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개학을 하고 아이의 운동량이 급증하자 한동안 사라졌던 두드러기가 간간히 올라온다. 마음이 철렁하여 한약을 한재 더 먹여야하나 고민하기도 하지만 일단 그냥 지켜보기로 한다. 밖에서 신 나게 놀던 아이는 자면서 때때로 피곤해했고 그러다보니 잠은 엄마나 저나 누우면 쓰러져 잤을 뿐 책 읽을 체력이 남지 않았었다.

 

그러다 9월 아이가 좋아하는 기차책을 한 권 샀는데 읽어주다보니 길어도 너~~무 길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잠들기 전에 읽어주기엔 참 좋아 주로 잠자리에서 읽어주고 있다.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는 객차와, 화물차, 탄수차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게 못마땅해 그것들을 다 버리고 혼자 빠르게 달리며 주목받으려고 하는 철없는 기관차이다. 다소 주제가 여섯 살 아들에겐 좀 무거운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매 장마다 펼쳐지는 기차의 모양, 치치가 벌여놓은 사고의 현장들이 익살맞게 그려진 점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치치를 찾기 위해 애쓰는 점이 아이에게는 편안함을 주는 듯 보였다. 말괄량이가 뭐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치치를 찾기 위해 애쓰는 아저씨들의 이름을 알아두려고 한다. 책을 읽을 때 9월에 책을 사고 선물로 받은 북램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덕분에 한 번은 아이와 그림을 보면서 읽고, 한 번은 나만 보면서 아이는 눈 감고 듣기만 할 수 있어 좋다. 함께 사는 친정 엄마가 탐을 내는 아이템이다. 엄마 때문에 책을 더 사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냥 램프만 하나 더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가 내가 물었었다.

- 이 책 그림이 어떤 책 그림하고 비슷한 것 같지 않아? 엄마는 이 책 읽다 보니까 어떤 책이 떠오른다.

고 했더니 아이는 기차 책만 줄줄이 이야기한다. 아이에게 아직 그림만으로 작가를 떠올리기엔 무리, 가 맞다 ㅎㅎ 그래서 가장 비슷한 장면을 펼쳐놓고 후보작들을 보여주었더니 겨우 찾아냈다. 엄마의 망상이란!^^

 

 

 

 

 

 

 

버지니아 리 버튼(1909~1968)은 미국 매사추세스 주에서 태어났다. 버튼의 매사추세스 공과 대학 학장인 아버지와 시인이자 음악가인 어머니에게서 사물을 보는 정확함과 예술적인 감수성을 골고루 물려받았다. 어렸을 때에는 발레리나가 꿈이었으나 후에 캘리포니아 스쿨 어브 파인 아츠와 보스턴 뮤지엄 스쿨에서 수학하여 화가가 되었다. 그녀는 조각가인 조지 드미트리어스와 혼인함으로써 남편의 도움을 받아 예술적인 재능을 더욱 꽃피웠다. 둘째아이를 낳고 나서 그녀는 만화에만 열중하는 아들을 보고 만화를 뛰어넘는 그림책을 손수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 어린이가 흥미로워하는 세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탓에 첫번째 그림책은 아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말았다. 버튼은 좌절하지 않고 이번에는 만화의 긴박한 이야기 전개 기법과 다이내믹한 화면 구성을 대담하게 받아들여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를 완성했다. 첫아들 아리스에게 헌정된 이 그림책은 물론 아들의 사랑을 받았고, 출간된 지 반 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탈것 그림책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 뒤로 버튼은 둘째아들 마이클에게 헌정한 역시 탈것 그림책인 《마이크 멀리건과 증기 삽차》, 《케이티와 폭설》 들을 만들었고, 1943년에는 《작은 집 이야기》로 칼데콧 상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  

 

개인적으로 버지니아 리 버튼의 그림과 글을 좋아한다. <작은 집 이야기>에서 점점 도시화되어 가는 삶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해 주는 점도 좋았거니와 그림이 일단 정말 따뜻하다.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는 <작은 집 이야기>의 색채가 사라져 따뜻함은 덜하지만 익살스러움, 역동감이 더 살아있다. 더구나 말썽꾸러기 치치의 성장기가 단편적 사건에 모두 담겨져 있어 책을 읽는 아이에겐 모험심이랄까 그런 마음도 들게 하는 것 같았다. 결코 말괄량이 기관차가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당분간 우리 모자의 밤을 함께 할 두 권의 책을 통해 시원한 가을 밤, 마음만은 햇살처럼 따사롭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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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랬다. 노부영이 뭐지? 출판사 이름인가? 알고 보니 '노래로 부르는  영어'의 줄임말이었다. 엄마들이 아이 영어 교육을 위한 교재(?)로 많이 구입한다고 한다. 도서관에서도 한 켠에 이런 타이틀을 걸고 있는 책들이 모여있다.

