡 잊고 반납해버려서... 다 쓰지 못했다. 뭐 어차피 이 책은 십대들의 특성 때문에 '실전용'이나 다름없는 책으로 나와서, <부모와 아이 사이>와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 기노트 스스로도 예시에서 그렇게 밝혀놓았기 때문에, 틈 잡을 것은 없었다. 오히려 기노트 특유의 깔끔한 정리능력이 더욱더 돋보였다고나 할까. 일단 십대를 이해하는(혹은 이해하는 척이라도 하는) 방법, 그들을 다루는 공식적인 원칙들을 지적해 놓았다. 십대들을 무턱대고 함부로 빠져들 수 있는 술, 담배, 성관계, 그리고 약종류들로부터 떼어놓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쓰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10년 정도 전에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기관에 대한 정보는 이 책만 봐서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미국에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적용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있다. 반드시 한국의 상황에 적합한 육아책과 같이 병합해서 보고, 여러 정보들을 더 모으길 추천하는 바이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부모로서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기본적인 기술과 원리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실제에 적용하기 힘들다는 책은 아니다. 후반기에 가서는 십대가 있는 각양각색의 부모들이 직접 토론한 내용을 실음으로서, 부모들의 태도 자체를 지켜보고 좀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다 좋은데 한 가지 마이너스 요소가 있다면, 아이의 옷차림을 지적하는 태도에 대해서 가르치는 장이었다. 솔직히 누구나 대학을 졸업하면 꼰대가 된다. 아무리 "내 마음은 청춘이다"라고 주장하더라도, 십대들에게 아저씨 아주머니로 불리는 데엔 장사없다. 한 사람의 마음도 모르는데 어른들이 어떻게 아이들의 패션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설령 다른 십대들에 비해 무지 뒤쳐지는 옷이라도, 어차피 친구들에게 지적을 당하면 아이가 스스로 옷 입는 스타일을 바꾸기 마련이다. 아이의 몸에 해로운 것이라면 모를까, 나는 맘에 드는 옷 입을 자유 등등은 보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것을 보면 기노트도 꼰대로서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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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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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인이여,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 ㅡ몰라요.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 출신인가? ㅡ몰라요.
왜 땅굴을 팠지? ㅡ몰라요.
언제부터 여기에 숨어 있었나? ㅡ몰라요.
왜 내 약지를 물어뜯었느냐? ㅡ몰라요.
우리가 당신에게 절대로 해로운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가? ㅡ몰라요.
당신은 누구 편이지? ㅡ몰라요.
지금은 전쟁 중이므로 어느 편이든 선택해야만 한다. ㅡ몰라요.
당신의 마을은 아직 존재하는가? ㅡ몰라요.
이 아이들이 당신 아이들인가? ㅡ네, 맞아요.

 
   

 

 간단하게 시 하나 올리고 시작. 비슬라바 쉼... 발음하기도 힘든 이 분. 아무튼 비슬라바 씨는 폴란드 출신으로 상당히 현실적인 시를 많이 썼다고 한다. 전쟁의 참혹함과 노동문제와 페미니즘 뿐만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면 되는지 언어과 글자를 어떤 식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민한 흔적이 돋보인다. 자신의 일상을 소박하게 일기처럼 적어낸 시들도 꽤 있는데, 노동운동에 참여했다거나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했다는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전업시인의 삶을 살면서도 꽤나 열심히 일하시는가보다. 딱 내가 어렸을 때 소망했던 삶을 살고 계시는, 그런 사람이다. 1923년도에 태어났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살아계신다고 한다... 수명이 거의 촘스키와 동급이로군. 그녀는 당당하게 여류 시인으로서 노벨문학상을 탔다. 사실 매우 편파적인 노벨상에서는 꽤 이례적인 일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의 시가 단순히 현실의 어려움만 담아낸 게 아닌 탓이리라.

