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읽은 괜찮은 책들을 정리해 본다. 뭔가 선별한 느낌이지만 '괜찮은 책 = 근래에 읽은 책'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으로 잘 알려진 한기호 소장이 2010년 11월부터 최근까지(지금도 연재는 계속되고 있다.) 약 3년 동안 <경향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모은 책이다.
한기호 소장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 해 출판사 사재기 문제로 TV에서 인터뷰를 한 모습을 본 것인데, 궁금하였지만 애써 찾아보진 않았던 그의 책을 이렇게 다시 만나는 것을 보니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심지어 이 책은 마지막까지도 도서관에서 볼까말까 했던 책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빌려온 책 중 이 책을 가장 먼저 읽는 이 심리는 뭔지 모르겠다.
책에 관한 책, 적잖이 읽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책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책은 그저 제목만 빌려줄 뿐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우리 나라 출판 문화, 독서 문화가 얼마나 학대당했는지에 대한 토로가 많았는데 읽다보니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편의 글에 서너 권 이상의 책들을 거론하면서 하나의 글로 마무리 짓는 솜씨가 좋다. <한기호의 다독다독>을 읽기 위해 <경향신문>을 구독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읽고 싶은 책들도 그득하고 시사에도 밝아지고 비판의식도 생기는 글들이다.
정보화 시대에 인간은 컴퓨터를 이기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기억력, 정보력, 정리력 등에서 컴퓨터를 이겨낼 수 없지만 창의력만큼은 이길 수 있습니다. 창의력은 책을 읽는 가운데 배양됩니다. 그러나 책은 혼자 읽는 것보다 함께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읽어온 것이 바로 학문의 역사가 아닌가요. 299쪽
머리를 식힐 겸 고른 책이다. [당신에게 러브레터]라고 하지 않는가! 더구나 부제도 '예술에 담긴 사랑과 이별의 흔적들'이라고 하니 예술작품+에피소드 정도로 구성되었거니 싶었다.
그런데 이 책 제목을 잘못 지은 듯 하다. 제목이 책의 내용을 갉아먹는 듯, 내용에는 깊이감도 있고 대중성도 있는데 제목이 너무 가볍지 않은가?
사진작가인 저자 이동섭은 이 책에서 사진 뿐만 아니라 회화,무용, 문학에 이르기까지 예술이라 불리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과 예술가의 삶을 사랑이라는 주제로 묶어 소개한다. 예술의 가장 기본이 사랑이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듯 싶으니 공감이 되는 글들이 많다. 사랑이 기본 테마이고 다양한 예술을 만날 수 있고 자신을 드러내는 편안한 글이라 많은 이들에게 읽힐 것 같은데 문제는 앞서 말한 제목! 너무 가볍다. 그 때문에 이 책이 더 읽힐지, 덜 읽힐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좀 바꿨으면 좋겠다.
가령, 에곤 실레의 에로티슴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그저 '러브 레터'라고 이름 붙이기엔 어려운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엄밀히 말하자면 실레의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실레의 에로티슴(의 기록)이지 내 에로티슴은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내 에로티슴이 그의 에로티슴과 만나고 있다고 느낀다. 무엇 때문일까? 불연속적인 존재인 우리가 경험하는 에로티슴은 각각 불연속적이다. 즉 나와 내 연인의 에로티슴, 그와 그의 연인의 에로티슴은 각자 떨어져 존재한다. 그럼, 언제 각자의 에로티슴은 연속적이 될까? 여기서 나와 예술작품의 관계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가 실레의 그림에서 느꼈던 여러 미묘한 감정들이 빚어내는 쾌감과 불안 등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146쪽
출간되었을 때부터 관심을 갖기는 했었다. 내가 무슨 번역에 크게 관심이 있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고 언제부터인가 번역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시나브로 느꼈기 때문이다. 올초에는 [이방인]에 대한 번역 논쟁(을 넘은 전투)이 있었듯이 알라딘 서재에서도 끊임없이 번역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어왔으니 책을 좀 읽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겐 번역이라는 것이 그저 남의 일만은 아닌 것이다.
위의 책과는 달리 제목을 참 잘 지었다. 이 책에서 유명한 번역가인 이디스 그로스먼은 글자 그대로 번역을 '예찬'하고 있었다. 아마 그 기저에는 그동안 인정받지 못하고 홀대받은 번역 작업에 대한 항의의 마음이 있었겠지만(영어권의 번역가라 그러했던 듯 하다. )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디스 그로스먼은 '번역'이라는 작업에 대한 자긍심이 무척 높았다. 그런 점은 나쁘지 않았고 그녀의 많은 생각에 공감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모르겠다. 그녀가 서평가나 비평가들이 책을 소개하며서 원어를 모르기에 번역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을 조롱하는 것에서는 그녀에게 동조할 수 없었다. 정말 언급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니 그냥 안타까워하는 정도로만 할 수는 없었을까? 하지만 앞으로는 리뷰를 쓸 때 번역에 대한 언급을 하고는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비록 그 언급 역시 그녀가 비난하는 정도에 그칠지라도 말이다.
어찌 됐건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듯한 저자의 태도가 무척 인상적이고, 문장만으로도 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미국에 사는 그녀의 번역본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충분히 만족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번역에 대한 책을 번역'한 공진호 번역가의 역할도 충분히 인정해 주어야 할 것 같다. 흥미로우면서도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 같다.
부록으로 이 책의 편집자와 번역자 그리고 로쟈 이현우의 인터뷰가 실려있는데 긴장하지 않고 읽기엔 그 글도 번역이라는 작업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었다. 만족스러운 책이다. 귀퉁이가 하도 많이 접혀서 어떤 부분을 공유할까 고민이 된다. 번역가를 작가라고 주장하는 아래의 글이 그녀의 생각과 감정과 문체와 수사를 잘 드러내는 것 같아 소개해 본다.
진지한 전업 번역가라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때, 달리 어떤 생각이 들건 자신을 작가라고 생각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대개는 남몰래 그런 생각을 하지요. 저는 또한 번역가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옳다고 믿습니다. 순전히 주제넘은 생각일까요? 분수를 모르는 도취적 생각일까요? 문학 번역가가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이기에 '작가'라고 불리는 게 정당하다는 걸까요? 번역가는 그저 하찮고 이름 없는 문학의 시녀요, 시종이 아닐까요? 고마워하며 출판업계에 늘 알랑거리는 종이 아닌가요? 제가 동원할 수 있는 말 중 가장 울림이 있고 점잖은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17쪽
어쩌다 보니 메타북들을 많이 읽는 것 같다. 지금 읽고 있는 책도 그런데 이 메타북의 세계는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