 

영어 교육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나는 외국어를 제대로 배워본 것은 중국어 초급반 6개월이 다였지만 언어를 익히는 것에는 흥미가 있다. 다만, 남에게 배우는 것을 어릴 때부터 잘 못했다. 진득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아이에게도 뭘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있다. 병설 유치원을 보내는 이유도 뭘 억지로 안가르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이에게 영어를 차단하는 것은 아니니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노래를 불러주곤 한다 사악한 발음으로!

 

아는 노래는 몇 없다. 도움을 받을까 싶어 박현영의< 키즈 싱글리쉬>를 세트로 사서 한동안 실컷 아이와 부르고 놀았다. 우리 동요를 번안하여 부르는 것이라 일단 내가 불러주기에 편했다. 아이가 서너살 때부터 내가 그냥 불러줬던 것 같다. 물론 아주 불규칙적이고 간헐적으로.

 

 

 

 

 

 

그래서인지 아이는 영어를 궁금해했다. 살다보니 아이는 언어 자체에 대해 궁금증이 많은 아이더라. 말로 장난 치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언어를 알게 되면 흥미와 집중력이 급속도로 생기는 성격이었다. 친구가 마법천자문 놀이 하는 걸 보더니 한자에도 한동안 빠져있었다.

 

그리곤 가끔 귀동냥으로 원어민 선생님 수업 시간에 슬쩍 얻어 듣는 영어 노래가 있다. 이를 테면, <Five little monkeys jumping on the bed>나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같은 노래를 흥얼 거렸다. 청소년 수련관에서 이 교재로 수업을 한다는 것을 안 것은 아이가 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될 무렵이었는데 내가 가서 배우려느냐고 물으니 아이는 그냥 엄마가 불러주는 게 좋다고 하여 그냥 지금도 몇 안되는 레파토리로 즐겁게 흥얼거리고 있다.

 

그러다 자동차나 기차를 좋아하는 아이 생각에 도서관에서 자동차나 기차 이야기 원서 그림책을 간혹 빌리기도 하는데 실패반 성공반이다. 실패는 내가 읽어주기에 너무 어렵다는 점이고 성공은 반대로 아주 쉬운 내용이라는 말이다. 극도로 비전문적이지만 이것을 비교육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으련다.

 

이번에도 중고서점에 가서 자동차와 관련된 영어 원서 그림책을 한 권 구입했다. CD도 있길래 중고도서치고는 좀 비쌌지만 사서 아이와 읽었다. 사악한 발음이지만 내가 읽어줄 수 있어 다행이었고, CD를 틀어주려고 했는데 중고서점의 문제가 발생했다. 책과 CD가 각각 다른 상품이라니!! 황당했지만 웃었다. 다행히 이 책은 내가 읽어줄 수 있었다. 아이가 좋아했다. 그러면 된 거다. 반복되는 문장구조와 아이가 빠져들만하 다양한 탈 것의 종류, 그리고 각각의 의성어들이 읽어주는 사람, 듣는 사람을 모두 만족시켰다.

 

내 아이는 탈 것을 무척 좋아한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것은 기차와 전철, 지하철이다. 그리고 다른 누구와 책 읽는 것보다 엄마와 읽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엄마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기 전에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내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그것에서 모든 교육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극도로 사악한 발음으로 최대한 불규칙하고 간헐적이라고 하기에도 미안할 정도로 드문드문 영어 노래를 불러주지만 아이는 영어를 좋아한다. 물론 잘은 못한다. 당연하다. 잘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은 여섯 살이다. 엄마와 일상을 함께 공유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나이이다. 영어 노래를 영어 노래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노래라고 받아들이는 그 모습이 가장 좋은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습이 좋아 앞으로도 난 극도로 사악한 발음으로 최대한 불규칙하게 조금은 덜 드문드문 노래를 불러주련다.

