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문천국 불신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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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서, 개론서, 청소년용으로 조리된 학습서 등등을 입문서로 통칭하기로 하고,,
철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등등 대체로 머리 빠개지는 사상학문들 철학으로 통칭하기로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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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철학 입문서’의 아이돌이 되어 버리겠노라는 욕망 같은 게 있었다.
비전공자에게 철학은 지나치게 어려운 학문이고, 절대적으로 불필요한 것은 아닌 듯 보이지만 난도나 투입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필요해 보였다. 알음알음 듣기로는 철학자라는 괴물들조차 모든 철학 원전을 다 읽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러다보니 지상이 평화로운 가운데 저 구름 위에서는 그들만의 전쟁이 항시 벌어지는 중이라 했다. 하이데거 하는 모질이들아, 니들이 니체를 똑바로 읽었으면 이렇게 깝치지는 못했을 거다. 놀고 있네, 우리도 니체 다 읽었거든요? 그리고 니가 니체를 읽으면 얼마나 읽는다고 나대냐, 니가 하이데거보다 니체 더 잘 읽냐? 쯧쯔, 저 니체 것들 하이데거 것들 또 싸운다 싸워, 여러분, 우리는 저런 진흙탕에 발 담그지 맙시다, 칸트 공부하는 사람 가오가 있지......
이런 실정이므로(허위사실), syo같은 무지렁이(한없이 투명한 사실)는 당초에 어지간하면 원전을 읽지 않기로 다짐하고 신포도 전략을 발동했다. 철학 저거저거, 너무 많이 알면 왕따 당한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꺼림’과 ‘존경’이 부적절하게 버무려진 느낌인데 이걸 ‘꺼존’ 혹은 ‘존꺼’ 따위로 부를 수 없(지만 부르고 싶다)어서 생각해봤는데 공포가 딱이었다. ‘경외’는 이쪽이 너무 작아지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그들과의 대화 국면이 내포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당최 뭔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어서 내면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도, 아, 지금 저는 너무나도 잘 알아듣고 있사옵니다- 하는 표정 연기를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데 있다. 음, 맞아요, 오, 그러네그러네정말그러네 같은 사운드 이펙트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어색하지 않은 톤으로 재생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지 아시나요? 아, 철학도여, 그대는 진정 나의 당도둑놈, 당신과 만나면 나는 언제나 현기증이 납니다. 제발이지 나와 만날 때는 티라미수를 지참해줘요...... syo는 저런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또 잘난 척은 하고 싶었어! 그렇다면? 정답은 입문서.
syo는 이런 말을 좀 들었다. 이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게 그런 거였구나, 되게 쉽네? syo 너하고 이야기하면 철학이 되게 쉬운 것 같아서 좋아. 그럴 때면 늘, 뭘 또 그런 말까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syo는 속으로 생각했다. 으하하하, 당연히 쉽지, 열라 후려쳤으니까! 다 깎아먹었으니까! 으하하하하, 내가 아는 건 죄다 껍데기야. 니들도 원숭이 한 권만 읽으면 다 알게 되는 수준이라고, 이 syo같은 무지렁이들아. 으하하하하하! 언제나 지금처럼 우리 함께 무지렁거리자꾸나! 무지렁무지렁 투게더!
물론 저렇게까지 생각하는 미친놈은 아니지만(확신할 수 있는지?), 어쨌든 함께 무지렁댈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언제나 힘이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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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서 덕질의 최대 장점은, 통상적으로 비례 관계에 있는 ‘지식’과 ‘깝침’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진다는 데 있다.
전문가들의 눈에는 하찮아보일지 모르겠지만 입문서를 쓰는 사람 역시 전문가들이다(통상적으로). 다른 전문가들로부터 이딴 걸 써놨네 하는 욕을 들어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자신의 입문서에 ‘이것만은 반드시’ 싶은 것들을 빠뜨리지 않고 쑤셔 넣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결과, 아무리 입문서라지만 꼼꼼히 읽고 나면 어쨌든 아는 게 생긴다.
그런데 그 ‘아는 것’이 원전을 통해 깨달은 게 아니라는 인식은 독자를 조심스럽게 만든다. 말이란 옮겨지면 달라지고 독해는 '독자적인 해석'의 준말이므로(날조다), 누군가를 독해하는 것과 누군가의 독해를 독해하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결국 내가 아는 마르크스는 원숭이가 듣고 알려준 마르크스인 것인데, 그 결과, 내가 아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마르크스의 바로 그것이라고 말하며 권위를 확보하려는 욕망이 발기하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 마르크스 대신 원숭이 얼굴이 똭! 원숭이가 바나나로 내 양심을 뽝! 슬그머니 입 닥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조심하게 된다.
