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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땀을 닦는다. 처음엔 더위에 흘린 땀이라 생각했지만, 아니다. 더위로 흘리는 땀은 외부의 열기를 이기지 못해 몸속에서 밀어내는 땀이다. 내보내려는 힘과 남아있으려는 힘이 서로 부딪히는 치열한 전투. 언제나 지는 쪽은 인간의 나약한 육체 쪽이다. 닦아내려 손을 대면 언제나 뜨듯하고 끈적인다. 마치 날선 칼날이 나약한 몸에 구멍을 내어 몸 밖으로 쏟아지는 피처럼. 하지만, 이번에 흘린 땀은 식어있었다. 몸의 긴장이 풀려 저 스스로 흘러나온 물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이번에 출간된 김영하 작가의 단편집 제목은 이 책에 수록된 네 번째 단편 「밀회」에서,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92쪽 위에서 13번째에서 15번째 줄에 걸쳐있는 혹은 밑에서 6번째에서 8번째 행에 걸쳐있는 문장의 한 구절을 따온 것이다. 처음에 이 제목을 접했을 때는. 마치 김경주 시인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따라한 치기어린 겉멋이라 생각했었다.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선 책을 읽어야하고, 꼼꼼히 읽은 독자들만이 알아챌 수 있는, 작가가 독자에게 베풀 수 있는 멋진 은혜(혹은 선물).
흐릿한 눈으로, 침대에 몸을 파묻고 한 편 한 편 심드렁하게 읽던 중, 서울의 온도가 35도에 가깝게 다가간다는 아나운서의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들은 지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난 까닭 없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소설집의 거의 끝을 향해가고 있는 「퀴즈쇼」에서였을 것이다.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퀴즈쇼」는 2007년에 출간한 장편 『퀴즈쇼』와 다르면서도 같은 작품이다. 단편 「퀴즈쇼」의 기본 골격은 장편 『퀴즈쇼』의 민수와 지원의 이야기를 조금 변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읽고 있는 어느 순간, 나와는 상관없을 거라 생각한 공포가 순식간에 내게 범람했다. 살인, 그리고 죽음.
여주인공 은이의 부모와 오빠는 한순간에 유명을 달리했다. 어느 한 연쇄살인범이 "방범창을 장도리로 뜯고 안으로 들어"가 은이의 부모를 장도리로 내리쳐 죽이고, 오빠는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유유히 사라진 사건이 발생했다. 후에 그 연쇄살인범이 잡혔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차를 몰고 돌아다니다가 문득 영감이 떠오르면 차에서 내려 자신에게 영감을 준 집으로 들어"가 살인을 저질렀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연쇄살인범을 만날 확률은 "0.0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논리의 세계"에서나 벌어질 일이다. "현실세계"는 다르다. 우리가 살면서 한강다리가 무너질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나? 백화점이 무너질 것이라 생각한 적은? 한창 일하고 있는 건물에 비행기가 부딪힐 것이라 생각한 적은? <추격자>의 개미슈퍼 아줌마는 무식해서 그렇게 죽었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 비극은 우리에게는 "놀라운 행운"이 된다. 김영하는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저 멀리 있는 공포를 슬그머니 우리의 일상 곁에 놓아둔다. 그는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낸다. 그리고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시제를 살짝 바꿔 묻는다. 정말 그렇게 안녕할 거라 확신하세요? 당신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악몽을 꿨다. 하늘에 불꽃이 일어나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던 지난 새벽에, 나는 보고 말았다. 노란색 우비를 입고 4층 빌라를 올라 방충망을 뜯어내고 들어와 내가 누워있는 침대 앞에 선 한 사내의 모습을. 가위에 눌렸다. 소리를 질렀지만 목구멍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사내는 (칼이 아닌) 긴 송곳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 거의 터진 목소리에, 놀란 아내가 잠을 깨웠다. 밖엔 비바람이 몰아쳤고 난 멍하니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 수록된 단편 소설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로봇」, 「여행」, 「악어」, 「밀회」, 「명예살인」, 「마코토」, 「아이스크림」, 「조」, 「바다이야기 1」, 「바다이야기 2」, 「퀴즈쇼」, 「오늘의 커피」, 「약속」. 각각의 이야기들은 제각기 다른 빛을 뿜고 있었지만, 감히 규정된 흐름으로 엮어본다면, 그것은 상실과 공포다. 그가 다룬 상실과 공포는 일상과 밀접하기도 하지만 때론 멀리 떨어져있기도 하다. 그의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일상과는 멀리 떨어진 사건들이다. 일반인들이라면 신문에서나 접할 수 있는, 0.01% 정도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 사건을 겪는 이들은, 0.01%의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바로 우리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확실히, 동생이 사고를 당해 회사 사장에게 돈을 빌릴 확률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헤어진 옛 애인을 만날 일은, 내 얼굴 때문에 회사 매출이 오를 일은, 국문학 박사과정의 일본인을 만날 확률은, 기름 맛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확률은, 일하는 매장에서 엄청난 물건을 도둑질을 할 일은, 연쇄살인범을 만날 일은, 주먹다짐으로 다른 사람의 코뼈를 부러뜨릴 일은, 다짜고짜 돈을 빌려달라는 여자를 만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돈을 갚지 못해 사장에게 몸으로 때우는 사람은,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은, 매출 때문에 죽는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온전히 오해해 감정의 골을 수습하지 못하는 사람은, 일 때문에 기름 맛 나는 아이스크림을 앉은 자리에서 4개나 먹어치우는 사람은, 타락한 사람은, 죽은 부모의 돈을 부러워하는 개새끼들은, 그래서 내 코뼈를 순순히 대주는 사람은, 집나간 아내를 찾는 사람은 우리 주위에서 (쉽지는 않겠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들은 희극적 혹은 비극적 혹은 그 둘이 섞인 채로 살아간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