 

 <탈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좋아했던 원서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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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우연한 기회로 김려령 작가님과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그땐 동화책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로 밖엔 작가님을 알지 못한 때라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 작가님께 얼마나 큰 실례였던가 하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작가님에게서 읽었던 섬세함, 따뜻함, 슬픔, 명랑함을 오래 기억했다. 이후 <완득이>를 읽었고 사실 깜짝 놀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득이> 속에도 김려령이라는 사람은 작품 전반에 실려 있었다.

 

오랜만에 작가님의 소설을 읽었다. <너를 봤어>. 제목을 보는데 너무 읽고 싶어졌다. 너를 너무나 보고 싶었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도대체 '너'는 누구길래,,,,,,

 

똘재야, 너를 봐서 너무 행복했다.

 

가장 간단하게 독후감을 말하라면 이 문장이다. 수현의 질척이는 가족사를 읽으면서 그리고 가족의 죽음에 대한 낯선 대응을 보면서도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아마 어느 순간부터 나 역시 수현을 온마음으로 사랑한 모양이다. 예쁜 아저씨 정수현을, 그리고 수현 안에 숨어 있는 나를 몹시도 사랑한 모양이다. 가여워한 모양이다. 똘재가 나타나서 정말 좋았고, 그녀가 수현을 받아주어 다행스러웠고, 수현을 떠나지 않고 그 곁에 머물러주어 고마웠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 독자가 이 소설을 읽고 한번쯤 웃고, 한번쯤 울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위로받은 듯한 웃음을 여러 차례 지었고 세번 크게 울었다. 에필로그에서 두 번, 작가의 말에서 한 번. 그 중 가장 크게 운 것은 작가의 말이었다. 이 소설은 앞의 모든 것들이 켜켜이 쌓여 마지막에 그 모두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었다.

 

책을 마무리하던 때가 밤이었다는 것이 큰 이유였을까, 아닐 것이다. 전혀 외롭지 않은 밤이었고 울 생각 따윈 하지 않던 시간이었다. 속지에 영재와 도하가 남긴 짧은 인사말에서 터진 울음은 그 밤 내내 한참 이어졌다.

 

마지막까지 우리였던, 영원히 그러할

당신을 애도하며, 서영재

당신에게 키스를, 윤도하

 

사랑합니다.

2013년

 

 

다음 날 책꽂이에서 <우아한 거짓말>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몇년 전의 자리에서 작가가 자전적 이야기라고 했던가 아끼는 이야기라고 했던가 했던 기억이 나서 <가시 고백>을 뒤로 하고 <우아한 거짓말>을 읽기 시작했다. 천지의 죽음은 좀 이르게 왔다. 봉인된 실을 하나씩 찾을 때마다 봉인된 눈물이 툭툭 터져 나왔다. 그러다 역시 작가의 말에 이르러 펑펑. <완득이>를 읽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프면서 슬프고, 슬프면서 아름답고, 아름답기에 결코 절망적이지 않은, 끝에 여운으로 남는 행복감이 있었다. 물론 <완득이>도 그랬다. 다만, 이 두 편의 소설은 마치 김려령이라는 사람의 속에서 그 모든 감정을 싹싹 긁어서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장담할 수 없는 것은 아마 다음에 읽을 작가님 소설을 읽다보면 또 맘이 변할 것 같다. 아직 남은 속이 있어서 아직 읽지 못한 소설에서 또한번 그 느낌을 받을 것 같다는 말이다. 작가의 말마저도 아름다웠다. 작가의 말에 자신의 남은 속을 다 긁어내어 독자에게 주는 것 같았다. 그러하기에 어느 소설을 읽어도 다 사랑할 것 같다. 아프고 슬프고 아름다고 행복한 느낌.

 

내일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보고 싶습니다.

 

 

내가 수많은 당신을 죽이며 갈망했던 것이 결국 사랑이었나보다.------이 책을 펼친 당신이 한번쯤 웃었으면 좋겠고 한번쯤 울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 작은 사랑이 당신에게 가 닿으면 좋겠다.
「너를 봤어」작가의 말 중.

어른이 되어보니, 세상은 생각했던 것처럼 화려하고 근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버렸다면 보지 못했을, 소소한 기쁨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애초에 나는 큰 것을 바란 게 아니니까요.
「우아한 거짓말」작가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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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거침없이 말하던 사람이었던가, 싶었다. 오래 전 읽었던 문장에서 힘과 명쾌함을 느꼈던 기억이 아련히 남아있기는 한데 이번엔 이렇게 거침이 없었던가 하는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그 거침없음이 역시 명쾌했다.

