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거침없이 말하던 사람이었던가, 싶었다. 오래 전 읽었던 문장에서 힘과 명쾌함을 느꼈던 기억이 아련히 남아있기는 한데 이번엔 이렇게 거침이 없었던가 하는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그 거침없음이 역시 명쾌했다.

  <동의보감>을 의학서라는 한정적 개념에서 벗어나 철학서로까지 확장한 책이다. 몸과 몸, 여성, 사랑, 가족, 교육, 정치사회, 경제, 운명을 특유의 문체로 쉽게 <동의 보감> 혹은 동양철학 속에서 잘 버무렸다만 뒤로 갈수록 거침없음이 조금은 완화된 듯 느껴졌다. 몸, 여성, 사랑, 가족을 이야기할 때가 좀더 좋았다.

 

1장 몸 VS 몸

 

스마트폰의 진군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은 바 있다. 그럼 몸은 대체 어디에 쓰란 말인가? 그 답이 여기 있다. 몸은 오직 장식용이었던 것이다. 몸을 어떻게 장식하느냐가 경쟁이고 스펙이다. 하여, 성형은 아름다움에 대한 원초적 발로가 아니다. 이 욕망에는 명백하게 척도와 목표가 있다. 작은 얼굴, 8등신에 S라인, 식스팩은 기본이고 허벅지는 일자로 쭉 뻗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쇼윈도의 마네킹이 기준이다. 모두가 이 몸을 향해 달려간다.  (19쪽)

 

진정으로 타인들과의 소통을 원한다면 기운의 배치를 바꾸어야 한다. 활발하면서도 여유있게. 그래서 성형은 미친 짓이다. 보톡스만 맞아도 표정이 사라지는데 전신을 다 헤집어 놓으면 대체 무엇으로 소통을 한단 말인가? 결국 성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우월감이다. 타인과의 교감이 아니라 인정욕망이다. 전자는 충만감을 생산하지만, 후자는 결핍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선 상처와 번뇌만이 숙성된다. 성형천국, 마음지옥! (21쪽) 

 

 

2장에서도 성형에 대한 고미숙의 발언은 거침이 없다. 모든 성형에 대해 강경하게 맞서는 그녀의 비판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물건을 사듯 얼굴과 몸을 고치는 현대 사회의 성형 문화를 생각하면 누군가는 그녀처럼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야하지 않은가 싶기도 한데 요즘은 그것을 일종의 문화로 인식하여 성형을 하고 그 고백을 하는 사람을 문화인으로 인식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허용적이다. 내 얼굴과 몸을 사랑할지어다! 그리고 활발하고 여유있게 표정을 지어볼지어다!!

 

 

2장 몸과 여성

 

폐경기 이후 여성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다른 방식으로 훨씬 더 넓고 깊게 고양된다. 무엇보다 가족과 혈연의 틀을 벗어나 공동체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원시문화에서 폐경기의 여성들은 '지혜의 피'를 보유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월경을 하는 여성들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지닌다고 여겨졌다. 부족의 모든 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운명과 미래에 대한 예지력이 생기는 것도 바로 이때다.(64쪽) 

폐경기에 대한 그녀의 해석과 응원은 아름답다.

 

3장 몸과 사랑

 

문명이 발달하면 삶이 더 여유로워져야 하지 않나? 혼인 적령기가 늦어지는 건 그렇다 치자. 청춘의 목표가 단지 결혼은 아니니까. 대신 청춘의 에로스를 발산할 수 있는 다양한 길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는커녕 보다시피 더더욱 협소해졌다. 그렇다고 생체주기가 달라진 건 아니다. 오히려 영양 과잉으로 '성적 조숙증'이 늘어나는 추세다. 결국 생리적으로는 조숙해지는데, 정신적 사회적 연령은 한없이 느려지고 있는 셈이다. 문명과 자연 사이의 엄청난 간극과 소외! 여기가 바로 번뇌와 망상이 발생하는 원천이다. (74쪽)