 위의 '베트남'에서도 보여지듯이, 그녀의 시는 읽을 수록 미묘한 분위기가 풍겨난다. 일단 굉장히 쉬운 듯해 보이는 무언가를 소재로 삼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시를 읽으면서 시에서 표현되는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게 만들고, 그녀가 왜 이런 시를 썼는지 현실에서 무엇을 담아냈는지 고민하도록 만든다. 대중들이 자신의 생각을 시로서 알아볼 수 있도록, 쉽게 쓰려는 그녀의 의지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단점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시 자체의 특성인 운율과 여유로움, 예술성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었다는 점. 하지만 리얼리즘 혹은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문학에서 이 정도면 상당히 고퀄리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시를 읽기 위해 역사를 깊이 알 필요도 없으니, 시사시에 입문하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일단 이 책부터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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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구) 문지 스펙트럼 11
작자 미상, 이동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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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한 사람은 이세상의 모든 재물이-지금 이세상 도처에서 벽이 바람에 부딪치고, 하얀 서리에 덮인 채 서 있으며, 집들이 폭풍우로 허물어지고 있는 것같이-황폐하게 되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를 깨달아야 하느니라. - p. 339~340

 
   

  일단 책이 겉모양부터 누렇게 뜬 것이 매우 고전적인 맛이 있다. 오른쪽에 베오울프를 원문 그대로 올린 것도 신기하지만, 역자가 번역을 하면서도 (원문)란에 시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결과를 올려준 게 가장 흥미로웠다. 딱 하나 마이너스 요소가 있다면 시를 산문처럼 그냥 쭉 열거해서 올렸다는 것 정도? 게르만 신화 특유의 잔인성으로 인해 장면 곳곳에서 피가 많이 튀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세상사를 대화체로서 제법 현실감있게 썼기 때문에 세련된 면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 구절. 그런데 아무리 수도승이 필사했다고 하지만 걸핏하면 하느님 운운하는 구절은 좀 많이 불편하다. 분명 그 시절 게르만 민족들은 베오울프 이야기를 할 때 자기네 신들의 이름으로 기도했을 텐데.

 무엇보다도 이 놈들 영웅이라면서 왜 이렇게 돈을 밝히는지... 황금이 쌓여있는 용의 보물창고를 보고 죽겠다는 베오울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간 정신이 아연해졌다. 자신이 죽은 이유가 자신의 백성 중 한 사람이 저 금을 탐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책에서는 베오울프가 죽은 이후 상황이 많이 안 좋아졌음을 '방랑자' 등의 시를 붙임으로서 표현하고 있다. 앞에서 한창 잘나가는 용사의 이야기를 읽고 난 후에 이 <방랑자>라는 시를 읽으니, 허무함과 씁쓸함이 더 고조되는 것 같다. 방패와 투구의 장식에서 드러나는 애니미즘이라던가, 소소한 데에서 게르만의 전통적인 풍습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리고 괴물보다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는 교훈을 여기서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베오울프와 관련된 책으로는 <그란델>이라는 이름의 심리적 소설과 동일한 제목의 소설이 또 한 권 있는데, 원본을 읽었으니 다른 책들도 좀 더 읽기가 쉬워지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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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 총서 1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 엮음 / 동인(이성모)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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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는 "파시스트 국가의 전제정치"에 대항한 싸움과 "가부장적 국가의 독재"에 대항한 싸움을 동일선상에 놓고 남성문화 전체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울프는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지배적 문화와 전통이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폭정으로, 정치적으로는 파시즘과 같은 독재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가부장적 아버지가 바로 독재자라는 점을 설명한다.- p. 415~416

 
   