실제로 마르크스를 원전으로 읽어도 내가 깨친 것이 똑바로 깨친 것인지를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원전’의 아우라를 훔쳐내 ‘원전 읽은 놈’이라는 아우라를 풍겨 보겠노라는 욕심은 불가항력에 가깝고 그건 syo같은 무지렁이일수록 더 저항하기 힘든 욕망이다. 따라서 애초에 딱, 입문서까지만 읽고, 깝침을 원천봉쇄하기로 한다.
정신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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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오늘도 역시 syo는 입문서 세 권을 읽고 있는데 재미지다.
스피노자에 대해 쓰신 이수영 선생님의 문장은 스피노자를 닮았다. 벤야민을 강의하시는 김진영 선생님의 문장은 벤야민을 닮았다. 그런데 레비나스에 대해 말하시는 문성원 선생님의 문장은 레비나스와 안 닮았다! 이런 불일치는 입문서 덕후의 입장에서 보면 미덕에 가깝다. 일치가 악덕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문성원 선생님의 다른 책을 월초에 조금 읽다가 반납했는데, 그 책에서 선생님의 문체는 이렇지 않았다. 입문서에서는 입문서의 글을 쓴다, 그러면서도 문장의 수준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몇 쪽 안 읽고 바로 문성원 선생님의 팬이 되었다.
그렇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조금씩 자라던 팬심이 대폭발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이렇다. 대괄호[]는 syo가 붙였다.
정확하게 옮긴 건 아니겠지만, 언젠가 도올 김용옥 선생이 텔레비전에 나와 이런 식의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강준만 교수의 말마따나 도올은 타고난, 희대希代[단](또는 戲臺[짠])의 ‘엔터테이너 철학자’다. 나는 김용옥 선생의 강의를 대부분 재미있게 시청했다[단]. 어떤 때는 정확하지 않은 얘기를 너무 자신 있게 해서 듣기에 조마조마 하기도 했지만[짠], 뭐, 그것도 보는 재미 중 하나였으니까[단]...... 남들이 쉽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내뱉은 시원시원함이[단] 자잘한 부주의와 과도한 자신감이라는 허물을[짠] 덮어버리곤 했다. 자못 심각한 문제까지 무겁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풍모[짠]가 단저미라면 단점이지만, 어떻든 부러운 재주를 가진 인물이 아닐 수 없다[단]. 그 나름의 통찰력과 진지함을[단] 자기도취적 코믹함과 경박함[짠]이 완전히 감추지는 못한다. 도올은 근래 펴낸 한 책에서 종교와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_ 문성원, 『타자와 욕망』, 55쪽
크, 독자가 방심하지 못하도록 움켜쥐는 저 절묘한 단짠의 조화를 좀 보라지. 심지어 단짠단짠단짠단짠하면 단조로울까봐 단짠단짠단단짠짠단단짠이라는 신묘한 변칙 패턴 구사까지! 사실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사이에 있는 것들은 그야말로 사족인데도, 이미 선생님의 현란한 드리블에 넋이 나간 syo의 눈에 이제 그런 건 보이지도 않는다.....
심지어 저 대목은 하이데거를 비판하기 위해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비나스가 하이데거를 똑바로 읽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어느 선배 학자의 견해를 비판하기 위해서 문성원 선생님이 배치해 놓은 대목이다. 저 문단에 이어지는 도올의 말은 하이데거를 아주 대차게 까고 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자신의 입이 아니라 도올 선생님의 입을 빌려와 차도살인계를 쓰신 것인데...... 와, 진심 뤼스풱ㅌ.
--- 읽은 ---
+ 하늘이 담긴 손 / 김영래 : ~ 130
+ 우리가 알아야 할 도시재생 이야기 / 윤주 : ~ 184
+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 / 우치다 타츠루 : 124 ~ 371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67 ~ 223
+ 있지도 않은 자유를 있다고 느끼게 하는 거짓자유 / 엄윤진 : 186 ~ 312
--- 읽는 ---
= 타자와 욕망 / 문성원 : 38 ~ 107
= 서울, 도시의 품격 / 전상현 : ~ 56
=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 김진영 : ~ 67
= 미루기의 천재들 / 앤드루 산델라 : ~ 117
-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 / 최무영 : ~ 122
=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 이수영 : ~ 130
=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 / 이정모 : 155 ~ 283
+ 덧, 혹시나 궁금하실까봐, 앞서 언급된 '원숭이' 삼형제