 

문명과 자연의 간극,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성에 대한 지나친 엄숙함, 우리가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한쪽에선 완전히 벗어나고 한쪽은 여전히 조선시대 사대부집안인데 그 간극부터 어찌 없애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모른다는 게 문제다 ㅠㅠ

 

4장 몸과 가족

 

아기를 업으면 엄마는 아기한테 집중하기보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다. 청소를 하고,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아기가 등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처럼 엄마 또한 자신의 일상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서로가 서로에게 배경이 되는 관계, 엄마와 아기가 각자 자신의 삶을 확충해 갈 수 있는 관계, 엄마의 등은 그것을 훈련할 수 있는 최고의 현장이다. 그러니 부디 안지 말고 업어라! (118쪽) 

양기 덩어리인 아기는 음기 덩어리인 할머니가 업고 있는 게 가장 좋단다. 친정엄마에게 고마워해야 할 시간^^

 

5장 몸과 교육

 

"3세에서 10세까지의 소아는 그 성품이나 기질을 보면 수명을 알 수 있다. ------어릴 때 식견과 지혜가 뛰어나면 장수하기 어렵다. ------일찍 앉거나 일찍 걷거나, 치아가 일찍 나거나, 말을 일찍 하는 것은 모두 성품이 나쁘니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 [동의보감] '소아'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요컨대, 빨리 뭔가를 터득하는 것은 성품이나 기질, 수명 등에서 아주 불리하다는 것. (152쪽)

비단 아이 뿐이랴, 어른들 중에도 뭔가 지나치게 자신을 달구어 빨리 하는 사람들이 성품, 기질, 수명에서 아주 불리하다는 것을 적잖이 봐왔다. 인간을 인간의 속도에 맞춰야지 문명의 속도에 맞추면 불리하다는 말!

 

6장 몸과 정치 사회

 

스펙터클의 정치는 언제나 쇼로, 쇼는 또 노래와 춤 같은 공연예술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만이 원초적 본능이라고 착각하지 마시라. 그에 못지않게 아니 더 강렬한 것이 '서사 본능'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호모 로퀜스'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말하는 것을 언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답하는 것을 어라고 한다."([동의보감]) 다시 말해서 언어는 자신과의 소통이자 타자와의 능동적 교감행위이다. 이 소통과 교감의 욕망이 서사를 구성한다. (168쪽)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우주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개별 인생에도 얼마나 많은 변수들이 존재하겠는가. 인간이 원초적으로 프리랜서라는 건 이런 이치에서다. 프리랜서는 말 그대로 '길 위의 인생'이다. 어떠한 조직과 지위 보장도 없지만 그렇기에 매 순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다. 욕망과 능력의 일치! 그래서 자유롭다. 하여, 나는 늘 궁금하다. 정규직은 과연 자신 안에 이런 열망이 들끓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182쪽)

 미스 김 언니가 생각나는군. 앞으로의 사회는 비정규직 사회라고 한다. 수명이 엄청 늘어나니까, 나의 노년은 멋진 프리랜서였으면 좋겠다.

 

7장과 8장은 통독. 다만, 브리콜라주의 경제학이라는 용어가 맘에 든다.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인디언의 기술. 너 맘에 든다. 좋다 좋아, 딱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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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터뷰] 자타공인 고전평론가 고미숙, 근대성을 말하다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4-05-12 14:09 
    우리의 신체와 무의식에 새겨진 '근대성'에 대한 탐사! 1. 선생님께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고전평론가’이시고, 그간의 저작활동에 비춰봤을 때, 이번에 출간하신 책들이 이라는 데에 놀라는 독자들도 적지 않을 듯합니다. 독자들의 머릿속에는 ‘고미숙=고전’이라는 등식이 자리하고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일단은 ‘근대성이 뭐지? 왜 고전평론가가 저런 문제를 다뤘지?’라는 의문이 먼저 들 것 같은데요. “근대, 그러면 지금 우리 시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