  <동의보감>을 의학서라는 한정적 개념에서 벗어나 철학서로까지 확장한 책이다. 몸과 몸, 여성, 사랑, 가족, 교육, 정치사회, 경제, 운명을 특유의 문체로 쉽게 <동의 보감> 혹은 동양철학 속에서 잘 버무렸다만 뒤로 갈수록 거침없음이 조금은 완화된 듯 느껴졌다. 몸, 여성, 사랑, 가족을 이야기할 때가 좀더 좋았다.

 

1장 몸 VS 몸

 

스마트폰의 진군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은 바 있다. 그럼 몸은 대체 어디에 쓰란 말인가? 그 답이 여기 있다. 몸은 오직 장식용이었던 것이다. 몸을 어떻게 장식하느냐가 경쟁이고 스펙이다. 하여, 성형은 아름다움에 대한 원초적 발로가 아니다. 이 욕망에는 명백하게 척도와 목표가 있다. 작은 얼굴, 8등신에 S라인, 식스팩은 기본이고 허벅지는 일자로 쭉 뻗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쇼윈도의 마네킹이 기준이다. 모두가 이 몸을 향해 달려간다.  (19쪽)

 

진정으로 타인들과의 소통을 원한다면 기운의 배치를 바꾸어야 한다. 활발하면서도 여유있게. 그래서 성형은 미친 짓이다. 보톡스만 맞아도 표정이 사라지는데 전신을 다 헤집어 놓으면 대체 무엇으로 소통을 한단 말인가? 결국 성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우월감이다. 타인과의 교감이 아니라 인정욕망이다. 전자는 충만감을 생산하지만, 후자는 결핍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선 상처와 번뇌만이 숙성된다. 성형천국, 마음지옥! (21쪽) 

 

 

2장에서도 성형에 대한 고미숙의 발언은 거침이 없다. 모든 성형에 대해 강경하게 맞서는 그녀의 비판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물건을 사듯 얼굴과 몸을 고치는 현대 사회의 성형 문화를 생각하면 누군가는 그녀처럼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야하지 않은가 싶기도 한데 요즘은 그것을 일종의 문화로 인식하여 성형을 하고 그 고백을 하는 사람을 문화인으로 인식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허용적이다. 내 얼굴과 몸을 사랑할지어다! 그리고 활발하고 여유있게 표정을 지어볼지어다!!

 

 

2장 몸과 여성

 

폐경기 이후 여성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다른 방식으로 훨씬 더 넓고 깊게 고양된다. 무엇보다 가족과 혈연의 틀을 벗어나 공동체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원시문화에서 폐경기의 여성들은 '지혜의 피'를 보유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월경을 하는 여성들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지닌다고 여겨졌다. 부족의 모든 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운명과 미래에 대한 예지력이 생기는 것도 바로 이때다.(64쪽) 

폐경기에 대한 그녀의 해석과 응원은 아름답다.

 

3장 몸과 사랑

 

문명이 발달하면 삶이 더 여유로워져야 하지 않나? 혼인 적령기가 늦어지는 건 그렇다 치자. 청춘의 목표가 단지 결혼은 아니니까. 대신 청춘의 에로스를 발산할 수 있는 다양한 길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는커녕 보다시피 더더욱 협소해졌다. 그렇다고 생체주기가 달라진 건 아니다. 오히려 영양 과잉으로 '성적 조숙증'이 늘어나는 추세다. 결국 생리적으로는 조숙해지는데, 정신적 사회적 연령은 한없이 느려지고 있는 셈이다. 문명과 자연 사이의 엄청난 간극과 소외! 여기가 바로 번뇌와 망상이 발생하는 원천이다. (74쪽)

 

문명과 자연의 간극,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성에 대한 지나친 엄숙함, 우리가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한쪽에선 완전히 벗어나고 한쪽은 여전히 조선시대 사대부집안인데 그 간극부터 어찌 없애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모른다는 게 문제다 ㅠㅠ

 

4장 몸과 가족

 