 <버지니아 울프>는 동인 출판사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소설, 일기 등에 대해서 대게 권위 있는 교수들이 발표한 논문 자료들을 모아서 펴낸 책이다. 소설 자체에서 나타나는 버지니아 울프 특유의 문학 기법에 집중한 논문도 있고, 버지니아 울프가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로서 당시의 역사적 문학적 상황을 반영한 점에 집중한 논문도 있다. 본 논문에서는 노턴에서 주로 언급한 시대적 상황과 연관 지어서 <버지니아 울프> 주제를 총체적으로 정리해보려 한다. 특히 여성의 권리가 사회의 새로운 권리들 중 하나로 등장하는 과정, 그리고 여성의 권리보장이 사회에 미치는 직접적 간접적인 영향들을 예측하면서 적어보려 한다.
 우선 나의 독단적인 의견도 다소 첨가해보려 한다. 사실 내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 중에서 제대로 정독한 소설은 <등대로>와 <댈러웨이 부인>, 이 둘밖에 없다. 살면서 보통 사람들보다는 많은 책들을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어려워서 아무리 읽어도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책 혹은 도저히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용납하지 못하는 책이 몇 권씩 있다. 후자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버지니아 울프의 책은 전자에 해당한다. 그나마 <등대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논문들 중 하나를 쓰신 김정 교수님에 의해서 차근차근 배워서 읽었다. <댈러웨이 부인>은 이 책을 읽기 전 최근에 미리 읽어보았는데, <등대로>보다 비교적 읽기 쉽다고 생각했었지만, 이 책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나보다. 세부적인 사항들 속에 버지니아 울프의 저항의식이 숨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미세한 것까지도 몸을 굽혀서 들여다 보는 시각을 가져야 버지니아 울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녀는 감정을 소설 언저리에서 희미하게 표현해내는데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녀는 사회에서 유발된 분노와 공포를 맨 손으로 붙잡은 뒤 뭉쳐서 크게 만들고 딱딱하게 굳혀서 화석으로 만든 뒤, 소설 속 깊이 박아 넣는데 탁월한 솜씨를 지녔다. 설사 겉보기만 대충 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이 딛은 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 위를 불편하게 지나다니고는, 버지니아 울프의 책이 어렵기만 하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심정에서는, 여성차별의 씁쓸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데 대한 불안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와 제임스 조이스가 등장하기 전 시대는 빅토리아 시대이다. 사실 19C가 시작하기 전에도 여성은 소설을 썼다.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그리고 조지 엘리엇은 ‘여성문학’이라는 장르 하나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 브론테 자매 중 한 사람이 여성소설가로서 살아가기 위해 조언을 구했을 때, 로버트 소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문학은 여성의 삶에서 일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거다.” 여성이 재산을 소유할 법적 권리도 이제 막 보장되기 시작한 시대였다. 참정권이 공식적으로 보장된 때는 2차 세계대전 이전이었으므로 더욱 오래 시간이 걸렸음은 물론이다. 교육확립의 자유를 얻음으로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공부를 하는 여성 학생들이 많아지고 여성대학도 세워졌다. 그러나 <제인 에어>에서 나오는 여성학교 내의 온갖 인격모독적인 일들을 볼 때, 그리고 <자기만의 방>에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예산에 비해 여성대학의 예산이 한참 적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을 볼 때, 독자들은 당시 세부적인 점에서 어떤 차별들이 행해졌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산책에서조차도 여성은 차별을 당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의 영향력을 피하기 어려웠던 20세기 초반과 달리 <댈러웨이 부인>에서 런던 거리를 홀로 산책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1차 대전 이후 여성들이 영역 분리의 이데올로기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 핸킨스의 지적처럼 거리를 산책하는 행위에서 울프는 여성으로서 젠더를 보이지 않게 하는 보행자로서의 익명성이 주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점에 주목한다. - <버지니아 울프> p. 131
 

