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 뫼비우스의 띠 같은.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문학동네, 2013

 

 

 

 

나는 나를 어디에서부터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에 관한 한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없다. 며칠 전 알지 못하는 고등학교 동창이 갑작스레 지하철 안에서 아는 체를 했을 때에도 나는 우리가 어쩌면 아는 사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기억력은 스스로조차도 미덥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다. 다행히 동창은 우리가 인연이 없는 그저 학교만 같이 다닌 사이임을 빨리 말해주어 안심했지만 ‘그런데 왜 넌 나를 기억하는 거니?’라는 생각이 들어 또다시 나를 의심해야했다. 집에 와 꾸준히 연락을 하는 친구들과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가 왜 친해졌는가’에 대해 서로 확인해봤다. 답을 얻진 못했다. 셋 다 몰랐다. 그저 우리는 현재의 우리로서 만날 뿐이었다. 최근의 기억들만 그나마 명료하다. 최근의 에피소드들은 매번 다르게 재생되는데, 과거의 에피소드들은 매번 같다. 이게 보편적인 기억의 양상이다. 오래된 것부터 점점 희미해지는 것.

 

그런데 최근의 기억부터 잃어가는 병이 있다. 알츠하이머. 더 이상 낯선 이름의 질병은 아니다. 나의 할머니도 우리 옆집의 할머니도 이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다. 작가는 어느 매체에서 이 병을 시적이라고 말했지만 난 전혀 이 병을 시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시라고 보기엔 매번 같은 기억에만 머물러 있다. 어제 내가 반복한 것을 오늘은 잊었다는 듯. 특정 트랙만 반복 재생하는 CD플레이어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가장 나쁜 기억만 재생하는 고장난 CD플레이어.

 

한 은퇴한 살인자가 이 병을 앓고 있다. 그 역시 고장난 CD플레이어처럼 한 가지 트랙만 반복 재생한다. 하지만 특별하게도 그는 기억을 잃어가면서 동시에 기억을 재구성한다. 원래 이 병이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면에서 그의 알츠하이머는 시도 CD플레이어도 아닌 소설 같다. ‘박주태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신의 기억에 확신을 가진 채로 점점 끊임없이 퇴고해가며 이야기를 탄탄하게 맞춰가는 김병수의 능력은 독자로 하여금 판단력을 끊임없이 유보시키게 만든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의 기억에 어느 순간 전적으로 의지해버렸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한 은퇴한 살인자의 불확실한 기억에 멀쩡한 한 독자가 그대로 의지해버렸다는 것은 이야기 막바지에 이를 즈음 허탈한 탄식과 작가에 대한 탄성을 내뱉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소설은 빠르게 나를 흡수했고, 또 그만큼 빠르게 나를 배반했다. 김영하가 돌아온 것인가.

 

사실 <호출>이라는 단편을 통해 김영하 작가를 알게 되었고, 이후 많은 작품들을 읽으며 작가의 작품에 공감을 했다. <검은 꽃>에 이르러 김영하 작가는 이전과는 다른 좀 더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고 느꼈으며 <빛의 제국>에서도 그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곧, 김영하가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지만 쉽게 오지 않았는데 이 작품의 제목을 들었을 때부터 왠지 그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작가는 여러 매체에서 이 작품의 두 가지 주제인 ‘살인’과 ‘기억’에 대해 꾸준히 관심이 있어왔다고 말했다. 그것은 귀납적인 결론이었다. 자신의 작품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살인’과 ‘기억’이었다는 말인데, 그런 까닭에 그의 작품을 꾸준히 읽은 독자로서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제목만 들었을 때에도 이 작품이 그의 모든 것을 압축한 작품일 것이라고 직감했고, 읽어보니 그 직감은 통쾌하게도 들어맞았다. 김영하가 돌아온 것이다. 가장 김영하 다운 작품으로.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사실 많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지금까지 김병수의 기억이 모조리 틀렸다는 거야?’라는 허탈감과 동시에 ‘그럼 은희의 통화를 엿들은 것도, 박주태와의 결혼도 모두 환상이었다는 거야?’라는 의문이 들었다. 인정하기 어려웠고 그것은 책을 다시 펼쳐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환상과 현실이 하나로 연결된 듯 했다. 그에게 살인은 무엇이었기에 이런 증상을 남기는 것일까? 자신에게 던진 물음처럼 그는 악마 아니면 초인 혹은 그 둘 다인 것인가? 아버지를 죽인 것과 은희 엄마를 죽인 것의 이유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동족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로서 인간은 살인의 원인을 어디에서든 찾아내야 할 테지만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혹은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물음을 남기는 것,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것, 바로 그것이 가장 김영하 다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물음의 범위는 매우 명확하다. 살인 그리고 기억 혹은 그 둘 다. 그 범위 안에서 나는 이런 저런 물음들을 만들고 아무런 답을 내지 못한다. 다만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그리하여 ‘다만 추측컨대’ 김병수는 은희 모녀로 인해 ‘살인’이라는 행위를 자신의 삶 속에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김병수에게 ‘기억’이라는 도구는 최적의 도구가 아니었겠는가. 현재의 기억을 잊어가며 과거의 기억도 잊고, 현재의 기억을 재구성하며 과거의 기억도 재구성한다. 그것만이 그의 삶에서 ‘살인’의 ‘기억’을 지우는 유일한 방법이다. 알츠하이머라는 병은 신이 내린 것이지만 알츠하이머라는 도구는 김병수가 만들어낸 것이다.