아기를 업으면 엄마는 아기한테 집중하기보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다. 청소를 하고,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아기가 등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처럼 엄마 또한 자신의 일상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서로가 서로에게 배경이 되는 관계, 엄마와 아기가 각자 자신의 삶을 확충해 갈 수 있는 관계, 엄마의 등은 그것을 훈련할 수 있는 최고의 현장이다. 그러니 부디 안지 말고 업어라! (118쪽) 

양기 덩어리인 아기는 음기 덩어리인 할머니가 업고 있는 게 가장 좋단다. 친정엄마에게 고마워해야 할 시간^^

 

5장 몸과 교육

 

"3세에서 10세까지의 소아는 그 성품이나 기질을 보면 수명을 알 수 있다. ------어릴 때 식견과 지혜가 뛰어나면 장수하기 어렵다. ------일찍 앉거나 일찍 걷거나, 치아가 일찍 나거나, 말을 일찍 하는 것은 모두 성품이 나쁘니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 [동의보감] '소아'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요컨대, 빨리 뭔가를 터득하는 것은 성품이나 기질, 수명 등에서 아주 불리하다는 것. (152쪽)

비단 아이 뿐이랴, 어른들 중에도 뭔가 지나치게 자신을 달구어 빨리 하는 사람들이 성품, 기질, 수명에서 아주 불리하다는 것을 적잖이 봐왔다. 인간을 인간의 속도에 맞춰야지 문명의 속도에 맞추면 불리하다는 말!

 

6장 몸과 정치 사회

 

스펙터클의 정치는 언제나 쇼로, 쇼는 또 노래와 춤 같은 공연예술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만이 원초적 본능이라고 착각하지 마시라. 그에 못지않게 아니 더 강렬한 것이 '서사 본능'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호모 로퀜스'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말하는 것을 언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답하는 것을 어라고 한다."([동의보감]) 다시 말해서 언어는 자신과의 소통이자 타자와의 능동적 교감행위이다. 이 소통과 교감의 욕망이 서사를 구성한다. (168쪽)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우주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개별 인생에도 얼마나 많은 변수들이 존재하겠는가. 인간이 원초적으로 프리랜서라는 건 이런 이치에서다. 프리랜서는 말 그대로 '길 위의 인생'이다. 어떠한 조직과 지위 보장도 없지만 그렇기에 매 순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다. 욕망과 능력의 일치! 그래서 자유롭다. 하여, 나는 늘 궁금하다. 정규직은 과연 자신 안에 이런 열망이 들끓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182쪽)

 미스 김 언니가 생각나는군. 앞으로의 사회는 비정규직 사회라고 한다. 수명이 엄청 늘어나니까, 나의 노년은 멋진 프리랜서였으면 좋겠다.

 

7장과 8장은 통독. 다만, 브리콜라주의 경제학이라는 용어가 맘에 든다.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인디언의 기술. 너 맘에 든다. 좋다 좋아, 딱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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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터뷰] 자타공인 고전평론가 고미숙, 근대성을 말하다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4-05-12 14:09 
    우리의 신체와 무의식에 새겨진 '근대성'에 대한 탐사! 1. 선생님께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고전평론가’이시고, 그간의 저작활동에 비춰봤을 때, 이번에 출간하신 책들이 이라는 데에 놀라는 독자들도 적지 않을 듯합니다. 독자들의 머릿속에는 ‘고미숙=고전’이라는 등식이 자리하고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일단은 ‘근대성이 뭐지? 왜 고전평론가가 저런 문제를 다뤘지?’라는 의문이 먼저 들 것 같은데요. “근대, 그러면 지금 우리 시대도..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 뫼비우스의 띠 같은.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문학동네, 2013

 

 

 

 

나는 나를 어디에서부터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에 관한 한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없다. 며칠 전 알지 못하는 고등학교 동창이 갑작스레 지하철 안에서 아는 체를 했을 때에도 나는 우리가 어쩌면 아는 사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기억력은 스스로조차도 미덥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다. 다행히 동창은 우리가 인연이 없는 그저 학교만 같이 다닌 사이임을 빨리 말해주어 안심했지만 ‘그런데 왜 넌 나를 기억하는 거니?’라는 생각이 들어 또다시 나를 의심해야했다. 집에 와 꾸준히 연락을 하는 친구들과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가 왜 친해졌는가’에 대해 서로 확인해봤다. 답을 얻진 못했다. 셋 다 몰랐다. 그저 우리는 현재의 우리로서 만날 뿐이었다. 최근의 기억들만 그나마 명료하다. 최근의 에피소드들은 매번 다르게 재생되는데, 과거의 에피소드들은 매번 같다. 이게 보편적인 기억의 양상이다. 오래된 것부터 점점 희미해지는 것.