 빅토리아 시대에서 밖을 돌아다니는 여성은 창녀 취급을 받았고, 독신으로 사는 여성은 레즈비언 혹은 고집 센 노처녀나 히스테리컬한 페미니스트로 보았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에서는 울프의 소설 캐릭터 중에서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전형적 인물로서 <등대로>의 램지 부인을 손꼽는다. 그녀는 인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타인들을 충만하게 만들어주고 감싸안아주는 힘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힘이 다해 죽기 전까지 계속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 병원의 의료시설과 낙농업에 독자적인 의견도 있고 그와 관련된 사업을 꾸려나갈 자신감도 있지만, 가부장 사회에서 그녀는 ‘집안의 천사’라는 미명하에 온전한 인간으로선 도저히 성취감을 느낄 수 없는 가정사에 묶여있는 것이다. 가정의 일도 중요하지만, 그녀의 눈앞 저 너머엔 다르게 살 수 있는 인생의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대에 만연한 차별 때문에 그녀의 가족, 그리고 그녀의 집에서 벌어진 파티에 참여한 사람들 외엔 전혀 알려지지 않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이 점에선 앞에서 이야기한 유명한 여성작가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성들이 글을 쓰기엔 힘든 현실이기에, 그녀들은 남자의 가명을 사용해가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이들 여성문학가들의 피엔 “익명성이 흐른다”고 말하며, “가리고 싶은 욕망이 그들을 지배한다.”라고 서술했다. 
 이 상황에서 근본적으로 스며들어있는 뒷 배경은 식민지를 지배하는 제국주의적, 남성적 사회에 있다. 에세이에서 그녀는 가상적인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장면을 등장시킨다. 한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그녀를 토요일마다 때린대. 지루해서라고 해야겠지, 술 때문이 아냐. 때리는 것 외엔 별로 할 일이 없거든." 우선 보수적이고 남성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고 세계는 광활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점점 넓어지는 세상에 의해 자신 스스로와 자신의 권력이 축소될까 두려워 변화의 비전을 상실한 채 일상에 갖혀 살아간다. 자포자기한 남자의 지루함은 타인, 즉 집에 갖혀있는 여성에게 가하는 만성적 폭력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까지 파괴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 행위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의식으로까지 이어진다. 1차세계대전 후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이전, 이 시절 영국은 전원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가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파시즘이 생겨났다고 한다. 파시즘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극도의 편협함과 전쟁을 떠올린다. 그러나 전원주의를 생각했을 때 우리는 파시즘이라는 단어보단 덜 부담스럽고 자연적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전혀 맞지 않아 보이는 이 두 이념이 갑자기 동시에 전국으로 퍼진 것을 보면, 전원주의 자체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홍보용 조작이었을지 모른다. 옛날 좋았던 영국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무슨 시대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무적함대를 부쉈을 적인 엘리자베스 시대? 아니면 인도를 신나게 짓밟았던 그 시대? 버지니아 울프는 영국이 다시는 ‘좋았던’ 옛날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막간에서) 포인츠 홀 내부의 서재나 침실에서 보이는 췬츠라는 면직물은 원래 인도에서 염색, 생산된 직물로 동인도 회사를 통해 타페스트리나 도자기 등과 함께 동양에서 유럽으로 수입되어 유행한 것으로 17세기 이래 영국 저택의 실내 장식에 널리 사용되었다. 췩츠가 영국의 가장 아늑한 공간에 남긴 이 흔적은 본래의 영국적인 문화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믿어지는 곳에서조차 영국 문화는 제국 주의의 영향으로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 <버지니아 울프>, p. 345
 

 무엇보다도 버지니아 울프는 <막간>에서 역사라는 드라마에 대해서 정의를 내린다. 드라마는 배우와 이에 박수치는 관객의 합작품이므로, 관객은 박수를 칠 수도 있지만 야유를 보내거나 극장을 떠나버릴 수도 있음을 일깨운다는 것이다. 배우 못지 않게 관객도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전혀 ‘다른’ 역사를 쓰는 것마저 가능하다. 폭력적 담론이란 위에서 받아들이고 바라보기만 했던 방관자가 선택하기 가장 쉬운 길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전기 땐 자기 세계에 갖혀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델러웨이 부인>이나 <올란도>, <막간>에서 남성적인 사회의 문제를 이렇게 확실히 지적하고 있다. 그녀가 사회 시대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고민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그 작고 미세한 사물들을 등장인물의 내면의식과 엮어 그렇게 적절히 표현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작가는 자기의 생각에서 떠오르는 것을 쓸 뿐이니까, 아무래도 울프의 사회의식들도 그런 식으로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성행함과 동시에 여성들의 권리를 개선하려는 움직임도 더욱 활발히 일어났으며, 이런 분위기는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워먼 퀘스천‘에서는 이미 빅토리아 시대에 sisterhood가 가부장적 사회에 대항하는 한 방식으로 한편에서 각광받기도 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에서 한 논문은 버지니아 울프의 양성적인 면모와 함께 <올랜도>에서 이런 특성을 잘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등대로>에서의 릴리 등 양성적인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서 “여자는 여자의 적이다”라는 패러다임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남성은 여성이 아무런 욕망도 없이 오직 허영심만 갖고 있다고 여성의 욕망을 무시하고, "여성은 동성에게 애정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서로 극도로 혐오한다"고 여성의 동료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폄하시킨다. 남성의 자극이 없으면 여성은 말도 안하고 서로 할퀴기만 한다는 그릇된 남성적 믿음은 "올랜도가 동성과의 교제에서 커다란 즐거움을 느낀다고 고백하였다"는 전기 작가의 언급에서 거짓임이 드러난다.- <버지니아 울프> p. 239
 

