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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
김성동 지음 / 청년사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분명 쉬운 책은 아니다. 법운과 지산으로 갈리는 수도승과 파계승 혹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이야기는 불교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3년 만에 다시 손에 들고 읽은 이 책은, 3년 전과 마찬가지로 한달음에 읽게 하는 힘이 있다. 김성동 작가의 『만다라』는 분명 쉽게 읽히는 책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깨닫는 책은 아니다.
법운은 수도승이다. 그는 인간사의 허무와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 위해, 그래서 이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의 윤회를 끊기 위해 수도에 매달린다. 법운은 불교의 엄격한 계율에 자신을 맞추고 수행을 정진한다. 법운이 중이 된 것은 속세의 인연을 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자신과 누나를 버리고 도망간 어머니에 대한 충격과 증오, 그에 대한 인간사의 허무. 그는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것을 뛰어넘기 위해 수도에 정진한다.
그런 그가 우연히 만난 법운은 파격의 연속이다. 말이 좋아 파격이지, 불교의 계율이란 계율은 모조리 무시하는 땡중의 모습이다. 법운은 이런 지산을 처음에는 경멸하지만, 그의 파격적인 행보가 결국엔 자신이 가는 길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같이 객질을 하며 다닌다. 산 속 선방서 수도만을 정진한 법운에게, 지산은 이 세상의 더럽고 추악한 면을 보여주며 이야기한다. 불교가 다시 제대로 서기 위해선 그들만의 불교가 아닌, 이런 세상을 껴안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법운은 지산과는 달리 수도승이 먼저 깨달음을 얻은 후에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법운과 같은 중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끔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법운과 함께 선방에 있던 수관의 모습이 특히 그러하다. 수관은 깨달음을 위해 자신의 왼손 손가락을 매년 한 개씩 부처님께 공양했다. 각(覺)을 깨치기 위해 자신의 생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쯤은 쉬이 견뎌낸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부처가 되는 것은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법운과 지산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법운의 죽음 때문이다. 지산이 산에서 동사하고, 지산의 잡기장을 읽은 이후, 법운은 심한 무력감 혹은 상실감에 시달린다. 자신이 가는 길이 맞는지, 지금의 불교에 소승이 맞는 것인지 때늦은(혹은 제때 찾아온) 방황을 한다. 파계와 같은 온갖 계율을 뛰어 넘음. 그리고 법운은 다시 산으로 들어간다.
이 책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중 어느 것이 더 위대한가를 구분하는 소설이 아니다. 소승과 대승은 불교라는 종교에서 다 각기 필요한 부분이다. 법운은 자신의 방식으로, 지산은 자신의 방식으로 각을 향해,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타락한 불교를 다시 세우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감, 인간의 육신을 지니고 어떻게든 살아 나감, 그게 바로 이 땅의 불교가 살아나가는 방법이 아닐까.
치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