 

그런데 최근의 기억부터 잃어가는 병이 있다. 알츠하이머. 더 이상 낯선 이름의 질병은 아니다. 나의 할머니도 우리 옆집의 할머니도 이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다. 작가는 어느 매체에서 이 병을 시적이라고 말했지만 난 전혀 이 병을 시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시라고 보기엔 매번 같은 기억에만 머물러 있다. 어제 내가 반복한 것을 오늘은 잊었다는 듯. 특정 트랙만 반복 재생하는 CD플레이어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가장 나쁜 기억만 재생하는 고장난 CD플레이어.

 

한 은퇴한 살인자가 이 병을 앓고 있다. 그 역시 고장난 CD플레이어처럼 한 가지 트랙만 반복 재생한다. 하지만 특별하게도 그는 기억을 잃어가면서 동시에 기억을 재구성한다. 원래 이 병이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면에서 그의 알츠하이머는 시도 CD플레이어도 아닌 소설 같다. ‘박주태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신의 기억에 확신을 가진 채로 점점 끊임없이 퇴고해가며 이야기를 탄탄하게 맞춰가는 김병수의 능력은 독자로 하여금 판단력을 끊임없이 유보시키게 만든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의 기억에 어느 순간 전적으로 의지해버렸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한 은퇴한 살인자의 불확실한 기억에 멀쩡한 한 독자가 그대로 의지해버렸다는 것은 이야기 막바지에 이를 즈음 허탈한 탄식과 작가에 대한 탄성을 내뱉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소설은 빠르게 나를 흡수했고, 또 그만큼 빠르게 나를 배반했다. 김영하가 돌아온 것인가.

 

사실 <호출>이라는 단편을 통해 김영하 작가를 알게 되었고, 이후 많은 작품들을 읽으며 작가의 작품에 공감을 했다. <검은 꽃>에 이르러 김영하 작가는 이전과는 다른 좀 더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고 느꼈으며 <빛의 제국>에서도 그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곧, 김영하가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지만 쉽게 오지 않았는데 이 작품의 제목을 들었을 때부터 왠지 그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작가는 여러 매체에서 이 작품의 두 가지 주제인 ‘살인’과 ‘기억’에 대해 꾸준히 관심이 있어왔다고 말했다. 그것은 귀납적인 결론이었다. 자신의 작품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살인’과 ‘기억’이었다는 말인데, 그런 까닭에 그의 작품을 꾸준히 읽은 독자로서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제목만 들었을 때에도 이 작품이 그의 모든 것을 압축한 작품일 것이라고 직감했고, 읽어보니 그 직감은 통쾌하게도 들어맞았다. 김영하가 돌아온 것이다. 가장 김영하 다운 작품으로.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사실 많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지금까지 김병수의 기억이 모조리 틀렸다는 거야?’라는 허탈감과 동시에 ‘그럼 은희의 통화를 엿들은 것도, 박주태와의 결혼도 모두 환상이었다는 거야?’라는 의문이 들었다. 인정하기 어려웠고 그것은 책을 다시 펼쳐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환상과 현실이 하나로 연결된 듯 했다. 그에게 살인은 무엇이었기에 이런 증상을 남기는 것일까? 자신에게 던진 물음처럼 그는 악마 아니면 초인 혹은 그 둘 다인 것인가? 아버지를 죽인 것과 은희 엄마를 죽인 것의 이유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동족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로서 인간은 살인의 원인을 어디에서든 찾아내야 할 테지만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혹은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물음을 남기는 것,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것, 바로 그것이 가장 김영하 다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물음의 범위는 매우 명확하다. 살인 그리고 기억 혹은 그 둘 다. 그 범위 안에서 나는 이런 저런 물음들을 만들고 아무런 답을 내지 못한다. 다만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그리하여 ‘다만 추측컨대’ 김병수는 은희 모녀로 인해 ‘살인’이라는 행위를 자신의 삶 속에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김병수에게 ‘기억’이라는 도구는 최적의 도구가 아니었겠는가. 현재의 기억을 잊어가며 과거의 기억도 잊고, 현재의 기억을 재구성하며 과거의 기억도 재구성한다. 그것만이 그의 삶에서 ‘살인’의 ‘기억’을 지우는 유일한 방법이다. 알츠하이머라는 병은 신이 내린 것이지만 알츠하이머라는 도구는 김병수가 만들어낸 것이다.