 

김병수가 마지막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에 왜 살인을 하지 않게 된 것일까? 인간이 살인을 할 때에는 어떤 이유가 필요하다. 그것이 자신으로서는 정당하다는. 물론 요즘의 무지막지한 범죄에도 그것이 적용되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아버지를 죽였을 때 김병수는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냈다는 스스로의 정당성이 있었다. 그 살인이 혼자 이뤄낸 것이 아니기에 이후 마지막 살인까지는 좀 더 완벽해지기 위해 저질렀다. 처음 살인을 했을 때 제정신이었다면 거짓말이었을 테고 당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살인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버렸다. 그러다 마지막 살인에서 어떤 계기인지는 모르겠으나 김병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복원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이상 살인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 은희에 대한 사랑이 박주태의 살인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방법을 다시 살인을 재개하는 것으로 정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저질렀던 최초의 살인처럼 그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다시 살인을 계획한다. 다만 기억 속에 남겨진 살인의 후유증들이 그를 괴롭힌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그것들을 정당화한다.

 

멀쩡한 기억은 그에게 최악의 고문 도구가 되지만 알츠하이머 환자로서의 기억은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최적의 도구가 된다. 자신이 가장이 된 단란한 가족의 모습과 죽은 아버지를 만나는 꿈을 꾸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금강경, 반야심경, 수상록, 니체, 젊은 시인의 시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그가 자신의 살인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살인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김병수이지만 일흔이 넘은 나이의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으로 맡게 된 은희 뿐이다. 살인의 전리품으로서 은희에게 가지는 김병수의 애정은 어쩌면 모순되는 듯 보인다. 자신은 그 애정이 살인의 무결성을 의미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죄책감의 표현 혹은 면죄의 도구로 보인다. 그런 은희를 난데없이 박주태라는 놈이 접근해 죽이려고 한다니 용서할 수 없다. 안형사의 등장으로 불안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20년 만에 살인을 해야 한다. 자신의 무결성을 지키기 위해, 혹은 면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박주태를 죽여야 한다. 이제 그에게 살인은 아쉬움의 문제가 아닌 정당화의 문제이다. 현재 그가 저지를 살인은 금강경과 수상록만큼 정당하고 박주태의 살인은 흉악하기 짝이 없다. 김병수는 환상으로나마 그런 대립 구조를 만들어놓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해야한다. 박주태가 그에게 알츠하이머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그의 환상은 논리적이고 구체적이다. 결국 그의 기억은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혼돈을 만들지만 왜인지 그의 결말은 평온해보인다. 환상과 현실 중 한 가지를 택해야했던 긴장을 벗어나 환상과 현실을 하나의 띠로 인정해버린 득도자 같달까? 장자가 나비인지 나비가 장자인지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듯, 현실이 환상인지 환상이 현실인지 현상을 인식하지 못하는 과거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고 현재 한 요양보호사를 살해한 일흔 살의 알츠하이머 김병수만 있을 뿐이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짧기에 흡입력이 강하고 앉은 자리에서 두세 번도 읽을 수 있을만큼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읽고 나서도 많은 물음들이 생겨난다. 앞서 말했듯 그런 수많은 물음들이 발생하는 것, 그것이 가장 김영하 다운 소설이라고 할 때 단언컨대 이 소설은 가장 김영하 다운 소설이다. 여름이면 살인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 드라마, 영화, 뉴스로 쏟아지곤 한다. 때로는 가십거리로 때로는 심각한 사회 현상으로. 하지만 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이라는 정신 기능과 맞물려 빚어내는 이 소설만큼 긴 여파를 남기지는 못하는 것 같다. 김충규 시인의 ‘기억의 퇴적층’이라의 마지막 두 연을 읽으면서 이 소설을 떠올렸다.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무엇엔가 홀린 듯 맴돌았던 그 장소마저

기억의 퇴적층에 묻힐지도 모를 터,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겠지만

정말 그러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동일인일까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 그대로일까

 

그런데 이렇게 중얼거리는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김병수가 두려워한 것은 자신이 처벌받을 것이라는 사실 보다는 현실과 환상 속에서 헤매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디 그대, 기억의 퇴적층에서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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