 물론 그녀는 극단적으로 여성적인 세계엔 찬성하지 않았다. 세상에 남성만 사는 것도 아니고, 여성만 사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여성과 남성 모두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관용적인 세상을 꿈꾸었다. 예를 들어, <자기만의 방>에선 한 택시에서 같이 내리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리고 <댈러웨이 부인>에서 등장하는 영국은 정확히 시간을 맞추는 딱딱하고 남성적인 ‘빅밴’, 그리고 빅밴보다 몇 분 늦게 작동함으로서 사람들에게 아직 여유가 있음을 알리는 ‘성 세인트 폴 성당의 종소리’가 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독재자로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차별이 어느 정도 해결된다면, 다른 차별들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증폭현상도 해결될 수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소설의 기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드러냈다. 그녀는 기존 에드워드 시대의 사실주의 작가들을 물질주의자들이라 명명하면서, “일상적인 날의 일상적인 기분”을 표현하는 글들을 썼고, “Look within”을 주장하면서 모든 삶에 있어서 문제의 근본인 정신적 삶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하려 애를 썼다. 과거와 과거가 드러내어지는 과정에 있어서 그녀는 월터 페이터의 내면의 비전, 순간에 작용하는 힘을 보려고 애썼고, 인물과 독자 사이를 중개하며 인물의 생각들을 해석하는 ‘내적 분석’으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이는 여성성을 부각시켜 이미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성성과 동일해지려는 버지니아 울프의 노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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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선옥 옮김 / 집사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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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밋빛 얼굴이라고, 하고 부인은 냉소했다. 다 쓸데없는 거란다, 얘야. 왜냐하면 먹고 마시고 같이 자고 그리고 좋은 날 궂은 날도 있어서, 인생이란 장밋빛 얼굴 같은 건 문제도 되지 않거든. 더구나 정말이지, 이 캐리 뎀스터는 켄티시 타운에 사는 어떤 여자하고도 운명을 바꾸고 싶진 않았단 말이야! 그러나 그녀는 동정을 애원했다. 장밋빛 얼굴을 잃어버리 데 대한 동정을. - p. 45~46  
   

 신기하다. 김정 교수님께 <등대>에 관한 수업을 받고 나와서 그런가. 그럭저럭 내용이 이해가 잘 된다. 더불어 그녀가 소설에 집어넣으려고 애쓴 듯한 무언가의 감정들이 툭툭 살아서 튀어나오는 것이 선명히 보인다. 여태까진 막연히 그녀의 소설을 봤지만 이젠 사람들이 그렇게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버지니아 울프는 분노와 공포를 맨 손으로 붙잡은 뒤 뭉쳐서 크게 만들고, 딱딱하게 굳혀서 화석으로 남긴다. 그리고 그 것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소설 속에 박아넣는다. 독자들은 그 위를 불편하게 지나다닌다. 적어도 내가 느낀 그녀는 그랬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겨우 두 권밖에 읽지 못했지만, 그녀의 글 쓰는 방식이 하도 특이해서 오히려 그녀의 스타일대로 따라가면 주제를 쉽게 포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생각을 그저 물 흐르듯 흘러가게 한다. 한 명의 생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수십명의 생각들이 우리의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등장인물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관점에서 세상을 내려다 볼 때 등장인물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이 책에서 담고 있는 이야기는 사랑이야기이다. '세상엔 다양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메세지는 넘치고 넘치지만, 이 책에서는 교훈만 달랑 담겨져있는 게 아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현실에 없는 댈러웨이 부인, 현실에 없는 피터가 된다. 그 오싹한 기분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아울러 버지니아 울프가 항상 찬양하는 전통적인 여성, 남성을 거울처럼 비추는 여성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느끼게 된다. 그 즐거움을 직접 감상하시라고 마지막 부분은 인상깊은 글귀에 올리지 않았다. 직접 읽어라.

 사실 <등대>를 읽고, 영화로 봤을 때 많이 실망했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전하려고 하는 효과는 아무래도 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나보다. 그래서 사실 <댈러웨이 부인>을 영화로 선뜻 접하기는 겁이 난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그려냈다는 <세월>이란 영화는 보고 싶다. 매우 찾기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은 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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