 

김병수가 마지막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에 왜 살인을 하지 않게 된 것일까? 인간이 살인을 할 때에는 어떤 이유가 필요하다. 그것이 자신으로서는 정당하다는. 물론 요즘의 무지막지한 범죄에도 그것이 적용되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아버지를 죽였을 때 김병수는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냈다는 스스로의 정당성이 있었다. 그 살인이 혼자 이뤄낸 것이 아니기에 이후 마지막 살인까지는 좀 더 완벽해지기 위해 저질렀다. 처음 살인을 했을 때 제정신이었다면 거짓말이었을 테고 당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살인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버렸다. 그러다 마지막 살인에서 어떤 계기인지는 모르겠으나 김병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복원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이상 살인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 은희에 대한 사랑이 박주태의 살인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방법을 다시 살인을 재개하는 것으로 정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저질렀던 최초의 살인처럼 그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다시 살인을 계획한다. 다만 기억 속에 남겨진 살인의 후유증들이 그를 괴롭힌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그것들을 정당화한다.

 

멀쩡한 기억은 그에게 최악의 고문 도구가 되지만 알츠하이머 환자로서의 기억은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최적의 도구가 된다. 자신이 가장이 된 단란한 가족의 모습과 죽은 아버지를 만나는 꿈을 꾸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금강경, 반야심경, 수상록, 니체, 젊은 시인의 시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그가 자신의 살인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살인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김병수이지만 일흔이 넘은 나이의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으로 맡게 된 은희 뿐이다. 살인의 전리품으로서 은희에게 가지는 김병수의 애정은 어쩌면 모순되는 듯 보인다. 자신은 그 애정이 살인의 무결성을 의미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죄책감의 표현 혹은 면죄의 도구로 보인다. 그런 은희를 난데없이 박주태라는 놈이 접근해 죽이려고 한다니 용서할 수 없다. 안형사의 등장으로 불안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20년 만에 살인을 해야 한다. 자신의 무결성을 지키기 위해, 혹은 면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박주태를 죽여야 한다. 이제 그에게 살인은 아쉬움의 문제가 아닌 정당화의 문제이다. 현재 그가 저지를 살인은 금강경과 수상록만큼 정당하고 박주태의 살인은 흉악하기 짝이 없다. 김병수는 환상으로나마 그런 대립 구조를 만들어놓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해야한다. 박주태가 그에게 알츠하이머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그의 환상은 논리적이고 구체적이다. 결국 그의 기억은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혼돈을 만들지만 왜인지 그의 결말은 평온해보인다. 환상과 현실 중 한 가지를 택해야했던 긴장을 벗어나 환상과 현실을 하나의 띠로 인정해버린 득도자 같달까? 장자가 나비인지 나비가 장자인지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듯, 현실이 환상인지 환상이 현실인지 현상을 인식하지 못하는 과거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고 현재 한 요양보호사를 살해한 일흔 살의 알츠하이머 김병수만 있을 뿐이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짧기에 흡입력이 강하고 앉은 자리에서 두세 번도 읽을 수 있을만큼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읽고 나서도 많은 물음들이 생겨난다. 앞서 말했듯 그런 수많은 물음들이 발생하는 것, 그것이 가장 김영하 다운 소설이라고 할 때 단언컨대 이 소설은 가장 김영하 다운 소설이다. 여름이면 살인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 드라마, 영화, 뉴스로 쏟아지곤 한다. 때로는 가십거리로 때로는 심각한 사회 현상으로. 하지만 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이라는 정신 기능과 맞물려 빚어내는 이 소설만큼 긴 여파를 남기지는 못하는 것 같다. 김충규 시인의 ‘기억의 퇴적층’이라의 마지막 두 연을 읽으면서 이 소설을 떠올렸다.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무엇엔가 홀린 듯 맴돌았던 그 장소마저

기억의 퇴적층에 묻힐지도 모를 터,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겠지만

정말 그러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동일인일까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 그대로일까

 

그런데 이렇게 중얼거리는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김병수가 두려워한 것은 자신이 처벌받을 것이라는 사실 보다는 현실과 환상 속에서 헤매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디 그대, 기억의 퇴적층에서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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